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크리스마스 폭격 : 하노이 SAM 미슬 혈전

구름위 2013. 11. 28.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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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hristmas Bombing

 

 

                                   By Marshall Michel

 

                                               (Air & Space Magazine, J2001, 1, 1)

 

 

(사진) 라인베커 작전 도중 무장사가 폭탄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 베트남 하노이의 박물관 작은 극장에서 베트남 전쟁의 마지막 B-52

폭격작전에 대한 영상을 봤다. 1972년 하노이 폭격에 대한 지도도 표시되었고,

영상은 사운드 트랙으로 만든 폭격음과 함께 야간에 지대공 미슬이 발사되는

장면도 나왔다. 거기 B-52가 화염에 휩싸여 추락하는 장면도 있었다.

 

지상에 번쩍이는 폭탄 폭발과 함께 B-52 추락이 보였다. 이 화면은 베트남이

만든 것으로 건물이 불타는 장면과 대공포수에게 고함치는 장면도 나왔는데,

그 마지막에 나레이션 나왔는데, 그때 내 베트남 가이드가 그 말을 번역해

주었다.

 

“디엔 비엔 푸 상공에서, 12일 주야로 우린 B-52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이것은 슬기로운 베트남 인민의 바람과 정신, 자랑을 보여준다."

 

난 북베트남 항공작전을 위한 두 번째 책을 내기 위한 학술조사로 하노이에

갔다. 1972년 12월 하노이 B-52  폭격, 알다시피 라인베커-II 작전이다. 1972

년 12월 초, 리차드 닉슨과 그의 안보고문인 헨리 키신저는 정치적으로 힘들

어졌다. 북베트남은 파리에서 협상을 거부했고, 미국은 반전운동이 격렬해지

면서 미 의회가 전쟁을 위한 자금을 차단하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에

게 승리를 선사하는 길로 가고 있었다.

 

[라인베커: 미식축구에서 최종 수비수를 뜻하며, 이들이 뚫리면 점수를 내주게 된다.

 이 라인베커는 선수 중에서 가장 체구가 크며 힘 좋고 깡 좋은 사람에게 맡긴다. 쉽게

 말하면 제일 무식한 괴물형이 딱 어울리는 자리.]

 

북베트남이 협정에 서명하게 하기 위해 닉슨은 하노이를 폭격하기로 결정

했다. 파리협상에서 북베트남이 협상을 거절하자, 최초의 큰 손실에도 불구

하고 우린 11일간 북베트남을 공습했다.

 

그러나 하노이에 들어온 지 며칠 후에, 나는 북베트남 사람들이 폭격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들은 라인베커-II 작전이 미국

에 대한 마지막 승리이며, 프랑스를 인도차이나에서 밀어낸 것 같은 승리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박물관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했

으나, 결국 답을 뒤로하고 떠나야 했다.

 

난 박물관을 나와 조각난 B-52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폭격기 조각들이 약

6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고 근처에는 SA-2 미슬 발사대 두 개가 보였다. 판송

추적레이더와 미슬 조작수들이 탔던 통제 차량도 있었다. 그 두 전시물 사이

를 걸으면서 참 양쪽이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B-52도 비좁은 공간에 6명이

탔고, SA-2 미슬은 통제차량 인원을 포함해 총 7명이 운영했기 때문이다.

 

 

하노이에 전시 중인 미공군 B-52의 잔해

 

 

1972년 12월 15일 금요일, 밥 서튼 대위와 그의 B-52G 승무원들은 괌의 앤더슨

비행장에서 모든 본토로 가는 교환근무가 중지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쓰라린

한방이었다. 우린 월요일에 아칸서스 브리데빌 기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 다른 좌절이었다. 처음에는 4일에 돌아간다고 하다가 12일로 미루어졌고 다시

연기되었다. 특히나 서튼 대위와, 본토로 돌아가면 전대장으로 진급할 예정인

조종사 돈 리지 중령은 더욱 참담했고 항법사 서튼 대위는 당시를 떠올렸다.

 

"우리 승무원들의 첫 번째 생각, 혹은 희망은, 전쟁이 끝나는 거였다.

그리고 괌의 모든 비행기가 본토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다음날인 토요일,

우리 모두는 비행을 준비하며 B-52들에 급유를 하고 폭탄을 장착했다."

 

12월 18일 월요일 아침 11시 서튼 대위의 승무원들은 브리핑실로 갔다.

승무원 백 명이 모여 있었다. 마치 2차대전 영화 ‘Twelve O'Clock High’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브리핑자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Gentlemen, 오늘밤 우리 타켓은 하노이입니다."

 

그 뒤의 스크린에

북베트남 수도 하노이 지도에 삼각형 목표가 표기되어 있었다.

 

처음이었다.

 

우리 대형 폭격기가 하노이의 강력한 방어망과 마주하게 됐던 것은.

 

 

라인베커-II 작전 브리핑을 받는 B-52 폭격기 승무원들.

