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잊혀진 전투 [1] - 캄보디아 침공

구름위 2013. 11. 2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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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odian Campaign

 

 

        날짜: 1970년 4. 29- 7. 22

        장소: 동부 캄보디아

 

 

아래 사진들은 모두 1970년 캄보디아 습격 당시 사진들입니다.

 

 

베트남전 미군의 대규모 전투였으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캄보디아 습격이다.

이 전투는 보통 캄보디아 침공(Cambodian Incursion)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군이

빠져나가던 1970년 중반.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힘을 합쳐 캄보디아 동부로 국경을

넘어 공격한 사건이고, 토벌전이 아닌 공세였다.

 

이 침공을 결심한 것은 다름 아닌 리차드 닉슨 미 대통령이었고, 침공 성격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남베트남군은 1970년 4월 29일-7월 22일까지 약 100일 동안 캄보디아

에서 13개 메이저급 전투를 치렀고, 미군은 중간인 5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작전에

가담했다.

 

이 작전의 목적은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 국경지역으로 도주한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인민전선(베트콩) 병력, 합해 4만 명을 쳐부수는 것. 미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월맹군과

베트콩들은 더욱 준동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남베트남 중남부를 괴롭히면서 캄보디아

영토에 거점을 둔 상대에게 완전히 떠나기 전에 큰 타격을 입히고 싶어 했다. 적어도

자신들이 떠나고 남베트남 공화국이 곧 망하는 것은 상상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 거대 규모의 침공은 캄보디아 영토 내에 숨어 있는 적의 기지를 파괴하고 1966년에

캄보디아가 한 ‘중립국 선언’을 유지시키기 위한 목적, 미국 입장에선 군사력과 방위력

을 남베트남정부에 위임하는 베트나미제이션의 시작이었고, 군사력 위임은 아직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캄보디아 내 월맹 기지를 파괴할 기회를 엿보던 미국은 중요한 시점을 잡는다. 1970년

시아누크가 해임되고 친미적 논놀 정권이 들어서면서 침공 규모의 공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많은 물자를 노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적 주력 병력을 근절하지 못했기에 이직도

이 침공은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배경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에서 전투와 공격을 감행한 뒤에, 이른바 성소(sanctuaries)라고

불리던 캄보디아/라오스로 국경을 넘어 일상적으로 도주했다. 전쟁 초기 닉슨 대통령은

이아드랑 전투 후 캄보디아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려는 1기병사단장의 건의를 국제법

이유를 들어 불허했다. 이를 간파한 월맹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캄보디아 동북부

병참과 휴식을 위한 기지를 만들어 이후 여차하면 남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튀었고,

베이스 규모는 점차 커졌다.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영토를 이용해 남베트남으로 들어온 건 1963년이 처음이었다.

1966년, 캄보디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는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중국 공산당과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해

캄보디아는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군사베이스를 영토에 허용하고 시아누크빌 항구를

통해서 물자를 받는 것까지 허락했다.

 

베이징 회담: 왼쪽부터 마오쩌뚱, 시아누크 왕자, 류 샤오치(유소기).

분위기 좋다. 그러나 외교적 미소는 오래 지나고 보면 자기 이익적인

사악한 미소였음을 서로 알게 된다.

 

 

그러던 1968년, 캄보디아 공산당이 북베트남 지원 아래 점차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른바

크메르 루즈(Khmer Rouge)다. 이들은 점차 강해져 캄보디아 정부를 전복하려는 모반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시나누크 왕자는 아차 싶었다. (시아누크가 국가에 저지른 아차 싶은

행동은 크게 봐서 한 10개도 넘는다. 잇빨 주) 사실 월맹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캄보디아

시아누크 왕자를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크메르 루즈에게 무기도 제한적으로만 주고

‘중립국’임을 존중하려 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 영내로 들어온 북베트남군/베트콩들은 그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군벌 비슷하게 자기 땅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 캄보디아에서의 적 활동을 미국 정부도 감지하고 있었으나 신적으로 추앙받고 있던

시아누크 왕자와 중립국을 선언한 캄보디아를 직접적으로 압박하긴 힘들었다. 참다못한

닉슨 대통령은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 영내 적 동태를 정찰하는 극비작전을 허락했고 이

일은 MACV-SOG가 맡았다. 이 정찰결과를 토대로 미국은 시아누크 왕자의 맘을 바꾸기

위해 자세하게 보고서 형식으로 그에게 은밀히 넘겼다.

 

 

공군의 본격적인 공격

당시 베트남에는 미군 총사령관은 클링턴 W. 아브람스 장군이 새로 취임한 상태. 닉슨은

그를 임명시키면서 B-52를 이용해 캄보디아 내 적 기지를 폭격해도 좋다는 그린라이트를

줬다. 닉슨 대통령도 원래 이 폭격안을 거절했었으나, 미니-테트공세라고 불리는 1969년

구정공세가 다시 한 번 일어나자 마음을 바꾸었다. 정전협정을 위반한 북베트남에 닉슨은

대단히 분노했고 이로 인해 북베트남 폭격을 재개하고, 마침내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항공

작전도 허락했다. 그 첫 작전의 명칭이 ‘Operation Menu’로 3월 18일부터 14개월간 이어

지는데, 3천회 출격과 10만 8천 톤의 폭탄을 캄보디아 동부에 투하했다.

