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1부] 2차대전 중 연합군-추축군간의 광기의 복수극

구름위 2013. 11. 2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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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복수는 항상 총살으로 이어집니다.

2차대전중 이런 복수극에는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무장 친위대입니다.

그러면 왜 무장 친위대는 도대체 얼마나 학살을 했길래 미국 및 유럽에서는 언급하는 것 조차 금기가 되었는지 알아보면 다들 아시는 아우슈비츠를 떠나서 다른 집단 수용소에서 뭔 일이 생겼는지 알아봅시다. DACHAU 집단 수용소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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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용소는 1933에 처음 독일에 생긴 집단 수용소 였는데 초기에는 단지 이 수용소는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히믈러의 명령으로 SS가 세운 최초의 수용소였습니다. 약 30개국의 출신국가에 20만명이 넘는 죄수들이 수용되었고 2/3는 정치범에 나머지는 유태인이었습니다. 약 25,613명이 이 집단 수용소에서 죽은 걸로 추정되었고 나머지 10,000 여명은 이 수용소 관할의 내에 있는 다른 구역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는 마지막 날에 더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945년 4월 29일

 

06:00

무장 친위대 장교인 Heinrich Skodzensky는 이날 이 수용소 소장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전날에 진짜 SS 지휘관이었던 수용소장 Martin Gottfried이 약 1000여명의 Allgemeine SS(일반 SS)와 Death's Head SS 사단 병사들이랑 도망을 갔거든요. 이유는 미 보병 사단이 근처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도망을 간 겁니다. Heinrich Skodzensky는 최초이자 마지막 명령을 부대원에게 내립니다. "미군에게 항복"

 

Death's Head SS 사단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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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5

미 육군 제 45 보병사단 썬더버드의 157 보병연대 3 대대는 10마일 밖에 있는 Gross Inzemoos 마을에서 탱크지원을 받는 3개 보병 중대더러 수용소 쪽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08:30 

스나이퍼 몇명을 사살한 다음에 3 대대는 수용소에서 4마일 밖에 있는 Ampermocking 도시근처의 다리가 폭파된 것 때문에 잠깐 지체를 하게 됩니다.

 

09:30

101 탱크 대대의 탱크들이 다른 다리를 발견후에 그 쪽을 통해서 집단 수용소가 있는 DACHAU시에 진입을 시작하게 됩니다.

 

10:00

K와 L 보병 중대는 뮌헨을 공격하기 위해서 따로 돌아갔고 I중대만 수용소쪽으로 가게 됩니다.

 

10:15

드디어 3 대대는 집단 수용소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10:30

I 중대랑 M중대는 집단 수용소쪽으로 진격했습니다. 탱크들은 Amber강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다리는 폭파되었고 이 와중에 많은 숫자의 독일군이 전사했으며 탱크는 더 이상 다리를 건널수 없게 되었습니다.

 

10:45

L중대의 중위 L.R. Stewart와 상사 Robert Wilson는 보병만 건널 수 있는 작은 다리를 발견했고 이 다리는 1명의 MG사수가 방어하고 있었답니다. 이 사수는 탄약 한개 벨트만 난사한 다음에 도망을 갔고 I 중대는 이 다리를 통해서 건너갔습니다. 탱크와 L중대는 다리 뒤에 남아서 DACHAU시에 남아 있는 독일군 잔여 병력을 청소했고 나중에 뮌헨으로 진격해 갔습니다.

 

10:55

Intelligence & Reconnaissance (I & R): 한마디로 정찰대가 수용소의 외곽 구역에 접근했고 무장 친위대의 사격을 받았습니다만 4명이 탑승한 지프가 오자 바로 이들은 항복을 했답니다. 몇몇 무장친위대 병사들은 도망을 갔고 이 와중에 Heinrich Skodzensky가 와서 항복을 할려고 제스춰를 취하다가 오해를 받고 사살당합니다. 오해받고 사살당하는게 이날 벌어질 참혹한 일에 비하면 아주 좋은 죽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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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I중대의 선발대들이 철로 근처에 있는 죽은 죄수들 시체를 하나 하나씩 찾아내면서 바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일병 Pfc. John Degro씨가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집단 수용소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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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대략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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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미군 병사들이 A지역에 있는 안쪽 구역에서 죄수들이 수용된 것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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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B구역에서 소각장과 독가스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시체가 어딜가도 있었고 거의 지옥이나 다를바 없는 상황이었다죠. 게임 퀘이크4에서 시체가 막 쌓여 있는 쓰레기 장 같은 구역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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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미군 병사들은 공포, 경악 및 분노에 사로잡혀서 주변에 서 있던 항복한 무장 친위대 병사들 122명을 바로 보는 대로 사살해버립니다. 살아 남고 걸을 수 있었던 죄수들은 모여들어서 약 40명의 무장 친위대 병사들을 죽여 버립니다. 몇몇은 맨손으로 죽였다군요. Private John Lee 씨는 나중에 신문기자랑 인터뷰에서 적어도 무장 친위대 60명을 죽이는데 자기도 거들었다라고 발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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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거의 모든 저항이 없어졌고 도망갔던 죄수들도 한두명씩 돌아왔다네요. 358명의 무장 친위대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의 대다수가 수용소내에 있는 병원에 누워있던 환자들이었습니다.

