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베트남] 프랑스의 사이공 공격 (1861)

구름위 2013. 11. 2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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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

French Conquest of Saigon:

 

Battle of the Ky Hoa Forts

 

 

1858년 8월 31일,

프랑스 극동군의 찰스 리걸트 드 Genouilly 제독은,

프랑스 차이나-해상사단의 함정 14척을 몰고 토우란

(Tourane)으로 들어갔다.

 

(Tourane : 오늘날의 다낭. 이후 다낭으로 통일)

 

그곳은 당시 베트남 중부의 제1무역항이었다. 다음날

제독의 함정들은 포격으로 도시를 장악해버렸고, 이어

9월 2일, 2,500명의 프랑코-스페니쉬 병력을 상륙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신속하게 진격하여 베트남 제국을 공격했고,

명목은 베트남 왕국이, 북부 베트남 통킹만의 주교, 몬시뇨르

조세 산주르조를 처형했다는 것이었다. 

 

(몬시뇨르 : 카톨릭 성직자에 대한 경어)


1857년 7월 20일, 스페인 사람이었던 산주르조 주교는 프랑스의

핑계거리였다. 프랑스는 이 베트남을 노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 제국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할 것과, 프랑스와의 교역을

인정하고 당시 수도였던 후에(Hue)에서 교역사무소를 만들고 교역을

시작하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물론,

예상대로 베트남은 이 최후통첩을 거절했다. (고마워하는 프랑스)


1858년 당시, 베트남 황제는 투 덕(Tu Duc. 뚜득)이었고, 10년 째 왕으로

통치 중이었다. 당시 베트남에는, 서양 전도사들의 박해 속에 1820년부터

베트남의 기독교도는 꾸준히 늘어갔고, 투 덕 황제의 시기에 세력의 힘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베트남 서쪽 지방과 충돌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베트남 황제는

이들의 세력이 (당시 동남아시아를 뒤흔들고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세력을

등에 업고 확장될까 두려워했다. 베트남의 기독교도들은 뭉쳐서 황제에 대항

할 제5열의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미 황제는 북부에서 폭동을 한번 경험한

바 있었다. (더 심한 왕권국가로 종교를 무서워하는 나라도 있다. 병립불가.)


프랑스는,

과거 2세기를 넘게 지속된

베트남의 매우 흥미롭고 변덕스러운 역사를 알고 있었다.

 

특히나 베트남의 남부에 해당되는 코친차이나(Cochinchina)매우

경제적으로 번성했고, 인구의 분포도 적었다. 이는 베트남 왕국이

캄보디아 왕국의 일부 영토를 빼앗음으로써 생긴 결과였다.

 

프랑스인들은 ‘안남 사람들’이란 베트남인들과 18세기 말부터 이미 교역을

하고 있었고, 당시는 투 덕의 할아버지가 통치를 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인들은 투 덕의 할아버지였던 황제가 고리대금으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자

그를 도와주어 진압했다.  

그리고 프랑스인 전도사들은 이미 1700년대 말부터 베트남에 들어와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베트남에 정치적으로 어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었다. 교역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만을 조금 원할 뿐이었다. 프랑스는

자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트남인들에 의한 산주르조 주교의

처형은 시간적으로 최악, 프랑스로써는 최적의 시간이었다.


 


1850년대 말,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 시절, 프랑스는 바다 건너 제국의

팽창에 눈을 뜨게 됐다. 이에 프랑스는 민법을 하나 제정하여 뒤끝 없도록

만들었고, 이런 배경에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항상 걸림돌이던 영국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감정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다.

 

영국은 이미 싱가포르와 홍콩을 손에 넣었고, 베트남도 프랑스가 능동적

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가로챌 생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선교사들로부터 베트남이 주인 없는 농익은 과일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다낭 항 공격을 명령한다.

