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광트리(Quang Tri) 시 방어작전

구름위 2013. 11. 28. 10:57
728x90

 

베트남전을 기술하면서, 혹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면서,

이 '남베트남 군대'라고 하면,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경향을

옅볼 수가 있다. '베트나미제이션'은 실패했으며, 미군 없이

자력으로 베트남을 방어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남북의 문화가 다르다고 해도 남이나 북이나 같은

베트남이고, 윗쪽의 베트남은 충분히 놀랄만한 강도를 보여

주었다.

 

아래는 1968년 당시, 남베트남군의 성공적인 방어로 치러낸

광트리(Quang Tri) 시의 방어작전이다. 또한 전술적으로도

대규모 공중강습 작전이 성공한 흔치 않은 전투였다.

 

남베트남 북부, 전체 베트남으로 보면 또한 중부에 있는 고도

후에(Hue)는 북베트남군에게 항상 목표가 되는 정신적이며

남하공격에 필수적인 도시였다. 동쪽 해안 쪽이 아니면 산악을

통한 전면적인 공격은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경도 상의 바로 북쪽의 광트리 시는, 이런

후에를 점령하는데 정말 중요한 도시였다. 광트리를 점령하지

못하면 후에를 점령하더라도 버틸 수가 없다. 그리고 광트리는

그 지역의 모든 도로가 만나는 남베트남의 배스통 격이었으며,

해안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면 후에를 만날 수 있다.

 

1968년 북베트남의 구정공세는, 명백하게 후에를 점령해서

남북경계선을 다시 그을 의도가 있다. 월맹군이 후에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퇴각한 이유중에 하나도, 이 광트리가

넘어오지 않아서 배후 근거지가 없어진 것도 크다.

 

 (그림 오른쪽 위에서, 후에를 찾고 바로 위의 광트리를 찾으시면 된다) 

 

(지옥의 묵시록에도, 윌라드 대위가 광트리에서 민간 정보원을 살해했다고 나온다.

 이는 자세히 알고 보면 베트남전 전사의 여러가지 짜집기다.)

 

-----------------------------------------------------------

 

 

Attack on Quang Tri City

 

 

By James I. Marino

 

 

 

 

 


보이지 않게 슬그머니 광 트리로 접근하는 것.


그것은 월맹측의 엘리트 특공대원 새퍼 20명이었다.


그들은 1968년 1월 31일,

 

새벽 2시,

 

미군기지를 강타했다.


그들은 남베트남 최북단을 공격하는 월맹군의 대규모 공격의 창끝이었다.

월맹군은 도시의 경계선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광트리(Quang Tri)라는

도시는 고도 ‘후에’를 점령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월맹군 최고지휘부는 미국의 뉴스 미디어에 많이 등장했고, 또한 남베트남군의

무력함을 취재하는 것도 또 하나의 주요 방송거리였다. 그러나 광트리의 남베트남

군은 달랐다. 그들은 도시에서 후퇴하지 않고, 마치 벌지전투의 배스통의 미군처럼

싸웠다. 특히 남베트남군 공수부대 병력을 밀물처럼 밀려드는 월맹군에 대한 방파제

였다. 그들은 증원군을 기다리면서 계속 월맹군과 싸웠다. 그들은 기갑부대가 도착

하기 전까지 오래전 미국의 서부처럼 고립되어 싸웠다.


광트리는 광트리 주의 주도다. 비무장지대 남쪽 20킬로미터 지점이고, 도시의 오른

쪽에는 타크 한 강이 흘렀다. 이 도시는 매우 넓은 지역의 주도로, 전쟁기간 동안

통신과 군수품의 직접소였다. 그리고 남베트남의 1번 국도에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도로들이 광트리로 모였다. 광트리는 성채도 있었고 마치 고도 후에의

미니어쳐 같은 존재였다. 더욱 중요한 점은 광트리 남쪽 45마일 지점에 후에가

있다는 것이다. 광트리는 모든 방향에서 공격받기 쉬운 지형이었다.


