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다시 서울을 노린 중공군

구름위 2013. 3. 1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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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했던 1.4후퇴의 기억을 멀리하고 1951년 4월 중순, 봄이 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부대들은 38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화천~양양을 연하는 캔사스(Kansas)선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전으로 상황이 다시 돌아간 것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난 6개월간의 경험을 통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에서는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려는 생각은 포기하고 있었고 현재 확보한 캔사스선을 중심으로 휴전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덧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북으로 전선을 밀어붙였습니다.]

  반면 유엔군 측의 이러한 생각과 달리 공산군 측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제4차 공세가 비참한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아직까지도 지난 3번의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기분 좋았던 과거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전략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에 대규모의 병력과 보급품을 집결하여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감지한 신임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중장은 철의 삼각지대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작전명 불굴(Dauntless Operation)로 명명한 일련의 공세를 독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임자였던 리지웨이에 비해 상당히 공격적인 성향의 지휘관이었던 밴 플리트는 그의 성향대로 먼저 선제 타격에 나선 것이었는데,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공격이 4월 22일 오후가 되면서부터 전선 도처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이 감지되면서 진출이 저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을 국군과 유엔군에게 군말 없이 내주고 후퇴를 거듭해온 공산군은 이때쯤 새로운 공세준비를 완료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지난 제4차 공세가 중동부전선을 돌파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단절 시키려 하였던 전술적인 목적이 컸다면 이번 공세는 상당히 전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서울의 재점령이었습니다.


  공산군 측 최고사령관 펑떠화이는 중공군 27만과 북한군 3만 5천으로 이루어진 총 30만 5천명의 대병력을 이용한 전형적인 인해전술로 서울을 일거에 포위하여 한강이북에서 유엔군의 주력을 격멸하여 노동절(May Day)전에 서울을 탈취해서 마오쩌둥에게 선물로 바치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펑은 지난 3월 서울을 순순히 내준 대신 한강이북으로 건너온 서부전선의 유엔군 주력을 이번 공세에 일거에 격멸하여 서울을 다시 탈취하여 전선을 한강까지 밀어 붙임과 동시에 유엔군의 항전의지를 철저히 꺾으려 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서울을 재점령할 대공세를 계획하였습니다.]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공산군은 아군의 전 전선에 4시간에 걸친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면서 전사에 중공군의 제5차 공세로 기록된 대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포격이 멈추자 서부전선의 중공군은 서울을 포위하기 위하여 3개의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각각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19병단(서방의 야전군 개념)이 개성-문산 축선에서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을, 제3병단이 연천-동두천 축선에서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향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직접 서울을 노렸습니다.


  마치 6·25전쟁 개전 당시의 모습과 흡사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이 투입되었지만 이번에는 같은 장소로 무려 18개 사단이 공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외곽에서는 제9병단 예하 3개 사단이 김화~포천 축선에서 광덕산줄기를 따라서 미 제25, 24사단을 목표로 남하하였고 나머지 6개 사단이 화천-춘천 축선에서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북한군 제3, 5군단이 동부전선의 인제-신남 축선에서 공세로 나왔습니다.


[중공군 제5차 공세 상황도]


  공산군은 이번 작전에서도 예외 없이 기동력과 화력이 열세인 국군 사단들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을 먼저 돌파하여 후방으로 진출한 후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공산군의 이 같은 공격으로 서부지역에서 국군 제1사단이 담당하고 있는 파평산 일대와 바로 옆 설마리를 담당하던 영국 제29여단이 중공군의 대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고, 중부전선에서는 사창리에서 유엔군의 외곽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집중 공격을 당하였습니다.