 

 

닉슨은 12월 14일 공습을 지시했지만, 네브라스카 오마하의 전략공군사령부는

허둥지둥 계획을 짰다. 괌에 있던 제8공군 참모들도 이 결정에 깜짝 놀랐다. 괌

에서 근 1년간 B-52 폭격을 계획했던 8공군은 많은 승무원들과 논의하며 전술

을 결정했으나, 본토의 전략공군사령부와 괌의 실작전 대원들 사이에는 갭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략공군사령부의 계획은 B-52가 여러 파로 갈라져 있었다. 괌의 폭격기와

태국 유-타파오 기지의 폭격기들이 3파로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야간폭격

이었고 각 공격파 간의 간격은 4시간이었다. 그리고 아주 동일한 루트로

하노이를 향해 1열로 날으라는 거였다.

 

B-52 부조종사였던 짐 슈나이더맨은 이 첫 브리핑을 들었고 참 난감했다.

“전술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첫 번째 폭격이 있고 나서 다음 사람들은

같은 방향, 같은 고도, 같은 퇴출로로 작전하라는 거였다. 독립전쟁의 영국군

이 떠올랐다. 그들은 열을 지어 우릴 향해 곧장 걸어왔고, 정말 쉬운 목표가

되었다. 참 기괴한 발상이었다.”

 

당시 베트남 북동부는 몬슨 시즌이었고, 1972년 12월 18일 저녁은 각별히 춥고

비가 내렸다고 딘 후 탄은 기억했다. 탄은 북베트남 항공방어군 291레이더연대

45레이더 중대장으로 하노이 외곽 작은 마을 근처에 있었다. 45레이더중대에서

처음으로 공습경보가 울렸다.

 

소련제 P-12 경고레이더에서는 경고음이 삑 울렸고 스코프 상에는 메콩강 위쪽

에서 1열로 뭔가 북으로 향해 태국에서 라오스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탄과

부하들은 그게 30톤의 폭탄을 투하하는 미국의 거대한 전략폭격기 B-52라는 걸

알았다. 45레이더중대 레이더병은 전에도 B-52를 많이 목격했지만 그렇게 많은

수는 처음이었다. 이 폭격기들은 Point 300란 곳을 지나 동쪽으로 기수를 틀어

보통 라오스나 비무장지대, 이른바 프라이팬 손잡이(North Vietnamese panhandle)

를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이날 밤 B-52들은 Point 300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진행했다. 그리고 레이더

조작수들은 깨달았다. 이 북쪽으로 오는 코스는 미군 전폭기들이 하노이를 폭격할

쓰던 루트라는 것을. 하노이 시각 저녁 7시 15분, 탄은 연대본부에 전문을 보냈다.

"엄청난 B-52들이 Point 300을 통과해 날고 있다. 보기에 목적지는 하노이다!"

 

연대본부는 곧바로 이 전문을 하노이의 항공방어사령부로 전송했고, 탄은 전문이

정확히 송신됐냐고 재차 물었다. 미군의 베트남전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레이더 사이트와 마찬가지로, 북베트남 대공방어망은 영토 각지에 이런 소규모

기지박아 놓아 멀티시스템으로 경보를 울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탄의 정보

를 포함한 여러 정보를 받은 대공방어사령부의 거대한 상황판에 표시된 숫자를 보고

참모들은 정보가 과장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 상황판 옆에는 각 미슬부대

로 연결되는 직통전화들이 놓여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상황병들이 항공기의 이동

경로를 표시하고 점을 찍느라 분주했고 반대편에는 참모들이 보고 있었다.

 

하노이 지역 방어는 제361대공방어사단 관할. 사단은 많은 레이더와 대공포가 있

었고 SA-2 미슬연대 세 개가 예하에 있었다. 261연대는 하노이 북쪽과 동쪽을 맡

았고, 257연대/274연대는 남쪽과 서쪽. 각 연대엔 또한 3개 SA-2 미슬대대가 있고

그 미슬대대에도 레이더가 한 대씩 있다. 바로 판송(Fan Song) 미슬유도레이더로

그 아래에 총 6개의 미슬 발사대가 있었다.

 

SA-2 유도 시스템은 고기동의 미군 전투기에 대해서도 꽤 성공적이었다. 전체적

으로 믿음직한 물건이었으나 단점으로는 진공관을 사용하던 느린 기계적인 컴퓨터

로 인해 완벽하지 못했다. 거기다 여러 종류의 전자적 재밍(jamming)에는 판송 유도

레이더가 상처입기 쉬웠다. 7명의 레이더 조작수의 능력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경험 많은 하노이 미슬 조작병들은 수 년을 미군 전폭기를 상태로 방어를 펼쳤고,

그들은 아주 특별히 B-52를 격추시키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거대한

폭격기는 케산은 물론 남베트남에 월맹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와 자신을

아군을 초토화시켰다. 폭격기들이 라오스와 북베트남을 매일 폭격하기 시작하자

북베트남군은 전문가들이 모여 B-52의 전술과 재밍절차(jamming procedure)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판 송 레이더 시스템... 전파방사 4초가 넘어가면 미군은 이 레이더를 간파해 대-레이더미슬로 공격했다.

 

 

1972년 10월, 하노이에서는 미슬 대대장들이 모여 회의를 가졌다. 이때 판송

레이더가 아닌 Spoon Rest radar에 관한 필름을 보고 분석했다. 원래 초기 목표

는 남쪽에서 싸우는 월맹군 부대를 위한 분석이었다. 이 회의 후에 항공방어사

령부는 ‘B-52와 싸우는 방법’이란 소책자를 발간해 SA-2 미슬 부대에 하달했다.

