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썩어도 준치 : Truck Killer

구름위 2013. 11. 2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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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ck Killer

 

2차대전 폭격기가 베트남에서 최고가 되다

 

 

 태국 동부 낙혼 패놈 비행장의 제609 Air Commando 전대

 

    By David Lande

       (Air & Space Magazine, 2010.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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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했다가 액땜하는 수가 있다...

 

 

“25년 뒤에 태어난 내가 그걸 잡을 수 있었다,”

 

 베트남에 참전했던 미 공군 조종사 팀 블랙의 말이다.

 

“난 2차대전 전투기와 조종사들에 흠뻑 빠져 성장했다.”

 

그가 늦게 태어났건 일찍 태어났건 2차대전의 구식비행기를 몰았다.

기종도 그랬고 무기도 50기관총이었다. 그런데 그건 그의 꿈이었다.

 

1960년대 그가 베트남에 참전할 때 Douglas A-26 Invader 기종으로 자원했다.

2차대전의 경폭격기가 베트남에 쓰였냐고 물으면 대답은 간단하다.

 

“(베트남에서) 임무에 최적인 기종이다!”라고.

 

당시 미국은 F-4와 F-105를 주력으로 호치민루트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 참여한

A-26은  ‘동남아시아 최고의 트럭 킬러’란 명성을 얻게 된다. 오래 날 수 있었고, 또한 화력

의 조합이 매우 좋았다.

 

1940년 11월, 미 육군항공은 더글라스사에 A-20경폭격기를 대신할 기종을 의뢰한다. 그러

면서 B-25나 B-20을 능가하는 조건을 요청했다. 결국 더글라스사의 기술진들은 세 종류의

경폭격기를 대상으로 연구를 해 A-26을 만들었다. 앞선 모든 경폭격기들보다 매우 빠르게

날 수 있었고, 공격력은 거의 전투기와 같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생산에 시간이 덜 들게

더 간편한 설계를 요구했다. 이 기종의 생산이 분통 터질 정도로 느렸기 때문이다. 미 육군

항공 사령관 햅 아놀드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난 A-26을 이번 전쟁에서 사용되길 바란다. 다음 전쟁이 아니고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종은 다음 전쟁에 정말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전쟁까지...

 

 

 

 

이 기종은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에 드디어 2차대전에 참가했다. 유럽과 태평양 모두

사용됐다. 승무원은 3명. 조종사, 항법사, 사수인데, 이 사수는 B-29와 동일한 형태 기관

총 포탑을 무선으로 조종해서 사격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이 기종이 드라이버에도 뚫릴

거라고 약하게 평가했다. 계속 업그레이드버전이 2차대전 후반까지 나온다. A-26은 B-25

생산량의 1/4에 해당되는 2,451대만 생산됐다.

 

1948년, 2차대전 이후 미군은 여러 혼란을 겪고 있었다. A-26 ‘습격자’도 B-26‘약탈자’로

설계되었으나 혼란은 여전했다. B-26은 1948년 미 공군 물품명세서에서 빠져 이미 서류

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10년 후, 미 공군물자사령부의 존 모엔치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P-51나, P-80에서 전환된 F-80 등은 아무 문제 없었다. 그러나 우린 그걸

  A-26으로 불러야할지 B-26으로 불러야 할지 혼란을 겪었다. 원래는 B-26으로

  불렀다. 그러나 신형 기종의 넘버에 이게 중간에 끼어들어 애를 먹었다. 이 명칭

  을 놓고 몇 년간 심심하면 토론을 벌여야 했다니....”

 

그런데 1966년 이 명칭은 다시 A-26으로 바뀌었다. (A:ataack, B:bomb) 그런데 베트남전

기술에는 B-26이라 많이 부르고 초기에는 A-26이라 불렀다. 그러다 또 뒤집어지는 사태

가 발생한다.

 

A-26 450대가 한국전에 참전했었다. 이 기종은 주력전투기인 미그-15와 F-86 사브레의

스피드에 반 정도 밖에 안 됐다. 그러나 이걸로 트럭이나 기차를 파괴해보니 재미가 쏠쏠

했다.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이 기종은 적 저장고나 기지를 엄청나게 폭격했다.

 

한국전에서 바로 이 기종으로, 원산항을 폭격하는 장면...

 

 

베트남전 초기에 이 기종은 역시 2차대전 당시 모양 그대로였으나, 사수(gunner)자리가 없어

지고 두 대의 포탑도 떼어냈다. 탑승자가 2명으로 줄었다. 초기에 이 기종은 1961-64년 동안

주로 대게릴라전으로 폭격과 근접항공지원을 했다. 암호명은 Farm Gate. 이를 사용하던 부대

는 훈련전대였다가 1st Air Commando Wing이 된다.

