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의 피닉스 프로그램에 관해서
암살 프로그램이다, 잘못된 방식으로
오용되어 큰 문제를 겪었다고만 알려져
있고 그 실제 구성과 실상은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아래는 그 피닉스 프로그램에 자원하여
경험했던 한 미 해병 전역자의 글을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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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Navigation
앤드류 R.피날레이슨,
(퇴역한 미 해병 대령)
피닉스 프로그램은 충분한 논쟁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베트남 전쟁 기간 중에 수행한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세력 구조와 말단 세포를
파괴하기 위한 아주 단순명료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Lao Dong
(남베트남 내 공산당-베트콩- 하부조직)이었다.
그러나 그릇된 정보나 증거 불충분으로 오류를 낳기도 했다. 그런
결과들로 인해서 반전운동의 빌미나 학자들의 비판을 제공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민간인에 대한 불법과 부도덕한 암살 등이
병폐로 일어났다.
아래는 타이 닌 지역에 대한 피닉스 프로그램의 예이다. 이 프로그램은
특히 1968년 테트 공세 이후 활동적으로 가동되었다. 이를 위해서
구성된 조직이 PRU(the Provincial Reconnaissance Units) 부대였다.
피닉스 프로그램의 해부
피닉스 프로그램은 1960년대 CIA가 기획한 평정 및 농촌지역 보안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승낙을 위하여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를
설득했다.
1967년 MACV는 베트남 내 군사와 민간을 하나로 묶어서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CORDS/시민작전과 혁명발전지원 프로그램이다.
이 CORDS는 CIA와 MACV가 모두 관여되어 있고, 사이공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 CIA의 베테랑인 로버트 H. 코머가 처음에 이것에
관여했다. 그러나 1968년 코머의 후임자인 윌리엄 E. 콜비가 이것을
성공적으로 활동화시켰다.
콜비는 베트남 CIA지부에 장으로써 1959년부터 1962년 동안 근무
했던 경력이 있었고, CIA의 Far Eastern Division(극동사단)의 지휘관
이기도 했다. 콜비는 베트남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시골까지의
모든 베트콩 구조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동된
CORDS는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토지 개혁, 기간시설 축성,
경제발전 등등이 포함되었다.
CORDS의 구성 중에 하나가 피닉스 프로그램(Phoenix Program)이었다.
이는 사이공 정부가 관할하고 있었다. 돈은 CIA가 대고 관리했다.
CIA는 남베트남을 100개 이상의 지역과 정보권으로 분류했다. 피닉스의
활동은 경찰과 지방 민간인 준군사조직이 골자였다. 그러나 타이 닌 지방을
예로 들면, 실제 피닉스 프로그램에서 활동한 군사병력은 매우 다양했다.
베트남 경찰, 미 해군 네이비 씰, 미 육군 특전단, 지방 PRU 부대 등이다.
이들은 직접 마을과 촌락으로 갔고, 특정 개인을 확인한 뒤에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심문을 했다. 혹 저항하면 사살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 프로그램이
전적으로 사이공 정부에 넘어갔다. 잡힌 포로들에 대한 심문과 정보 판단에
약 600명의 미국인이 참여했다. CIA나 미군이었다.
특히나 베트남인으로 구성된 PRU 부대는 가장 피닉스 프로그램에서 논쟁의
여지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미 1964년에 만들어진 부대로, 사이공 정부와
CIA 합작으로 탄생했으며, 실제 역할은 최초에 카운터-테러팀이었다.
44개 지역구에 약 4천명의 병력까지 갔었으며, 1969년까지는 미군 장교와
선임하사급이 그들을 지휘했었다. 그 이후는 CIA 고문관들이 미군을 대신해서
관리했다. 그러나 암살자라는 악명과는 달리, 적발된 베트콩 세포 중에서 PRU
부대에 사살된 사람은 약 14% 정도다.
1968년 테트 공세부터 1972년까지 피닉스 프로그램은 5천명 이상의 베트콩
세포를 제거했다. 발각되어 도주한 인원까지 포함하면 약 2만 명까지 추산
된다. 테트 공세 이후 MACV는 피닉스 프로그램의 가동을 바로 요구했다.
