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중동부전선의 원주 돌파구가 계속 확대되고 있어 상황은 극히 비관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1월 20일을 전후하여 감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또다시 후퇴하여야 한다는 패배의식이 전선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 합동참모본부는 여기서 불과 50킬로미터 만 더 후퇴한다면 한반도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전쟁에서 손을 들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37도선에서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으나 패배의식이 팽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선에서는 막상 후퇴한 유엔군을 추격할 것 같았던 중공군의 움직임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이제 어떻게 싸워야할지 난감해 하던 유엔군은 생각과 달리 적이 나타나지 않고 숨 막히는 적막만 전선에 흐르자 오히려 초조해졌습니다. 비록 원주에서 미 제2사단이 선전을 펼쳐 중부전선의 위기를 막아내기도 하였지만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와 그로인한 후퇴로 사기는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전투보다 군의 사기 회복이 선결문제로 부각되었고 신임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교육을 통하여 전투의지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정신교육보다 사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승리였습니다.
결국 국지적인 승리라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지금까지 나타나기만 기다리던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항공정찰 등을 하였음에도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해진 리지웨이는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정찰대를 구성하여 위력수색(威力搜索)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미 제1군단에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이 배속되어 증강된 제25사단 27연대가 작전에 나섰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으로 명명하였습니다. 비록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전이었지만 이것은 6·25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위력수색에 나선 제27연대원 들의 모습]
1월 15일 아침, 제27연대전투단은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수색을 개시하였습니다. 더불어 밀번 미 제1군단장은 제27연대전투단의 동측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 제3사단의 1개 연대와 국군 제1사단의 1개 대대를 안성-용인방향으로 진출시켜 수원-용인 간 국도를 차단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이들 작전 참여부대들은 첫날, 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다음날 아침 수원에 진입하면서부터는 대규모의 중공군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목표가 전투가 아닌 수색이었으므로 군단장은 철수를 명령하였고, 항공기의 공중엄호로 중공군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안전하게 철수를 완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진까지 뚫고 들어가 교전을 벌이며 직접 확인한 위력수색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수원-이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는데 의외로 화력지원과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대규모의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울프하운드 작전이 불과 1개 연대전투단이 겨우 이틀간에 걸쳐 펼친 소규모의 작전이었지만,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겼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제8군 전체가 한번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J.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전선의 상황을 직접 파악한 콜린스 는 처음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와 달리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야전지휘관들에게 주지시키려 한국을 찾았지만 울프하운드 작전 결과는 자신들이 너무 중공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극복한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작전을 검토하는 리지웨이)
콜린스 대장은“중공군을 군사적으로 응징한다”는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의 확고한 신념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철군이냐 확전이냐의 갈림길에 섰던 유엔군은 비록 확전은 아니더라도 철군을 하겠다는 패배적인 생각을 접게 되었습니다. 콜린스 대장이 이후 그의 자서전인 『평화시의 전쟁(War in Peacetime)』에서 “철군문제의 변화를 가져다준 장본인은 바로 리지웨이 장군이었다”라고 하였을 만큼 리지웨이의 신념과 그가 주도한 울프하운드 작전은 비록 작았지만 전쟁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실험삼아 실시한 울프하운드작전의 성과는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중공군에게 지난 두 달간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짓눌려왔지만, 생각보다 현재 상황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중공군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유엔군이 반격할 차례였습니다. 하지만 리지웨이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성급하였던 지난 북진의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함이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신중한 반격을 결심합니다.]
썬더볼트(Thunderbolt)작전으로 명명된 이번 작전은 서두르지 않고 한 단계씩 앞으로 나가는 방식으로 예정되었습니다. 유엔군은 서부전선을 오산과 여주를 연하는 선에서부터 한강까지를 총 5개의 통제선으로 구분하였고 이를 차근차근 점령해 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전의 진정한 핵심은 진격 그 자체보다 중공군의 소탕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지리적인 점령은 그다지 의의가 없고 중공군을 최대한 소모시켜 버리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전제 요건으로 중공군이 우회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고 전선을 최대한 오밀조밀하게 연결하면서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오로지 적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이제까지 부대들이 산개하여 도로를 따라 앞으로 나가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부대의 좌우가 완전하게 연결된 상태로 전진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또한 적을 섬멸한 후 사전에 정한 5개의 통제선을 통과할 때는 군단장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1951년 1월 25일, 오산-여주를 연하는 선에 정렬하고 있던 미 제1군단 25사단과 미 제9군단 1기병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청천강 일대에서 지난 11월 24일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공세이후 꼭 2개월만의 이루어진 유엔군의 공세였습니다.
[1951년 2월 포격당하는 적진을 관측하는 미 제25사단 병사들]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어깨를 나란히(shoulder to shoulder)하라는 리지웨이의 의도대로 유엔군은 조심스러운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초반에 오산, 수원, 이천 등에서는 적의 저항이 있었으나 예상보다 경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1월 31일, 선도부대가 안양-양평을 연하는 선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러자 리지웨이는 주력을 앞으로 투입하여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하라고 예하 군단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 서울의 초입인 한강을 향해 내달릴 준비를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강을 향해 계속 진출하기 위해서는 수리산과 관악산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했습니다. 더불어 중공군의 저항강도도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공군 제150사단 예하 1개 연대가 점령한 수리산 일대는 수원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1번 국도와 수원에서 인천을 연결하는 42번 국도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이었는데 이곳을 터키여단이 증강 된 제25사단이 공격하였습니다. 싸움이 고지전으로 격렬해지자 문제는 보급이었습니다. 아군은 50여명의 노무자가 지게를 이용하여 고지위로 보급을 추진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중공군은 그들이 보유한 탄약과 보급품을 소모하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치열한 공방전 중공군이 공격을 멈추고 도주하면서 전투가 막을 내렸습니다.