 

지상이 춥고 비가 오는 가운데 견고한 구름 위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구름 위는 맑고 만월이 구름에 반사되고 있었다. 이 폭격에는 여러 단위가 조합

되어, B-52를 기본으로 F-4 팬텀들은 채프 금속조각을 떨어트렸고 EB-66 전자

전기도 재밍을 했으며 야생족제비(F-100, 적 레이다를 간파하는 장비가 설치된)

들이 Shrike와 Standard 대-레이더(ARM) 미슬로 무장해 SA-2 미슬의 판송 레이더

전파를 찾아다녔다. 하노이 부근에 미군기들이 다가서자 먼저 FB-111 전폭기가

저고도로 날면서 월맹군 미그 비행장을 공격했고 이어 B-52 세 대가 폭격했다.

 

동 티 반은 그날 밤 항공사령부 상황판을 정리하던 여성이었다.

B-52가 다가오자 굉장히 긴장했던 그 밤을 그녀는 기억한다.

 

"처음에는 하나... 이어 두 개... 그리고 여러 대가 마치 벌떼처럼

 날아왔다. 다른 동료 군인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날 진정시켜주었다.

 이어 난 계속해서 전투기를 상황판에 표시했다."

 

월맹군 361사단은 다가오는 공습을 지켜보며

다가오는 비행기들을 예하 미슬대대에 목표로 지정해주었다.

 

미슬 조작수들은 돌아가는 B-52를 주목했고 레이더와 지휘차량에 동력을 공급

하기 위해 트럭들의 디젤 엔진 동력소리가 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바퀴가 18개

달린 이 밴 차량은 바로 SA-2 대대의 심장이었다. 지휘 밴 안에는 대대장, 사격

통제장교, 지시장교 3명, 적기 표식자, 미슬 기술장교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상황을 주시하면서 6대의 미슬 발사대 조작버튼이 달린 판넬을 조작했다.

 

대대장은 유선으로 연대본부와 교신했고 주로 Spoon Rest 획득레이저로 대대

할당구역을 감시했다. 상황판엔 대대별 책임구역이 표시되어 그 구역에 표식자

가 상공의 항공기를 계속해서 이동시키며 지시했다. 이 과정은 대대에 해당된

레이더가 미군의 재밍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목표가 지시

되고 표식자가 상황판에 점을 찍으면 전투가 시작된다.

 

사격통제장교는 대대장 바로 옆에 앉아서 바로 앞의 판송 레이더 스크린을 보면서

목표를 추적했다. 그 앞 지시장교 3명은 각자 미슬의 고도/방위각/거리를 알려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밴은 서로가 빽빽이 앉은 가운데 레이더수들은 목표에 집중해

야 했다. 그러나 기기의 쿨링팬은 너무 소리가 커서 사람 목소리도 잘 안 들렸다.

 

SA-2 미슬 시스템의 전자기기는 진공관이 많아서 과열될 경우 문제가

생기므로, 계속적으로 냉각팬을 돌려야 했다. 익명이길원한 과거 월맹군

미슬 대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기기 뒤에 붙은 쿨링팬의 소음이 큰 문제였다. 정말 시끄러웠다.

그러나 조작해야 했다. 각 대대장들은 지휘하는 방식이 각자 있었고,

강력한 음성으로 보통 지휘했다. 그 방식에 해당 조작수들은 훈련되어

있었다."

 

그날 밤 북베트남 상공으로 들어간 B-52 1파는 태국 유-파타오 공항에서

이륙한 21대였다. 그 뒤에 앤더슨에서 이륙한 28대가 2파가 뒤따랐고, 총

49대가 일렬로 날아 남동쪽에서 하노이로 향했다.

 

밥 서튼 대위의 기억. “bomb run에 들어가기 위해 라오스에서 동쪽으로 기동해

북베트남 상공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한 폭격을 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치명적인 적 샘 지대공 미슬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기 20분 전이었다.

그러나 그 위협에 우린 그렇게 겁먹지 않았다. 레이더 항법장교와 난 외부 무전기

를 모두 끄고 우리 목표에 집중했다. 우리는 폭탄 투하지점(release point)에 이르기

전까지 회피기동을 하지 말라고 명령받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유-파타오에서 이륙

한 B-52들이 우리 30분 앞에 있었는데, 레이더로 샘 미슬의 경고음이 계속 다중적

으로 울렸고, 우린 이게 자살적인 작전이 아닌가 불안해졌다.”

 

붉은강 북쪽에 있던 261연대 57대대 샘 미슬 대대가 첫 번째로 요격을 시작했다.

57대대장 느구옌 반 피엣은 경험 많은 지휘관으로 미군을 상대로 한 대공방어에만

5년이나 전념했던 군인이었다.

 

“그때 난 난생 처음 보는 재밍(jamming)을 목격했다. 모든 레이더 화면이 갑자기

안개처럼 완전히 하얀색으로 밝아졌다. white fog of the jamming이었다. 사격통제

장교와 지시장교들의 화면에는 검은 녹색 줄무늬들이 경사각으로 나타나기 시작

했고, 그것들은 괴상한 스피드로 바뀌기도 했고 다른 것과 섞이기도 하고 점들이

서로 교차해서 이동하기도 했다. 하나로 뭉치기도 했고 하나가 여러 개로 쪼개지

기도 했다.