목표는 촌락 단위 방어와 민간군사조직 구성, 그리고 8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베트콩의 탈당, 저지, 사살이었다. 1972년 월맹의 부활절 공세와, 또한 1975년
의 공세에는 지역 베트콩의 연합활동의 거의 없었다. 피닉스에 의해서 베트콩
세포들이 대거 제거된 것은 사실이다.
지옥의 묵시록의 윌라드 대위도, 실제 대사와 독백의 내용으로
보면, 미육군 공수부대에 있다가 피닉스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
처럼 구성되어 나온다. 거기서 이중첩자를 허락 없이 처형한 것
이 바로 그 내용이다.
1969년 피닉스 프로그램이 개시
1969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당시 5해병 2대대 G중대에 보병 장교로
있었다. 남베트남에 주둔 중이었다. 그때 나는 PRU 프로그램에 처음 관여했다.
당시 내 두 번째 참전의 반 정도가 지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아리조나 영토’
라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1군단지역이었고 안 호아에 전투베이스를 구성
하고 있었다.
내 중대는 당시 65고지란 곳에서 돌아와 있었다. 그곳은 화력지원진지로 다낭
남서쪽이었고, 나는 대대 작전장교로부터 ‘베트남 경찰의 특별부대가 베트콩
간부들을 수색하기 위하여 그 일대 마을에 들어간다.’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부대가 나타났을 때, 난 그들의 지휘관과 인사했는데, 지휘관은 미군 보병
장교로 검은색 파자마를 입고 있었고, 대원들은 가지각색의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중국제 AK-47도 있었고, 브라우닝 9밀리 권총도 가지고 있었다.
난 그 미군 장교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는 나보다 해군사관학교를 1년 먼저
졸업하고 해병이 된 선배 장교였기 때문이다. 1967년에 그는 졸업했다.
그리고 1967년에 다낭 근처의 1수색정찰중대에서 같이 근무를 했었다.
나는 이들과 3일을 같이 지냈다. 그 장교와 16명으로 구성된 특별부대는
마을을 수색하면서 베트콩 세포들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선배 장교
에게 만약 내가 3회 차에 참전을 신청하면 그 PRU 프로그램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나는 당시 6개월을 더 연장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지 일반적인 질문도 했다. 부대에 돌아와서 지휘관에게 물어보니, 잘 모르
겠다고 하면서, 하여간 계속 보병중대에 있어야 하고 다른 문제는 다낭의
제3상륙군본부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사이공에 가서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1969년 8월 말, 나는 사이공의 맥브이 연락장교에게 갔다. 나는 일단 호텔로
가서 대기했다. 몇 시간 뒤에 한 베트남 장교가 나타났는데, 그는 선그래스에
타이거스트라이프 군복을 입고 웃으면서 호텔 로비에서 나를 반겼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본부로 가자고 했다. 나는 그 장교와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곧 보게 될 거야."
지프차를 타고 조금 이동해서, 대통령궁 근처의 표현하기 힘든 빌라로 그는
나를 데려갔다. 난 2층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사복차림의 사람
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 사람은 미 육군의 대위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베트콩을 잡는 매우 중요한 전투임무’
라고 말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만약 내가 인터뷰를 통과하고 부대에
들어오면, 자신의 배속이 완전히 그곳으로 옮겨지며, 작전구역은 베트남의
44개 지역 모두라고 했다.
그 대위는 나를 두 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주로 그는 베트남의 역사, 문화,
언어에 대하여 물었다. 난 다른 장교보다 베트남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했고,
장거리 정찰 팀장 경력, 그리고 보병중대장 경력을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더글라스 파이크가 지은 ‘베트콩’이란 책을 주었고, 그곳을 읽고 내일
아침 8시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난 호텔로 돌아와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 두 시에 다 읽었다.
다음날 나는 다시 그곳 2층으로 갔다. 전날의 사복을 입은 대위가 다시 나왔다.