전술1군단 지역에 많은 미 해병과 보병의 부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남베트남 1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남베트남 1사단은 미군이 뽑는 최고의 보병

사단이었고, 후에에서도 작전을 했었다. 이 베트남 1사단은 2차대전 당시 미군

중기갑사단과 같은 구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남베트남 사단과는 달리 1개 연대에는

 4개 대대가 있었다.

 

 

 

(남베트남군. 구정공세 사진인지, 1972년 부활절 공세 사진인지 알 수 없다)

 

남베트남 1사단 1연대

 

전술1군단장인 중장 호앙 욱산 람(Hoang Xuan Lam)은 능력이 있었고 또한 전투

경험이 많았다. 그리고 광트리 지역의 수장인 시장은 느구엔 암 중령이었고, 그는

광트리 지역에 주둔했던 남베트남군 전직 1연대장이었다. 그는 1사단과도 연계가

잘 되어 이후 전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군 고문관들은 당시 남베트남군 1사단 1연대장인 느구엔 후 한 중령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래서 1연대를 약하게 보았다. 미 해병3사단은 1967년 연말보고서에서

이 후 한 중령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판을 얻고 있다.

그렇다고 아주 무능한 인물은 또한 아니다.’ 


1968년 초에 남베트남군 1연대는 당시 ‘지역 발전’이란 정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한 중령은 2개 대대를  파견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병력들을 광트리 북서쪽의 여러

마을에 분산시켜서 하는 것이었다. 결국 병력이 축소되자 한 중령의 연대는 남

베트남군 제9공수대대를 그동안 배속 받았다.


이 9공수대대는 1965년 10월에 만들어졌고, 남베트남군 제1공수여단 소속이었다.

이 공수부대원들은 전원이 자원자들이었고, 공수훈련센터에서 9주간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이후 탄 손 누트 공군기지에서 3주짜리 공수훈련을 받은 병력들이었다.

 

이 공수부대원들은 대부분 전쟁경험이 있는 자들로써 다른 부대와, 급식, 무기, 보급,

가족혜택이 모든 남베트남군 중에서 가장 좋았다. '한' 중령은 이 공수대대를 광트리

시의 방어에 유용하게 배치했다. 그리고 광트리 시 안에는 고유의 국립경찰 야전군

중대가 있었고 또한 1연대의 장갑차 전대가 있었다. 지역 민간군사조직도 있었다.


누구엔 후 한 중령의 1연대 중, 2와 3대대는 도시 북서쪽의 경계를 서고 있었고,

제9공수대대는 도시 북동쪽의 카톨릭 마을 ‘트리 부’에 있었다. 1대대는 장갑차

부대와 함께 서쪽의 광트리 보급품 직접소를 지키고 있었다. 연대본부는 1번국도

동쪽에 있었고, 도시는 국립경찰이 순찰을 돌았다.  

 

(아군과 적군을 떠나서 애처로운 장면...)

 

 

광트리 전투 전

미해병대는 이 북단의 전술1군단 지역에서 1965년부터 작전했다. 광트리 지역을 맡고

있는 것은 미해병 3사단이었다. 이 미해병 3사단은 비무장지대부터 1번 국도까지 길게

흩어져서 작전했고, 또한 케산 기지의 방어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해병은 얇고

길게 흩어져 있는 셈이었다. 미해병대의 역사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해병3사단은

광트리 시에 방어에 투입할 병력이 없었고, 그래서 남베트남군이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일부 병력만이 박격포를 가지고 스나이퍼 레인지에서 도시를 보고 있었다.’


구정공세 이전에,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전술1군단 지역의 병력을 증강하려고 했다.

정보부의 보고와 월맹군에게서 노획된 문서를 보고 결정한 것이다. 북쪽에 강한 압박을

모두 예고하고 있었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이 시기를 1968년 1월 17일 경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광트리,투아 틴 등의 북단 지역에서 대규모 교전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비무장지대 바로 아래에서....”라고 말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먼저 1군단지역에 완편 1기갑사단을 보냈다. 1기갑사단의

3여단은 이미 그곳에 있었는데, 이를 23(아메리칼)사단에 배속시켰다. 1여단은 봉

손에 있었는데 1월 17일 후에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1월 25일, 여단은 광트리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웨스트모어랜드는 101공수사단의 2여단을 1기갑사단에

배속시켰다.