 

1970년 1월 당시 시아누크 왕자는 치료 휴양 차 프랑스에 가 있었고, 국내에선 영토에 들어

온 북베트남 군대에 대한 전국적 반대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사회불안이 가중되자 국무

총리이자 국방장관이었던 논 놀(Lon Nol)은 공산주의자들의 보급품 전달장소인 시나누크빌

항구를 폐쇄했고, 궁극에는 3월 12일, 북베트남군에게 72시간 내에 캄보디아 영토에서 나가

라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프랑스에 있던 시아누크 왕자는 격분해 즉시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경유하는 여정에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협정을 맺어 북베트남에게 캄보디아 내 주둔을 재차

허락한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논놀에 의해 축출되었고 망명자 처지였다.

 

(아직도 추앙받는 이 전통적인 왕족 시아누크는 나라에 위태로운 일을 한두 번 저지른

것이 아니다. 그래도 존경받는 걸 보면 캄보디아 국민이 착하다고 해야 할지 어쩔지 알

수 없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사건도 길게 보면 시아누크 책임 적지 않다. 잇빨 주)

 

3월 18일, 캄보디아 국가연합회의는 시아누크를 해임하고 논 놀을 그 수장으로 선출했다.

논놀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이에 시아누크 왕자는 사상 초유의 감정적인 일을 저지른다.

베이징에 임시정부를 선언하고 여러 계열과 동맹을 맺은 것. 그 동맹에는 북베트남, 캄보

디아 공산당 크메르 루즈, 패테트 라오(라오스 공산당)까지 논놀에 대항하는 모든 곳과

동맹을 맺었다. 북베트남도 논놀정권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크메르 루즈에게 엄청난 양의

무기와 함께 고문관을 파견, 이로 인해 캄보디아 내전이 촉발한다.

 

사진의 캄보디아 캄퐁 참과 그 밑으로 보시면 됩니다.

 

 

베트남인 학살

그러자 논놀은 캄보디아에 살고 있던 베트남계 인구 40만 명을 인질로 삼아 북베트남의

공격을 막으려했고, 이들을 모두 한데 모아 억류시켰다. 묶여 있던 폭력의 끈이 풀렸고

캄보디아인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베트남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4월 15일을 예로 들면,

한 마을에서 베트남 인종 800명이 체포되어 묶였고 이어 살해된 뒤에 모두 메콩강에 던져

졌다. 이 시체들은 메콩강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가 베트남 땅에서 목격된다. 이 행동에

남베트남 북베트남 모두 캄보디아를 비난했다. 정치적으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처음

이자 마지막으로 공조해 비난했다.

 

시아누크빌 항구를 폐쇄하기 전부터 북베트남군은 이미 영역을 확장하여 라오스 남부로

호치민루트를 확장했고 이어 캄보디아 북부까지 진출하기 시작한다.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를 우습게 봤고 동/북동부의 캄보디아 육군을 대규모로 공격했다. 결국 캄보디아 정부군은

고립되었고 캄퐁 참 같은 여러 도시가 월맹군에 점령당했다. 미군과 싸우던 월맹군은 캄보

디아 군대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월맹군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32km 거리까지

육박했고, 그러자 닉슨 대통령도 행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베트남에서 미군도 철수하는 판에 캄보디아가 월맹의 손에 넘어가면 후방전선이

위험해지고 이는 곧 수도 사이공에 대한 위협이 된다. 수도 사이공은 캄보디아

국경에서 지리상 너무 가까웠다. 캄보디아가 넘어가면 남베트남의 함락은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잇빨 주: 북베트남군과 월맹군은 같은 말이다.

 ‘월맹’은 주로 우리나라 반공주의 교육에서 나타난 단어로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

 

 

Planning

 

침공 전 캄보디아 국경 근처 베트콩과 중앙지휘소의 거점 모양.

 

 

캄보디아 내 월맹군에 대한 응징을 진행시키면서 닉슨은 책임을 뚜렷하게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아누크가 캄보디아를 떠난 뒤 월맹군의 캄보디아

내 주둔지역과 크기는 매우 넓어졌다. (시아누크는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에 장기

체류함. 잇빨 주) 닉슨은 캄보디아 지원작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에 닉슨은 합참의장/베트남사령관과 상의하며 여러 옵션을 내놓았다:

    1. 해군을 통한 해상차단,

    2. 월남공군과 미공군의 공중폭격

    3.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 영내로 추적하는 남베트남군의 확장작전,

    .... 그리고 4번은 캄보디아 영내로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공동 침공작전.

 

(해군을 통한 해상 격리: 중국에서 오는 무기와 물자를 중남부 베트남을 공격하기

위하여 캄보디아까지 호치민루트로 운송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캄보디아의

서쪽 항구를 통해 중공의 물자를 배로 받았는데, 이 물자는 호치민 루트로 들어오는

것보다 훨씬 막대하고 안전하고 상태가 좋았다. 잇빨 주)

 

4월 22일,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앵무새 부리’를 통해 캄보디아로 침공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지도상의 모양) “이 작전을 통해 남베트남군 자체의 전투능력을 후원하고 향상시켜,

베트나미제이션이 실제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음을 증명한다.”가 취지였다. 행정부의

일부가 전쟁이 다시 확장되는 걸 원치 않아 이 공격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베트남군은 이 작전을 3월 말부터 리허설하고 있었다. 3월 27일에는 남베트남 레인저

대대가 캄보디아의 월맹군 기지를 습격해서 파괴했고, 4일 뒤에는 남베트남 병력이 국경

넘어 16km 전진했다 돌아왔다. 원래 중립주의를 유지하려던 논놀도 4월 14일 미국 정부

에게 군사지원을 요청. 바로 그날 남베트남 육군은 3개로 무리 지어 ‘완벽한 승리 41호’

란 이름으로 기갑병력을 선두에 내세워 스바이 리엥 지역을 공격했다. 6일 뒤에는 남베

군이 앵무새 부리를 통해 공격해 들어가 월맹군 144명을 사살했고, 4월 22일에는

남베트남 군대의 모든 작전에 미군이 협조하라고 승인되었다.