그리고 그는 다시 다른 장교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PRU 프로그램의
미군 최고 지휘관이었다. 미 해병 대령이었다. 그는 그 프로그램을 위하여
내가 선발되었다고 말하고, 곧 타이 닌 지방의 곧 돌아가는 장교의 후속인원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아마도 피닉스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선서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는 부도덕하거나 비합법적인 것은 금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해병 군적에서 가장 하찮은 하급직으로 서류상에 존재하게 된다고
말했다. (투옥된 것으로 해놓은 대원도 있었다.)
놀랍게도, 우리는 파이크의 책에 관하여 대화를 하지 않았다. 나는 매우
놀랐다. 그 때까지 내 입장과 지각은 서구적인 것에만 초점이 있었다.
신문이나 판단도 서양의 신문에 의존했다. 파이크의 ‘베트콩’이란 책은
월맹과 베트콩에 관하여 새로운 시각을 열게 해주었다. 이는 차후 타이
닌에서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누이 바 텐(Nui Ba Den)의 그늘 속에서
다음날, 나는 항공기를 타고 도시, 타이 닌으로 날아갔다. 타이 닌 지방의
수도였다. 탄손누트에서 북쪽으로 30분 정도 날았다. 그리고 나는 그 유명한
누이 바 덴(블랙 버진 마운틴)을 보았다. 항공기에서 내리자 나는 혼자 버려진
상태가 되었다. 아무도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찌는 듯이 더웠다.
당시 그곳에는 그린베레 B-32팀에 소속된 민간인 비정규군대원들이 있었고,
나는 잘못 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때 비행장 끝에서 미 대사관 깃발을
단 녹색 도요다 크루저 트럭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앞에 오니 운전수는 필리핀
사람으로 베르니란 사람이었고, 나를 마중 나왔다고 말했다. 우리가 간 곳은
맥브이 막사구역의 작은 빌라였다.
그곳이 바로 내가 10개월간 근무하게 된 타이 닌 지방의 PRU였다.
난 그곳에 있던 미군 고문관 팀을 만났다. 그리고 CIA의 장교가 있었는데 그가
나의 상관이었다. 난 그에게서 빠르게 일을 배웠다. 타이닌 지방의 수장은 우리
부대를 협조하게 되어 있었다. 그 지방의 수장은 남베트남 육군 중령이었고 다음
날 만났다. 그는 영어를 잘했고, 능력 있고 존경받는 장교였다.
Who Were the Tay Ninh PRU?
둘째 날, 비교적 격식이 없는 모임이 있었다. 나는 타이 닌 PRU 대원 92명을
만났다. 나는 그들의 지휘관이자 고문관이었다. 나는 그들이 매우 용감하고
경험이 많은 병력임을 느꼈다. 일부는 카오 다이군(베트콩과 싸우는 지방 군사조직)
출신이었다.
이 카오다이는 공수사단이었다. 일부는 그린베레가 훈련시킨 CIDG출신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카오다이 종교의 신앙인들이었다. 그러나 카톨릭도 몇 명 있
었고, 몇 명은 캄보디아인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베트콩에 대한 깊은 증오심
이었다. 가족이 베트콩에게 잔인한 보복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타이닌의 PRU부대는 18명으로 된 5개의 팀이 있었다. 팀은 다시 3개 분대로
나뉜다. 4개 팀은 타이닌 시골지방을, 한 개 팀은 타이닌 도시를 담당하고
있었다. 본부는 이 도시 팀에 속해 있었다. 그 팀에 전체 지휘관과 작전장교
가 있었다. 그리고 도시 팀의 팀장은 이 부대의 부지휘관이 된다.
부대는 M-16, M-60과 45구경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M-79유탄발사기도
썼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다양한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PRC-25
무전기를 썼고, 7-by-50 쌍안경, 의무키트 등을 사용했고, 토요타 트럭과 혼다
오토바이를 사용했다. 본부 안에서는 모두 사복을 입었다. 그리고 작전에는
타이커스트라이프 군복이나 검은색 파자마를 입었다. 미군 고문관도 비슷하게
하고 다녔다.
정식명칭은 ‘타이 닌 지역 정찰 부대(PRU)’이고 이는 피닉스 프로그램의 수행자
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보기에 훈련부족이었다. 그들은 사격을 받으면
움직이지 않았고, 사격도 시원치 않았으며, 포격유도도 불안했다. 그러나 우리의
상대는 훈련된 자들이었다.
