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복수는 항상 총살으로 이어집니다.
2차대전중 이런 복수극에는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무장 친위대입니다.
그러면 왜 무장 친위대는 도대체 얼마나 학살을 했길래 미국 및 유럽에서는 언급하는 것 조차 금기가 되었는지 알아보면 다들 아시는 아우슈비츠를 떠나서 다른 집단 수용소에서 뭔 일이 생겼는지 알아봅시다. DACHAU 집단 수용소 이야기 입니다.
이 수용소는 1933에 처음 독일에 생긴 집단 수용소 였는데 초기에는 단지 이 수용소는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히믈러의 명령으로 SS가 세운 최초의 수용소였습니다. 약 30개국의 출신국가에 20만명이 넘는 죄수들이 수용되었고 2/3는 정치범에 나머지는 유태인이었습니다. 약 25,613명이 이 집단 수용소에서 죽은 걸로 추정되었고 나머지 10,000 여명은 이 수용소 관할의 내에 있는 다른 구역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는 마지막 날에 더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945년 4월 29일
06:00
무장 친위대 장교인 Heinrich Skodzensky는 이날 이 수용소 소장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전날에 진짜 SS 지휘관이었던 수용소장 Martin Gottfried이 약 1000여명의 Allgemeine SS(일반 SS)와 Death's Head SS 사단 병사들이랑 도망을 갔거든요. 이유는 미 보병 사단이 근처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도망을 간 겁니다. Heinrich Skodzensky는 최초이자 마지막 명령을 부대원에게 내립니다. "미군에게 항복"
Death's Head SS 사단 마크
07:35
미 육군 제 45 보병사단 썬더버드의 157 보병연대 3 대대는 10마일 밖에 있는 Gross Inzemoos 마을에서 탱크지원을 받는 3개 보병 중대더러 수용소 쪽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08:30
스나이퍼 몇명을 사살한 다음에 3 대대는 수용소에서 4마일 밖에 있는 Ampermocking 도시근처의 다리가 폭파된 것 때문에 잠깐 지체를 하게 됩니다.
09:30
101 탱크 대대의 탱크들이 다른 다리를 발견후에 그 쪽을 통해서 집단 수용소가 있는 DACHAU시에 진입을 시작하게 됩니다.
10:00
K와 L 보병 중대는 뮌헨을 공격하기 위해서 따로 돌아갔고 I중대만 수용소쪽으로 가게 됩니다.
10:15
드디어 3 대대는 집단 수용소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10:30
I 중대랑 M중대는 집단 수용소쪽으로 진격했습니다. 탱크들은 Amber강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다리는 폭파되었고 이 와중에 많은 숫자의 독일군이 전사했으며 탱크는 더 이상 다리를 건널수 없게 되었습니다.
10:45
L중대의 중위 L.R. Stewart와 상사 Robert Wilson는 보병만 건널 수 있는 작은 다리를 발견했고 이 다리는 1명의 MG사수가 방어하고 있었답니다. 이 사수는 탄약 한개 벨트만 난사한 다음에 도망을 갔고 I 중대는 이 다리를 통해서 건너갔습니다. 탱크와 L중대는 다리 뒤에 남아서 DACHAU시에 남아 있는 독일군 잔여 병력을 청소했고 나중에 뮌헨으로 진격해 갔습니다.
10:55
Intelligence & Reconnaissance (I & R): 한마디로 정찰대가 수용소의 외곽 구역에 접근했고 무장 친위대의 사격을 받았습니다만 4명이 탑승한 지프가 오자 바로 이들은 항복을 했답니다. 몇몇 무장친위대 병사들은 도망을 갔고 이 와중에 Heinrich Skodzensky가 와서 항복을 할려고 제스춰를 취하다가 오해를 받고 사살당합니다. 오해받고 사살당하는게 이날 벌어질 참혹한 일에 비하면 아주 좋은 죽음이었죠.
11:00
I중대의 선발대들이 철로 근처에 있는 죽은 죄수들 시체를 하나 하나씩 찾아내면서 바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일병 Pfc. John Degro씨가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집단 수용소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죠.
지도는 대략 이렇게 생겼습니다.
11:20
미군 병사들이 A지역에 있는 안쪽 구역에서 죄수들이 수용된 것을 발견합니다.
11:25
B구역에서 소각장과 독가스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시체가 어딜가도 있었고 거의 지옥이나 다를바 없는 상황이었다죠. 게임 퀘이크4에서 시체가 막 쌓여 있는 쓰레기 장 같은 구역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11:30
미군 병사들은 공포, 경악 및 분노에 사로잡혀서 주변에 서 있던 항복한 무장 친위대 병사들 122명을 바로 보는 대로 사살해버립니다. 살아 남고 걸을 수 있었던 죄수들은 모여들어서 약 40명의 무장 친위대 병사들을 죽여 버립니다. 몇몇은 맨손으로 죽였다군요. Private John Lee 씨는 나중에 신문기자랑 인터뷰에서 적어도 무장 친위대 60명을 죽이는데 자기도 거들었다라고 발언했습니다.
12:00
거의 모든 저항이 없어졌고 도망갔던 죄수들도 한두명씩 돌아왔다네요. 358명의 무장 친위대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의 대다수가 수용소내에 있는 병원에 누워있던 환자들이었습니다.
