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캄보디아 함락..

구름위 2013. 11. 2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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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에는 태국, 북부에는 라오스, 남동쪽에는 남베트남이 연결되어 있다. 

2. 위의 톤레 삽, 커다란 호수 위에 밑줄 쳐진 것이 앙코르와트 사원이다. 

3. 메콩 델타 지명 위의 네모가 '앵무새 부리'라는 지형이다. 여기서 남베트남군

    까지 합해서 혈전이 벌어졌는데, 그 앵무새 부리 끝이 사이공와 너무 가까웠다. 

4. 왼쪽의 작은 블럭은 해외 물자를 받거나, 월맹군에게 봉쇄된 도로를 피하기 

   위하여 물자를 받던 항구지대이다. 

5. 월맹은 서쪽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캄보디아에 넘나들 수 있었다.

    7번 도로 동쪽은 거의 월맹군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1972년.

 

 

<상황> 

 

1. 라오스에 비하여 캄보디아는 국내 영토의 월맹군을 원칙적으로 허용치 않았다.

2. 캄보디아 논놀 정부와 남베트남은 협조하여 월맹군과 대적하고 있었다.

3. 1972년 월맹군은 남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부활절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4. 부활절 공세의 남부 공세의 경우, 캄보디아가 필요했고, 또한 상징적인 사이공이 있었다.

5. 캄보디아의 동쪽지대는 이미 호치민 루트로 월맹군이 점령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6. 그뿐 아니라 라오스에 들어온 월맹군들은 캄보디아 북부에서 크메르 루즈를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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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ing Ground to the Khmer Rouge


캄보디아 공산당에 의한 3년 간의 내전.

 

(Khmer Republic’s war)

 


1972년, 그것은 믿지 못할 고요와 함께 시작되었다.

 

마치 한바탕 때리기 위한 복서의 휴식과 같았다. 미군 장비로 무장한 캄보디아

육군은 캄보디아 중부에서 공산주의자를 소탕하기 위한 Chenla II 작전을 펼쳐서

비참한 결과를 낳고 있었다.

 

캄보디아 공산당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북베트남 공산당인 월맹군이었다.

그들도 남베트남에서 부활절 공세를 준비하기 위하여 보급품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월맹은 부활절 공세 전에 그들의 뒤를 정리해두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캄보디아다.


크메르 루즈 (붉은 크메르, KR) 캄보디아 공산당은 월맹군과 중국공산당에

훈련교습을 받으며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동안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힘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1969년 이래, 미국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만은 자신들의 영향권에 두고 싶어 하고 있었다.

 


1972년 1월 10일, 캄보디아 육군 22여단은 미군들의 용어로 피시훅이라고

불리던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에서 (월맹군에 밀려 동부에서) 철수했다.

그들은 7번 국도를 버렸다. 그 도로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잇는 개방된

도로였다. 결국 이는 월맹군의 손에 넘어간다.

 

그리고 바로 그날, 캄보디아 육군은 보다 남쪽의 1번 국도 평정을 시작한다.

‘앵무새 부리’라는 명칭의 지역으로 남베트남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는 남

베트남군과 함께 11개 대대가 참가한 베트콩 소탕작전이었다. 그러나 시작이

되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렁에 빠진다.

 

 

북부전투


그 다음에 캄보디아 육군의 공격대상은 국가의 상징과 다름없는 앙크로 와트

(Angkor Wat) 사원지대였다. ‘앙크로 승리’라는 작전을 통해서 공산주의자

수중이 이 일대를 되찾으려고 한 것이다. 이 캄보디아 북서부의 방치된 고대

수도를 대상으로 보급선을 끊고 공산당군을 포위하는 작전이었다.

 

근 1세기 전에 앙크로와트의 72평방 마일의 방어선은 프랑스인들의 영향을

받아 복구되었고, 월맹군 연대와 크메르 루즈 몇 개 대대에게 1970년 6월에

빼앗기고 나서 6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정글 수의에 덮여 있는 복잡한

방어망은 캄보디아 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1971년에만도 포격으로 큰 피해

를 보았다.