 


그러나 다낭에 대한 공격에서 프랑스군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투를 6개월

이나 계속 했고, 프랑스 군대는 식량의 부족, 콜레라, 말라리아, 이질에 시달

렸다. 1859년 2월, 실망한 Genouilly 제독은 그곳에서 떠나 남쪽으로 항해해

코친차이나의 수확저장고인 사이공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사이공>


2월 15일 아침, 배 위에서 제독은 드디어 사이공을 눈으로 보았다. 그렇게

붐비는 도시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수많은 미국사람들과 미국

언론이 자리 잡는 도시가 된다......


19세기, 남부 베트남의 6개의 지역이 연합하여 코친차이나를 형성하여

 ‘와일드 웨스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역은 광대했으나 인구밀도는 매우

낮은 곳이었다. 메콩 강에서는 여전히 해적이 날뛰고 있었고, 베트남 왕국

통치력은 매우 미약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매우 많은 여분의 쌀은,

베트남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매우 중요한 베트남의 소스)


지역학적으로 보면, 사이공은 거대한 메콩 강의 북쪽에 있었다. 메콩의 물

흐름은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었다. 그중, 남쪽의 벤 느그헤 물길, 이것이

사이공 시 동쪽으로 흐르는 사이공 강으로 흘러간다. 이 세 개 모두 작은

배들로 통행하고 있었고, 프랑스 전함도 이동할 수 있었다. 


당시 사이공은 2천 명이 거주했고, 매우 좋은 집들이 있었으며 강변 하류에

성채가 있었다. 관통하는 시가길은 딱 두 개였다. 하나는 강변을 따라서 나

있어 일부 상점과 소박한 집들이 있었고, 다른 길은 시내를 관통하면서 창고

들과 부유한 중국상인들의 집이 있었다. 좀 더 내륙에는 농장과 과수원들이

있었다.


지역의 주요 상업센터는 수로 5킬로미터 지점에 있었고 명칭은 ‘탄곤’ 혹은

‘탄간’이라고 불렸다. (이는 나중에 촐론Cholon이라고 불리게 되고, 뜻은 ‘대시장

Great Market’이다.) 이곳의 교류 창고들은 중국 명나라 시절의 망명객들인

화교들이 만든 것이다. 반세기 이상 동안, 이 촐론은 근처의 모든 수로와

해상길의 중심지가 되어 해안의 후배지(後背地)가 되었다. 남베트남의 잉여

미곡과 기타 생산물들이 이곳으로 모였다.


(베트남 사이공의 기고 글에는 이 ‘촐론’이 꼭 등장한다.

 그냥 시장이라는 의미로도 통용된다. 잇빨중사)

 


2월 16일, Genouilly 제독의 배들은 사이공의 ‘기아 딘’ 성채를 마주보고 위치

했다. 그곳은 흙과 석공술로 지은 성채로, 코친차이나에서 가장 중요한 곳...

 

사이공 강에서 800미터 거리였고,  티 크그헤 시내의 남쪽이었다. 성채는 2.5

에이커의 크기로 병영, 창고, 정부기관 건물, 고위관리들의 집들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기아 딘의 최고 관리 ‘부 두이 닌’이 살고 있기도 했다.

 

(미개인들은, 복종하지 않으면 전쟁의사로 해석하는 선진국)


그리하여 제독의 함정과 베트남인 성채 사이의 포격전이 일어났다. 베트남인

들의 포격이 느슨해지자 프랑스와 스페인 병사들은 해안으로 향했다. 상륙에는

함정의 대포가 지원하고 있었고, 함정의 마스트 꼭대기에서 병사들이 소총

사격도 해주고 있었다. 2개 중대의 프랑스 해병대와 해군 육전대가 상륙을

시작했다.

 

이들을 모두 지휘한 것은 찰스 가브리엘 데스 팔리에스 장군이었다.

 

상륙병들은 대열을 형성하여 성채의 북동쪽 벽을 공격했다.  팔리에스

장군의 병력은 필리핀에서 데려온 스페인계 기병대와 공병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프랑스군 병력은 성채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고,

베트남 방어대와 전투를 벌였다. 결국 사이공의 최고관리 ‘부 두이 닌’은

자살했다.