 

이 모든 작전들은

주월미군사령부가 계획하는 대규모 침공작전의 정찰작전이었다.

 

이와 동시에 닉슨은 아브람스 장군에게 좀더 북쪽 낚시고리(Fishhook) 지역에 대한

작전도 준비하라고 했다. 예비 작전계획이 3월에 완성되었으나 기안하면서 시간이

늦어져 3일 후 작전계획이 백악관으로 들어갔고, 그때 처음 서류를 접한 국가안보

위원회의 간부들은 깜짝 놀랐다. 작전계획이 너무 ‘엉성’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기와 보안엄수였다. 캄보디아에 몬순이 닥치면 엄청난 비가

내려 작전에 큰 지장을 주는데, 몬순이 두 달 뒤로 다가와 있었다. 보안으로 인해 이

침공계획은 캄보디아 프놈펜 미국대사관에 통보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논놀 조차도

잘 몰랐다. 문제는 미군의 보급.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는 건설된 미군의 보급기지가

없었다는 것. 이 계획에 보병여단장들은 일주일 동안 공세가 가능하다고 했고, 대대

장들은 2-3일 동안 공세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결심

모든 미국 행정부의 인사들이 캄보디아 침공에 동의한 건 아니다. 동의하지 않은 사람

들은 이 침공이 군사적으로도 정치적-편의주의적으로도 의미가 없다 생각했다. 국방

장관 멜빈 레어드와 로저스 장관은 이 침공이 미국 내에 거센 반대에 부딪칠 거라 생각

했고 진행 중인 파리 평화협상에도 악영향을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자 키신저는 둘에게

관료주의적 미온주의라고 혹평했고, 그 결과 이 작전은 국방장관 레어드를 거치지 않고

연합참모총장이 직접 기안해서 백악관에 직속으로 올렸다.

 

1970년 4월 30일, 닉슨 대통령이 캄보디아 공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텔레비전 회견에서 북베트남의 침략행위에 대한 응답으로 꼭 필요한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4월 25일 저녁, 닉슨은 그의 친구와 키신저를 불러 저녁식사를 했고, 식사 후에

닉슨이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관람했다. 바로 2차대전 전기영화 ‘패튼’이었다.

닉슨은 이전에 그 영화를 이미 다섯 번이나 봤다. 키신저는 이렇게 말했다. “벽에

부딪쳐 수가 막힐 경우, 닉슨은 공상적인 상태가 되곤 했다. 그는 전통적인 장군

패튼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했다."

 

다음날 저녁, 닉슨은 결정했다. “자, 우리 시작합니다.”

침공의 그린라이트가 떨어졌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이 전투 시작을 5월 1일로

두고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전상자를 줄이고, 미군의 철수

상황에서 보증을 보여주고, 파리협상에서 미국과 남베트남은 협상력을 고양시킨다.

 

4월 30일 밤 9시, 닉슨은 텔레비전 채널 세 개에 동시방송으로 나타나 말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힘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밤 우리의 명성은 시험될

것입니다. 이제 움직일 시간입니다." 닉슨은 미군이 캄보디아에 특수목적을 위해

들어간다고 말했다. “우리 목표는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근거지 본부입니다."

 

 

작전

 

남베트남군의 사전 공격

 

붉은색 선이 1970년 4월 초 PRG의 탈출로다. 중간에 2점 라인이 국경이다.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 본부 기지를 공격했고, 국경을 넘어선 남베트남군은 헬기를

이용해 기동해 월맹군/베트콩의 거점을 포위했다. 포위된 베트콩7사단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포위를 뚫고 COSVN과 함께 북쪽으로 후퇴했다. 이 일대는 좀 복잡한 데,

COSVN은 남베트남 내 베트콩 총 지휘부로 보면 되고, PRG는 이 일대를 자기 땅처럼

여겨 만든 ‘지역혁명정부’를 뜻하고, 캄보디아 정부에 자치구처럼 건드리지 말하는 뜻

정도가 된다. 

 

PRG의 최고지휘관인 트롱 누 탄은 나중에 북으로 후퇴하던 상황을 증언했는데, 행군

하면서 B-52 폭격에 의해 하루하루 전열이 깨져 붕괴되었다고 했다. 이들은 7번

국도를 횡단하기 전에 베트콩 9사단이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는 소릴 들었다.

 

몇 년 후 트롱은 이렇게 회상했다. "남베트남군은 가까이 다가와 남쪽 방어의 핵심을

전멸시키거나 점거하려고 했다. 최전선의 우리 엘리트 전사들 중에는 민간인들도 있

었고 지휘력은 건재했다." PRG는 긴 행군 끝에 캄보디아 북부 크라티에 거점에 비교적

안전하게 도착했다. 전사자는 경미했고 PRG의 부사령관 투옹 귄 호아는 그날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다. 후퇴대열은 많은 날 회복에 노력해야 했고, 트롱 자신은 긴 행군으로

몇 주 동안이나 회복기간이 소요되었다.