 

대체할 수 없는 캄보디아 고대 유적들이 방콕, 홍콩, 그리고 서방의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공산당들은 정과 망치로 그것들을 떼어내

재정에 충당하려고 했다. 1972년 1월 돌연히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추방

되었고, 캄보디아의 일군들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20명이 CIA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캄보디아 군의 작전은 1월 29일 서쪽의 6번 도로와 동쪽에서 나태한 상태로

시작되었다. 4마일에 걸친 거리에서 크메르 루즈와 캄보디아 육군은 교전을

주고받았고, 그러나 앙코르 와트의 미완성 극장과 경기장에서 크메르 루즈의

저항에 막혀 캄보디아 육군은 전진이 중단되었다.

 

크메르 루즈는 10일 뒤에 반격을 시작해 캄보디아 군을 뒤로 밀어냈다. 두

시간 동안의 공중폭격이 있고 나서 캄보디아 군은 성의 해자부근까지 밀려

났고 이는 경계선이 되었다. 사원 남쪽 끝에 잘 알려진 비슈누 신을 모시는

사원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2월 21일, 캄보디아군의 전진은 오도가도 못

하게 되었다.

 

 

남부


이 건기 동안에 크메르 루즈는 강하게 캄보디아 육군을 밀어냈다.

 

3월 20일, 지역의 수도인 (프놈펜 동남쪽) 프레이 벵에 박격포, 무반동총,

122밀리 로켓이 떨어졌다. 그리고 도로와 논을 통해서 지상공격을 시작

했다. 16마일 부근의 주요한 1번 국도의 한 마을에 122밀리 로켓이 떨

어져, 연료와 탄약을 적재한 곳이 폭발하여 큰 불이 났다. 충격이었다.

 

18명의 캄보디아인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당했으며 10명이 실종되었다.

상대는 33명이 불운을 당했다. 이 공격은 캄보디아 정부가 캄보디아 내

호치민 루트를 방해하자 보복으로 가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의 연계를 자르려는 목적도 있었다. 남베트남군은 앵무새

부리 동쪽(베트남쪽) 30마일 지점에 있었다.


1월 30일 이후 중단되었던, 캄보디아 수도의 밤하늘에 다시 불빛이 드러

나기 시작했다. 그때 월식이 일어났다. 캄보디아군들은 이 전설상의 괴물

같은 월식을 바라보았고, 그 시점의 월맹군 공격으로 200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때, 공산당의 무반동총과 로켓이 세 방향에서 두 시간 동안

도시에 떨어졌다.

 

프놈펜의 일곱 구역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 중 150-200발의 포탄이

캄보디아군 막사와 포첸통 공항에 떨어졌다. 이 공격으로 불과 연기가 일어났

고 102명이 죽었으며, 208명이 부상당했고 400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수도

를 방위하던 캄보디아군은 혼란에 빠졌고, 2일 뒤에는 한 군인들을 실은

버스가 공격당해서 11명이 죽고 66명이 부상당했다. 


3월 23일, 크메르 루즈 해상침투조가 5천톤급 화물선을 톤레 강 항구에서

침몰시켰고, 메콩 강의 캄보디아 츠오이 창 해군 기지도 피해를 입었다.

두 대의 바지선이 부유하는 폭뢰가 터져서 침몰했다.

 

 

남서부


3월 24일, 프놈펜과 츠오이 창 반도를 잇는 5년 된 2,700피트짜리 도로

중간에서, 트럭이 통과할 때 2천 파운드의 폭약이 폭발해 트럭이 날아가

버리고 다리의 중앙판넬이 휘어버렸다. 이로 인해서 11명이 죽거나 다

쳤다. 결국 문제가 된 철강부분을 잘라내고 다시 교량을 사용할 수 있

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일본이 이 교량을 수리해 주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면, 이 앵무새 부리와 사이공이 얼마나 가까운지 알게 된다.