(여기서 프랑스군에 배속된 스페인 군대는 계속 등장하는데, 식민을 위해서는

서양 국가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탁도 하는 행동을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나누어먹고 서로 협조하고, 혹은 배신하는 것이다. 재래식 무기의

동양인을 그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바보 같은 항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공을 전투 중에, 제독은 Tourane(다낭)에 남겨둔 프랑스군이

절망적인 궁핍 상태라는 보고를 받게 된다. 제독은 사이공에 병력 1천 명을

남겨두고 다시 북쪽으로 항해를 나섰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절박했다.

 

매달 100명의 프랑스/스페인 병사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들

베트남의 프랑스군은 본국의 나폴레옹 3세에게 통신문을 보냈지만

그는 그럴 틈이 없었다. 1859년 5월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지원의 부족으로 정떨어진 Genouilly 제독은 11월에 직위에서 물러

나겠다고 본토에 통보했다. 1860년 3월, 프랑스군은 Tourane(다낭)을

버리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 영국군과 합류했다. 당시 영국군은 중국본토

서쪽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식민야합은 어디서건 일어났다. 프랑스가

미국의 요즘 중동 전쟁에 제동을 건 이유를 잘 살펴야 한다. 미국이 나누어주는

것이 있었다면 양심이고 뭣이고, 프랑스가 뛰어들 수 있었다에 한 표!)


사이공에 남겨진 1천 명의 프랑스군은 충분히 촐론의 중심구를 증원군

없이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좀 더 내륙의 코친차이나 쪽으로 영역을

넓히기는 힘들었다. 베트남군은 도시 서쪽에서 착실하게 참호를 파면서

프랑스군영 쪽을 향하고 있었고, 해안을 습격하는 회수가 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기념비적인 교전이 있었다. 1860년 12월 7일, 카이 투옹 탑

근처의 전투에서,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이로 인해

프랑스군 사이공 부지휘관이 전사했다.


1861년 1월, 중국에서 ‘베이징 조약’으로 서양국가와 중국의 전쟁이

중국의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는 레오날드 카르네르 제독을 지나해

차이나 해군사단 지휘관으로 새롭게 임명했다. 프랑스는 사이공의

방어군을 구출하고 코친차이나 전체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자신들의 군인이 죽으면 더욱 확실한 사회적인 모티브가 된다.

 그리고 증오심에 불타, 프랑스 시민들은 까짓 베트남 뭉게라고

 열변을 토하게 된다... 힘있는 놈이 법이다. 테이킹 챈스.)

 

 

 

<사이공 재공격>


1861년 중순,

카르네르 제독은 상하이에서 남진하기 시작했다.

 

휘하부대는 아래와 같다.


프랑스 제3해병연대 전체.

프랑스 제4해병연대 6개 중대. (합해서 총 1,200명.)

프랑스 제2경보병대대(600명.)

포병 200명. (30밀리/80밀리 자주포 각 10문. :12파운드/4파운드 포)

공병과 해군 800명. 해군보병 100명.


이들은 또한 사이공에서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으로 된 스페인군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로 인해서

사이공 병영의 병력과 합하면 총 전투병사는 3,500명에 달했다.

 

(전투에 지면, 야만인들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인들이 돌아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1860년 7월,  후에의 베트남 황제는 군사경력이 풍부한 느구엔 트리 푸옹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사이공을 포함한 그 일대를 포위하여 프랑스군을 몰아

내라고 명령했다. 당시 군대는 2-3만 명을 파견했다.


사이공과 근처는 넓고 평평한 지형이었다.

 

키 호아 평야라고 불렸다.

