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베트남] 햄버거힐의 서전, Dak To 1967 (1)

구름위 2013. 11. 2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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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1969년 101공수사단의 햄버거힐(동 압 비아) 전투에
관하여 많이들 알고 있으나, 사실 전사속에서 묻혀졌지만
베트남전 사상 햄버거힐을 능가하는 엄청난 사상의 이
닥 토 전투에 관하여는 크게 알지 못한다.

173공수여단의 닥 토 전투라 함은 하나의 전투가 아닌 닥토
근처의 4-5개 고지의 1967년 11월 중순부터 12월 초순까지의
전투 모두를 의미한다. 'battle of the slope'라는 말로
미군은 이 끔찍한 전투를 기억하고 있다. 173공수여단의
사이트에서 이 battle of the slope'라는 코너가 없다면
진짜 173의 사이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수치로는 2차세계대전 등에 비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베트남전을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희생이
뒤따른 혈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4개 고지 (830. 823.875 877 고지. 875가 가장 처절했다)*

이 닥 토 전투를 요약해서 말하면, 173공수여단의 3개 중대가
점차 각각 고립되어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결국 173
공수여단의 과반수의 부대들이 투입되었고 여러 곳에서 혼전을
겪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설명하기 복잡한 '닥 토' 전투이다.

나중에 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사상률은 햄버거 힐 보다 훨씬
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햄버거 힐보다는 그리 알려진 전투가
아니다. 햄버거힐은 연일 언론의 보도가 뒤따랐지만 1967년의
닥 토는 소문만 자자할 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 군부가 크게 언급되는 것을 자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73공수여단의 탄생과 연혁>

173공수여단의 기원은 82공수사단이다. 이 82공수사단에서 503공수연대가
휘하에 창설이 되는데, 태평양 전쟁의 목적으로 82가 유럽을 떠났을때
503공수연대는 본토에 남았다가, 결국 11공수사단과 함께 태평양 전선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503공수연대는 호주에 머물면서 섬 건너뛰기 전법의
소소한 작전에 투입되었고, 이후 파푸아 뉴기니에서 맥아더 장군이 참관한
가운데 이루 어진 유명한 공수작전 등, 11공수사단의 필리핀 전투를 제외한
모든 공수작전은 이 503공수연대가 한 것이다.

503공수연대는 태평양 전선에서 11공수사단과 비슷하게
3회 정도의 전투강하를 했고, 또한 오지에 고립된 조종사를
구출하는 작전에도 참가하는 등, 맥아더 휘하의 육상기동부대였다.

결국 전쟁이 끝났고 503연대는 일부 소집해제자가 본토로 돌아가고 본대는
11공수사단에 편입이 되어 일본에 남아 있다가 1963년 일본에서 173공수여단
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65년부터 71년까지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돌아
왔다가 다시 재가동되어서 이탈리아에 주둔하게 되고, 걸프전에도 참가하게
된다. 2차 걸프전에서는 아시다시피 공수작전으로 들어가 이라크 북부에
협공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에도 참전했다가 2006년 복귀
했다.

원래 173이란 연대명칭은 1917년 창설되었던 미 87보병사단의 연대였으나,
이후 그 명칭만 살아났을 뿐 공수부대와는 상관이 없었다. 주체는 503공수
연대다. 그러므로 아래 글을 읽어보면 <173공수여단 503연대 4대대>라는
특별한 명칭을 보게 된다. 연대의 고유성에 대해서는 과거 햄버거힐 글에서
한번 언급했으니 반복하지 않는다. 173공수여단은 베트남에 파견된 최초의
미육군 부대였다.

그리고 1967년 2월에 시작된 베트남 최초(혹은 최후) 대규모
공수작전인 'OPERATION JUNCTION CITY'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들은 최초 비엔호아의 비행장 주둔지에 내림과 동시에
베트콩의 박격포 공격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73공수여단의 닉네임은 SKY SOLDIERS 이다. 여단에 대한
SKY SOLDIER라는 닉네임은 국민당군의 공수부대가 173여단의
대규모 강하를 보고 붙혀준 닉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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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닥 토 전투는 햄버거힐과 매우 유사하다. 처음에 작전을 하던
미군은 단지 소수로 간주된 베트콩/월맹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3개의 고지로 진격을 하는데, 이 고지들은 이미 월맹군에 의하여
진지화된 견고한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탄을 재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미군이 들어가서는 안될 곳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또한 후퇴를 모르는 월맹군의 격렬한 전투력을
다시 한번 미군이 체험한 작전이기도 하다.

햄버거힐과의 또다른 유사점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 들어와 은거지를 구축하고 있던 이들은,
이른바 숨바꼭질 베트콩과는 전혀 다른 북에서 넘어온
월맹군 정규군이었다는 것. 베트콩은 은거/지연작전과
지원임무를 수행하지만, 루트를 통해서 넘어온 월맹군은
'공격적인 자세'로 전투에 임한다는 사실.......

*아래의 모든 사진들은 닥 토 전투 당시의 사진들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위크 지에 났던 이 작전에 대한 기사>


1967년 11월 중순...

베트남중부 고원지대....