 

적을 좌절 시킨 서부전선의 혈전

당시 서부전선은 국군 제1사단이 고랑포일대를 그 우측을 미 제3사단에 배속된 영국군 제29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지경선인 감악산일대를 글로스터쉐어연대 1대대(1st Battalion of the Gloucestershire Regiment 이하 글로스터대대)가 담당하였습니다. 4월 22일 22시경, 중공군은 글로스터대대 정면에 1개 사단의 주력을 집중하여 임진강 도하한 후 교두보를 개척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4월 23일 동이 트면서 유엔군의 항공폭격이 개시되는 틈을 타서 글로스터대대는 감악산 전방의 설마리 일대에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였으나 그날 저녁 재개된 중공군의 공세로 인접대대들이 밀려남으로써 적중에 고립되는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고립된 설마리에서 적에게 응전하는 글로스터대대 박격포]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미 제3사단에 배속 된 필리핀대대가 1개 전차중대를 지원받아 적진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브로디(Tom Brodie) 영 제27여단장은 소울(Robert H. Soule) 미 제3사단장에게 글로스터대대의 야간철수를 건의하였으나 사단장은 중공군이 우세한 야간에 이동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미 제65연대가 구출할 때까지 현 진지를 고수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지 고수를 지시받은 대대는 적의 파상공격을 물리치고 있었으나 구원에 나선 미 제65연대는 적진 돌파에 실패하였습니다. 완전히 고립된 글로스터대대를 제거하여 전선 전체를 밀어 붙일 목적으로 중공군은 집중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때 미 제1군단이 전 부대에게 후방 철수를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단장은 칸(James P. Carne) 글로스터대대장에게‘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으니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철수하거나, 불가능하면 중공군에 항복하라’는 최후 결정권을 위임했습니다.


  대대장은 중대장들에게 자신은 50여명의 부상병과 함께 잔류할 것임을 선언하고 중대 단위로 철수를 지시하였으나 군목, 군의관, 위생병은 대대장과 함께 현지에 남기를 자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10시경 A중대를 선두로 비장한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 지역으로 탈출에 성공한 D중대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탈출도중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이로써 영국 제29여단은 전체 병력의 1/3이 손실을 입는 대패를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3일간이나 현지를 사수하며 동두천 지역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을 3일간이나 고착 견제하였고 이로써 군단 주력부대의 안전한 철수와 차기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에 글로스터대대의 희생은 그야말로 값진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1사단 지역으로 탈출에 성공한 D중대원들]


  같은 시각 중공군 2개 사단이 임진강을 도하하며 파평산 일대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 전면에도 나타났습니다. 기습을 당한 제1사단은 임진강을 이용하여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극 방어에 나서 적의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항공기와 포병화력을 집중 운용하여 방어선 바로 앞에 몰려있는 중공군을 공격하여 3.000여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다시 밤이 되어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되었고 날이 밝으면 공군과 포병의 지원을 발판삼아 아군이 반복하여 중공군을 격퇴시키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던 3일째 되는 4월 24일 밤, 중공군에 의해 파평산일대의 방어진지가 아깝게 피탈되었습니다. 주간에 국군 제1사단은 공군과 포병의 지원을 받아 이곳을 탈환하려 하였지만 3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북한군 제1군단이 추가 투입되면서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선 전체, 특히 전선 중앙부가 대책 없이 붕괴되고 있던 당시 중공군 제5차 공세 전체를 살펴보았을 때 이는 상당한 선전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미 제1군단으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되어 국군 제1사단은 파평산 탈환을 포기하고 월롱산-부곡리-삼방리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설마리에서 탈출한 글로스터대대 D중대원 40명이 국군 제1사단 지역에 도착하여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7여단이 혈전을 벌인 임진강]


  중국은 그들의 전쟁사에서 제19병단이 장파리,고사동 일대를 점령하였지만 파평산 북쪽에서 국군 제1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주진지 신속히 돌파하지 못하였고, 설마리에서 글로스터대대에게 발목이 잡혀있어 후속 공세 재개에 상당한 차질을 빚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야심만만했던 제5차 공세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군의 반격에 애를 먹고 진격이 멈추었지만 이러한 고백을 토대로 판단하자면 서울을 재점령하여 전세를 완전히 재역전 시키려던 중공군의 전략이 바로 이곳에서 멈추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나름대로 서부전선에서 선방하며 중공군의 제5차 공세를 저지하고 있던 그 시점에 커다란 위기가 중부전선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공세 이전인 4월 22일까지 춘천북방의 사창리-화악산 일대에서 육단리-와수리 방향으로 공격하던 부대는 미 제9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6사단이었는데, 군단으로부터 사단 전방에 대규모의 적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으로 보아 중공군의 대공세가 충분히 예견되는 시점이어서 사단장 장도영(張都暎)은 16시경 공격을 중지하고 부대를 방어태세로 전환시켰습니다. 더불어 사단 좌측의 미 제24사단과 우측의 미 제1해병사단도 공격을 방어로 전환하며 진지구축에 들어갔습니다.