 

얕은 골짜기와 수로가 있었고 수목은 드문드문했다. 그리고 베트남 제일의

매장지였다. 베트남은 당시 흙무덤을 썼다.  원래 베트남 황제는 이 코친

차이나 지방을 자신에게 완전히 복속시키려고 했었고, 이는 프랑스의 야심과

겹쳐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느구엔 장군은 즉각 키 호아의 방어군을 보강했다. 참호를 더 파고 높고

두꺼운 성채형 전초기지를 만들었고, 근처에 대-인마용 장애물을 만들

었다. 그 요새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이공 강과는 6.5킬로미터

거리였다. 그것은 5개의 것이 모인 모양으로 울타리를 둘렀으며, 이 키

호아 평야의 참호라인은 캄보디아로 가는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이것의 폭은 약 1킬로미터였고 벽의 외벽에 나무로 된 망루가 있었다.

이 참호망 기지는 북서에서 남동으로 굴대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남쪽

1킬로미터 지점의 활주로는 나중에 탄 손 누트 공항이 된다.


프랑스 카르네르 제독은 사이공의 방어에서 남쪽과 서쪽으로 영역을

넓히려고 했고, 그는 이를 일컬어 ‘특별한 네크웍’이라고 불렀다. 이는

또한 참호망과 장애물로 이루어진 12킬로미터 길이의 요새화된 전초

기지와  성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키 호아 방어에 베트남군은 21,000명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이는 절박한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는 방어선 변경의

병력까지 포함된 숫자였다.  

 

<베트남군의 노력>


당시 느구엔이 이끄는 베트남군은 병력에서 우세했고 지리학적으로도 강한

거점을 정성들여 만들어 가지고 있었으나, 훈련이 프랑스군에 비하면 부족

했다. 그리고 무장도 노후 된 부싯돌식 전장 수발총, 창, 도끼창, 곡괭이형 창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포 역시 철로 만들어진 오래된 것들이었다.


프랑스군의 군함은 티 느구헤 냇가에서 사이공 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약

5킬로미터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을 떠나서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의 불시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프랑스 군 진영에서 가장 가까운 베트남군의 요새는

 북쪽이었고, 스페인과 프랑스군은 그 요새의 끝에 측면이 노출된 상태였다.


평야를 가로질러 베트남군의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평야는

말 그대로 대부분 평탄지였고 숨을 곳이 적었다. 그러므로 베트남군의 참호와

장애물, 전초기지는 벌판에 노출되어 프랑스군의 포격과 공격에 정확히 노출

되어 있는 상태였다. 전상자는 매우 많았으나 증명할 길은 없다.


카르네르 제독은 키 호아 평야의 남쪽 끝에서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1959년 이후로, 프랑스는 4개의 불교 탑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여 사이공을 지배했다. 그 탑(파고다)들은 사이공을 찾는 베트남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가장 서쪽에는 카이 마이 탑이 있었고, 북서에서 남으로

비포장도로가 흐르고 있었다. 베트남인들의 방어선과는 2킬로미터 거리였다.

그 장소의 요새를 프랑스인들은 ‘성채’라고 불렀다.


카르네르는 베트남인들의 방어망을 그 성채를 점령함으로 해서 파괴하려 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키 호아 평야의 주 요새를 뒤에서 공격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북쪽에서 오는 베트남 황제의 병력과 보급품을 끊으려 했기 때문

이다. 그는 사이공과 항구 사이에 만들어진 최악의 장애물과 참호들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상대의 문화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안중에 없다..)


1861년 2월 23일, 카르네르는 카이 마이 탑 근처를 공격했다.

함정들이 프랑스 군 지원에 나섰다. 함정의 대포를 떼어다가

카이 마이 탑 근처에 화력지원으로 설치했다.


당시는 베트남의 건기 시즌이었다. 공기는 비교적 차가웠고, 프랑스와

스페인 병력은 2월 24일 새벽 카이 마이 부근에서 공격을 준비했다. 공격

지휘관은 프랑스군 준장이었다. 카르네르 제독과 참모들은 구 중간에서

전투를 감독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아침 목표인 그 각면보 성채는

70년 전 프랑스군 공병대가 만든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4파운드 12파운드 포와, 산악자주포와 로켓 등, 모든 것을 동원

해서 성채와 그 전초기지를 1,100미터 거리에서 포격하기 시작했다. 탑 부근의

대구경 포에서도 포격을 지원받고 있었다. 특히 산악포는 베트남요새와 500미터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포의 위력이 전투를 가늠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자 베트남인들이 대응포격을 했고, 모든 소총들이 프랑스군 진영을 향해

쏘았으며, 그 사격은 매우 정확했다. 프랑스군은 3개의 파트로 공격부대를

나누었다. 왼쪽에 해군보병 2개 중대가 사다리를 휴대하고 전진하고 있었다.