2월 9일, 제8군은 한강으로 가는 길목의 마지막 장애물인 관악산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중공군은 고지정상 일대에 기관총과 박격포를 배치하고 완강히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의 공격에 중공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추격을 계속한 국군 제1사단은 다음날인 영등포-노량진 일대에 진출함으로서 먼저 한강선에 도착하여 있던 미 제3사단과 연결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지난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한강을 건너온 지 한 달 만에 아군은 다시 한강에 섰고 이제부터는 서울 탈환을 결정해야할 차례였습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터키군의 모습 ( 사진은 군우리전투 당시 )]
그런데 신중한 리지웨이는 유엔군 전력이 중공군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지 못한 현재의 상황 하에서, 성급한 서울 재탈환은 군사적으로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서울 점령이전에 중부전선을 남양주-가평선까지 끌어올려 서울의 동측방을 포위하여 배후를 안정시킨 후 한강을 도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록 일단 여기서 진격이 멈추어 아쉬움은 남았지만 서부전선의 아군은 훗날을 기약하며 전력 재정비에 몰입하였습니다.
간파된 적의 약점
6·25전쟁을 살펴볼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의외로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싸운 전쟁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전쟁이라는 행위가 처음부터 쌍방이 약속을 하고 일정한 규칙에 의해 벌이는 스포츠게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전에 상대방의 전술이나 전력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6·25전쟁은 발발부터 약 1년이 되는 1951년 6월까지 상대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치른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개전초기의 북한군이나 이후 갑작스럽게 등장한 중공군에 대해 너무나 몰랐고 이런 무지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상대에 대해 너무 몰라 톡톡히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런 무지함은 공산군 측도 사실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국군과 유엔군이 1월 25일부터 전 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하자 중공군 지휘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내심 유엔군의 반격이 있다하더라도 빨라야 2월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유엔군이 썬더볼트 작전을 막 시작하였을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 고위간부회의에 참석하여 차후작전 방향을 논의하였는데, 여기서 나온 결론은 지난 3차례의 공세로 타격을 입고 전의를 상실한 유엔군이 곧바로 공세로 나올 수는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1월 4일, 서울 점령 후 중공군의 방어 전략은 부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아군의 반격이 빨리 개시되자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공격을 최대한 지연하면서 한강선에서 강력히 서울을 방어한다는 방침을 수립했습니다. 이를 위해 중공군은 서부지역에 중공군 2개 군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투입하고, 중동부 지역에 중공군 4개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하도록 지시함과 동시에 원산의 제9병단 예하 제26군(군단)을 철원에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시간이 부족하였고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중공군도 그만큼 모르는 것이 많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공군의 늦장 대처가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에게 고민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이 제3차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을 37도선까지 밀어낸 후, 약 20일 동안 꼼짝도 않고 있다가 아군의 반격에 당황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미군 같으면 전선을 돌파하면 계속하여 적을 밀어붙여 전과를 확대해야하는데, 중공군은 바로 그러한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공세를 멈추는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민은 중공군의 참전이후 새롭게 변한 전쟁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바로 중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결정적인 순간에 공세가 약화되는 이상한 패턴을 반복하였습니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한 이후의 공세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공군의 제1차 공세는 10월 25일에 시작되어, 11월 1일 청천강으로 철수한 유엔군의 추격을 중단함으로써 끝이 났는데, 공세기간은 8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공세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공세 직후인 11월 25일 야간에 시작되어 12월 2일 중공군이 추격을 중단할 때까지였는데, 이때의 공세기간도 8일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제3차 공세는 12월 31일 시작되어 1월 7일 중공군이 진격을 중단할 때까지, 역시 8일간 실시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중공군의 한 가지 패턴이 감지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공세는 8일이 지나면 이상하다 싶을 만큼 약화되었고, 그 다음의 공세는 대략 1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벌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보급체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공군이 공세를 펼치다가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 아군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결코 신비한 전술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피치 못 할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중국이 공세에 나서기 위해서는 약 한달 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이런 준비기간 후 공세에 나서면 8일 정도밖에 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차후 이런 분석이 속속 입증되었는데, 당시 중공군의 보급능력은 형편없이 낙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엔 공군의 후방폭격으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공군의 기동부대들은 최초의 보급으로 전투를 수행하며, 전투 중 재보급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중공군은 전투병이 최대한 1주일분의 식량, 탄약 등을 휴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닥나면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베일에 가려있던 중공군의 약점이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보급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에게 다음의 공세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격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제8군 예하의 전 부대에게 1월 31일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로 1.4후퇴 후 도망가기에만 급급하였던 유엔군이 적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조기에 작전방침을 바꾸어 적극 공세로 바뀐 배경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소득은 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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