 

미 공군이 베트남에 전개하기 전,

이 A-26은 이미 25대가 CIA에 의해 들어와 있었다.

 

라오스에도 사용되었다. 한 항법사의 기억. “이 비행기는 오래됐으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정비에 손도 별로 안 가고 좋았다. 그러나 생산년도가 오래 되었기에

구조 자체가 튼튼한지는 알 수 없었다.”

 

톰 스미스는 조종사로 1963년 7월에 도착했다. “비엔 호아 비행장에 내려서고 있는데,

머리 위에 B-26이 날아가면서 착륙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 휘파람 소리 같은 게 비행기

에서 들렸다. 그래서 난 터보프롭엔진인가 했다. 지나갈 때 보니 기체에 뚫린 구멍에서

나는 소리였다. 병목에 입을 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

 

여러 임무에서 이 기종이 떨어졌는데, 떨어진 비행기의 승무원들조차도 왜 추락했는지 알

지 못했다. 기체 결함인지 적이 쏴서 떨어트린 건지 모르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의심을

받았다. 아무도 어떤 이유로 추락했는지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추정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비행은 계속 됐다. “조종석에 구식의 대형 G-meter가 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3.5

이상은 감지가 안 된다.” 조종사 스미스의 말. “우린 기체에 아무런 부담 없이 탔다. 비싼

것도 아니고 잘못되면 탈출하면 된다. 우리가 제일 걱정하는 건, 땅에 있는 놈이 우리에게

총을 쏘는 거였다.”

 

  베트남에서 A-26에 탑승하는 조종사들. 제트기 시대에 2차대전 항공기를

  몰았으니, 자신이 원해서 타는 사람 외에는 좌천이라고 느낄 정도....

 

 

한 메콩 델타의 임무에서 땅에 있던 적들 다수가 총을 쐈다. 스미스.

“그때 네이팜을 투하했는데, 그건 화염이 올라와서 자칫하면 기체 복부에 도달한다.

 그래서 예비연료통에 닿을까 겁도 난다. 그때 50기관총을 포함해 적들이 모두 일어

 서서 우릴 향해 총을 쐈다. 놀랍지도 않았지만, 45구경 권총탄까지 밑을 뚫고 조종석

 까지 도달했다. 그건 베트콩들이 쏘는 톰슨기관단통이나 그리스건에서 나온 총알이다.

 A-26 하부는 방탄기능이 전혀 없다. 그냥 얇은 알루미늄 판이다. 이 기종의 장점은 적

 들이 우릴 향해 쏠 때, 소리를 못 들어도 총알을 눈으로 정확히 볼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주로 밤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기종을 베트남에서 사용하기 위해 승무원들이

훈련받은 곳은 허버트공군기지 에그린비행장 52번 보조활주로였다. “보조활주로를 할당

한 것은, 이 기종이 자주 추락해 비행장을 먹통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날개가 주로 고장

났다.”

 

그래도 지상공격에 훌륭하다고 판단한 미 공군은 1천 6백만 달러로 40대의 B-26 생산을

공모하는데, 이때 캘리포니아의 마크 엔지니어링이 수주를 따낸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애리조나 데이비스-몬산 공군기지 한 편에 사람들이 망각한 채 200대의

같은 기종이 방치되고 있었다는 걸. 그러나 결국 신형인 B-26K이 등장한다.

 

신형은 날개 끝에 연료탱크가 달리고, 방향타가 약간 길고 가늘어졌으며, 8정의 50기관총

이 기체 앞에 장착되었다.  기관총은 이중으로 사격통제가 가능했다. 그 외에 약간의 신형

장비와 무전기가 추가되었다. 복부 포탑은 없었다. 엔진은 패트 & 휘트니 수냉식 2,500마력

엔진이 장착되었고 프로펠러도 신형으로 달았다. 동체의 연료통이 날개 끝으로 가면서 불안

하던 날개의 구조는 보강되었고, 다른 기종보다 더 큰 브레이크와 함께 G-값도 더 버틸 수

있게 되었다.

 

50기관총 8정이 전면에 달려 있다. 이걸 무섭다고 해야 할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제작사는 말했다. “이 신형은 새로운 비행기와 같다. 새로운 폭스바겐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음... 과거와 같이 날지만 힘이 강화되었고 소음이 줄어들어, 이륙 시에 대화도

가능해졌다. 그리고 짐도 더 달 수 있다.”

 

적재량은 7,500파운드에서 12,000파운드로 들었고 또한 양 날개에 9천 파운드를 더 달

수 있게 됐다. 시간당 305마일로 속도도 늘었다. 전투 반경은 575마일로 많이 늘어났다.

