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잊혀진 전투 [2] - 람손 719작전

구름위 2013. 11. 2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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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Lam Son 719

 

 

 

  * 이 글의 모든 사진은 람손-719 작전 사진입니다. *

 

 

작전명: 람손 719

시간: 1971년 2월 8일 - 3월 25일

장소: 라오스 남동부

결과: 북베트남군 승리

 

관련자: 남베트남, 미국, 라오스왕국, 북베트남, 패테트 라오(라오스 공산당).

 

병력: 남베트남군 1만 5천 + 미군 1만

북베트남군 : 3만 5천명

 

[람손 719의 양쪽 피해]

 

   부대         I     전사      I      부상      I      실종

--------------------------------------------

남베트남군       1,529            5,483             625

북베트남군       2,163            6,176              -

미군                 215              1,149             38

 

 

 

 

 

Operation Lam Son 719는 남베트남군이 라오스 왕국의 남동쪽을 공격한 제한

적인 성격의 공세로, 시간은 1971년 2월 8일부터 3월 25일까지. 미국은 이 작전

에서 포병, 항공지원, 보급을 도왔고 미군 지상군의 라오스 월경은 금지된 상태

였다. 이 작전의 목적은, 차후에 가능성이 있는 북베트남군 공세를 막기 위한

월맹군 호치민루트에 대한 파괴작전이었다.

 

또한 월남 육군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미국에 신뢰를 주기 위한 목적도

었다. 전년도인 1970년 캄보디아 침공 성공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미국 지상군이 돌아가는 마당에 남베트남군은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이 전투는 남베트남군 역량에 대한 시험무대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능수

능란한 적에 의해 남베트남군은 재난을 당했고 베트나미제이션은 의문을

받게 된다.

 

 

배경

1959년부터 1970년까지 11년간 호치민루트는 월맹군과 베트콩의 공고한 보급수단

이었고, 월맹은 미국 지상군이 물러나는 시기에 미국 물자에 의존하는 남베트남을

공격해 통일하고 싶어 했다. 이 호치민루트는 1966년 미국이 제3국에 대한 공중폭격

금지를 선언하자 더욱 활성화되었다. 결국 라오스 내부에는 월맹 물자가 활발히 이동

하고 있었고, 미군은 특수전 정찰부대 외에는 발을 디디지 못했다.

 

1966년 이후로, 호치민 루트를 통해 총 63만 명의 인원과 식료품 10만 톤, 무기 40만

정, 탄약 5만톤이 이동되었다. 그들은 비포장도로, 오솔길, 강 등 라오스의 모든 천연

지형을 이용했다. 이런 시스템은 캄보디아까지 이어져 ‘시아누크 루트’라고 불렸다.

1970년 시아누크가 실각하고 논놀 정권이 들어서자 시나눅빌 항구가 폐쇄되었는데

이는 월맹에 매우 중요한 항구였다. 먼 남쪽의 병력에게 가는 물자의 70%가 이 항구

를 이용했는데 그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1970년 미군/남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

으로 캄보디아 내 보급기지는 심각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이렇게 캄보디아 침공으로 캄보디아 내 월맹군 보급기지를 완벽하게 파괴하자,

미군 사령관은 이와 같은 작전을 라오스에도 구상했다. 미군 전투력이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에 가용한 자원으로 빨리 실행해야 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월맹군

과 베트콩은 약 12-18개월 동안 보급품 부족에 시달릴 수 있었고 그 시기면 미군

도 마음 놓고 철수할 수 있었다.