 

 

앵무새부리와 낚시고리

 

캄보디아의 남베트남군 M113 장갑차

 

캄보디아 도로의 미군 11기갑연대 M551 셔리던 탱크와 지뢰제거팀

 

 

남베트남군은 1970년 4월 30일 ‘완벽한 승리 42호’작전으로

총 12개 대대 8,700명이 앵무새부리 지역 국경을 넘어 스바이 리엥으로 돌입했다. 

 

이 공세의 지휘관은 남베트남군 3군단장 도 카오 트리 중장으로, 남베트남 장군 중에서

가장 공격적인 성향으로 명성이 높던 사람이었다. 첫 공격 2일 동안, 남베트남군은 몇 번

북베트남군 후위부대를 만나 날카로운 접전을 펼쳤다. 적들은 이미 침공의 전언을 들은

상태였고, 본 병력이 서쪽으로 탈출하기 위한 시간을 벌라고 명령받고 있었다.

 

곧 남베트남군은 평정을 되찾아 점차 수색섬멸작전으로 전환되었고 남베트남군은 소부대로

나뉘어 산야에 보급품 집적소를 찾아다녔다. 작전 2단계로 들어서면서 보병9사단이 새롭게

지역에 들어왔고, 앵무새 부리 남쪽에서 4개의 기갑/보병 특수임무부대가 밀고 올라왔다.

3일간 작전이 이어져 월맹군 1,010명이 사살되고 포로 204명을 잡았다. 남베트남군은 66명

전사하고 330명이 부상당했다.

 

5월 1일, 남베트남군은 좀 더 큰 규모의 ‘완전한 승리 43호’를, 미군은 작전명 ‘바위깨기’를

시작했는데 바위깨기는 B-52 36대를 동원해 피시훅 남단에 총 774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어 한 시간 동안의 준비포격과 다시 한 시간의 전폭기 공중폭격이 이어졌다. 이어 오전

10시, 미육군 1기병사단 제11기갑연대와 남베트남군 1기갑연대, 남베트남군 제3공수여단

이 캄보디아 캄퐁(Kampong) 지방으로 들어갔다.

 

 

 

이 바위깨기 작전의 지휘관은 미군 제1기병사단 사단장인 로버트 슈메이커 장군. 이 지역은

특수전부대 SOG 외에 아무런 미군/남베트남군이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오랜 시간 공산주의자

들의 강력한 낙원이었다. 여기에 미군 1만 명/남베트남군 5천 명은 밀고 들어갔다. 이 작전은

지상군 기갑부대가 적 지역 깊이 밀고가 투입된 월남군 공수여단과 만나는 것이 컨셉이었고,

미군 강습부대도 헬기를 타고 강습으로 들어갔다. (이 컨셉이 현대전에서 얼마나 많이 나오는

지는 상상에 맡깁니다. 2차대전부터 시작된 컨셉이죠. 잇빨 주)

 

이 바위깨기 작전에서 적의 저항은 격렬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월맹군/베트콩들은

작전 2일 전에 서쪽으로 이동해버렸다. 5월 3일, 미군은 전사 8명 부상 32명으로 작전규모에

의하면 전상이 작은 편이었다. 미군 11기갑연대는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3km를 전진하다 시간

을 끌 목적의 적 후위부대와의 소규모 교전을 했다. 월맹군은 주로 소총과 로켓으로 응사했고

미군은 탱크포와 항공폭격으로 응답했다. 전투의 포연이 사라지자 월맹군 병사 시체 50구에

미군은 2명이 전사했다.

 

미군 제1기병사단 3여단 7기병연대 1대대는 5월 초에서 6월 30일까지 피시훅에서 작전하고

강을 건너 베트남 땅으로 되돌아왔다. 부대는 매우 극단적인 혹독한 전투를 치렀고 전상자도

매우매우 많았다. 이 대대는 엄청난 신병을 받고 나서 제대 건제를 유지할 정도였다. 한 완편

중대는 6월 30일 남베트남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사람이 딱 9명이었고,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후송된 상태였다. 이 대대는 부대 용맹상(Valorous Unit award)을 받고 각 개인들도 은성훈장을

피시훅 작전으로 여러 개 받았다.

 

북베트남은 이 공격을 충분히 감지한 걸로 보인다. 5월 17일 점령된 B-3 Front의 본부에서

작전명령이 발견되었는데, 그 월맹군/베트콩에게 내려진 명령서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돌파하라. 응사를 회피하라. 우리 목적은 최대한 병력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 작전 계획자들은 이 서류를 발견하고 매우 놀랐으며 그 보안누설의 주범을 캄보디아

논놀로 봤다. 사실 미국은 작전누설이 두려워 워싱턴도 사이공도 논놀에게 정보를 주지

않았는데, 자국 영토 내 진격을 매우 걱정하던 논놀은 미군 지휘관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때 누설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한 미군 장성은 논놀과 대화한 내용 일부가

라디오에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잇빨 주: 정보-보안은, 무언가 알고 있는 사람이 딱 한 사람에게만 말하면서 누설은

시작된다. 대부분의 누설 관련자들은 자신이 믿을만한 딱 한 명에게만 말했다 생각한다.)