 

12:05

버드아이라고 별명이 있었던 M중대 소속의 미군 MG사수가 순간 "적들이 도망갈려고 합니다!"라면서 포로에게 발포를 시작했고 중위 Colonel Felix Sparks가 발로 걷어 차면서 지금 뭔 짓이냐라고 고함을 질렀댑니다. 하여튼 12명이 이렇게 사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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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여단장 Henning Linden이 장교들과 같이 방문을 했고 대령 Sparks과 심한 말 다툼을 하고는 떠 났습니다. 뭔가 이 와중에 대령 Sparks가 맘에 안드는 명령을 했죠. 여단장 Henning Linden는 곧 떠납니다.

병원에 있었던 독일군 환자 포로들이 총살장으로 가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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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

그 동안 신나고 즐거워 하던 죄수들이 다들 잠잠해 졌고 강제 수용소는 완전히 장악되었습니다. Sparks 대령은 부대 본부에 상황를 무전으로 보고합니다. 그 후에 다른 미군 장교들은 강제 수용소 내부를 시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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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 

Sparks 대령은 캠프 밖에 지휘부를 세우고 거기서 Frederick 장군을 기다립니다. 물론 이 와중에 Henning Linden가 내린 명령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4:45

지도의 C지역에서 병원에 있었던 346명의 부상당한 독일군들이 다 기관총 세례를 받고 사살당합니다. 이를 담당한 장교는 중위 Jack Bushyhead 였고 그는 인디언 출신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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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

이 쯤에서 거의 다 사살당합니다. 이 도표에서 X는 독일군들의 위치, 점은 미군병사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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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

대부분의 독일군 들이 다 죽었는데 몇명은 죽어가고 있었답니다. 이 상황에 아무도 치료를 해줄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 죽어가는 독일군 포로들은 확인 사살당합니다.

 

15:15

Frederick 장군과 Sparks 대령이 17:00시 까지 강제 수용소를 시찰합니다.

 

무장 친위대가 죽인 사람들이 뭍힌 무덤입니다. 이 총살장에서는 수천명의 러시아 포로들이 사살당했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총살장에서 무장 친위대에게 사살당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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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남은 I중대원이 싸늘하고 조용한 수용소 경비임무를 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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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사살자 명단

보자 마자 사살됨:                            122명

죄수들에 의해서 사망:                        40명

버드아이라는 MG거너에 의해서 사망:   12명

집단 총살:                                       3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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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내 독일군 포로 사살:                520명

수용소 외곽 전투에서 사살:                 30명

도망간 인원(나중에 사살됨)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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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합계:                                          560명  

 

이 사살은 다 30명을 제외하고는 다 비무장 인원들을 사살한 사건입니다. 게다가 358명은 이 집단 수용소에 있는 병원으로 수용이 된 인원이었고 원래는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하다가 부상당해서 이쪽으로 호송된 것이죠. 원래 이 수용소에서 죄수들을 죽이던 인원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전날 도망간 1000여명의 Death's Head SS 사단병이나 아니면 일반 SS가 이 수용소 죄수들을 죽이던 인원이었는지도 모르죠. 이유는 도망간 지휘관이 원래 그 지휘관이었으니까요.

몇몇 독일군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4명씩 미군장교에게 불려가서 한명씩 권총탄을 맞고 죽었고 죽어가는 병사를 다른 미군 병사가 몽둥이로 패서 죽였다고 합니다.

 

무장 친위대에는 의외로 동양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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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은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를 삽으로 패서 죽였고 죽인 이유는 그 장교가 자기를 고자로 만들었다고 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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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용소 사살 사건은 1991년이 되어야 미군에 의해서 공개가 된 일입니다. 왜 1991년인지 아시죠? 독일 통일 1990년 바로 직후에 이루어 졌습니다. 그전에 왜 안했을까...아마 서독의 반감을 사게 될지도 몰라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무장 친위대가 정상적인 인간들이라는 건 아닙니다. 하여튼 이런 광기적인 장소를 세우고 전쟁전에도 정치범들을 셀 수도 없이 사살했고 자기네들도 구 소련군 포로들을 수천명이나 다 사살했죠. 그 피의 값을 그대로 받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그럼 무장 친위대, 미군만 이렇게 재판없이 복수를 했는지?

SS 소속이 아닌 독일 국방군 소속인 강하엽병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강하엽병의 경우는 상황이 약간 달랐습니다.

크레타 섬 공방전에서 많은 수의 강하엽병이 죽었고 적지 않는 수가 농부들에게 죽임을 당했죠. 그래서 여단장 Student의 명령으로 크레타 섬 점령후 가장 활발하게 저항했던 마을중 하나였던 콘토마리 마을에서 모든 남자들을 다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이것도 재판없이 사살하라는 것입니다.

사진을 보면 이상하게 죽이는 것을 즐겼던 SS애들과는 달리 강하엽병들도 얼굴이 밝은 얼굴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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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나리카스 밀리터리 게시판 Genesis24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