 

당시 라오스 남동부에는 엄청난 물자이동을 보였고, 이는 분명히 월맹이 공세를 준비

한다는 증거였다. 북베트남군은 항상 라오스의 건기가 끝나는 시점에 공격했고 (건기:

10월에서 3월) 그 시점이 되면 항상 물류가 증가했고 곧 월맹군이 공세로 나왔다. 미군

정보에 따르면 월맹군은 물자 90%를 호치민루트를 통해 받고 있었고 남베트남 최북단

DMZ 바로 아래에 세 지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워싱턴과 미군 지휘부는 긴장

했다. 그래서 숙명적으로 호치민루트를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계획 

1970년 12월 초, 호치민루트 정벌 요구에 미 연합참모총장이 베트남으로 날아와 사령관

아브람스 장군을 만났다. 이때 이 작전에 고문을 한 사람은 국가안보위원회 키신저. 당시

미군 정보부는 라오스 남동부에 쌓이는 월맹 물자를 보면서 남베트남군에게 모든 걸 맡기

기에는 불안했다. 결국 참모총장이 워싱턴으로 돌아와 닉슨과 토의를 했고, 12월 중 닉슨

도 이 라오스 공격에 흥미를 느껴 무드가 고조되었고 닉슨/키신저/펜타콘이 모두 합의를

보게 된다. 특히나 이 공격으로 라오스 왕자이자 국무총리인 수오바나 푸오마를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푸오마 역시 월맹군을 어쩔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북베트남은

워낙 강력했다.

 

1971년 1월에 먼저 목표는 월맹군 기지지역 604와 611이 선정되었고,

책임은 미군 24군단장 제임스 서덜런드 주니어 중장이 맡아 작전은 4단계로 계획:

 

1. 먼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국경지역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2. 월남군 기갑과 보병이 9번도로를 따라 공격해 라오스 쎄뽄(Tchepone)으로 향한다.

 

3. 그 다음에 604기지를 치고, 이어 공중기동병력이 북쪽과 남쪽 측면으로 치고 들어가

   공수와 지상군이 만난다는 형식. 3단계에서 604기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다시 9번

   도로로 후퇴하여 나머지 611구역을 치는 것이 골자였다.

 

4. 그 다음에는 어샤우 계곡을 통해 남베트남으로 복귀한다. 만약 작전이 5월 초를

   넘어 길어지면 그때는 라오스의 우기가 엄습하게 될 수 있었다.

 

(잇빨 주: 여기서 나오는 9번 국도란 남베트남 도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9번국도는

베트남과 라오스의 주 교역용 도로로 케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져 라오스로 들어가고,

쎄뽄이란 곳에서 다른 도로와 만난다. 그러므로 아래 작전내용에서 나오는 월남군의

9번국도란 남베트남에서 이어진 ‘라오스 영토 내’ 9번도로를 말한다.)

 

 

 

문제는 남베트남군의 악명 높은 느슨한 규율로 인한 보안 허술이었다. 당시 남베트남

내 공산당 첩자들 능력은 상상초월이었다. 그래서 작전기안도 딱 몇 주로 줄이고 미군

과 베트남군의 최고사령부는 각각 내용을 나누었다. 낮은 레벨 장교는 거의 관여시키지

않아 남베트남군 1군단 참모 정도만이 알고 있었다.

 

1군단장 호앙 옥산 람 중장이 이 작전의 남베트남군 지휘관이었고 미군은 앞서 말한

대로 서덜랜드 24군단장. 그래서 람 장군과 미군 지휘부가 사이공에서 이 작전을 브

리핑할 때 비공식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심지어 회의에서 메모도 금지되었다. 이 회의

에서 람 장군의 작전지역은 9번국도 양쪽 15마일로 국한되었고 쎄뽄에서 더 이상은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작전의 문제는 지휘통제와 부대 작전서열이었다. 남베트남 군대 장군들은 굉장히 정치

적인파벌이 있어 이를 통해 진급하고 지휘하는 구조였다. 이 작전에 관해 대통령 티우와

월남군 해병대 사령관 레 느구옌 캉이 부대통령 카오 키와 함께 상의했고, 옥산 람 장군

은 그 계통 밖의 장군이었다. 그런데 이 람장군은 티우 대통령이 밀어주는 사람. 다른 예

도 있다. 월남군 공수부대 사령관인 두 쿠옥 동의 병력도 이 작전에 참가했는데, 작전이

시작될 때 그는 그냥 사이공에 남아 있었고 그의 부하장교들은 람 장군의 통제를 받아

작전했다. 작전 성공을 위한 올바른 명령구조가 되지 못한 게 베트남 군대였다.