1기갑사단 1여단장인 도날드 래턴 대령은 명령은 없었지만, 무언가 심각한 일이 있을

거란 생각에, 지역에 있던 지역발전 프로그램의 미군 고문인 로버트 블루어와 적정

상황에 대하여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광트리 서쪽에는 미군 8기갑연대 1대대가

화력지원진지 101을 운영하고 있었고, 101사단 502연대 5대대가 시의 남서쪽 5킬로

미터 지점에 있었다.


다른 기갑부대들은 기동하면서 월맹군을 찾고 있었다. 모든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당시 평정작전과 수색섬멸작전을 수행하고 있었고, 또한 보급품 직접소를 개량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진 이름은, 1967년 7기갑연대)

 

 

북베트남의 공세준비


그리고 1968년 테트 공세가 다가오자,

광트리시를 통과할 월맹군 9개 연대 21,000명이 도시로 다가왔다.


이 테트 공세를 계획한 것은 북베트남의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장군이었다. 그는 그

전년도 여름부터 이 작전을 준비했다. 지압 장군은 ‘후에(Hue)’ 시를 완전 점령하고

싶어 했다. 이를 통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공세로 전환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는 1944년 아르덴느 전투를 일으킨 히틀러와 비슷한 구상이었다.


후에는 군사적으로는 정치적으로나 중요한 목표였다. 해안을 따라 난 남베트남 1번

국도와 연결이 되어 있고, 배스통처럼 지방의 교통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

전에 위치한 광트리를 점령하는 것은 월맹군에게 매우 중요했다. 월맹군은 군단병력을

투입해서 광트리를 점령하고, 해안 국도를 따라서 남하해 후에로 진격할 작정이었다.

 

(남베트남 1번 국도 : 해안선을 따라서 남베트남을 잇는 도로. 지도에 붉은 선)

 


이 광트리를 공격하고 월경하기 위한 공격에는 월맹군과 베트콩이 연합으로 참가했다.

 

제일 먼저 선봉에 선 부대는 월맹군 제10새퍼대대의 1개 소대였다. 이들이 주요 거점을

공격하고 뒤 이어서 월맹군 1개 연대와 베트콩 1개 대대가 주력으로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월맹군 324사단 812연대. 베트콩 814대대) 월맹군 324사단은 주력이 남베트남

출신의 자원자들이었다. 이 사단은 미군 정보부에서도 정예사단으로 꼽는 부대였다.


당시 ‘새퍼(sapper)’란 월맹군의 최정예병이었다. 이 부대는 1954년 디엔 비엔 푸 공격을

했던 부대로, 월맹군 대대 앞에는 새퍼 1개 소대가 장애물을 제거하고 본대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이 새퍼부대의 훈련생들은 북베트남 ‘손 타이’ 부근의 캠프에서 3개월간의

특수훈련을 따로 받았다. 일부는 남베트남에 침투하여 일정한 직업을 잡고 대기하기도

했다. 이들은 완벽한 무성으로 침투하는 훈련을 받았고, 폭파와 공병훈련도 받았다.

전통적으로 새퍼 부대는 3개의 제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경계제대, 두 번째는

공격제대, 세 번째는 지원과 예비제대였다.


당시 월맹군 812연대는 4개 대대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1개 대대가 월맹군 90연대로

부터 배속/지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대는 130명으로 된 중대가 3개로 되어 있었고,

별도로 통신/정찰/중화기/지원중대가 연대에 있었다. 연대의 공격병력은 2,600명이었다.

814베트콩대대는 600명이었고 북서쪽의 조공이었다. 이 월맹군 812연대는 네 방향에서

광트리 시를 공격했다. 총 3천 2백 명이 광트리로 향하고 있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월맹군이 공격계획을 바꿀까봐,

1군단 지역으로 1기갑사단을 보낼 때, 최대한 조용히

간파하지 못하게 이동시켰다.