원래는 241마일이었다. 날개에는 750파운드짜리 폭탄과 로켓을 모두 달 수 있었고, 기체

앞의 기관총 8정을 위해 기관총탄약 탑재량만 몇 천발이나 됐다. 클러스터폭탄이나 네이팜

도 장착이 가능했다.

 

톰 브론슨은 1968년 1월 항법사로 베트남에 들어왔다. 그리고 참전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가  A-26을 훈련받고 다시 베트남으로 갔다. 그는 A-26을 베트남에서 몰면서 C-130

조명탄 수송기와 같이 호치민루트에서 작전했다. “내가 그렇게 한 계기는 아무도 모른다.

베트남에서 난 C-7 Caribou를 몰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맞았다. 그리고 응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C-7은 못한다. 그게 A-26을 몰려고 결심한 계기다.”

 

 C-7 Caribou, 공격무기가 없는 수송기다. 비상 보급품 투하에 많이 쓰였다. 후반에 무장을 달기도 했다.

 

1966년 베트남에 처음으로 이 기종을 정식으로 받아들인 것은 609 Air Commando 전대다.

이때 호출부호는 ‘Nimrod’. 성경의 노아 부분에 강력한 사냥꾼이라는 인물로 나오는 인물.

그래도 부대도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Nimrod: 님로드, 니므롯, 여호와께서도 알아주시는 힘센 사냥꾼;

창세기 Ⅹ: 8-9)

 

그들은 태국 동쪽 낙혼 패놈 공군기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 태국 왕실공군은 ‘폭격기’는

들여 올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1966년 B-26K를 원래대로 A-26으로 명칭을 다시 변경

해서 들여와야 했다. A-26A는 기술적으로 공격기지 폭격기는 아니었다. 일단 폭격기처럼

기지 않았고 운동성도 훨씬 좋아 전투기 느낌이 났다. 태국정부도 기체를 보고 폭격기라

생각하지 않아 허가했다.

 

태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모두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이 제3국을 통한 호치민루트는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가는 보급/병력의 동맥이었다. 정교한 병참 라인이었다. 대부분

정글로 인해 상공에서 보이지 않았고, 트럭들은 다중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이 길을

따라 수많은 트럭들이 존재했고 유류고와 탄약고, 막사들이 있었다. 미군은 야간에 이 루트의

이동을 막아야 함을 깨달았다. 미군은 choke point란 걸 설정해서 지상의 목표물을 찾았다.

 

브론슨은 평균적인 호치민 루트 야간비행을 이렇게 말한다. “보통 5,500-6,500피트 상공

에서 TACAN이라는 항법장치를 이용했다. 폭탄 투하는 보통 목표상공 2-3천 피트(600-900M).

정찰기가 세 개의 통나무(log: 조명탄)을 투하하면 우리가 공격했다. 정찰기는 목표의 고도,

지형 장애물 등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공격을 위탁한 뒤 퇴출로도 지정해준다. 정찰기들은

야간투시경을 통해 루트의 적을 관측하고 이렇게 말해 준다... 통나무 북동쪽 100미터지점에

트럭들!”

 

(log: 조명탄인데, 공중에서 모닥불이 타듯이 타서 지어진 별명)

 

항법사가 무장을 준비하고, 그러면 조종사는 A-26의 기수를 내리고 30도 각도로 다이빙을

한다. 하강하는 동안 항법사는 계속해서 고도를 불러주고 통나무를 통해서 목표로 빠르게

다가선다. 노톤의 말. “그러면 내가 pickle and pull[drop the bombs and climb]을 한다.”

 

가끔은 조명탄에 트럭 하나만 잡힐 때도 있었다.

주기된 트럭들이 연쇄폭발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브론슨 “거기 가면 우린 혼자가 아니다. FAC 정찰기 O-2 외에, C-123, C-130 수송기들이

조명탄 투하를 위해 같이 작전하고, F-4와 B-57도 공격에 참가해, 상공은 정말 아군기들로

꽉 차 붐볐다. 해군의 A-4만 참가하지 않았다. 공중에서 아군기 충돌가능성은 정말로 걱정

했다. 가끔 우리 사이로 제트기가 내려가기도 했다.”

 

제트기들이 오면 우리 A-26들은 빠르게 목표지대를 벗어났다. “연료가 많으면 더 기다려

보기도 했다,” 노튼의 말. 그리고 적의 대공화기 사수들은 계속 겨냥하고 있었다. 적의 사격

혹은 다른 이유로도 12대 정도의 A-26이 격추됐다. 승무원들은 정글과 어둠 속에 숨어 있는

37mm나 그 이상의 구경에 사격을 일상처럼 받았다. “예광탄이 올라오면 그건 아주 가까워

졌다는 증거다. 예광탄이 올라오면 좌우로 틀어 도망쳤다.”