 

결국 수백 개 수천 개의 밝은 점들이 다발로 분열하듯이 나타나 천천히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레이더 스코프 상에는 마치 폭우가 내리

는 듯 했다. 어떤 것이 전투기 재밍이고 어떤 것이 B-52 재밍인지 분간도 할 수 없

었다. EB-66 재밍이거나 혹은 F-4 팬텀이 투하한 채프인가?”

 

곧 하노이의 부근 건물과 일대,

미슬대대까지도 첫 번째 폭격 충격이 전해왔다.

미그기 비행장 두 곳에 대한 폭격이었다.

대공사령부는 261연대장을 불러 소리쳤다.

 

"B-52를 본 거야?"

 

"어느 부대도 아직 안 쐈나?"

 

"왜 여태껏 안 쏘는 거야?"

 

북베트남 미슬 조작수들은 레이더로 B-52를 추적하려 노력했고 주로 Spoon

Rest 포착레이더를 사용했다. 판송 레이더는 미군이 너무 잘 알고 있었고, 판송

레이더파는 대-레이더파 간파기기를 장착한 미군 족제비들이 간파하자마자 공격

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추적도 불가능했다. 재밍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다.

 

공습이 다가왔을 때를 78대대장 느구옌 찬은 이렇게 기억한다.

“재밍이 한번 방사되고 나면 이어서 곧바로 다른 재밍의 파도가 날아들었다.

마치 거대한 선풍기 날개처럼 계속해서 다음 재밍이 들이닥쳤다. 그와 함께

모든 레이더 스펙트럼이 지워져버린다. 화면이 너무 밝아져 눈에 통증이 올

정도였다. 이어, 공들이 마구 엉키고 나선으로 꼬인 것 같은 모양들이 떼로

나타난다.”

 

찬과 판송 레이더 조작수들은 준비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판송 레이더의 목표

지시 버튼을 불러야 하는데, 이때 레이더를 최고 동력으로 놓고 약 4초 안에 간파

해 미슬을 쏴야 했다. B-52들이 다가오는데 찬 대대장은 탐색 레이더가 여전히 먹통

임을 깨달았다. 그는 구역판의 할당을 보면서 결국 B-52를 찾기 위해 판송 레이더를

켜라고 명령했다. 판송 레이더를 켜는 것은 당시 엄청난 위험이었다. 판송 레이더

전파가 공중에 나가는 순간 공격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찬 대대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레이더 버튼을 눌렀고, 이어 다가오는 폭격기들의

거리와 방위각을 읽고 지도에 손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안테나를 그 목표에 정면

으로 돌렸다. 사격통제장교 느구옌 반 루옌은 간신히 한 B-52의 재밍에서 빠져나와

한 폭격기에 대고 십자선을 정렬했고 미슬발사대 이동-조준버튼을 눌렀다. 이어

지시 장교 세 명이 고도/방위각/거리를 불렀다. 거리계산 장교 틴 트롱 듀가 "B-52!"

라고 선언했고, 제원은 확고해졌고 발사대는 목표를 향해 돌며 조준했다.

 

지시장교 듀가 소리쳤다. “진짜 B-52다!” 그러자 대대장 찬이 모두 조용히 목표

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때 미군의 재밍은 판송 레이더의 정확한 제원 획득을

방해하지 못했다. 레이더와 발사대는 자동으로 목표를 계속 추적했고 결국 저녁 7시

49분, 찬은 발사명령을 내렸다. 버튼 두 개를 눌렀고 로켓 부스터가 점화되면서 밤

하늘을 밝게 수놓으며 미슬이 구름을 향해 위로 올라갔다. 하노이 대공방어사령부

트란 난 소장은 257연대장으로부터 찬이 미슬을 발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령부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당시 한 북베트남 장교는 그 상황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모든 총은 하나의 전력이라고 생각했다. 두 눈 뜨고 당하기는 싫었다. 우리는

가진 모든 총을 동원해서 미군기를 쏘라고 격려했다. 얼마나 멀든 가깝든 무조건

쏘라고 했다. 사람들은 응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들은 방공호로

들어갔지만, 부모들은 방공호 입구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

 

하노이 북쪽 몇 마일 지점의 제59미슬대대 대대장 느구옌 탕은 좌절을 맛보았다.

대대는 미슬 네 발을 쐈지만 모두 빗나갔고, 근처의 폭격으로 지휘밴 지붕으로

먼지와 자갈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이제 탕은 261연대본부에서 T671이란 목표를

받아 레이더로 추적을 시작했다. 고도는 10km 상공이었다.

 

탕은 사격통제장교에게 구령했다.

“방위각 350, 거리 30km, 고도 10km, 목표: 비행기 무리.”

 

통제장교는 레이더를 350도로 고정했고, 이어 목표 추적 버튼을 눌렀으며,

4초간 판송 레이더는 최대 동력으로 가동되었다. 강력한 재밍이 화면에 뜨고

있었으나 그는 B-52 세 대를 구별해냈다. 통제장교는 대대장 탕에게 구령했다.