지도에는 현 호치민 시티로 나와 있다. 이는 나중에 캄보디아-베트남전쟁

의 혈전장이 되기도 한다.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남베트남군도 최대한 그

곳의 월맹군을 막으려고 했다. 남베트남 내의 월맹군과 베트콩들도 이쪽

으로 동원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앵무새 부리 오른쪽에 '타이 닌'이라고

보일 것이다. 바로 과거 본인이 기고했던 '이동게릴라포스'의 작전지역

이다. 이른바 노터치 지대였다. 거기에 물린 캄보디아도 마찬가지....

 

 

 

앵무새부리


4월 7일, 캄보디아 육군은 닉 루옹과 프레이 벵 사이의 15번 도로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프레이 벵은 고립되 상태로 그 달에 크메르 루즈로부터 박격포

무반동총 로켓으로 127호나 공격당했다.

 

4월 중순, 메콩강과 앵무새 부리 중간에 대한 크메르 루즈의 공격으로 프놈펜과

사이공을 잇는 1번 국도상의 캄보디아군 거점 22개가 절멸되었다. 정부군은 닉

루옹 동쪽으로 기동하면서 도로를 평정하고 콤퐁 트라벡에서 최대한 멀리 개통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산당군들은 전투경험이 많았다.

 

그러자 남베트남의 미군 훈련캠프에서 훈련을 받던 캄보디아 보병 5개 대대가

급하게 동원되었다. 그들은 콤퐁 트라벡에서 31마일 거리의 지점에 간신히

거점을 마련했다. 캄보디아 최남단에서는 북베트남 제1사단의 제대가 남베트남

군과 캄보디아군을 포위했다.

 

미 공군의 공중지원에서 불구하고 남베트남 증강병력은 겨우 국경을 넘어 태국

만에 도착해 있었다. 결국 월맹군은 포위된 상대를 4월 30일 무너트렸다. 월맹군

은 해상으로 보급품을 받고 있었고, 남베트남에 대한 치명적인 부활절 공세를

위한 뒤를 안전하게 하고 싶은 목적이 있었다.

 

 

다시 북부       


5월 중순, 캄보디군은 앙코르와트 부근의 크메르 루즈가 어디론가 빠져서 사라

졌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다.  5월 17-18일 사이 야간 동안, 병력은 동쪽으로 빠져

나가 시엠 립 공항으로 향했고, 이어 조용히 고대에 축성된   제방을 건넜다.

그들의 목표는 프놈 박헹(Phnom Bakheng)이었다.

 

그곳은 앙크로와트 남쪽 문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의 약 해발 70미터 정도의

고지가 하나 있었고 성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원래 30명의

크메르 루즈와 7명의 월맹군만이 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대담하게 아침

에 횡단했다.

 

사실 캄보디아군은 1972년 처음으로 주목할만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전술상의 후퇴였다. 그곳에서도 높이 솟은 앙크로

와트의 탑들이 보였다. 다음날 밤, 캄보디아 육군의 3대 부대가 12세기 수도원

쪽에 있는 적의 거점을 향해 침투했다. 한 그룹은 동쪽의 관문인 세임 립 강으로

향하고 있었고, 다른 그룹은 서쪽에서 크메르 깃발을 들고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는 매우 긴 둑방길이 하나 있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매우 빨랐다. 이 여명을 받는

고대의 사원에서 서로는 강한 전투를 벌였고, 공산당군의 교차사격은 다가오는

 캄보디아군을 조각내 버렸다. 한 부대는 75%의 전상율을 보였고 17명이 전사

했다. 3대 1의 숫적인 압도 속에서 캄보디아군은 다시 새로운 공격을 서쪽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당군은 참호와 벙커에서 격렬한 사격으로 몰아내었다. 캄보디아

공군은 네이팜탄과 고폭탄을 600피트 상공에서 투하했는데, 문제는 고대의

유적지였다는 것이다. 두 개의 과거 여행자 호텔이었던 곳도 파괴되었고,

결국 전투는 몇 주 만에 수가 막혀 버렸다.