 

그 중앙에서, 두 개의 경보병대대가 공병중대와 같이 이동하여 성채 정문을

폭파시켰다. 200명의 스페인보병과 프랑스 공병, 경보병, 해병부대가 주력군

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


키 호아 주 성채는 상당했다. 성채는 매우 광대한 참호망과, 장애물, 대나무

울타리와 말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원형으로 구덩이를 파고 나뭇

가지와 나무뿌리들이 산재해 있었다. 모든 구조는 공격을 느리게 하고 대형을

유지하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프랑스 포병이 포를 쏘고 있었으나

베트남군의 강력한 대응사격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 프랑스군이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프랑스 군인들은 ‘황제폐하 만세!’을 외치며 큰 파도와 같이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다리를 이용하여 프랑스와 스페인 병사들이 성채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베트남군이 저항을 갑자기 멈추었다. 병력들이 성채의 난간에 올라섰을

때, 돌연 베트남군이 퇴각을 한 것이다. 그것은 좋은 명령이었다. 그들은 키 호아의

주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아직도 우리는 프랑스 국기에서 자유를 본다. 그냥 그렇다.)


성채의 공격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프랑스군은 6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

당했다. 이중에는 공격대 지휘관인 준장도 해당되었다. 그의 팔에 머스킷 소총탄

구슬이 관통했다. 한 스페인 대령도 다리에 총을 맞았다. 둘은 후방으로 후송

되었고, 카르네르 제독이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점차 더위가 물러갔고 프랑스군은 전진을 다시 개시했다. 카이 마우 탑

근처의 프랑스군 포병이 포격을 시작했다. 오후 4시, 베트남군과 전투 코끼리들이

프랑스군 오른쪽에서 갑자기 돌격했다. 그리고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에 피해를

입히고 다시 물러났다. 이들은 프랑스군의 전진에 지장을 초래했다.


어둠이 내렸고 카르네르는 군대에게 그 황량한 벌판에서 야영을 명령했고,

키 호아 항구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을 파괴했다. 제독은 버려진 한

가옥을 지휘소로 삼았다. 그리고 서쪽과 북쪽에서 숫자 미상의 베트남군과

다시 짧은 전투를 벌였다.

 

얼마 뒤 베트남군의 포탄이 카르네르의 본부 건물에 떨어져 터졌으나 피해는

없었다. 스페인 군대와 프랑스 해군보병은 나무들을 잘라냈고, 이어 두 대의

4파운드 포로 베트남 포격에 대응포격을 했다. 어둠이 왔고 전투를 끝났다.


2월 25일 오전 10시,

프랑스군은 키 호아

주 성채를 원형으로 길게 뒤에서 포위했다.

 

프랑스군은 다시 대열을 셋으로 나누었다.

 

포병은 중앙,

스페인군은 프랑스 해군보병과 오른쪽,

왼쪽에는 1,200명의 프랑스 해병연대와 70명의 기병이 맡았다.

600명의 경보병대대는 포대 뒤에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베트남군 포병은 간헐적으로 프랑스군 대열에 포격을 가했다.

 

프랑스군 보병이 진군하자 프랑스군 포병은 1킬로미터 거리에서 베트남군

포병과 응사를 주고받았다. 한 전투 참여자는 베트남의 포병은 매우 생기에

넘치고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로 인해서 프랑스군 포병도

희생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식 서양 군함 몇 척과 그 안에 탄 병력으로

인해서 나라의 운명이 갈리는 상황. 그걸 똑같이 흉내냈던 일본. 카피는 DNA)

 

베트남군에게 불리했던 단 하나는 태양을  눈으로 정면에 받아야 했다는 것.