 

“목표 간파. 각도 352. 거리 미상. 고도 10km. 적! 비행기 무리!”

 

탕은 사격통제장교의 레이더 스크린을 건너보았고, 다시 자기 화면을 다시

돌아왔다. 그 다음 상황판을 보고 사격장교에게 미슬 2발을 준비하라고 구령

했다. 제원은 각도와 고도뿐이었고 거리를 몰랐다. 그러나 거리 계산은 생각

보다 쉬웠다. B-52는 30,000-38,000 피트 상공으로 보통 비행한다. 거리 계산

은 초보 기하학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방위각과 판송 레이더파 방사를 기본으로

삼각형을 그린 뒤 직삼각형의 빗변을 계산하면 그뿐이다.

 

탕은 스코프의 반짝이는 재밍 움직임을 주시했고 결국 안정감을 찾았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방법이었지만 지시장교들에게 목표를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추적하라

고 명령했다. 1982년 베트남 신문에 기사가 났는데,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묘사했다.

 

"또렷이 보이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미슬을 유도해서 적중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거기다 B-52가 재밍기기를 작동하면 레이더 화면을 비단처럼 덮어버

린다. 미슬 조작 핸들이 잠깐 덜컹이라도 하면 순식간에 목표에서 1km 정도가

벗어나거나 공중폭발하는 상태로 떨어진다."

 

B-52가 다가오자 미슬 두 발이 발사됐고, 유도장교가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조작핸들을 조작했다. 미슬 발사 24초 후에 컨트롤 판에 빛이 번쩍했고

그것은 목표에 대한 근접 자동폭발을 의미했다. 이어 2번 미슬도 번쩍였다.

방위각 지시장교는 목표를 잃어버렸지만, 고도 지시장교인 린은 목표인 점이

점차 고도가 떨어지는 걸 목격했다.

 

호출부호가 ‘목탄 1’인 밥 서튼의 B-52는 목표에 거의 도달하고 있었다.

그는 조종석보다 낮은 승무원 칸에서 임무를 하고 있었다.

 

"레이더 항법사 딕 존슨 소령과 나는 모든 감정을 위험한 임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폭격 15초 전이 되었고 우린 투하구를 열었다. 5초 후에 난 스톱워치를 눌렀고 아무

이상은 없었다. 그때였다. 레이더 스크린이 공백으로 나타나면서 다른 계기판들이

동력을 잃었다. 첫 번째로 내가 한 생각은, 부조종사 로비 토마스가 실수로 발전기

스위치를 건드렸다는 거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로비가 인터컴으로 고함을

질렀다. ‘조종사가 맞았다! 조종사가 맞았다!’”

 

EW [전자전 장교], 톰 심프슨 대위가 같이 소리를 질렀다.

“누구 없어? 폭격수! 폭격수!”

 

“왼쪽 어깨 뒤를 돌아보니 내 눈에 화염이 들어왔다. 내 첫 번째 생각은 불이

붙기 전에 27개 750파운드 폭탄을 빨리 투하해야 한다는 거였다. 난 RN[radar

navigator]에게 소리쳤다. ‘염병할 폭탄을 투하해버려!...’ 우린 그게 어디 떨어

지는 지도 몰랐다. 투하버튼을 그가 눌렀고 모든 폭탄은 불구가 된 우리 B-52

에서 떨어져나갔다. 다음 생각은 동체 하부연료통에 불이 날 지 모른다는 생각

이었다. 거기 항공연료 JP-4 1만 파운드가 실려 있었다.

 

기장 돈 리지의 목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조종사 아직 살아 있다.’

 

이제 빠져나가자고 그가 말했고, 나는 퇴출기동 290!이라고 선언했다.

 

첫번째 샘 미슬이 맞은 지 10초 정도가 되어, ‘EW's leaving!'이란 소리를 들었고,

이어 톰 심프슨이 사출해서 나갔다. 그의 좌석 위의 해치가 열리면서 펑 하는

폭발소리가 들렸고, 이어 그의 좌석 밑에서 로켓이 추진해 위로 솟구쳐 나갔다.

생각보다 감압은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더 장교와 난 같이 사출을 준비했다. 난

내 비행 케이스를 좌석 밑에 던지고 사출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레이더 장교와

난 눈이 잠시 마주쳤고 이어 얼굴을 전면으로 돌렸는데, 그때 조종사가 사출하는

장면이 보였다. 나도 손잡이를 당겼다. 그러나 실패했다.

 

난 내 위의 해치가 날아가고 로켓 탄도를 활성화시켜 발진되는 과정이 약 10초

안에는 결정 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가운데 갑자기 내 앞의 계기판

들이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어 모든 것이 슬로우비디오로 보였다.

 

그 다음 기억나는 견 내가 차가운 대기로 들어가 덤블링을 한 것이다. 그때 난 이런

멍청한 짓이 어디 있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난 비행기가 더 날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비행기는 어디 있지? 이어 낙하산이 열려 나가는 게 느껴졌다. 정말 길었다. 그러나

좋았다.