지압 장군은 도박을 걸었다. 그에게 이 광트리 시를 점령한다는 것은, 이 지역의 가장 큰

활주로를 탈취하는 것이기도 하며, 여러 도로망을 모두 장악할 수 있었으며, 보다 남으로

공격하기 위한 필수적인 거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월 동안, 월맹군과 VC부대들은

조용히 광트리 시 근처로 이동했다. 그리고 베트콩 정찰병들을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광트리시를 정찰했다. 그들은 시의 남베트남군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1월 28일, 1군단장 람 장군은 광트리로 들어갔고, 거기서 시를 비상계엄 상태로 설정했다.

(이미 미 정보부는 눈치를 어느 정도 채고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시의 공무원들과 사무원

들에게 총기를 지급했다. 그리고 두 명의 장교를 숨겨 공격징후를 파악하도록 했다. (사복

으로 민간에 배치시켰다는 말 같다.)

 

 

 (구정공세 당시 사이공)

 

 

광트리 전투의 시작

1968년 1월 31일 새벽 2시,

20명의 월맹군 새퍼 특공대원들이 광트리 시를 때렸다.

그들은 통신선을 파괴하고 도시의 중요한 거점을 공격했다.

이어 월맹군 대대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광트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하천이 범람했고 생소한 지형으로 인하여 월맹군 812연대는

새벽 4시 20분이 되어야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두 시간의 갭으로 인하여 남베트남

군은 새퍼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거기다 지역 경찰 야전군중대가 새퍼 소대를

고립시켰다. 맹렬한 사격전이 있은 후, 몇 명의 포로와 더불어 새퍼들은 제거되었다. 새퍼들은

본대를 기다리면서 2시간 동안 맹렬하게 저항했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 1연대장 한 중령은

남베트남군에 비상을 걸고 공격에 대비시켰다.

 


새벽 4시 20분, 로켓과 박격포가 도시 내외곽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월맹군 812연대는

다중경로로 공격을 시작했다. 월맹군 대대들은 중대 단위로 도시를 뛰면서 목표물로 향했다.

 

그들의 목표는, 광트리 시의 서쪽 입구 벽, 시청, 포병막사, 도시의 감옥 등이었다. 그리고

다른 목표로는 1번국도와 철도와 라 방의 남베트남군 막사였다. 814베트콩대대는

북서쪽 마을 ‘트리 부’로 공격을 시작했다. 도로와 철도를 공격하는 대대는 남쪽에서의

증원군을 막는 것이 임무였다.


당시 814베트콩대대는 위장술로 모두 남베트남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제대는 트리 부에 있던 남베트남 제9공수대대와 맞닥뜨렸다.

 

그런데 남베트남 공수대대 초병은, 그들이 군복은 남베트남 것을 입고 있지만, 군화

대신에 샌달을 신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대로 총격을 시작했다. 이어서 치열한

사격전과 백병전이 이 트란 부에서 일어났다. 이 베트콩대대의 습격에 제9공수대대는

점차 후퇴하는 양상이었으나, 후퇴 이후 제대를 다시 재점검하고 규합했다. 그리고

광트리 시를 등에 지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로 인해서 이 814베트콩대대는 끝내

광트리 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윌리암 피어슨 중장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남베트남군 공수부대가 베트콩대대를 정지시키고 완전히 막아버렸다...”         


광트리 동쪽으로 진입하던 월맹군 2개 대대는 방어군의 치명적인 사격을 받았다.

그러나 월맹군은 피해를 입고도 계속 전진했다. 남베트남군의 방어는 생각 이상

이었다. 월맹군은 한발자국 전진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남베트남군은 1사단

1연대 1대대였다. 연대장 ‘한’ 중령은 이 동쪽에 장갑차를 보냈다. 이 APC들은 화력

지원을 했고, 아침 동안 도시 외곽에서 격렬한 전투가 계속 됐다.


병력은 적었지만 효과적인 중화기의 화력지원으로 월맹군은 결국 도시 진입구에 섰다.

 

남베트남군은 뒤로 천천히 그들의 본부 쪽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정오가 되자 전투에

균형이 잡히기 시작했다. 남베트남들은 계속 거점에서 버텼고, 월맹군은 지속적으로

압박이 증가했다. 만약 월맹군이 한 곳에 전 대대를 집중했다면 남베트남군은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군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미군 1기갑여단 1여단

뿐이었다.