 

 

캄보디아의 정치 상황


당시 캄보디아의 정치/경제적인 면도 별로 건강하지 못했다. 원수인 논 놀

(Lon Nol)은 1970년 중립주의자였던 노로돔 시아눅 왕자를 추방했다. 그리고

1972년 3월, 대통령제로 제도를 바꾸었다. 4월이 되자, 그는 국가조직을 재

구성해서 자신의 힘을 증강시켰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 58세의 미스테리한 대통령은 선거에서 선거용지에 손을

댄 흔적이 역역했다. 결국 격렬한 시위로 6월에 재선거가 실시되었고 결국

논놀은 55%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투표율이나 국민적인 결속력은 떨어

진 상태였다. 결국 논놀은 자기가 만든 당을 떠났다.

 

또한 국민에게 욕을 먹는 논놀의 또다른 형제이자 이름이 같은 논놀도 문제

였다. 이들은 나라의 아래 윗 좌석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논놀은 가끔씩

휠체어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1년 전에 당한 수난 때문이었다. 형제 논놀은

군사작전을 보고도 없이 자신 방식대로 치르기도 했다. 


캄보디아군은 1972년 중순 20만 명의 크기였고, 문제점도 역시 많았다. 첫 번

째로 매우 단련된 월맹군과 베트콩 베테랑들을 상대해야 했다는 점이다. 캄보디아

군 전술은 CIA의 보고서를 인용하면,

 

‘적이 우리를 공격하게 만든 다음,

공중지원과 남베트남군을 통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힌다,’였다.

 

군사조직은 미국과 프랑스의 것이 혼합된 상태였다. 이런 오용으로 인해서,

남베트남 거주 캄보디아인(크메르 크롬)들 중, 전투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캄보디아로 영입되어 13개 여단과 특전단을 만들었는데, 1972년이 끝나도록

정식으로 계급을 수여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진급과 훈장은 보기 드믄 매리트였다. 고위장성들은 무기와 탄약을 적에게

팔아 자신의 호주머니 속으로 넣었고, 군용미는 암시장에 팔았으며, 존재

하지 않는 유령 부대를 만들어서 여분의 정부돈을 받아냈다.


이렇게 명단으로 제출하여 리베이트처럼 챙겨지는 돈이 매달 백만 달러를

넘었다. 결국 정부는 실제로 10만 명의 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했다. 다른 문제로는, 병사의 가족들이 전투지대로 따라간 것이다.

 

그리고 어린 자식들을 병적에 넣었다. 9월에는 봉급을 못 받은 군인들이

프놈펜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부는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논놀은 예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외국인이 캄보디아의 발전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난 그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미군의 지원  


미국은 캄보디아 공화국을 유지시키려고 계속 원조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따라서 훈련 프로그램이 끝나자, 미국은 총 86개의 캄보디아 대대를 남베트

남에서 훈련시킨 상태였다. 당시 미군 ‘캄보디아 군사원조팀’이 62명이 들어

가 프놈펜 미 대사관 뒤의 건물에서 임시 기거하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 의회

가 타부시하는 행동이었다. 미국 육군 특전단 46특전중대가 캄보디아군 특전단

을 태국에서 훈련시켰고 가끔 그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1972년 캄보디아 정부는 총 76대의 항공기를 가지고 있었다.

 

16대의 T-28,

3대의 AC-47 스푸키 건쉽,

10대의 C-47 수송기,

9대의 세스나 T-41 훈련기,

14대의 UH-1H 헬기와,

33대의 경항공기가 있었다.

 

1973년에는 154대로 늘어났고 모두 미국이 준 것이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군의 훈련부족으로 14대의 T-28이 1년 만에 추락했으며, 그중 여덟 개는

조종사 에러였다. 결국 항공은 미 공군이 많이 도와주고 있었다. 캄보디아

해군은 1972년에는 69척, 1973년에는 123척을 보유했다. 1975년 4월에

미국은 캄보디아 군사원조 프로그램으로 총  10억 달러도 넘게 사용했다. 