 

낙하산 개방상태가 안전한 걸 확인하고 난 처음으로 밑으로 시선을 던졌다. 내 양발

사이 아래에, 20분 전 폭격으로 대화재가 일어난 게 보였다. 다른 목표에서 터지는

연속적인 폭발이 들려왔다. 정확히 27개가 터졌다. 진귀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저 앞

지상에서 다시 연속적인 폭발이 있었다. 내가 날아가는 곳이었다. ‘오 하느님, 어찌지?’

란 생각이 들었다. 그쪽은 폭격구역이 아니라 우리 퇴출루트였다. 다시 밑을 보니 거의

화살과 같은 불덩어리가 보였다. 우리 B-52가 화염에 휩싸여 마을로 떨어지고 있었다.

 

당황했다가 난 다시 집중했다. 사출해 나오니 밑에는 구름이라 내가 어디 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만월이 떠  사방은 잘 보였다. 낙하산과 내 헬멧은 하얀색이라 빛났고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하노이 북쪽 10km 이상이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 북베트남군은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이미 대공

방어사령부에는 미군 B-52를 격추시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몇 분 후, 하노이

외곽에서B-52 승무원 세 명을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그 중에는 밥 서튼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튼은 포로가 되고 몇 분 후, 부상으로 죽어 누워있는 자신의

조종사 돈 로지를 목격했다.

 

 

 

 

첫 번째 공습이 지나가고, 북베트남군 사령부는 긴장이 약간 풀렸다. 그들은 B-52

에 보복을 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미슬대대 트럭들은 불타는 진흙탕을 통과해

미슬만 따로 숨겨 놓은 장소로 이동했다. 상점으로 위장된 보급소는 빠르게 미슬을

조립해서 트럭에 실어주었고 트럭은 포상으로 달렸다. 자정이 되기 직전 다시 미군

전투기와 지원항공기들이 레이더 상에 나타났다. 새로운 B-52 폭격이었다.

 

하노이의 감옥에 있던 미군 승무원 노브 가트너는 라오스에서 추락해 북베트남

으로 들어온 포로였다. 그는 공습 사이렌을 들었고 이어 대공포의 발사음, 그리고

전투기의 애프터버너 켜는 소리를 들었다.

 

"B-52들이 곧 폭격할 것을 깨달았다. 난 이렇게 말했다. BUFF(B-52 닉네임)들이

왔구나... 제발 이 염병할 전쟁 좀 끝내줘라... 생각했다. 폭격기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북베트남인들은 더욱 두려워했다. 폭격의 포효가 지나가자 거리가

흔들리고 천정이 요동쳤으며 콘크리트 벽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창이 없었기에 (창은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우리는 은색으로 된 판금을 약간 뜯어

내 결국 조금 열었다. 열쇠구멍 크기였다. 그곳으로 우리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불타서 떨어지는 B-52를 목격했으나 그렇게 많이 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투하된 채프들이 사방에 보였다."

 

제 2파가 1파와 같은 루트로 대부분 같은 목표로 다가왔다. Peach 02란 호출명의

2파 B-52는 폭탄을 투하하고 나서 샘 미슬에 맞았다. 그러나 조종사는 태국 상공

에 이르자 승무원들에게 사출을 명령했고, 자신은 계속해서 비행기를 몰아 거의

불구에 가까운 폭격기를 기지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시간 유-타파오 비행장에서는

공격 3파를 위해 존 유질 중령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1파가 복귀하고 있었다.

 

"돌아온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얼마나 심각한 날이었는지 그들의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2파가 하노이 남쪽으로 물러나던 시점에서 제77대대 딘 데 반 대대장은 사격통제장교

반 덕과 토론했다. 판송 레이더의 자동추적기능으로 B-52를 잡을 수 없을까 하는 주제.

자동추적은 매우 정확했고 일반적으로 재밍에도 잘 버틸 수 있었다. 한 대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자동추적기능을 쓰자고 하면 황당한 생각이었다. 거의 공상에 가까운 생각.

이 기능은 미국이 재밍을 사용하기 전인 1965-66년에 마지막으로 쓰였었다. 그때까지는

미군이 그렇게까지 교활하지는 않았었다."

 

반 대대장은 해보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1파 폭격에서 폭탄은 자신의 77대대 근처

에도 떨어져 일부 장비가 망가지고 발사대 대원 몇이 전상을 당했다. 몇 분 후, 반은

판송레이더를 자동추적기능으로 켜 B-52를 찾았다. 그러자마자 미군 족제비가 날아와

Shrike 미슬을 발사해 지휘밴 30미터 안쪽에서 터졌다.

 

밴 안의 대원들은 좌절을 겪었다. 공습 2파에도 77대대는 미군폭격기의 재밍을

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2파 공습을 맞으면서 77대대는 미군의 B-52 재밍

스위치를 끄는 시간을 알게 되었다. (잇빨 주: 사실 끄는 게 아니었다.)

 

"B-52의 강력한 재밍을 받으면 레이더 스코프가 그냥 햐얀색으로 바뀐다. 그러나

우린 비행 내내 재밍을 강력하게 쏘지 못한다는 걸 목격했다. 중요하게 계산을 해

보면, B-52가 한 순간 가늠자에 들어온 양처럼 노출되는 시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기회는 4시간 뒤에 B-52 제 3파에서 기회를 엿보게 된다. 그들은 이전에 두 번과

같은 코스로 들어와 같은 폭격목표로 날고 있었다. 77대대는 조심스게 목표를 바라보다

재밍이 감소하는 순간을 포착해 곧바로 자동추적상태로 미슬을 두 발 발사했다. B-52

호출명 ‘Rose 01’이 미슬에 맞았다. 승무원들은 모두 사출에 성공했고 폭격기는 하노이

외곽에 떨어졌다.