[중공군의 공세가 예견되자 방어태세로 바꾸었습니다.]


  이들 앞에 등장한 적군은 중공군 제9병단이었는데, 이들은 화천-가평 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중동부의 미 제9군단과 서부의 미 제1군단의 연결을 끓어 서울을 공격하는 주공부대(제19, 3병단)의 동 측방을 엄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들은 중공군의 새로운 공세가 서울 재 함락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조공에 해당되던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서부전선에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의 분전에 막혀 중공군 주력이 남하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동안 오히려 조공이었던 중공군 제9병단이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전선전체에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을 겁내 사창리에 집결한 국군 제6사단 지역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만일 이곳을 뚫어버리면 양측에 있던 미 제24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의 후퇴도 자연적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4월 22일 17시경, 중공군은 정면공격과 병행하여 부대 간격으로 침투해 국군 제6사단의 후방지역을 차단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좌전방 제19연대는 순식간 적중에 고립되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우전방 제2연대와 예비인 제7연대는 겁에 질려 차량 및 장비를 포기한 채 분산 철수하였는데, 갑작스런 제6사단의 후퇴로 말미암아 후방에서 사단을 지원하던 미군 포병들도 순식간 중공군에게 포위당하여 다수의 화포를 유기한 상태로 철수했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제6사단은 항공기와 포병의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둔화시키면서 화악산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그날 밤 중공군의 공격에 의해 또다시 돌파되었습니다. 결국 4월 25일에 제6사단이 긴급 배치된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가평일대로 철수를 완료하였을 때 집결한 병력은 후퇴 이전 정원의 60퍼센트 수준에 불과한 6,313명이었습니다. 이들의 무질서한 후퇴는 주변 미군들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국군에 대한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국군방어선이 돌파당하여 후방 미군지원부대까지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창리에서 제6사단이 조기에 붕괴되었던 것은 하급제대의 지휘관 및 참모들의 지휘통솔 및 전투능력 부족과, 하사관들의 사기 저하 등에 기인 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명을 내려도 통하지 않던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제6사단의 문제가 아니라 1951년 중반까지 한국군 전체의 가장 큰 취약점이기도 하였습니다. 6·25전쟁 초기의 병력은 낙동강까지 밀려가면서 소진이 되었고 그 이후 징집된 병력은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체 북진에 나섰지만,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 적도 없이 단지 걸어 다니기만 하였던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국군 제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은 23일과 24일,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서부전선과의 연결고리인 서울-춘천간의 도로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서부전선에서 막힌 중공군의 제5차 대공세가 엉뚱한 곳에서 성공하려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긴급 투입되어 가평에 진지를 구축하고 강력히 저항에 나선 영연방 제27여단에 가로 막혔습니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병사들로 구성 된 영연방 제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가평을 사수하는 기적을 만들었고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난 2월 지평리에서 미 제2사단 23연대가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좌절시킨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가평의 전설을 만든 영연방 제27연대 소속의 뉴질랜드 포병대 ]


  그런데 이것은 이후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힌트가 되었습니다. 추후 공세는 미군이나 유엔군이 담당하는 전선이 아닌 국군이 담당하고 있는 곳으로 하여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번 공세에서 국군 제1사단이 나름대로 분전하였지만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공세에서 중공군이 위세를 떨쳤던 것은 아쉽게도 주로 국군이 담당하던 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유엔군이 구멍을 틀어막아 위기를 해소하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다음 중공군의 공세는 국군들이 담당하고 있는 곳으로 예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굴욕적인 역사지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다