전투의 붕괴와 경작지의 넘겨줌으로 인해서, 캄보디아는 결국 메콩강의

경작지에서 올라오는 식량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로들이 불안해서

결국 배로 운송해서 태국만에 짐을 부리고 있었다. 민간이나 군용 항공기가

나르기도 했다. 그러나 수도 프놈펜의 인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큰 10년간 수도의 인구가 3배로 늘어 150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위한 사치품들도 부족하지 않았다.


폭도의 입장인 크메르 루즈 (정식 명칭은, 캄푸치아 공산당, PCK)의 지도자 일명

폴 포트는, 두 가지 의사결정을 한다. 하나는 1970년 중국 광둥에서 열린

인도차이나 회담에 의한 것으로, 회담 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크메르 루즈는

전쟁을 점차 월맹군-베트콩에게 넘기고 있었다.

 

1972년, 크메르 루즈는 병력을 대대와 연대로 나누면서 그 기간요원들을

월맹군-베트콩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그해 중순에 크메르 루즈는 총 4-5만

의 정규군과 8-10만의 비정규군을 보유하게 된다. 그 해가 끝날 무렵, 크메르

루즈는 총 20만으로 격상하였고, 베이징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아눅 왕자가

그들의 보증인이 되었다. 그는 특히 시골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 당시 캄보디아

의 시골은 공중폭격으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좀 더 불길한 징조였다.

폴 포트는 ‘신성한 공산주의’를 표방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1975년 그 유명한 대량학살들이 일어나게 된다.

농부들은 집단농장에 소속되어야 했고, 포로들을 죽였으며, 심지어

서양 저널리스트이자 배우 에롤 클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린다. 이런

행동들은 여러 부대들이 경쟁적으로 하게 된다.

 

사실 캄보디아에게 베트남은 ‘상속된 세습적인 적’이었다. 그런데

크메르 루즈는 부대의 훈련을 월맹군들에게 맡겼다. 약 8천 명의

월맹군-베트콩들이 캄보디아에 남아 있었다. 다른 월맹군 3만 명은

호치민 루트를 관리하고 있거나, 동부 캄보디아에서 남베트남 국경을

넘어 작전하고 있었다.

 

(베트남 왕국과 크메르 왕국은 항상 싸우던 사이)  


1972년 6월 수도 프놈펜의 캄보디아 정부는 재난을 당했다. 6월 5일, 핑크색

커튼이 쳐진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가 프놈펜 국방부 옆의 커브를 돌았다.

그리고 이어 중국에 107밀리 로켓이 날아와 지붕에서 터졌고, 두 발은 장관

관사에서 터졌으며, 다른 한 발은 대통령 궁 70미터 부근에서 터졌으며, 그

곳에서 놀던 소녀 세 명이 죽고 말았다. 로켓을 쏜 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

났다.

 

다시 6월 8일 오후 1시, 122 로켓 이 국방부, 기차역, 급수시설과 공항에 떨어져

7명이 죽었다. 동시에 6마일 남쪽에서는 200명의 습격자가 카누를 타고 강을

건너 습격해 64명이 죽었고, 습격자(공산당)들도 14명이 죽었다. 그러나 더욱

나빴던 것은 1번 국도를 지키는 캄보디아 육군이었다. 두 개의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크메르 크롬 48여단의 엘리트 두 개 대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매복을

당했다. 그들은 포위를 당해 공중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무 것도 오지 않았다.

탄약을 떨어졌고 그들은 포격을 요청했다.

 

결국 600명의 병력 중에서 13명 만 살아서 귀환했다. 


7월 4일 이후 3일간은 대통령 취임으로 공휴일이었는데, 캄보디아군과 남베트남

군 연합으로 Operation Sorya를 시작했다. 1번 국도 장악과 콤퐁 트라벡에 대한

공격이었다. 같은 시간, 프놈펜 남쪽 42마일 지점의 메콩강을 건넌 월맹군은

앙타솜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 그러한 중화기로 그런 엄청난 포격을

퍼붓기는 처음이었다.