 

밴 안의 대원들은 결국 미군 전술의 큰 취약성을 발견했다. 미 공군 전략공군사령부는

각 폭격기들에게 폭탄을 투하하고 나면 날카롭게 턴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 기동은 원래

핵무기를 투하할 때 하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전략공군사령부는 이런 기동을 판송레이더나

샘미슬의 기동을 상대로 시험해 본 적이 없었다. 바로 그 가파른 기동을 할 때 폭격기 밑에

달려 있는 재밍포트 안테나가 지상의 샘 사이트를 보지 않고 옆으로 들리게 된다. 그렇게

비행기가 옆으로 들린 동안에는 판송 레이더가 재밍의 피해를 받지 않고 잠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2005년에 촬영된 미 공군 B-52 재밍 포드.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자,

하노이 시민들은 박살이 나서 추락한 B-52 두 대를 보게 된다.

 

모든 부대가 방공사령부에 축하 전문을 보냈다. 사령관 난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기분이 사령부에 널리 퍼졌고 각 대대와 참모들 그리고 전장으로 퍼졌다.

우리 하노이 방공망이 결국 미군의 거대한 무기를 잡은 것이다. 우리 손으로. 인민

군대에 모두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다음날 밤에도, 다시 미군 폭격기들이, 같은 루트와 같은 목표를 향해 날아

들었다. 그러나 앞서 추락한 두 대 외에 더 이상 전과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361

공중사단의 모든 미슬 대대장들이 본부에 모여 밤새 토론했다. 9명의 대대장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말했다. 왜 실패했고 성공하려면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가 주제

였다. 다음날 오후 본부의 참모들은 직접 미슬 사이트로 가서 미슬 발사과정을 반복

하며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참모들은 B-52의 예상 항로를

공격하는 방법을 정격화시켰다.

 

3일차인 12월 20일 밤, 그날도 앞선 두 날과 같이 시작되었다. 공습 1파 B-52들이

밤 8시 전에 나타났고 제93미슬대대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휘 밴에서 그들을 맞았다.

93대대는 전날의 실패로 모진 비난을 받았었고 오후 내내 361연대 참모들이 보는

앞에서 계속해서 훈련을 해야 했다. 폭격기들은 지난 2일과 아주 똑같이 움직였다.

93대대는 낮에 현상금까지 걸었다.

 

그들은 한 B-52가 예상된 그 폭격 후 가파른 턴에 들어가자 미슬 두 발을 발사했다.

잠시 후 호출명 ‘Quilt 03’이란 B-52가 상공에서 거의 수직으로 떨어졌다. 탈출해서

살아난 승무원은 6명 중 4명이었다.

 

다른 미슬대대들도 전날 실패를 교훈 삼아 준비했고, 이날은 3개 대대가 한 폭격기

향해 미슬을 동시에 발사했다. 그런데 미슬 하나가 B-52의 열려진 폭탄투하구 안

으로 들어가 터졌다. 그 결과 750파운드 폭탄 27개가 동시에 폭발해 엄청난 섬광을

만들었고, 80마일(128km) 밑의 통킹만을 날던 미군 정찰기에서도 이 폭발 섬광이

보였다. 그러나 더욱 기적적인 것은 그 와중에 이 폭격기의 승무원 두 명이 탈출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잇빨 주: 계산하면 터진 폭탄 약 9천 1백 킬로그램)

 

계속해서 B-52들이 맞았다. 이 뉴스는 361연대 본부의 대형 스피커에 여성의

목소리로 중계되고 있었다. 361연대장의 기억. "적의 대형이 붕괴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무전기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고, 구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북베트남군은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미슬 조립과정은 필사적으로 다음 날 쓸

것을 조립해야 했다. 그러나 자정에 하노이에 폭격이 없었고 B-52이 소수가 북쪽

에만 약간 폭격했다. 그날은 2파부터 하노이 폭격이었다. 북베트남 미슬 부대원들

은 일본, 독일, 북한, 중국과 러시아도 해내지 못한 걸 해냈다. 미국은 항공전 역사

상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사실 미군 폭격기들은 전날과 같이 하노이로 향했으나 방어망이 강력한 걸 보고

기수를 돌려 돌아갔다. 2파까지 그렇게 돌아가자 미 공군은 3파를 다시 보내게

되었고, 그들이 하노이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였다. 북베트남 미슬대대가 즉각

재가동에 들어갔다.

 

북베트남군은 경악했다. B-52들은 여전히 8시간 전의, 그리고 매일 오던 루트을

통해 목표로 향하고 있었다. 미군이 제정신인가 의심스러워했다. 이어 B-52 한 대

가 폭격 후 그 예상된 가파른 턴에서 맞았다. 그러나 조종사는 기체를 끌고 라오스

로 넘어갔고 거기서 1명 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그 다음 15분 동안 두 대가 더 떨어

졌다.