 

개별적인 작전부대들은 1월 17일까지 계획을 보지도 못했다. 작전을 선도할 월남군

공수사단 역시 개시 일주일도 남지 않은 2월 2일에야 작전명령 세부사항을 받았다.

이 중요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당황했다. 이 부대들은 항상 대대

나 여단급으로 분할해서 작전했고 사단급으로 기동을 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미

101사단 부사단장은 이를 지켜보고 이렇게 말했다. "작전은 빠르게 달렸고, 그들의

보안은 불구와 같았다. 또한 미군과 베트남군은 서로 격리되어 작전을 준비했다."

 

미군의 몫은 ‘듀이협곡' 작전과 비슷했고 작전명도 ’듀이협곡-II'였다. 그 듀이협곡

작전은 미 해병대가 1969년 남베트남 최북단에서 수행한 작전으로, 이때 듀이협곡은

양동작전으로 하노이는 미군이 진짜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혼란을 겪었다.

 

남베트남군은 이 작전을 람손-719라 명명했는데,

람손이라는 마을은 베트남의 전설적인 애국자 레 로이의 고향으로

그는 1427년 침공한 중국 군대를 물리친 인물이다.

 

상부의 결정이 내려졌고 계획도 완성이 되었으나 귀중한 시간이 소비되었다. 남베트남

군대는 전쟁 사상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크며 가장 복잡한 작전에 들어가게 된다. 시간은

부족했으나 남베트남군은 이제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2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작전을

GO 시켰고 이와 동시에 미군은 듀이협곡-II 작전을 시작했다.

 

 

 

작전

 

듀이 협곡 (Dewey Canyon) II

 

당시 미군의 그 어떤 공세도 1970년 12월 19일에 발효된 쿠퍼-처치 수정조항에

제한이 걸렸다. 이 조항으로 미군 지상군이나 고문관이 라오스에 들어갈 수 없었

다. 그러므로 미국측 작전인 듀이협곡-II 작전은 베트남 영토 안에서만 가능했고

과거 1968년에 버려진 케산 진지까지 9번국도를 따라 통로개척을 하는 임무만

미군이 맡았다. 이 기지까지 개통되면 전진하는 남베트남군을 위한 작전 보급기지

및 공두보(헬기 전진기지)로 이용되었다. 미군 공병들은 케산까지의 9번도로를

다시 보강해 그 길을 따라 보병과 기계화부대가 이 길을 따라 진행하며 통신선도

깔았다.

 

미군 포병도 국경으로 이동해 라오스까지 포격을 준비했고, 미군은 아낌없이 남

베트남군에 군수지원을 해줬다. 공중지원에는 미군의 모든 육해공부대가 총망라

되었다. 특히나 수송헬기가 완벽히 지원되었다. 동원된 미군 부대는: 포병 4개 대대.

공병 2개 대대. 101공정사단, 101공정사단 비행단 6개 대대. 5보병사단 1개 여단(

기갑대대 탱크대대와 2개 공중기동보병대대 보강). 23보병사단 2개 대대.

 

 

 

1971년 1월 30일 아침, 미군 5보병사단 1여단의 기갑/공병제대가 9번 국도를 따라 서쪽

으로 출발했고, 여단의 보병제대는 케산으로 바로 날아가 강습으로 랜딩했다. 2월 5일에

라오스 국경까지 9번국도가 개통되었고, 이와 동시에 101공정사단이 어샤우 계곡을 향해

위장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케산에서 월맹군의 시선을 돌리게 하기위한 양동작전이었다.

 

그런데 구 케산 진지에 들어간 미군은 굉장히 힘들었다. 날씨도 안 좋고 장애물들과 지뢰

들이 너무 많았고 불발탄들이 많아 활주로를 사용할 수 없었다. 미 공병이 그걸 제거하는

데 3일이나 걸려 작전계획은 일주일이 지연된다. 2월 15일 새 활주로가 완성되자 첫 수송

기가 케산에 도착했다. 당시 월맹군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미군 전상도 매우 적었다.