프랑스 포병은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500미터 거리까지 나아

갔고, 나중에는 벽에서 200미터 거리까지 접근했다. 희생자는 더 늘어갔다.


연기와 화약냄새가 벌판을 따라 흘렀고,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 병사들은

군장을 벗어버리고 전진속도를 더 가속화시켰다. 그렇게 성채의 100미터

거리에 도달했을 때, 이들은 베트남군이 만들어놓은 인공 장애물들을 만났다.

그것을 극복하자 이번에는 가파른 제방을 만났고 그 제방위에는 가시덤불이

놓여져 있었다. 그 누벽의 폭은 약 5미터였다.

오른 쪽에서,

프랑스 해군보병과 스페인군이 전방으로 돌격했다.

 

일부 병력은 베트남인들이 파놓은 제방에 공성용 사다리를 걸고 넘어갔으나,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는 하중을 못 이기고 붕괴해버렸다. 이때 프랑코-스페인군은

북쪽 벽의 마지막 도랑에 도착했다. 그러나 쓸만한 사다리는 3개 밖에 남지 않았다.

 

베트남인들의 저항은 맹렬했다. 베트남인들은 도랑의 병력에게 계속 총을

쏘아댔고, 사다리가 없는 프랑스군은 서로의 어깨를 밟으면서 벽을 오르려

노력하고 있었다. (벽에 걸쳐진 사다리는 베트남군들이 도끼창을 휘두르면서 밖으로 밀어냈다.

떨어진 사다리의 프랑스군은 가시덤불로 떨어져 몸을 심하게 베였다. 간신히

3명이 벽에 올라섰으나, 한 명은 결국 죽었고 두 명은 심하게 부상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베테랑들이었다. 먼저 수류탄을 성벽위로 던져서 베트남군이

물러나자 바로 앵커가 달린 로프를 던졌고, 그 밧줄을 잡고 벽을 오르기 시작

했다.


모두가 외벽을 오르는 것은 한 시간이나 걸렸다.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는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성채 안을 정찰하는 일은

예상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남쪽과 북쪽을 잇는 성채의 100미터 구간은

거의 직벽에 가까웠다. 그 뒤에 또 다른 요새가 있었다.

 

 

<최후의 성채>

 

베트남군들은 당시 프랑스인들이 ‘관리관의 성채(Mandarin Fort)’라고 부르는

곳의 정문을 통해서 퇴각했다. 성채 안으로 들어간 베트남군은 다시 새롭게

활기를 되찾고 사격을 가해왔다. 그때 프랑스 해군과 스페인 보병들은 자신들이

사면 벽에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리관의 성채에서는 무서운 사격이

날아왔다. 그들은 킬링존에 갇힌 것이다. (재래식 야만 군대라고 머리까지 야만인

것이 아니다. 다만, 무기에 너무 차이가 있을 뿐. 전술도 무기에서 나온다.)


더 많은 사다리가 앞으로 전달되었고 베트남군은 사다리들을 벽에서 계속

밀어냈다. 그러자 프랑스군 공병들은 관리관의 성채 외벽 밑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한 목격자는 이 전투를 ‘성난 폭풍’ 같았다고 증언했다.

 

베트남군은 성채의 총구멍으로 강력한 사격을 계속했다. 한 프랑스군

군목이 부상자들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연기가 제한공간에 가득

찼다. 변치 않는 베트남군의 사격이 날아왔고, 고립된 프랑스군은 고통

으로 절규했다. 


다른 병력은 베트남인들의 1차 장애물 라인으로 후퇴해서 기다렸고,

그곳에서는 키 호아 벽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

제독은 나머지 병력을 왼쪽의 공격파로 모두 보강해서 내보냈다.

왼쪽의 공격대는 관리관의 성채 북벽을 오르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제 제독에게 예비대는 포병을 지키는 단 하나의 경보병

중대 밖에 남지 않았다.


관리관의 성채 공격은 머뭇거리고 있었고, 베트남군의 저항은 배가되었다.