전술2군단 지역....



닥 토에서의 추수감사절


"우리는 고지에 기어올랐다. 그러나 그 875고지를
기어오르는 동안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추수감사절치고는 나쁘지 않았나?"


이 기고자는 173공수여단 소속 503공수연대 2대대의 하사출신이다.
그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에드워드 베르와 대담을 나누었다.
하사는 닥토에서 875고지의 경사면(slopes)에 마지막 공격을 위해
랜딩했었다.  

"가스마스크를 준비해야 했다. 벙커는 최루가스로 공격해야 했어.
그 곳에는 어디에나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포탄껍질, 빈
탄약통, 피가 묻은 붕대 등이 널려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벙커에서
사람이 기어 나왔다. 난 놀라서 쏠 뻔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공수여단 4대대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두 번째로 증강되어
날아왔던 병력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정상인들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큰 고함소리가 들렸다.

'난 이제 저기를 기어오를 것이다. 젠장 염병할 엿이나 먹어라!'

병사들이 앞으로 전진했다. 공격이 다시 시작된 것이고 난 그들
뒤를 따랐다. 한 5분은 잘 갔나? 난 빨리 그들(월맹군)이 우리에게
사격하기를 바랬다. 올라가는 동안 그 적막이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이렇게 점령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갑자기, 오른편에서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명의
병사들이 소리쳤다.

'올라가! 가! 가! 가란 말야!'

몇 명은 정상에 대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수도 없이 퍼부었다.
정상은 가까워졌다. 그러자 우리의 선두 전면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수라장이 되었다. 혼란, 혼란 그 이상이었다.
난 충격과 함께 공중으로 붕 떴다가 땅에 떨어졌다.

박격포탄에 맞은 것이다. 나를 지나치던 사람들이 발견하고 나를
들것에 실어서 이동시켰다. 난 나를 들것으로 나르는 사람을  
봤다. 보기에 17살 이하로 어리게 보였다. 그의 올리브색 피부를
보니 멕시칸 아니면 푸에르토리카 출신이었다. 그는 나를 나르면서
미친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상태. 포탄 쇼크. 상태, 포탄쇼크, 상태....포탄 쇼크'

주변을 돌아보니 한 명은 바지가 거의 사라지고 하체의 살이
드러난 상태로 보였다. 그의 부상자국은 잘 보이지 않았다.
박격포탄이 그의 바지와 하체를 가져갔다. 난 그에게 무언가
소리쳤으나 이후 말이 없었다. 그는 죽었고 점차 돌처럼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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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무도 없는 벙커에 누워있었다. 병사들은 꼭대기의 20야드까지
접근해 있었고 월맹군은 육안으로 보였다. 난 월맹군의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소화기를 사격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벙커에서 쏘고 있었다. 붉은 색과 검은색의 화염탄이 던져져서
타고 있었다. 그들이 내가 있는 벙커로 던진 것이다.

난 필사적으로 다시 밖으로 기어나갔다. 난 아래로 기어갔다. 그때 난
한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상태로 죽은 병사를 보았다. 가슴과 어깨가
박살이 나 있었다. 난 그를 기억한다. 그는 키가 컸고 붉은 머리의
기관총사수였다. 난 경사면에서 전진할 때 바로 그의 뒤에서 전진하고
있었었다.

사방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버려진 군장, 떨어진 철모와 군복
천쪼가리, 그러한 것들은 미군 것도 있었고 월맹군 것도 있었다. 난 다시
하나의 벙커 옆에 누웠다. 거기서 난 회색과 녹색의 물체를 하나 발견했다.
난 너무도 당황했다. 좀 더 자세히 가까이 가서보고 난 전율에 떨었다.

그것은 사람의 가슴부위였다. 팔의 일부가 달려있었다.
근처에 불에 탄 군화조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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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지를 점령 할 꺼야."

어느 초췌한 병사가 말했다.

병사들은 앉아있었고 일부는 큰대(大)자로 누워있었다. 그들은
닥토로 돌아갈 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면 따끈따끈한
추수감사절의 뜨거운 칠면조요리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875고지는 5일간에 피를 땅에 뿌리고야 점령됐다. 다른 의미로
말하면 이 고지를 아주 유명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173공수여단은
악조건에서 믿기지 않는 용기로 참호의 월맹군과 싸웠다.

158명의 미군이 875고지에서 죽었다. 그리고 402명이 부상당했다.

(햄버거 힐과는 비교가 안 되는 더욱 참혹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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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이아드랑 계곡에서의 전투 이후로 가장 치명적인 전투였다.
그러나 의문이 제기됐다. 정말 가치가 있는 전투였나? 월맹군은 그저
중대규모였다. 이후 미군이 몰리자 결국 월맹군도 증강되었고 혈전장이
되고 말았다.


<왜 '닥 토' 였는가?>

답은 바로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닥토라는 곳의 위치다. 별로
변변하지 않은 라오스국경에서 20마일이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의 국경이 모인 삼각주였다.
이곳은 호치민 루트의 한 기착점이었다. 남베트남에서 싸우는
월맹군의 상당수가 이곳을 이용해서 들어왔다.