 

노톤은 쌍발엔진 A-26을 몰면서 일종의 트릭도 썼다. “월맹군 포수들이 갸우뚱하도록....

우린 엔진 기관의 출력을 마구 변경했다. 그러면 흠 음 음 음 그런 소리가 난다. 그러면 지상

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가 어디서 오는 지 판단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월맹군

포수들이 그들의 추적을 멈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비행기는 수도 없이 두들겨 맞아 비틀

거렸다. 그러나 우린 돌아왔다.”

 

켄 얀시는 참으로 의아했다. 비행기는 전투 동안 계속해서 피해를 먹었기 때문이다.

상태를 보면 비행기는 폐기처리되어야 했다. 세 번이나 그랬다. 월맹군 37밀리 대공포

가 수평안전판, 수직날개, 수평날개, 혹은 모두를 포함해서 보기에 뼈가 오싹한 상태로

패놈 기지로 복귀하곤 했다. 그러나 217회의 임무 동안 월맹군 포수들은 얀시를 결코

격추시키지 못했다.

 

그는 비행기를 이렇게 짧게 찬양했다.

 “그건 마치 전투기처럼 날았다. 내가 정말로 원하던 바로 그 비행기였다.”

 

스미스. “그 비행기 정말 잘 날았다. 그 비행기를 정말로 몰아본 사람이 아니면 진짜

감동을 모른다. 신비한 매력이 있는 비행기였다. 그게 우리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해준

것이다. 비행기를 정말 보고 싶었다.”

 

그리고 승무원들은 이야기한다. 두 가지를.

 

 “사출 좌석도 없다”

 “낮엔 너무 느렸다.”

 “우리가 살아남은 건 밤에 비행했기 때문이다,”

                   항법사 프랭크 넬슨의 말.

 

 

조종사가 나란히 옆에 앉는게 특징. 자손처럼 떠오르는 기종이 하나 있죠?

 

그러나 제트기들의 파워로 인해 전단의 A-26 작전은 1969년 11월 종료하게 만든다. A-26

이 퇴역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기종은 30년간 운항되면서 3개의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그 도중에 한번도 비행기 재고에서 소멸 되지는 않았었다.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적

으로 정비가 어렵지 않았고, 직강하 폭격이 가능했으며, 2차대전 이후 기총소사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30년이면 명예로운 퇴역이 가능한 시간이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주간폭격을 하던 A-26이 찍은 사진... 깔보면 서운한 기종.

 

조종사 팀 블랙과 항법사 브루스 커스타프슨은, 다른 A-26과 마찬가지로 낙혼 패놈의

활주로를 떠나 미 본토로 비행기를 몰고 가야 했다. 항로는 태평양의 모든 중요한 곳들

을 들러야 했다. 2차대전의 전설적인 전적지 필리핀, 괌, 웨이크 섬, 미드웨이, 하와이

의 힉캠 비행장 등등.

 

베트남에서 완전무장하고 날고 있는 A-26. 당시 프롭으로는 세계최강이 아니었을까.... 하는...

 

블랙과 커스타프슨은 전시되어 있는 이 비행기를 찾아갔다. 그리고 조종석에 앉아왔다.

습관대로 서로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조종사 블랙은 왼쪽에 항법사 커스타프슨은 오른쪽

에 앉았다.

 

블랙의 마지막 회상이다.

 

“우리는 데이비스-몬산 기지에 착륙했고, 기지의 폐비행기 주기장을 향해 비행기를

 굴려갔다, 몇 개의 문을 지나 비행기주기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내리면 비행기는 이제

 저장(폐기저장)될 운명이었다. 한 친구가 딱딱한 태도로 와서 말했다. 엔진 정지! 우린

 말했죠. 안 돼! 그러자 그 친구가 다시 엔진 정지!...라고 하더군요. 몇 번의 실랑이가

 있고 나서, 그 친구는 우릴 놔두고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죠.”

 

둘은 서로를 힐끗 봤다.

 

과거 긴장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1970년 1월 부근. 둘은 동시에 말했다.

 

“아직 연료가 남았어.”

 

거스타프슨이 강조하며 말했다.

 

“이 비행기는 아직까지 우리 거야.”

 

블랙도 말했다.

 

“아마도 이 비행이 이 비행기의 마지막 비행이었을 거야.”

 

 

둘은 그 상태로 비행기 안에 15-20분을 그대로 더 있었다.

 

그들은 앉아 있었고,

 

엔진은 계속 돌고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최고 학술연구원,

데이비드 랜디의 "Live and Let Fly" 중에서 (2008. 8-9).

 

톰슨 기관단총 얘기 나온 김에, 1968년 테트 공세 당시 사이공의 한 미군 헌병... "난 Combat 손더슨 중사가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