 

1968년 케산 진지에 미군이 철수하고 나서 월맹군은 그 일대에 병력을 유지시키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케산진지는 라오스로 들어가는 남베트남군 전진지원기지가 되었다.

서덜랜드 장군은 미군과 월맹군이 레이스를 벌여 결국 미군이 이길 것이라 믿었다.

 

다가오는 남베트남 공세에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아브람스 장군은 보기 드문 강한 엠바고

(embargo)를 걸어 병력취재를 막았으나 소용없었다. 좌파와 非아메리카 계열 언론이 이미

엠바고가 걸리기 전에 이미 미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거라 신문 1면에 장식했다. 미군

과 남베트남군은 라오스 정부에 의도적으로 작전을 통보하지 않았었다. 라오스 수오바나

포우마 국무총리는 언론에서 추측하는 침공 소식에 라오스는 중립을 유지할 것이라고

의사를 표명했다.

 

 

 

공세 Offensive

 

1971년 초, 604군사지역의 월맹군 병력을 미군 정보부는 2만 2천 명으로 추산했다:

전투병력 7천 명, 보급부대원 1만 명, 그리고 나머지 5천 명은 라오스 공산당 패테트

라오(Pathet Lao)로 계산했다. 이들을 지휘하는 건 새로 창설된 제70전선(70th Front,

혹은 군단). 이들은 남베트남군을 맞아 방어작전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아브람스

장군도 과거 캄보디아침공과 다르게 북베트남군이 라오스 기지에서 끝까지 싸울

걸로 믿었다.

 

1970년 미국 CIA 분석보고서를 12월에 열람한 아브람스 장군은 걱정스러웠다. 강력한

월맹군의 응집이 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였으나, 오히려 미군 정보부는 침공

시 저항이 경미할 거라고 확신했다. 전술항공 폭격으로 월맹군의 대공포가 170-200개

정도 무력화될 것이고, 월맹군의 기갑은 큰 문제로 보지 않는 견해. 월맹군 1개 사단이

증원될 경우 북에서 비무장지대까지 급파하는데 14일로 보았고, 그 동안이면 충분히

점거작전은 안정될 거라고 봤다.

 

그러나 불행히도, 월맹군은 예상과 다르게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지만,

611군사구역과 어샤우 계곡 남쪽에 이미 월맹군 포병과 연계해 총

8개 연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이미 어떤 작전을 예상하고 있었다. 1월 26일,

미군이 감청한 월맹군 무선전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적은 우리 보급수송을 타격할 것으로 결심한 것 같다.

굉장한 기동력과 공중폭격을 준비하고 있다. 방심하지 말고 부단히 경계하라.”

 

(잇빨 주: 이런 전문이 정확히 감청되었다면 작전은 중단하거나 연기되어야 했다.

그러나 일개 감청부대의 전문을 두고 대규모 작전이 취소되지는 않는 것이 현실

이다. 이런 경우는 적지 않다.)

 

전술항공폭격이 침공 전에 대공화기 예상지점을 먼저 공격했는데,

조금 지나면 기상이 나빠질 것 같다는 예상 때문이었다. 거대한

포병의 포격과 B-52 폭격이 11회 선행되었다.

 

그리고 침공은 1971년 2월 8일 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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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군 3기갑여단의 보병과 기갑 4천 명, 1과 8공수대대가 저항 없이 라오스 국경선을

넘어 9번도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쪽 측면을 따라 월남군 공수대대와 레인

저대대가 같이 진행했다. 39레인저대대는 도로 북쪽에 강습했고 21레인저대대는 39대대 3km

남쪽 랜딩존에 강습했다. 이 두 레인저대대는 구축되는 화력지원진지를 막는 전초 역할이었다.

월맹군 전초에는 삼각 철조망이 쳐져 있고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제2공수대대가

화력지원진지30을 점거했고 동시에 3공수여단 본부와 3공수대대가 화력지원진지 31을 점령.