펑떠화이가 3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서울 재점령을 목표로 야심만만하게 개시한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전선을 지난 1월 4일 위치로 되돌려 버리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지난 제3차 공세 당시에 중공군이 서울을 차지한 것은 그들이 잘해서라기보다는 아군이 미련 없이 서울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이룬 결과였고 엄밀히 말해 중공군 스스로도 서울 점령까지는 예상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4차 공세 실패 후 2개월간 준비를 하였던 이번 공세는 차원부터 달랐고 펑은 충분한 준비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중공군은 서울 재점령을 목표로 야심만만한 공세를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울프하운드 작전의 성공이후 유엔군은 그동안 가져왔던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하였습니다. 아군은 그들의 화력이 중공군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설령 중공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고립되었어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매몰되어 아군 주변에 몰려있던 중공군은 유엔군 폭격기와 포병의 좋은 먹잇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펑의 의지와 달리 이번 공세에서 중공군은 유엔군 격멸과 서울 점령은 고사하고 오히려 서울 북방에서만 8만여 명이 사살되고, 5만여 여명이 부상당하는 등 엄청난 손실을 보았습니다.


  더불어 이런 결과에는 그 당시 신임 제8군 사령관이 된 밴 플리트의 저돌성도 크게 한 몫 하였습니다. 전임 사령관 리지웨이는 단지 심리적인 상징성이나 역사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서울을 순전히 군사전략적인 관점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서울을 적에게 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3월 15일 서울을 수복하고도 민간인의 이주를 철저히 금지시킨 체 비워 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시각은 중공군도 같았습니다. 이미 서울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지난 1.4후퇴 당시에 완전히 소개되어 텅 빈 폐허 뿐 이었습니다. 유엔군도 지난 1월에 뒤 돌아보지 않고 서울을 내주었지만, 중공군도 중부전선에서 참패를 당하며 2월의 제4차 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미련 없이 서울을 내주고 38선 근처로 후퇴해 버렸던 것도 바로 이러한 실리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밴 플리트는 서울이 차지하는 심리적,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이제는 다시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서울 재탈환 당시의 국군 제1사단]


  물론 사창리전투처럼 전선 일부에서 급박한 위기를 겪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유엔군은 회복한 자신감에 밴 플리트의 의지가 더해져서 사상 최대로 평가되던 중공군의 제5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서울을 지켜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서울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만일 이때 다시 한 번 더 서울을 피탈 당하였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쓰여 졌을지 상상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한강을 중심으로 DMZ이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렇다면 서울은 현재 북한의 최전선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제5차 공세의 결과는 중공군이 아무리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여도 보급능력 부족으로 1주일이상의 공세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약점을 철저히 파악한 유엔군에게 중공군은 더 이상 신비스러운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유엔군은 어이없이 도망만 다닌 지난 세 차례의 중공군 공세 당시와 달리 제4차, 5차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이제는 결코 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공세 초기의 어려움만 버티어 낸다면 결국 이길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었습니다.


  4월 26일, 펑은 마오쩌둥에게 실패를 보고한 후, 4월 29일부터 방어로 전환함으로써 중공군의 제5차 공세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는데, 이때 마오에게 보고한 실패원인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하나있습니다. 여러 가지 분석 중 하나가 중공군이 너무 깊게 남하하면 후방지역으로 적(유엔군)의 후방 상륙이 우려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같은 대규모 작전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지난해 9월에 있었던 인천상륙은 중공군 스스로 발목을 잡게 만든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피해를 보았음에도 펑떠화이는 새로운 공세를 곧바로 준비하였습니다. ]


   그런데 펑은 실패를 조기에 만회하기 위해 다음 공세를 예전보다 빨리 실시하기로 하고 곧바로 다음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 같은 대응은 6·25전쟁의 중공군 대공세 과정 중 이래가 없는 즉각적인 행보였습니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았을 때 중공군의 다음공세는 빨라야 6월 초나 가능했는데, 이러한 중공군의 급박한 준비는 아군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행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측이 빗나간 만큼 위기가 빨리 닥쳐왔습니다.