 

그 지역의 통치자이자 계급이 준장인 콩 차이스가 구원에 나섰으나 결국 전사

하고 말았다. 앙타솜은 7월 11일이 되어서야 구원되었고, 콤퐁 트라벡도 결국

13일 후에 캄보디아 군에 넘어왔다.


8월 6일, Sorya II 작전의 일환으로 캄보디아 11여단과 66여단의 3개 대대가,

콤퐁 트라벡의 2개 사단 급 월맹군을 공격했다.  이때 월맹군은 탱크를 캄보디아

에서 처음 사용했다. 선봉에 선 월맹군 탱크는 고립된 캄보디아 11여단을 1번

국도에서 공격했다. 2일 후, SA-7 미슬이 또한 전쟁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피난민을 싣고 가던 헬기가 미슬에 맞아 추락하면서 14명이 죽었다.


8월 11일, 11여단의 대대들이 1번국도의 나머지 부분을 결국 평정했다.

 

10일 후, 남베트남군이 고립된 캄보디아 군을 향해 전진해서 닿았고, 미군

전폭기에 의해서 월맹군 기갑 30대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도로 동쪽은 여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9월 8일 공산당군은 다시 콤퐁 트라벡을 다시 재점령했고,

서쪽으로 5마일이나 밀어부쳤다. 월맹군은 캄보디아 수도로 진군하면서 최루

개스까지 썼다. 당시 3여단 그룹은 대통령의 형제인 논놀 대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수도 프놈펜을 향해서


10월 7일 여명이 틀 무렵, 도시 푸험 벤에서는 불교도들이 선조들을 찬양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공산당군은 그곳을 깊숙이 뚫고 수도 프놈펜으로 향했다.

새퍼들이 츠로이 창 교량으로 달렸고, 나머지는 이웃 도시 토늘 삽으로 샹했다.

 

약 100명의 월맹군 특공대가 B-40 로켓의 지원 아래 교량 서쪽 도시의 스타디움

으로 역주했다. 그곳에는 캄보디아군의 M-113 장갑차들이 주기되어 있었다.

공격자들은 몇 대의 장갑차를 파괴하고 죽기 전에 서쪽의 몇 대를 더 파괴했다.

결국 일곱 대의 장갑차가 파괴되었고 캄보디아 군인 12명 정도가 전사했으며,

목욕탕을 피난처로 삼고 있던 군인 가족들도 사살했다.

 

전투는 여섯 시간 동안 벌어졌는데, 이 특공대는 군사설비에 도달하기 전에

진압되었다. 근처의 프랑스 대사관이 피해를 입었다. 캄보디아 군은 23명이

전사했고, 적은 83명이 전사했다.


크메르 루즈의 첫 번째 대규모 단독작전이 1973년 1월 6일에 있었다. 프놈펜

북동쪽 45마일 지점의 한 마을을 캄보디아군 대대를 포위한 것이다. 결국 미군의

지원 아래 크메르 루즈 2대 대대의 봉쇄를 뚫고 후퇴했으나, 크메르 루즈는 도시

에 1월 23일 입성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를 유지할 의도까지는 없었다.

 

1월 27일 파리 협정에 따라서 베트남에는 가상의 평화가 찾아왔다. 협정의

20번 조항에 따라서 캄보디아에서도 총성이 멎어야 했다. 크메르 루즈는 이

협정을 배신행위로 보고 있었다. 캄보디아 종전은 ‘적당한 간격’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미군의 후퇴와

남베트남의 피할 수 없는 와해 사이에 시간을 조정해야 했다.

 

라오스에서는 조용한 가운데 라오스 공산당인 패트 라오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캄보디아군은 단편적인 작전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도 전쟁의 끝은 보이고 있었다.


땅이든 바다에서든 일어난 모든 일에서,

다음 187일간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특히나 공군에....

 

잠시 정적이 흐른 뒤에 미군의 항공기들은 다시 2월 9일 날아들었다.