 

미군이 이 작전에서 경험한 전통적인 정규전은 5월 1일 스놀이라는 마을에서였다. 당시

호치민루트 중에서 캄보디아 땅의 구역은 ‘시아누크 루트’라고 불렀는데, 그 시아누크

루트의 마지막 종착점이 바로 세 개의 도로가 만나는 스놀이었다. 헬기지원사격과 함께

미군 11기갑연대가 마을과 근처 활주로에 접근하자 월맹군이 발포 했다. 공격하는 미군

규모도 컸지만 적 저항도 매우 강력했고, 미군은 뒤로 물러나 마을을 2일간 공중폭격을

때려 가루로 만들었다. 당시 작전 중 11기갑연대장인 돈 스타리 준장이 수류탄 파편에

맞아 후송되기도 했다.

 

 

 

보배와 같은 전리품

다음 날, 미군 1기병여단은 이른바 ‘The City’라고 불리던 지역에 들어간다. 스놀 남서쪽의

이곳은 약 2평방마일에 걸쳐 월맹군이 400개 막사와 저장고, 벙커들을 축성해놓은 곳이다.

식량 무기 탄약이 포장된 채 발견되었다. 그곳엔 트럭을 수리하는 정비소도 있었고 병원과

목재소까지 있었으며, 식당만 18개였으며 돼지농장과 수영장까지 있었다. 그곳에서 북동쪽

40km에는 더욱 큰 기지가 5월 6일 발견되었다. 미군은 이 기지를 ‘Rock Island East’라고

불렀는데, 이는 동양의 록아일랜드란 뜻으로, Rock Island는 원래 미 본토 일리노이에 있는

미 육군 병기창 이름이다.

 

이 Rock Island East에서 총 6백 5십만 발의 대공화기탄, 소총탄 50만 발, 수천 발의

로켓탄이 노획되었고, 제네럴 모터스 트럭도 여러 대에, 거대한 양의 통신장비도 발견.

 

Rock Island East 북동쪽으로 20km를 더 정찰나간 7기갑연대 5대대의 선두 첨병은 별명이

샤키였다. 샤키는 땅을 걷다 땅바닥에 강철판으로 묻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곧 월맹군

에 의해 샤키는 전사했다. 거기서 보급품이 적재된 벙커 59개가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이후

병사들은 그곳을 ‘Shaky's Hill’이라 불렀다. 벙커마다 탄약 수천 발이 발견되었고, 미군은

이 탄약을 캄보디아 정부군에게 넘겨주었다. 노획된 무기나 탄약은 미군 특수지원단이 

관리해 결국 논놀의 군대에 대부분 넘겨주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COSVN이 발견되지 않았다. 5월 1일, 닉슨의 텔레비전 기자회견으로 

베트남의 아브람스 장군은 닉슨이 이 작전으로 적의 핵심 본부를 점령하기를 원한다는 걸

알았다. 미군사령부 정보부는 그들의 이동력과 폭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본부 위치를

찾기는 너무 어려웠다. 백악관의 질문에 사령관 아브람스 장군은 이렇게 답변했다.

 

 "COSVN의 주 제대는 약 110평방마일 넓이 정글로 흩어져 사라졌음.

  COSVN이 주 제대를 잡기에는 너무 멀어 보임"

 

작전 일주일이 지나고, 부가적인 부대가 작전에 더 투입되었고, 캄보디아에 들어간

남베트남군/미군의 병력은 총 9만 명에 이르렀다. (미군은 33개 대대) 그러나 정치적

으로 국내에서 난류가 흐르기 시작하자, 닉슨은 5월 7일, 미군 작전범위를 국경에서

30km 안쪽으로 6월 30일 이전에 작전 끝내고 남베트남으로 복귀하는 데드라인을 그었다.

 

남베트남 병력은 시간적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았고 미군의 거리제한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스바이 리엥 지역 주도에서 남베트남 제대는 서쪽 캄퐁 트라벡을 향해 전진했고, 5월 18일

그곳에서 남베트남군 8기갑연대와 15기갑연대는 북베트남 보병 88연대는 만나 격퇴했다.

5월 23일, 남베트남군은 미군보다 훨씬 더 관통해 들어가 크렉 마을을 공격했다. 근 10년

동안 항상 골치를 알아왔던 캄보디아 내 적에 관해서 남베트남군에게 이런 기회는 없었다.

 

 

엄청난 총기류가, 구리스도 제거되지 않은 A급으로 발견되었다. 이 물품들의 보급처가

캄보디아 시아눅빌 항구 외에는 떠오르지가 않았다.

 

 

 

Binh Tay and Cuu Long

그보다 위쪽인 전술2군단 지역에서는 작전명 Binh Tay I(서쪽을 길들인다란 뜻)

발진되어 미 보병4사단 1여단과 2여단과 월남군 보병40연대가 캄보디아 북부

의 ‘702 기지지역’을 향해 들어갔다. 이 702 지역이란 B-2 Front의 전통적인 본부

였다. 작전은 5월 5-25일로 공중폭격을 시작으로 미군이 헬기로 강습을 시작했

으나 강력한 대공화기가 응사해 결국 다시 돌아갔다.