 

거의 동시에 베트남군 보병1사단이 주 공격로(도로) 남쪽 여러 랜딩존에 헬기로 강습했다.

1사단은 화력지원진지 호텔, 델타, 델타 1를 만들면서 점거해 주력의 남쪽을 보호했다.

 

도로를 따라 주력군이 세뽄 강 계곡 평탄지를 따라 진군했다. 진군로 북쪽은 고지가 높았

는데, 헬기들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높은 고지에서 월맹군 대공포가 쏘기 시작했고, 기관총

과 박격포도 월남군 진군 대열에 쏘기 시작했다. 상황은 점차 나빠졌다. 9번국도의 열악한

상태로 인해 기갑차량과 트럭 지프차가 서쪽으로 가는데 애를 먹었다. 도로사정으로 인해

증원군과 보급은 무거운 짐이 되었고, 헬기부대는 보급의 동맥이 되어버렸다. 역할이 증대

됨에 따라서 낮은 구름과 적 대공화기로 인해 점차 비행이 위험해졌다.

 

(잇빨 주: 전체적으로 보면 마켓가든이 연상되는 작전이다.)

 

남베트남군이 사용한 M41 Walker Bulldog 탱크 

 

 

기갑부대는 9번국도를 점거하고 반 동(미국인들은 A Luoi라 부름)을 향했는데, 그곳은

국경 넘어 약 20km를 전진해 목표인 교통의 요충지 쎄뽄까지의 중간이었다. 2월 11일

반 동에 화력진지와 함께 중앙지휘소가 설치되고 병력은 주목표를 향해 빠르게 이동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지휘관 람장군은 남베트남 병력을 반 동에서 정지시키고

기다리라 명령했다. 2일 후, 아브람스 장군과 서덜랜드 장군은 람장군 전방지휘소에

찾아가 빨리 전진하라고 요구했다. 이 면담에서 1사단을 도로 남쪽에 길게 늘여서 배치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이를 배치시키는데 5일이 소모된다.

 

워싱턴에서는 국방장관 멜빈 레어드와 연합참모총장이 남베트남군의 정지를 두고

갑논을박이 벌어졌다. 언론에는 월남군 지휘관이 그냥 잠시 적의 동태를 보기 위해

멈춘 것이고, 곧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 말했다.

 

 

 

 

월맹군의 응답, 그리고 반격

 

침공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은 점차 강도가 세졌다. 하노이는 당시, 이 공격과 함께

미 해군이 북베트남 해안가에 상륙전을 펼치지 않을까 지켜보고 있었다. 실제로 미 해군은

태스크포스를 조직해 북베트남 해안도시 빈Vinh 근처에 유사시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노이는 이 습격이 길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해당 구역에는 B-70군단이 있었고 예하에

304, 308, 320 월맹군사단이 있었으며, 월맹군 2사단도 쎄뽄을 향해 남하를 하다 남베트남

군과 조우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3월 초가 됐을 때 하노이가 여기 집결시킨

병력은 36,000명에 달하게 되는데, 이는 남베트남 작전병력에 딱 두 배였다.

 

월맹군이 첫 번째로 선택한 전략은, 도로 북쪽의 화력지원진지들을 대공화기로 고립시키는

거였다. 그리고 베트남군 전초에 박격포와 로켓, 포병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화력지원진지에

월남군의 포가 있었지만 월맹군의 소련제 122mm 130mm포는 남베트남군 것보다 사정거리가

길어 마음껏 포격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미군 폭격기와 전폭기들이 그 간격에 계속해서

폭격해줘야 했다.

 

 

그렇게 큰 접전 없이 작전 10일이 경과하던 2월 18일부터 월맹군은 도로 북쪽 남베트남군

레인저대대 전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에는 북쪽의 레인저 39대대를 강력하게 공격

했는데, 월맹군 308사단 102연대가 소련제 PT-76과 T-54를 앞세워 밀고들어왔다. 당시 이

거점들은 약간의 장애물과 함께 도수로 만든 참호수준 방어진지였다. 레인저대대는 밤 동안

완강히 방어하며 버텼다. 공격 전날 밤 티우 대통령은 람장군의 지휘소에 들렀고, 쎄뽄으로

향한 공격이 지연되고 오히려 남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첫 두 장은 람손 719 당시 델타-1 진지입니다.