‘거점을 잃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전술항공에 책임이 있는 미 7공군은

본부를 베트남에서 태국으로 이동했고, 하루에 12회 정도 라오스를 폭격

했다. ‘크고 추하고 살찐 동료들’이라고 불리던 태국의 타파오 기지에서

이륙한 B-52들이 하루 2-3회 보강 폭격을 했다.

 

프놈펜의 미 대사관은 이 캄보디아 내 폭격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의회 조사팀이 4월에 도착하자 잠시 폭격통제팀은 캄보디아군 영내로

갔다. 지상의 상황은 나빠져가고 있었지만, 조종사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 공군의 공중전력의 모든 스펙트럼을 동원해서, 아군과 민간인

들을 협박하는 이들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 캄보디아 동부의 월맹군-베트콩

들은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때 6개월 간의 전투가 끝났을 때, 총 25만 7천 톤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이는 2차대전 중 캄보디아에서 일본군이 떨어트린 폭탄의 양보다 10만톤이

더 많았다. 그 시점에서 미군의 B-52는 하루 출격이 81회에 달하고 있었고,

그 당시 베트남도 하루 최고 60회 정도였다.

 

1월 28일부터 7월 8일까지 추락한 미국 항공기는 총 11대였다. 미 7공군의

지휘관 존 보거트 주니어 장군은 이렇게 썼다. ‘적이 총 퇴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그러나 우리도 공세를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슬프게도, 공산당만이 피해자가 아니었다.


닉 루옹은,

프놈펜과 베트남을 연결하는 1번 국도상 메콩강의 페리 타운이었다.

그곳은 최악의 예였다. 8월 6일 새벽 5시, B-52 승무원은 폭격 비콘

타켓기를 이 마을의 중앙을 지시하고 투하구를 열었다. 1마일 길이로

30톤 짜리 고폭탄들이 떨어졌다. 병원과 시장 등에. 137명이 죽고 268

명이 부상당했다.


공산당은 승리의 선전물을 뿌려대고 있었고, 편집증 증세를 보이던 논놀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전투상황을 멀리하고 경쟁자들을 체포

하는데 신경쓰고 있었다. 그때 시아눅 왕자가 월맹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6주간 625마일의 긴 여정을 통해서 추방 이후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들어왔다.

크메르 루즈 병력들은 시나눅 왕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지방 도시들을 순회

하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콘서트와 같았고 성공적이었다. 

 

 

기울어가는 전세


그 동안 캄보디아군은 여단급을 사단으로 재조직하고 있었고, 도심지를

중심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미 시골지역을 통제하고

있었고, 랜덤으로 캄보디아군을 때렸다. 그러면서 점차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나라는 점차 광적인 상태가 되었고, 수도에서도 점차 소총소리가 들리고

화약 냄새가 났으며, 전기는 제한량에 시달리고 있었고, 대사관들은 비

핵심요원들을 철수시키고 있었다. 메콩에서 트럭들은 간신히 들어오고

있었다. 트럭들은 강뚝에서 매복을 받아 지체되었다.


그들은 재편성과 재보급을 위해서 잠깐씩 쉬었고, 크메르 루즈는 1973년

6월 초 전통적인 습기 공세에 들어갔다.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는

습기(몬슨)는 크메르 루즈의 친구였다. 캄보디아군은 여름에 들어갈수록

점차 약해졌다. 크메르 루즈는 허술한 캄보디아군 3사단과 7사단의 방어선

을 관통했고, 병력들은 동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프놈펜을 향하고 있었다.


이 공격부대들은 대부분 캄푸치아 공산당 소속이 아니었다. 크메르 루즈의

지휘관인 키우 삼판은 캄푸치아 공산당 제대를 메콩강을 건너 도시 동쪽으로

안전하게 놔두었다. 아무리 뭐라해도 7공군의 단 16,000 명은 크메르 루즈

에게 매우 큰 상처를 입혀, 활동이 가장 강했던 해인 반면, 그 피해도 적지

않았다. 논놀은 자신의 캄보디아군의 단점에 직면했으나, 이렇게 말했다.