 

 

 

다음날 미 101공정사단 506연대 3대대가 뜻밖에 아무런 저항 없이 헬기 강습에

성공한다. 이어 들어온 자매대대 506-1대대도 그렇고 제14보병연대도 반응 없이

랜딩에 성공했다. 그러나 8보병연대 3대대는 최초 60명을 랜딩시키는 과정에서

월맹군의 강력한 사격을 받았고, 헬기도 한 대 격추되었다. 결국 이 부대는 랜딩이

취소된다. 다음날 아침, 월맹군은 일대를 이미 떠났다.

 

5월 7일, 미군 4사단 2여단 3개 대대도 아무 저항 없이 랜딩했고, 10일 동안 중대한

교전은 딱 한번이었으며 이후 일대를 남베트남군에 맡기고 되돌아왔다. 이 작전 결과

는 미미했다. 이어 5월 14-22일 동안에 Operation Binh Tay II가 발동되어 남베트남군

22사단이 702군사지역으로 들어갔고, 22사단은 5월 말까지 두 개의 적 근거지를 더

찾아 계속 작전했다.

 

전술3군단지역에서는 ‘완벽한승리 44호’가 다시 발동되었고, 미군 작전명은 ‘대담한

창기병’으로 미군 25사단의 1-2여단이 참가해 5월 6일부터 6월 30일까지 작전했다.

목표 지역은 적의 기지 지역 353, 354, 707구역이었고 남베트남 타이닌 지방 북동쪽

이었다. 이 작전으로 미군은 다시 한번 중앙지휘소 COSVN을 사냥하려고 캄보디아

메모트란 마을로 나섰지만 결국 허탕을 치고 말았다. 이 작전에서 미 25사단은 월맹

군/베트콩 총 1,017명을 사살했고 미군은 총 119명이 전사했다.

 

(잇빨 주: 시기적으로 정확히 고증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 시기가 영화 ‘플래툰’의

작전내용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영화는 1967년 캄보디아 국경 근처 미 25사단이다. 물론

25사단의 작전지역과 정확히 고증되어 일치한다. 올리버 스톤이 전술3군단 지역에서 참전

했기에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캄보디아에서 작전하는 미군병사가 신문을 보고 있다.

 

 

남베트남군의 완벽한승리 44호 작전과 동시에, 미군도 9사단 3여단의 2개 대대를

5월 7-12일 동안 피시훅 남서쪽으로 국경을 넘어 48km를 들어가 작전했고 작전명은

‘Dog's Face’였다. 이때 중요한 교전에서 월맹군 51명이 사살되고 21명이 포로로 잡

혔고 작전 동안 미군은 8명이 죽고 22명이 다쳤다.

 

이때 이미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계열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1만 명이 죽임을 당하고

있었고, 여전히 탈출 못한 베트남 종족이 캄보디아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는 논놀에게 그들이 베트남 땅으로 최대한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조정안을

내놓았다. 조정안을 받아들였지만 캄보디아 정부는 집과 일체의 재산을 그대로 놔두고

떠나라고 명령했다.

 

(베트남이 적화되고 나서 캄보디아를 침공한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베트남 공산당 정부는

캄보디아를 침공해 점령하고 위성국가로 전락시켜 버렸다. 1970년 캄보디아 내 베트남인

학살도 나중에 침공에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우린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태국인을

오래 체류하지 않는 이상 거의 구별 못한다. 세계의 여러 지역이 다 그렇다. 인류가 그렇고

지구가 그렇게 싸우고 가까운 나라에 모두 앙금을 가지고 있다. 누가 시작했느냐는 언제

부턴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잇빨 주)

 

 

 

티우 대통령은 Cuu Long이란 작전을 명령했다. 이는 남베트남 기계화부대가 메콩강 동쪽

에서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이동하고, 남베트남 해군 함정 110척과 미군 함정 30척을 동원해

메콩강을 따라 동진하면서 캄보디아 내 베트남인들을 찾아다니는 것. 5월 9일부터 7월 1일

까지 계속됐는데, 베트남 정부군은 베트남인을 만날 경우 남베트남인을 위해 싸울 것인가를

먼저 물었다. 만약 월남군과 함께 싸울 의사가 없으면 추방이라는 명목으로 구조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월맹군과 베트콩들은 이 퇴거작전을 전혀 방해하지 않아 쉽게 작전할 수 있었다.

 

전술 4군단지역에서도 Cuu Long II 작전이 5월 15-24일 동안 거행되었다. 이는 메콩강 서쪽

으로, 논놀은 남베트남군에게 캄퐁 스페우를 점령해줄 수 있는가 의뢰했다.  마을은 프놈펜

에서 이어지는 4번 국도상인데 국경에서 내륙으로 거리가 무려 140km나 됐다. 결국 남베트

남군은 병력 4천 명을 보내 캄보디아 정부군과 함께 이 마을을 되찾았다. 5월 24일부터 6월

30일까지 다시 Cuu Long III 작전이 수행되어 계속 캄보디아 내 베트남인 탈출을 도왔다.

 

이 작전의 결과 남베트남군은 캄보디아를 압박하던 북베트남군을 약화시켰다. 이 과정의

키포인트는 북서쪽에 70km 떨어진 캄퐁 참이란 곳으로,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해 캄보디아

도 군사1구역으로 두고 있었다. 5월 23일, 남베트남군 1만 명이 이곳에 진군해 고무농장

에서 북베트남군과 전투를 벌였고, 캄퐁 참 포위전으로 월맹군 98명이 죽었다.