 

태국 기지의 미 공군은 B-52 승무원들은 새로운 평가를 받았다. 몇 년 동안 전투기

조종사들은 저고도로 날며 엄청난 적의 방어와 싸웠고, 그로 인해 안전한 고공에서

폭격하는 B-52 폭격기 승무원들은 조소하고 조롱했었다. 이전에 B-52는 큰 피해도

없었다. 라인베커-II 작전 동안, B-52 승무원들은 매일 엄청난 샘 미슬 공격을 받았고,

동료를 잃었으며, 그러면서도 매일 밤에 하노이로 날아갔다. 이제 B-52 승무원들의

담력이 모자라다고 비난하던 목소리도 사라졌다.

 

 B-52 조종석

 

 

태국 유-타파오 기지의

제17비행사단 B-52의 지휘관인 글렌 설리반 준장은 심각했다.

 

"난 작전 지휘관인 돈 데이비스와 빌 브라운 대령을 불러 토의하고 전략공군사령부의

전술이 변경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난 야간에 같은 고도에서 1열로 비행하는

걸 반대했다. 그 1열 비행을 ‘bomber stream'이라 불렀다. 매일 밤 같은 고도에서 같은

전술을 쓰다니 말이 되는가. 난 그걸 요약해서 다음날 아침 제8공군 사령관 제리 존슨

장군에게 보고서로 보냈다. 중간의 장군들은 상부 명령과 상충될까봐 겁을 먹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했다."

 

그 보고서는 약간 효과가 있었다. 이 보고서는 추천되어 괌의 B-52 지휘관들에게도

열람되었다. 다음날 폭격 후 기동(post-target turn)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략

사령부는 여전히 같은 루트와 1열 비행은 하라고 했다. 그리고 B-52 두 대가 또 떨어

졌다. 피해가 크자 전략공군 사령부는 이후 3일간 하노이를 제외하고 폭격하라고 한다.

크리스마스 날엔 폭격이 없었다. 이어 12월 26일, B-52는 다시 하노이로 향했다.

그래도 8공군은 설리반과 승무원들의 의사를 반영해 전술을 발전시켰다.

 

1972년 12월 26일 밤 10시, 북베트남군 레이더들은 대규모 B-52의 알람을 울렸다.

라오스를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다른 일파는 통킹만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파는 목표 직전에서 흩어져 하노이와 하이퐁 항을 동시에 폭격했다.

거의 동시였다. 총 110대의 B-52 폭격기들이 사방에서 목표로 날아들어 폭격했다.

미군의 충격적인 공습이었다.

 

15분이 지나자, 북베트남 레이더수들은 필사적으로 추적을 시도했으나 사방에서

동시에 엄청나게 달려드는 B-52에 압도당했다. 거기다 B-52들은 폭격후 가파른

기동을 하지 않고 그냥 직진으로 목표지역과 미슬 사거리를 벗어났다. 그날 격추된

것은 하노이 부근에서 딱 한 대였고, 다른 한 대는 유-파타오 비행장에서 착륙하다

추락했다. 북베트남군은 이제 더 이상 며칠 전과 같이 많은 B-52를 격추시키기 힘들

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은 12월 27일, 북베트남은 파리 협상에 다시 응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보냈다.

 

하노이 폭격은 파리 협상에 북베트남이 나와 앉을 때까지 계속 됐다. 27일 밤에도

B-52 60대가 하노이에 날아왔고 두 대가 격추되었다. 파리협정에 나오겠다고 의사

를 밝힌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28-29일 폭격엔 격추가 없었다. 12월 30일, 충분한

효과를 봤다고 생각한 닉슨 대통령은 폭격을 중지시켰다. 결국 다음 해 1월 말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미 정부는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양쪽 모두 라인베커-II 작전은 정말 심각한 전투였다.

 

베트남에서 전직 미슬 조작수와 참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크리스마스

폭격에 관한 그림은 다르게 다가왔다. 북베트남과 미국은 이 폭격을 서로 다른

관점과 목적에서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 정부는 파리협상 자리로 북베트남

을 끌어내고 미군 포로들을 송환시키는 목적과 함께 전쟁을 끝내고 그걸 남베트남

정부에 위임하려고 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폭격이 다른 의미였다.

 

베트남인들은 그 폭격이 조건부 항복과 남베트남에서의 철수의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파리협상 당시 북베트남군이 남쪽에 있는 것이 허용되었고, 북베트남은

라인베커-II 작전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남쪽의 월맹군은 오히려 증가하여 1975

년 최후의 공세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이 서로 다른 해석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내가 느낀 것은, 베트남인들

에게 라인베커-II 작전이 30년 동안 이어온 독립전쟁의 다른 승리였을 뿐이다. 그들

의 통일에 그 전투의 승이란 것이 기여한 것은 맞기 때문이다.

 

 

 

이 글은 Air&Space/Smithsonian에 2000년 12월 기고되었다.

이 내용은 마샬 마이클의 책 [크리스마스의 12일: 베트남의 마지막 미군전투]를 기초로 하고 있다.

 

 

B-52 항법사 레이더장교 폭격수의 위치...

B-52 Tail-gunner Recalls MiG Dow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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