그러자 지휘관은 후퇴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베트남인 현지민 중대를

포함한 해병과 경보병이 벽에 사다리를 걸치고, 성채 뒤쪽에서 넘어가기 시작

했다.

 

거의 같은 시간, 프랑스군 공병을 포함한 오른쪽 대열이 성채의 정문에 도달

했다. 그들은 정문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이 두 부대의 양공으로 베트남군의

저항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시 전투에 쓴 맛을 본 프랑스와 스페인

군인들은 극도로 흥분했고 자비가 없었다. 사로잡힌 베트남군은 항복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바로 살육되었다.


늦은 아침, 키 호아 항구의 전투를 끝났다. 카르네르 제독은 베트남 투 덕 황제의

코친차이나에 대한 잔존 전투력 때문에 하루 이상을 더 소비해야 했다. 베트남군의

장군 느구엔의 동생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지휘관 느구엔 장군도 부상을 입었고,

물줄기를 따라서 비엔 호아로 탈출했다.


공식적인 프랑스 해군장관은

카르네르가 베트남 군대에 감탄을 했다고 적혀 있다.

 

‘적의 저항은 정말 완강했다,

 그들의 열정과 완고한 용기는 인상적이었다.’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의 전상자는 225명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관리관의

성채 공격에서 나왔다. 12명이 죽었고 그 중에는 프랑스 해병대의 대령도

포함되었다. 베트남군의 주력은 300구의 시체를 뒤로하고 후퇴했다. 

 

느구엔 트리 푸옹 장군은 부상에서 살아남았으나, 그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직위를 잃고 강등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다시 복직되어 프랑스

군을 공격하게 된다.


카르네르 제독은 무모한 전술행동에 비난을 받았으나, 그렇게 분별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그 역시 모험이었다. 그는 많은 수의 보강된 진지의

상대에게 개활지에서 공격을 명령했다. 그 다음의 그림은 그려지지 않은

상태로.

 

그러나 군대 지휘관에게 필요한 덕목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비평에

함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겼다. 마침내 사이공은 완전히 넘어

왔고, 1944년 코친차이나 식민지 정부에서는 제독을 기념하는 우표까지

나오게 된다.  (망각의 세월. 강한자는 모든 것을 독점한다.)


키 호아 성채에서의 한달 정도의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는 6개의 코친차이나

지방을 비롯한 지배지역을 넓힐 수 있었다. 저항은 계속 되었고 전투도 계속

일어났다. 그러나 사이공와 남부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는 공고히

되고 있었다.

 

베트남 황제권은 잠시 유지가 되었으나, 황제와 그의 대신들은 백성들의

동요 속에 약해져 갔다. 그들은 이후 25년간 지상의 군사행동은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왕권은 종말을 맞는다. 또한 근 1세기간 독립된

베트남의 면모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 1885년 프랑스는 투 덕 (뚜득) 황제의 항복을 받아내 베트남 전역을 모두

복속시켰다. 그 여세를 몰아 담배, 인디고, 차, 커피의 수출을 촉진할 목적으로

1940년 초까지 베트남에서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몽땅 자신들의 자원으로 사용했다. 1887년 안남과 통킹,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보호령과 코친차이나를 한데 묶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되었다.  *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판,

프랑스 농장 장면에서 프랑스인들은 열열히 자신들의 권리와

미국이 전쟁에 들어간 원인을 역설한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프랑스 식민역사에 대한 모욕임을 프랑스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자신들의 식민역사와 원재료 강탈, 인간에 대한 원숭이

취급은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미국의 잘못을 역설한다. 그리고

여전히 베트남인 급사가 달려와서 포도주를 따른다.

 

100년을 프랑스에 지배당했음을 망각하고, 디엔 비엔 푸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의

수탈은 디엔 비엔 푸로 해장술 하기에 너무 컸다.

 

이 영화의 프랑스 농장 장면에서 프롱스인들이 떠드는 말은,

어쩌면 그렇게 일본 우익들이 떠드는 말과 유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