로버트 블루어는 광트리 지역 고문관 단장이었다. 그는 헬기를 타고 날아가 1기갑사단

1여단장 래턴을 만나서 작전을 상의했다. 블러어는 여단장에게 긴급하게 이렇게 말했다.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이미 월맹군 1개 대대가 남베트남군 방어선을 넘었습니다.

 다른 대대가 증강을 해서 광트리 시에 거점을 마련할 겁니다. 동쪽과 남쪽에 화력

 거점을 말입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래턴 1여단장은 1기간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광트리 진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를

이미 예견한 월맹군들은 1여단 주변에 자리 잡고 이미 로켓과 박격포로 공격해서 1여단의

주둔지역 일부를 돈좌시키고 있었다.


당시 1기갑사단은 ‘공중기동’의 능력이 있었다. (당시 1기갑사단은 뒤에 -Airmoible-이라고 수식어가

붙던 부대) 이는 사단장 톨슨이 새로운 공중기동전술을 도입한 선견 때문이었다. 1967년 4월에

사단장이 되기 이전, 그는 1965-1966년 동안 미 육군 비행학교 교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1937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인물로, 2차 대전 동안 뉴기니아와 코레히도, 필리핀

에서 전투강하를 했던 인물이. 그러나 당시 1여단만은 지상기동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톨슨 사단장은 응답했다. “나는 래턴 여단장의 의견에 동의한다.”라고 말했고, 나중에 그는

“난 그의 현명한 능력을 믿었다.”라고 기술했다.


래턴 여단장은 고문관 블루어로부터 월맹군의 위치와 침투 루트를 숙지했다. 월맹군은

도시의 북동쪽과 남동쪽에 있었다. 그는 헬기 기동을 택한다. 그는 랜딩존을 찍었다.

그는 나중에 기술하기를 ‘랜딩존은, 월맹군의 증강을 막고, 시가로의 진입을 막으며,

그들의 화력지원을 제거하는 쪽으로 선정되었다.’


당시 사이공의 미군지휘부는 테트 공세에 대처가 느린 상태였다. 그러므로 하부의

제대들은 알아서 필요한 전술을 사용해서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래턴의 참모

들은 계획을 추산하여 헬기 댓수를 산출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났을 때, 첫 번째

헬기가 월맹군 대대가 있는 정중앙에 병력을 랜딩시켰다. 

 

 

 

1기갑사단의 공중강습


래턴 여단장은 두 시간 만에 자신의 여단을 180도 회전시켜서 출동시켰다. 당시

1여단은 2개 대대(12대대, 5대대) 밖에 출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1개 대대(8대대)는

한 산의 정상에 베이스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산 정상은 당시 안개가

끼어 있어 헬기가 착륙할 수 없었다. 502공수연대 1대대는 만일을 사태를 대비해서

여단 베이스를 지키고 있었다.


1기갑여단의 2개 대대는 월맹군 후방지역 5개의 랜딩존에 랜딩했다. 12대대는

시 동쪽에 5대대는 도시 남동쪽에 랜딩시켰다. 이 중간에 래턴 여단장은 9기갑의

항공기를 통한 화력지원을 요청해서 확답을 들은 상태였다.

 


이렇게 미군이 준비를 하는 동안,

남베트남 보병과 공수대대는 월맹군의 항복제의를 거절했다.


첫 번째 미군 병력이 랜딩한 것은 오후 1시 45분이었고 1기갑여단 12대대 1대대

B중대였다. 몇 분 후 C중대가 랜딩하는데 월맹군 중대의 강력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화력지원과 함께 기갑대대가 전진을 시작하자, 월맹군은 미군과 남베트남 1연대

중간에 놓이는 상태가 되었다. 이어서 속속 다른 중대들이 랜딩하기 시작했다. 


한 병사는 이 기동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광트리 남동쪽에 공중강습했다. 우리는 북베트남 대대 바로 뒤에 랜딩했다.

 전체 중대가 1번국도 상에 모두 랜딩했다. 우리는 앞으로 전진 했고, 월맹군 812

 연대로 뛰어 들어갔다. 무장헬기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우리는 신속하게 그들은

 분쇄하기 시작했다.”