 

(잇빨 주: 베트남, 과거 남베트남에서 캄보디아 인종도 똑같이 차별을 당했다. 베트남 내

크메르 인종들은 남베트남정부를 신뢰하지도 않고 차별로 인해 적대시 했으며, 항상 고향

캄보디아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거 본인이 번역했던 ‘이동게릴라포스’의

현지민 대원들이 대부분 캄보디아 크메르인들이었다.)

 

 

공중지원과 보급

 

동남아시아에서 폭격 중인 미 공군 B-52D

 

 

지상작전에 비해 공중작전은 좀 느리게 출발했다.

미 공군은 최소한의 출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목표로 했다.

 

4월 17일,

베트남 미군 총사령관 아브람스 장군은 대통령에게 Operation Patio(스페인식 안뜰)

작전을 기안해 올렸다. 이는 은밀히 캄보디아 국경을 넘는 SOG 정찰팀에게 전술항공

폭격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닉슨행정부는 국경에서 캄보디아 북동부 13마일(

21km) 범위까지 비행을 허가했다. 이후 4월 25일 숙고한 미 정부는 다시 전체 국경에

서 29마일(47km) 범위로 확대해 주었다. 5월 18일에 파티오 작전이 종료되기 전까지

캄보디아 상공에 총 156회의 출격이 있었다.

 

이 캄보디아 침공 동안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총 9,878회의 출격을 기록했다. (미군 6,012

회/남베트남 공군 2,966회) 하루 출격이 평균 210회. 피시훅의 경우 미 공군이 3,047회 남

베트남 공군이 332회를 기록했다. 이 전술폭격에는 캄보디아 국경에 B-52 폭격기 총 653

회의 임무가 있었다. 5월 30일에는 Freedom Deal 작전이 시작되어 미군은 캄보디아에 계속

해서 폭격을 퍼부었다. 이 작전의 폭격은 국경과 메콩강 사이 48km 구역이었다.

 

이 두 달의 작전 동안 폭격은 메콩강까지 확장되었고 미공군은 캄보디아 병력을 위한 작전

까지 지원했다. 이 임무에 대해 미국은 공식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관한 보고서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미 국방성 기록에 의하면 1970년 7월부터 1971년 2월까지 미군이 총 8천회

캄보디아 출격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이중 약 40%는 작전구역 밖이었다.

 

이 작전에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정말로 괴롭힌 건 보급 유지였다. 작전보안을 위해 작전

부대들은 매우 신속하게 국경 쪽으로 이동해 준비해야 했는데, 도로 사정도 엉망인데다 야간

에는 자주 매복을 받아 차량들이 주간에 밖에 다닐 수가 없었다. 결국 헬기를 통한 공중재

보급이 가장 큰 혈맥이 되었고 공병과 비행사들이 엄청 고생했다.

 

빠른 템포와 신속한 전개, 재전개와 포병부대의 위치 등으로 인해 작전 내내 포격은 늘 병사

들을 불안하게 했다. 더욱 심각했던 건 통신이었다. 빠른 부대 전개에 맞는 통신망이 부족해

통신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레벨의 통신망 구축이 자연스럽게 연구되었고,

통신부족으로 보급품 역시 같은 문제였다. 식량 탄약 물을 필요한 적재적소에 아무 사고 없이

정확히 배달하기가 힘들었다. 보급은 작전 내내 매우 힘들고 복잡한 일이었다.

 

 

Repercussions

 

당시 캄보디아에서 발견된 월맹군의 쌀. 미국은 캄보디아 정부에 넘겼다.

 

 

북베트남의 주 전략이 최대한 회피였다. 그들은 퇴각한 뒤에 재편성했다. 북베트남군은

이미 이 공격을 잘 알고 있었고, 많은 COSVN/B-3 Front 부대들은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서쪽과 북쪽으로 이미 이동했다. 1969년 동안 월맹군 보급부대들은 이미 호치민루트에

넓게 퍼져서 모든 전투에 대처하고 있었다. 캄보디아 내 보급루트를 상실하자, 북베트남

은 라오스의 두 마을 아토페우와 사라반을 포위공격해 97km 곱하기 140km의 공간을 손

에 넣었고, 이어 콩강(Kong River)을 캄보디아 보급시스템으로 새롭게 구축했다. 캄보디

아에 제479운송단을 새로 창설했고 시엠 판랑과 메콩강 사이에 ‘해방길’이란 걸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제3국 침입은 미국 내 대학교들의 반전운동을 강하게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5월 4일 오하이오 주방위군이 켄트주립대학에서 4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중 2명

은 반전운동자가 아니었다) 2일 후에는 버팔로의 대학에서 4명에게 중상을 입었고, 5월 8일엔

워싱턴에 반전주의자 10만 명이 모였고 샌프란시스코에는 15만 명이 모였다.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로 26개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나고 ROTC 건물 30개가 불탔다. 16개 주 21개 캠퍼스에 주

방위군이 출동했다. 학생들의 폭력데모는 전국적이었고 약 4백만 명에 450개 대학과 심지어

고등학교에서도 일어났다. 대부분의 데모는 평화로운 행진이었다.

 

 

 

5월 둘째 주의 공공 투표를 통해서 보면 50% 미국인이 닉슨의 행동을 찬성하고

었고, 58%는 켄트대학의 참사를 비난했고 양쪽 감정의 골은 깊어갔다. 그 실례

로, 5월 8일 뉴욕에서 건설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데모하던 학생들을 공격했다.