12:05
버드아이라고 별명이 있었던 M중대 소속의 미군 MG사수가 순간 "적들이 도망갈려고 합니다!"라면서 포로에게 발포를 시작했고 중위 Colonel Felix Sparks가 발로 걷어 차면서 지금 뭔 짓이냐라고 고함을 질렀댑니다. 하여튼 12명이 이렇게 사살됩니다.
12:25
여단장 Henning Linden이 장교들과 같이 방문을 했고 대령 Sparks과 심한 말 다툼을 하고는 떠 났습니다. 뭔가 이 와중에 대령 Sparks가 맘에 안드는 명령을 했죠. 여단장 Henning Linden는 곧 떠납니다.
병원에 있었던 독일군 환자 포로들이 총살장으로 가던중..
12:50
그 동안 신나고 즐거워 하던 죄수들이 다들 잠잠해 졌고 강제 수용소는 완전히 장악되었습니다. Sparks 대령은 부대 본부에 상황를 무전으로 보고합니다. 그 후에 다른 미군 장교들은 강제 수용소 내부를 시찰하죠.
14:30
Sparks 대령은 캠프 밖에 지휘부를 세우고 거기서 Frederick 장군을 기다립니다. 물론 이 와중에 Henning Linden가 내린 명령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4:45
지도의 C지역에서 병원에 있었던 346명의 부상당한 독일군들이 다 기관총 세례를 받고 사살당합니다. 이를 담당한 장교는 중위 Jack Bushyhead 였고 그는 인디언 출신이었죠.
14:47
이 쯤에서 거의 다 사살당합니다. 이 도표에서 X는 독일군들의 위치, 점은 미군병사들을 말합니다.
14:53
대부분의 독일군 들이 다 죽었는데 몇명은 죽어가고 있었답니다. 이 상황에 아무도 치료를 해줄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 죽어가는 독일군 포로들은 확인 사살당합니다.
15:15
Frederick 장군과 Sparks 대령이 17:00시 까지 강제 수용소를 시찰합니다.
무장 친위대가 죽인 사람들이 뭍힌 무덤입니다. 이 총살장에서는 수천명의 러시아 포로들이 사살당했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총살장에서 무장 친위대에게 사살당했다죠.
18:00
남은 I중대원이 싸늘하고 조용한 수용소 경비임무를 맡게 됩니다.
최종 사살자 명단
보자 마자 사살됨: 122명
죄수들에 의해서 사망: 40명
버드아이라는 MG거너에 의해서 사망: 12명
집단 총살: 3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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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내 독일군 포로 사살: 520명
수용소 외곽 전투에서 사살: 30명
도망간 인원(나중에 사살됨)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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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합계: 560명
이 사살은 다 30명을 제외하고는 다 비무장 인원들을 사살한 사건입니다. 게다가 358명은 이 집단 수용소에 있는 병원으로 수용이 된 인원이었고 원래는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하다가 부상당해서 이쪽으로 호송된 것이죠. 원래 이 수용소에서 죄수들을 죽이던 인원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전날 도망간 1000여명의 Death's Head SS 사단병이나 아니면 일반 SS가 이 수용소 죄수들을 죽이던 인원이었는지도 모르죠. 이유는 도망간 지휘관이 원래 그 지휘관이었으니까요.
몇몇 독일군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4명씩 미군장교에게 불려가서 한명씩 권총탄을 맞고 죽었고 죽어가는 병사를 다른 미군 병사가 몽둥이로 패서 죽였다고 합니다.
무장 친위대에는 의외로 동양인도 있습니다.
죄수들은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를 삽으로 패서 죽였고 죽인 이유는 그 장교가 자기를 고자로 만들었다고 했다죠.
이 수용소 사살 사건은 1991년이 되어야 미군에 의해서 공개가 된 일입니다. 왜 1991년인지 아시죠? 독일 통일 1990년 바로 직후에 이루어 졌습니다. 그전에 왜 안했을까...아마 서독의 반감을 사게 될지도 몰라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무장 친위대가 정상적인 인간들이라는 건 아닙니다. 하여튼 이런 광기적인 장소를 세우고 전쟁전에도 정치범들을 셀 수도 없이 사살했고 자기네들도 구 소련군 포로들을 수천명이나 다 사살했죠. 그 피의 값을 그대로 받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그럼 무장 친위대, 미군만 이렇게 재판없이 복수를 했는지?
SS 소속이 아닌 독일 국방군 소속인 강하엽병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강하엽병의 경우는 상황이 약간 달랐습니다.
크레타 섬 공방전에서 많은 수의 강하엽병이 죽었고 적지 않는 수가 농부들에게 죽임을 당했죠. 그래서 여단장 Student의 명령으로 크레타 섬 점령후 가장 활발하게 저항했던 마을중 하나였던 콘토마리 마을에서 모든 남자들을 다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이것도 재판없이 사살하라는 것입니다.
사진을 보면 이상하게 죽이는 것을 즐겼던 SS애들과는 달리 강하엽병들도 얼굴이 밝은 얼굴은 아닙니다.
자료출처 : 나리카스 밀리터리 게시판 Genesis24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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