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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의 혈전, 금문도 전투

금문도 전투는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국민당군 약 4만이 상륙해온 중공군 1만을 문자그대로 전멸시켰으며 중공군은 상륙부대중 단 한명도 육지로 돌아온 자가 없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이 전투는 국공내전 후반기에서 국민당군이 처음으로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며 대만을 국민당의 최후 보루지로서 지킴으로서 현재와 같은 양안 대립 상황이 되는,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전투였습니다. 참전병력 : 국민당군 - 제 12병단, 제 22병단 + 증원군 제 19군단 총 8개 사단 4만명 중공군 - 제 10병단 4개 군단 6개 사단 2만명 1948년중반부터 중공군의 역습에 국민당군이 밀리기 시작하고 이른바 3대 전투인 회하전투, 평진전투, 서주회전에서..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한 이유는?

국공내전을 앞에 두고 양측의 전력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정치 외교적으로나 모든면에서 국민당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국민당은 1945년 초부터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와 자금을 지원받기 시작했고(1949년까지 총 40억달러) 그간 쌓아놓은 외화도 풍부했으며(약 9억달러) 그것을 기반으로 군대를 미국식으로 대부분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정규군 병력에서(민병제외) 양측은 200만대 60만으로 국민당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는데다 국민당군은 풍족한 무기로 2선급 부대까지 무장시킬 수 있었죠. 게다가 국민당측은 화북, 화중, 화남을 비롯해 버마, 인도차이나등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며 획득한 무기도 엄청났습니다. 또 남경으로부터 미군사고문단의 지도도 있었죠. 국민당군은 세계 5대 강국으로서 UN 상임이..

58.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안용복 사건(1693년 숙종 19년)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안용복 사건(1693년 숙종 19년) 숙종 19년 1693년 봄, 홀어머니 아래에서 궁핍하게 자란 안용복은 바닷가에서 떠돌아다니는 솔깃한 말 하나를 듣게 된다. 동해 멀리 섬이 하나 있는데 산삼이 많은 노다지 섬이라는 풍문이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그 섬에 다녀오는 배가 많다는 것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거기 가는 뱃사람을 모집한다는 은밀한 소식을 듣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지원을 했다. 공식적으로 그 섬은 일반인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왕실에 진상하는 전복은 물론이고 산삼까지도 있다는 소문에 동래 부사와 좌수영에서 오히려 배를 제공하고 몰래 밀항선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34명이고 총책은 동래 감영의 한비장이엇다. 이런 기록은 조선의 자료에서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