문제는 훈련이 체계적이지 않았고 일정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수가 전투
경험이 있었지만, 붕 타우의 해안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충분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결점을 보안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 지역을 아주 잘 알고,
베트콩 세포에 대한 정보를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콩들의 행동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정보의 소스
일반적으로 PRU부대는 광범위한 정보들을 모두 취합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모두 지역의 에이전트들이 보내온 첩보들로, 이는 지역 첩보센터에 취합
되었다가 다시 이동되었다. 다만, 지역의 미군군사고문관은 PRU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보는 PRU로도 수신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지역의 남베트남 경찰은 사소한 질투를 하고 있었다.
베트남 경찰의 특수부서는 이 PRU 프로그램의 작전에 일익을 하고 싶어
했고, 그러지 못하자 정보의 송달을 방해하기도 했다. 일부 미군부대들도
선뜻 정보를 PRU에 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들의 통제가 아닌 사이공의 미 대사관에 다이렉트로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미군 전투부대 지휘관은
적지 않은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용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정보를 주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에이전트들의 정보는 한결 같이 부정확한 것이 많았다. 미군 정보부는
오히려 이것을 발전시켜야 첩보로 활용이 가능했다. 나는 PRU에 10개월을
있었지만, 단돈 에이전트의 첩보 하나로 귀중한 상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에이전트들은 정보마다 일정한 보수를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치 없는
첩보를 창출해 내기도 했다.
베트남 국립경찰의 에이전시들이 보내오는 정보는 거의 쓸모없는 것들
이었다. 일부는 위험할 정도로 부정확했다. 베트콩에 관한 어울리지
않는 정보도 있었다. 가장 알맞은 정보는 베트콩 포로를 심문해서
나오는 정보들이었다. 보기 드믄 진귀한 정보도 가끔 얻을 수 있었다.
많은 베트콩들이 남베트남 정부의 Chieu Hoi ("Open Arms") 귀환 프로
그램에 전향했고, 호이 찬이라고 불리는 이 전양자들은 귀중한 정보들을
증언했다. 가끔 PRU 부대를 인도해서 다른 베트콩 세포를 체포하게 하기도
했다.
오히려 남베트남 통계국의 자료들은 놀라운 정보가 되곤 했다. 특히 63-64
년에. 그때 전국적으로 통계조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이 통계원
들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정부에 협조적인 곳과 아닌 곳을 지도에 색깔로
칠해 넣었다.
녹색은 가장 남베트남 정부에 충성스러운 곳이었고, 노란색은 중립, 붉은색은
베트콩 부류를 암시했다. 가끔은 그 지도에 베트콩 가담자의 이름까지 고맙게도
쓰여 있었다. 그러나 가끔 죽거나 잡혔는데도 계속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PRU 자체의 정보 시스템도 있었다. 대원들이 이 지역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기도 했다. 그들 역시 그 지역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족의 입담을 통해서도 습득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체포
대상인 베트콩 세포들을 대원들이 개인적으로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경우도 많았다. 특별한 경우, PRU 부대원이 베트콩 세포로 위장 침투한
적도 있었다.
조직 연계
PRU는 미국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그 실행에는 베트남 정부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 지역 수장의 협조가 필요했고, PRU부대장은 항상 작전 전에 그 지역
수장에게 작전에 관한 허락요청 공문 같은 것을 만들어 올렸다. 그래서 부대장은
지역 수장을 거의 매일 만났다. 중요한 일과였다. 수장 외에는 이 부대에 뭐랄
권한은 아무도 없었다. PRU에 동등관계는 지역 정보센터 정도였다. 정보를 받기
위하여 PRU는 작전상황을 계속 통보해주었다.