닥 토에는 비행장이 있는 미 육군특전단의 캠프가 있었다. 이것은 국경을
경계하는 일종의 라인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곳은 그린베레와
몽타나족 토착민 병사들이 국경을 순찰하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그 닥 토의 고지에는 약 7천명의 월맹군이 있다고
쓰여있었다.

이 정보는 무시할 수 없었다. 공중정찰로 월맹군을 볼 수 없었고 그린베레
압력캠프의 외딴 지역에서 직접 눈으로 목격한 정보였다. 웨스트모어랜드는
그 보고서를 보고 그곳에 4개 사단을 쑤셔 넣었다. 1기병사단과 173공수여단도
그 중에 하나였다. 월맹군을 피를 흘리면서 보급품을 날랐다. 그것은 결투에
가까웠다. 정글의 결투였다. 그것은 크레센토(점점 강하게)하면서 875고지를
달구고 있었다.



이 875고지전투는 173공수여단의 2대대가 닥토 남서쪽의 월맹군을 향해서
어느 일요일 진군하면서 시작되었다. 명령은 그 고지를 해가 지기 전에
점령하라고 되어있었다. 그리고 고지의 거의 꼭대기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조롭게 진출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지에 다다랐을 때 박격포탄이
미군의 대열을 향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월맹군의 화기들도 불을 뿜었다.
월맹군의 기관총에 대나무들이 펑펑 잘려나갔다.

"오, 하나님, 적이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벙커. 나무, 모든 곳에 있습니다."

그 당시 거기에 있던 공수부대원이었던 존 도넬리는
뉴스위크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사관들이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고지로 기어올라라.
저 염병할 고지로 기어올라라!'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리는 포위되어 있었고,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총을 갈겨대고 있었다."


테러: 한번의 맹렬한 월맹군의 맹습이 끝나자, 모든 장소에 죽거나
부상당한 공수부대원들이 쓰러져 있었다. 2대대는 필사적으로 방어진을
구성했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밤은 테러의 밤이었다.
GI들은 죽거나 살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대원들이 포탄구덩이로 몰렸다. 그리고 나무 밑으로 기어들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밤새도록 월맹군은 계속 야간공격을 가해왔다.

"그들은 박격포로 우리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우리를
향해서 무반동총을 날렸습니다. 모두가 땅을 파고 밑으로 최대한
내려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우리는 계속 땅을 팠습니다.
죽은 전우들이 사방에 널려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71명의 공수부대원이 누워 죽어 있었다. 그 경사면에
86명의 부상자가 또 누워있었다. 의무헬기들이 부상자를 나르려고
접근하다가 적의 대공사격에 걸려 8대가 격추됐다.

결국 헬기들은 모두 닥토로 돌아갔다. 상공에서는 전투기들이 계속
돌면서 적의 거점에 폭격을 가했다. 적을 포위하고 있는 우리 아군의
50야드 근처에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완전히 청소하고자
F-100이 시속 300마일의 속도로 날아와서 우리와 적의 경계선에
500파운드 짜리 폭탄을 떨어트렸다.

폭탄의 구름은 가장 높은 나무높이보다도 높았다.
파편의 소나기가 내렸다.

조니 헤이스 상병은 증언한다.

"그 폭탄으로 인해서 많은 아군들이 죽었다. 주변에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시체도 날아갔다. 오 하느님,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장교와 의무병은 죽었다.
2대대는 그냥 땅에 누워있었다.
교수대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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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터 레흐바 주임상사가 부상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노력했다. 상사는 농담으로 한 붉은 턱수염이 난 병사에게
이제 두 가지 종류의 비상보급품이 날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고 붉은 수염이 주임상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맥주와 담배! 넌 어느 것이 좋니?"

그러자 병사는 "아이고,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임상사가 말했다.

"뭐 아니면, 면도기. 구두약......하여간 그런 것들이 와야
우리가 다시 공수부대원같이 보일 것 같단 말야!"

주임상사는 전투 후 중간중간에 이렇게 계속 돌아다녔다.
그러자 병사들이 주임상사를 향해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 말했다.

"Airborne!"

그러자 주임상사가 말했다.

"하여간 멋진 녀석들이란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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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후, 173여단의 4대대가 875고지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살난 동료들을 목격했다. 랜딩존은 아직도 위험했다.
화요일 오후에 미군의 공중폭격이 적의 거점에 실시됐다. 그때서야
의무헬기들이 부상자를 나를 수 있었다. 밤이 되자, 닥토의 야전병원은
부상자들의 절규로 가득 찼다.

의무장교는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치료해야 했다. 아주 심각한
환자들은 C-130에 실려서 퀴논으로 날아갔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닥토에서 3일간 적은 식량과 물로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후송되어도 쇼크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러운 군복에 수염이
나 있었고, 군복의 천은 오물과 피가 엉겨있었다. 대부분은
아직도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떤 병사는 의무헬기에 실리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소리쳤다.

"저 개 같은 놈의 고지. 저 개 같은 놈의 개새끼들. 난 이곳에서
후송되지 않을 꺼야! 아무도 날 말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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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닥 토의 것인지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