 “조용히 해, 미국인들이 매주 천 명씩 우리 적들을 죽이고 있어.”

 

 

미국의 공식적인 인도차이나 전투행위 종결


1973년 8월 15일, 의회의 압력에 따라서 닉슨 행정부는 12년 동안 인도

차이나에서 해 온 공중정찰과 전투활동을 공식적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

었다. 이후, 오직 군사원조와 비무장 항공기의 정찰비행만이 재가되었다.


전례가 없는 미증유의 엄청난 폭격에서 프놈펜은 잠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캄보디아군은 북쪽으로 이동해서  일곱 개의 마을을 공격했다. 과거 작전의

척추가 되던 마을이었다. 3개 대대와 19개의 지방군 중대, 8대의 105밀리

자주포, 기타 무기와 첫 번째 주도에서 크메르 루즈가 빼앗으려 했던 많은

군수품들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T자 모양의 콤퐁 참(Kompong Cham)으로 메콩강 상류에 위치해

있었고, 수도 프놈펜으로부터는 75마일이 떨어져 있었다.

 

(물론 수도 프놈펜도 메콩강 지류의 물이 갈라지는 곳에 있다)

 

그러나 79여단, 5여단의 두 대 개개, 두 개의 낙하산대대의 증강에도 불구

하고, 56세의 사 호 소장은 도시 방어를 완벽하게 할 수 없었다. 9월 1일,

크메르 루즈는 도시의 반마일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영화처럼 돌격했다.

도시의 비행장도 지킬 수 없었고, 결국 도시의 반이 크메르 루즈에서 넘어간다.

 

1973년 9월 7일, 보강병력이 항공기와 16척의 함정을 타고 도착했다. 3일 후,

다시 80여단이 크메르 루즈 배후에 강을 타고 올라가 상륙작전을 했다. 그리고

14일 본 병력과 연결되었고 도시는 평정되었다. 그러나 그 달의 마지막까지

공항 부근에서 전투는 계속 되었다.


1973년 10월 1일, 캄보디아 육군 제3사단은 프렉 트라오트 강까지 밀렸다.

수도를 향한 마지막 장벽을 크메르 루즈가 밀어낸 것이다. 다음날, 3번과 4번

도로가 만다는 곳의 도시를 크메르 루즈가 습격하여 캄보디아군은 107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놈펜에서 312마일 지점이었다.

 

오직 1사단 1여단과 M-113 기갑대대만이 남서쪽에서 대이변을 막을 수 있었다.

 (캄보디아군은 탱크가 없었다) 11월 동안, 다양한 전투가 캄보디아 남부를 흔들

었다. 3-4번 도로가 막히자 프놈펜은 불안정해졌다. (메콩강의 지류가 되는)

프놈펜 북부 호수 일대도 불안정해졌다. 남베트남 공군과 지상군이 캄보디아를

구원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결국 중국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 루즈는 캄보디아 대부분과 7백 2십만 명의

국민을 장악하게 된다. 중국은 이 캄보디아 공산당을 키워서 북베트남 공산당

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견제까지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캄보디아

공산당은 점차 강해졌다. 그러나 월맹은 사실상 캄보디아 동쪽을 점령하고

있었다.

 

대조해보면, 캄보디아군은 북서쪽의 태국 국경쪽 엷은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고, 프놈펜 지역과 남서쪽의 만 지역만 유지하고 있었다. 크메르 루즈의

국방대신은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신병을 획득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캄보디아는 피폐해져 있었다.


1973년 6월 국가 총동원령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의 22만에서 30만의 군대는 믿기 힘든 상태였다. 


전쟁은 1975년 봄까지 이어졌다. 전세는 뒤집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영구불변하는 크메르 민간인들의 특유 낙천주의도

상황에 한 몫을 했다. 그들은 최후의 비극은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이겨도 적응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32세로 프놈펜에 들어온 한 피난민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평화다. 아주 빨리 그랬으면 싶다.”

 

그러나,

운명과 크메르 루즈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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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윌드레드 P. 딕이 베트남 매거진에 발표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