놀란 월맹군들이 기관총, 박격포, 무반동총 등을 미군에게 퍼부었다. 그러자 1여단의

정찰헬기들이 그들을 향해 공중에서 로켓을 쏘았고, 부가적인 사단 포병의 포병화력을

요청했다. 미군의 화력이 월맹군을 향해 쏟아졌다. 이로 인해 월맹군 한 대대의 후미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베트남군과 미군 사이에 끼어서 건쉽과 포격을 집중적으로 받은 월맹군 K-6대대는

전투부대의 제대가 무너지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를 공격 중이던 월맹군 대대들은

갑자기 나타난 미군 공중강습부대에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랜딩한

미군들은 먼저 그들의 증강병력 이동로를 차단했다. 월맹군은 앞 뒤로 막힌 상태가

되었다. 이에 사기가 오른 남베트남 보병 방어선은 두 대로 완강해졌다. 


남베트남 공수대대는 ‘그들은 꽤 잘 싸웠고, 또한 그들의 자리를 고수했다,’라고

한 1기갑여단 중대장은 기록했다. 점차 월맹군이 도시 동쪽과 트리 부에서 후퇴

하는 인상을 주었다. 야간이 되자 공중화력지원이 힘들어지자 미군은 박격포,

M-79, 기관총으로 월맹군을 공격했다.  

 

 (구정공세 당시 사이공의 사진)

 

 

 

와해되는 광트리의 월맹군


814베트콩대대는 또한 이동로를 봉쇄당했다. 1여단 일지에 따르면,

“월맹군은 우리들 기갑부대의 공중강습에 매우 생소했던 듯 하다.”

 라고 쓰여있다.


전투는 오후로 이어졌다. 지근거리에서 험악한 전투가 계속 됐다. 그러나 812베트콩

연대 연대장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다른 월맹군 K-5, K-8대대로 전진해서 연결

하는 대신 후퇴를 결정한 것이다. 오후 7시, 도시 동쪽 벽에 있던 월맹군들은 29구의

시체를 남기고 교전에서 물러났다.


월맹군 병사들은 오전에 도시에 도착했다가, 이제는 민간인 피난자들 틈에 섞여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복 위에 민간인 복장을 겹쳐 입고, 소총을

버렸다. 그리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상당수가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월맹군은 흩어졌고 탈출을 위하여 군기가 문란해졌다. 그들은 K-5대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합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공중강습작전은 월맹군을 분쇄

시켰고 남베트남군 방어자들을 구원했다. 밤이 오자, 월맹군들은 북쪽으로 도주를

시도했고, 도시 남쪽에 일부 제대만이 남아 있었다. 미군 기갑부대는 밤 동안 이들을

계속 공격했고, 아침이 밝아왔다.

 


2월 1일 정오, 남베트남군 1연대는 광트리 시에서 월맹군 낙오자들을 모두 청소했다.

미군 1여단도 나머지 812연대 낙오자들을 계속 진압했다. 그리고 안전지대의 동심이

점차 넓어졌다. 래런 여단장은 이 잔존 임무를 502공수연대 5대대에 교대시켰다.

 

그리고 이후 1여단은 잭팟을 터트렸다. 당시 월맹군 잔존병력이 우발적으로 도시

남쪽의 대성당에 모여서 저항했는데, 사격전이 일어났고 래턴 여단장은 숫적으로

많은 병력을 이곳에 투입했다. 이 교전으로 월맹군 76명이 미군에 전사했다.

 

그 동안 남베트남 공수대대 병력은 미군 항공기의 화력지원 아래 트리 부를

완전히 평정했다. 이후 래턴은 2월의 초기 10일간 계속 잔존병력 소탕작전을

했고, 결국 작전이 중단되자, 미군부대와 남베트남 제9공수대대는 헬기를 타고

전투 중인 후에로 이동해 계속 전투에 참가했다.

 

공식 통계상, 광트리에서 월맹군은 86명이 포로로 잡혔고,

914명이 전사했으며, 이중 553명은 남베트남군이 사살한 것이었다.

 

(압송되는 베트콩들. 광트리 사진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