 

공산군의 제5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즉시 반격에 나섰습니다. 전임 사령관 리지웨이는 일단 상황을 본 후 점진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는 신중한 스타일의 지휘를 하였지만 밴 플리트는 저돌적인 성격대로 즉각 추격을 결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공산군의 전투력이 고갈된 취약시기를 이용하여 적을 38선 이북으로 완전히 밀어 붙이고 공산군에게 차기공세를 준비할 수 있는 재편성과 휴식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밴 플리트는 곧바로 반격을 개시합니다]

(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하고 있는 모습 )


  사실 이것은 상당히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약점이 무엇인지 간파한 이상 그들이 회복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5차례의 공세를 통해서 중공군은 한번 공세가 끝나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의 회복기를 두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을 알게 된 이상 집요하게 파고들어 적을 괴롭게 만들수록 중공군의 재정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밴 플리트는 이번 중공군의 공세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인 중동부전선을 좀 더 위로 쳐올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세 당시에 공산군 주력을 서부전선에서는 훌륭히 막아내었지만, 오히려 중공군 조공이 견제 공격을 가한 중동부 전선에서 아군은 고전을 겪었습니다. 전선 중앙의 사창리에서 벌어진 국군 제6사단의 붕괴는 서부전선에서 선전을 펼치던 아군이 서울을 다시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군하여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더불어 중-동부전선의 주 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간 도로가 북한군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였습니다. 따라서 태백산맥 서쪽의 국군 제3군단과 동해안 연안의 국군 제1군단은 보급로가 제한을 받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밴 플리트는 전술도로의 탈환이 시급함을 깨닫고 서부전선에서 적의 공세를 좌절시키자마자 즉시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밴 플리트는 전방 각 사단들에게 5월 2일부터 위력수색과, 중요목표지역에 대한 공격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동부전선의 국군 6개 사단이 5월 7일, 미주리 선(Missouri Line)으로 명명된 춘천-인제-미시령-속초를 연하는 선을 향해 일제히 반격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필히 확보해야할 고지가 인제의 우측을 감제하는 위치에 있는 한석산과 매봉이었습니다. 당연히 적 또한 이곳을 계속하여 차지하려 하면서 연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한석산과 매봉을 놓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 포로가 된 북한군 )


  당시 한석산을 공격한 부대는 국군 제3군단 9사단 30연대였는데, 이 전투에서 제30연대는 72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적 사살 895명, 포로 42명과 4트럭 분량의 보급품 및 탄약을 노획함으로써 지난 제5차 공세 당시에 깊숙이 남진하여 있던 북한군에게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 전투는 1,000미터가 넘는 산악 능선에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는데, 여담으로 참패를 당한 북한군은 약 1년 전 6.25전쟁 초기에 바로 인근의 홍천에서 굴욕을 겪었던 제12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30연대가 혈전 끝에 확보한 한석산은 차후공격을 위한 유리한 발판으로 사용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사실 고지는 차지하면 적을 감제하기는 쉽지만 후속 보급이 어려워 지속적으로 확보하기가 생각보다는 어렵습니다. 특히 전선이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어 유동적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뒤이어 실시된 중공군 제6차 공세를 견디지 못한 국군 제3군단이 현리 일대에서 붕괴되었을 때 어렵게 확보한 한석산은 이 같은 이유로 곧바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음 공세를 준비완료 하였습니다.]


  이처럼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제5차 공세를 슬기롭게 막아내고 5월 2일부터 5월 중순까지 곧바로 실시된 반격작전으로 전선을 12~14킬로미터를 북상시켜 38선 일대에 다시 고정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중공군의 출혈을 유도하며 전선을 오히려 북상시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패로 막을 내린 제5차 공세에서 공산군은 아군 전선의 결정적 약점을 발견하였고 이것은 곧바로 개시된 제6차 공세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제5차 공세 당시에 중공군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6차 공세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되었고 이것은 전사에 엄청난 피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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