현상들은 정도를 벗어났다. 5월 20일에는 10만 명의 건설노동자 상인 행정직근로

자들이 뉴욕에서 대통령을 지지하며 행진을 벌였다.

 

미 의회의 반응도 매우 빨랐다. 의원 두 명이 미군 지상군과 고문관을 캄보디아에 파견

하지 못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이 법안이 6월 30일 통과된다. 캄보디아작전은 이제 끝이

었다. 결국 전쟁선언과 함께 존슨과 닉슨이 끌어온 7년간의 전쟁은 법적으로 제재가 생

겼다. 이 법안쿠퍼-처치 수정조항’이다. 이로 인해 12월 22일부로 미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미 공군은 이 법안을 묵살했다. 호치민루트

를 그냥 놔두란 소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결론

 

닉슨은 캄보디아 침공을 ‘전쟁 전체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사작전’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통해1971년 남베트남군이 라오스를 침공하는 ‘람손719’작전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이 침공으로 인해 1971-72년 동안은 캄보디아의 월맹 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역으로 이런 압력의 저하가 미군 퇴각을 부추기는 면도 있었다. 월남군 트란

딘 토 장군은 보다 회의적이었다.

 

"이 특별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길게 보면 북베트남의 행진은 잠시 쉬었을 뿐이다."

 

많은 역사가들인 이 캄보디아 침공이 북베트남 보급시스템에 매우 큰 충격을 주고

무력화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역사적으로 그 다음 북베트남의 공세는 1972년 느구옌

후에 공세이고 보통 부활절 공세라고 부르는데, 이 공세의 축은 북베트남 남단과 라오스

서부로, 캄보디아로부터는 공세는 없었다. 이는 1971년 캄보디아 공세가 성공했다는

걸 증명한다. 겉으로 봐도 북베트남이 캄보디아 기지를 복구해서 공세에 쓰는 것은

부적합해 보였다. 호치민 루트도 북부가 인원이나 물량으로 훨씬 강했다.

 

 

 

 

캄보디아 침공 중에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노획하고 파괴한 보급품은 엄청나다.

 

2만에서 2만 5천 명 용의 무기, 쌀 7-8천 톤, 탄약 1,800톤

(박격포탄 로켓 무반동총 포탄 143,000발 포함), 통신장비 29톤, 차량 431대, 의료용품 55톤.

 

 

어떻게 흘러들어갔는지 모를, 노획된 미국제 4.2인치 박격포.

 

 

미군 정부부가 판단하기를, 베트남 남부에서 활동하는 적 병력에게 평범한 작전 수준으로

매달 받아야 하는 보급품은 1,222톤이었다. 캄보디아 보급망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라오스

비행금지로 인해 북부 루트는 여전히 활동적이었다. 미군 정보부는 이 호치민 루트를 통해

매일 2.5톤의 물자가 들어오고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이 들어오는 물자가 월맹군 손에

쥐어지는 정도는 1톤으로 봤으나, 손해율은 10% 정도로 본다.

 

이 침공 동안 남베트남군 지휘력은 한결같지 못했다. 남베트남 트리 장군은 매우 지략이

있고 분발하는 지휘관으로 미국 언론은 그를 ‘앵무새 부리의 패튼’이라 불렀다. 아브람스

장군도 앵무새부리 지역 작전을 지휘한 느구옌 비엣 탄 4군단장의 능력을 호평했다. 불행

히도 이 두 지휘관 모두 헬기 추락으로 전사했다. 나머지 남베트남 장군들은 별로 잘하지

못했다. 거기다 남베트남 장군들은 보통 군사적인 능력보다 정치적 충성심으로 진급했다.

이 침공은 베트나미제이션의 성공이라고 찬사를 받았지만 사실 미군 지상군과 공중지원이

없었으면 남베트남 군대는 혼자서 해내지 못했다.

 

남베트남군이 정말 혼자의 힘으로 해낸 것은,

1971년 라오스를 침공해 들어간 작전명 Lam Son 719이다.

그러나 이 작전은 남베트남군 자력이 매우 약해졌다는 것만 보여주고 말았다.

 

이 캄보디아 침공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캄보디아 국민들을 변화시켰다. 캄보디아

정부는 침공 직전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 이를 통해서 내전이 점차 시작되었고 이

는 점차 되돌릴 수 없는 분쟁으로 이어진다. 30일간의 캄보디아 작전 후에 미군은

다시 돌아왔다.

 

"적이 계속 회피전술을 썼기에 캄보디아/남베트남

 모두 원하는 만큼 만족할 수는 없었다."

 

논놀의 캄보디아 정부군은 월맹군과 베트콩하고 싸웠을 뿐 아니라 하노이의 전적인

지원을 받는 토착 반란세력과도 싸워야 했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는 논놀정부와 정부군

의 나약함에 냉담했다. 논놀과 손잡고 싸워도 북베트남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미군이 작전을 끝내고 빠져나감과 동시에 캄보디아는 남베트남 정부와 같이

하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백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최후에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나 공산화 베트남은 다시 캄보디아를 침공한다.

 

 

동원 병력: 남베트남군 58,608명, 미군 50,659 ~40,000명.

전상: 남베트남군 809명 전사. 부상 3,486명.

미군 338명 전사. 부상 1,525명. 실종 13명.

전과: 적 전사 12,354 명 추정. 포로 1,17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