미국의 관여로 변화되는 역할의 충돌
난 1969년 9월에 지휘관이자 고문관으로 부임했다. 조금 지나서는 정식 지휘관이
장교가 아닌 하사관급으로 교체되었다. 이는 클링턴 아브람스 베트남 사령관의
생각이었다. 그는 피닉스 프로그램의 효과에 관하여 소극적이었고, 내가 부임한
후 3개월 만에 나는 지휘관에서 고문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달에, PRU에 관계된 미군에 대한 명령이 수정되었다. 지휘관은 ‘고문관’
으로 이동하고, 그는 또한 PRU의 야전작전에는 미군이 참여하지 말라고 요구
했다. 정식 군인이 그 나라의 민사업무에 동참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아브람스 장군은 생각했다. 난 반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근무
하는 동안의 타이 닌 PRU는 미군 고문관이 계속 동참하여 작전을 계속했다.
타이 닌 지역의 PRU는 좀 드믄 편제를 하고 있었다. 한 경우, 우리 타이 닌
PRU부대의 대원 4명은 미25사단과의 작전에서 용맹성을 보여 동성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정책은 부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 PRU도 미군의 무전, 병력지원, 의무구조헬기와 포병지원이 항상 필요한
부대였다. 미군의 지원 없이는 작전이 힘들었다. 특히나 War Zone C라고
명명된 안 탄 카이 메(An Thanh-Cay Me)의 캄보디아 국경지역은 더욱
더 힘들었다. 특히나 의무후송은 그들의 생명과 관계된 일이었다.
그리고 헬기를 이용한 비상퇴출도 매우 중요했다. 북베트남 정규군 9사단이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정책전환이 이루어진 1969년 11월 이후, 몇 달
동안은 계속 훈련이 지속되었다. 나는 지원을 요청하는 ‘배려요청’ 요구를
상부에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다.
내가 확신하건데 내가 있던 당시 타이 닌의 PRU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6월까지. 당시 우리는 31명의 베트콩을 사살했고,
64명을 포로로 잡았다. PRU 대원은 2명이 전사했고 2명이 중상을 당했다.
1968년 12월 초, 외관상 타이 닌 지역의 베트콩 세포들은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일부는 캄보디아로 국경을 넘어 도주했다. 그리고 1970년
6월, 내가 떠날 때까지 그 지역의 베트콩은 의미심장한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당시 PRU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남베트남군은 패했고 월맹군이 타이 닌에 입성했다. 타이 닌을 점령한
월맹군 사령관은 북베트남에 민간인 베트콩 세포 200명의 급파를 요구
했다. 당시 타이 닌에 남아 있던 베트콩 세포는 오직 6명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여전히 미군 지휘관 겸 고문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년 이상 같은 장교가 근무한 일은 베트남 전역에 없었다.
베트남전 전체의 문제였다.
1975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자, PRU 출신 멤버들은 드라마틱한 재앙을 맞았다.
그들은 사냥 당하여 죽거나 투옥되었다. 생존자는 굉장히 오해 재교육 캠프에
수감 당했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고통을 받았다. 일부는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 정부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직업을 주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캠프에서 죽었다. 잡히지 않은 일부는 국경 남쪽에서
반공게릴라로 연합하여 계속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도 했다. 그들 타이닌
출신의 반공게릴라들은 ‘노란색 용’이라고 불렸다. 이들의 반공활동은 1990
년까지 미국 정보부에 보고 되었다.
부대가 성공한 이유는 프로페셔널하게 조직하고, 훈련하고, 무장했다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일정한 베트남 정부의 타락과 베트콩
침투를 방지했다. 1천 7백만 명의 남베트남 시민에 총 4,500명의 PRU
대원이 베트남전 기간 동안 활동했다. 대부분의 대원은 그 지방 사람들이었다.
우리에게 잡은 포로에 대한 심문권은 없었다. 베트남 경찰과는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활동했다. PRU부대원과 가족에 대한 보호는 철저한 응징의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PRU부대원의 명단은 실제 이름으로 공개되지
않았었다.
그들 서로 간에 서로를 보호하고 뭉쳤다.
그리고 다른 부대보다 상부 조직의 첩보/정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1. 1967년 늦게 남베트남 총리는 푸엉 호앙이라는
대-베트콩 프로그램을 법령으로 만들었었다.
2. 참고서적: Douglas Pike, Viet Cong:
남베트남 구국전선의 조직/전술을 다룬 책 (Cambridge, MA: MIT Press,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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