 

 

 

다음날 오후가 되자, 월남군 21과 39레인저대대는 전투력이 급감했고 39레인저대대는

총 500명에서 323명으로 줄어들었다. 지휘관은 39대대에게 3km 남쪽의 21레인저대대로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해가 지기 전에 남쪽의 21대대로 탈출한 생존자는 109명밖에 되지

않았다. 기갑과 보병으로 된 월맹군은 공격에서 약 600명이 전사했다. 3일 동안의 방어전

으로 레인저 39대대는 총 75%의 전상률을 기록했다.

 

39레인저대대 진지를 정복하자 월맹군은 남쪽의 레인저 21대대 진지로 눈을 돌렸다.

거점에는 39대대에서 탈출한 생존자를 포함해 레인저 약 400명이 있었다. 그들은

2일간 월맹군 공격을 방어했고, 결국 람장군은 이들 레인저에게 5km 남동쪽에 있던

화력지원진지-30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람장군이 나중에 헬기를 타고 가다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그러자 티우 대통령은

전년도 캄보디아 침공의 영웅인 3군단장 도 카오 트리 장군을 람장군을 대신해

임명했다. 그러나 비극은 연이어 이어졌다. 2월 23일 남베트남군이 참패하여 퇴각

하는 와중에, 이 카오 트리 장군마저 헬기 추락으로 다시 전사하게 된다.

 

람 장군

 

같은 날 9번국도 남쪽의 화력지원진지 호텔-2가 강력한 포병과 보병의 공격받았고,

다음날 퇴각이 결정된다. 화력지원진지31이 그 다음에 월맹군에 넘어갔고, 월남군

공수사단장인 동 장군은 부하들 거점이 엄청난 공격을 받아 부대가 전멸할 위기임

을 직감했다. 당시 맹렬한 월맹군 대공화기로 인해 화력지원진지에 증원군과 보급

이 불가능했다.

 

그러자 동 장군은 17기갑대대에게 반 동에서 기동해 화력지원진지들을 증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기갑대대는 도착하지 못했다. 람장군이 화력지원진지31에 몇 킬로

미터를 남겨두고 정지시킨 것이다. 기갑대대는 두 장군의 다른 명령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했다.

 

2월 25일 북베트남군은 베트남군 진지를 향해 포격과 함께 기갑/보병으로 전통적인

공격을 가했다. 미군 정찰기들은 연기와 먼지로 인해 지상을 볼 수 없었고 4천 피트

이하로 내려가면 대공화기에 맞을까봐 내려가지 못했다. 이때 미 공군 팬텀기 한 대

가 부근에 떨어져 정찰기는 레스큐를 유도해 승무원을 구조했다. 지상 진지는 이미

운명을 다하고 있었다. 이미 월맹군은 베트남군 진지를 월경해 넘어들어갔고 남베트

남 공수여단장까지 포로로 잡았다. 화력지원진지31은 월맹군이 230명의 희생을 치르

면서 결국 점령했고, 공수부대의 치열한 방어로 PT-76 T-54 탱크도 11대 파괴되었다.

 

월남군 공수부대는 155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월맹군이 사용한 소련제 T-54/T-55 tank

 

 

 

 

 

화력지원진지 30은 일주일을 버텼다. 지형이 가파러 월맹군 탱크가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월맹군 포병은 매우 정확한 효력사를 때렸다. 3월 3일, 화력진지의

105mm 6문과 155mm 자주포 6문은 피해를 입어 전열에서 이탈했고, 결국 월남군 제17

기갑연대가 기동해 와 진지의 동료들을 구출했다.

 

바로 이날 남베트남군 탱크와 북베트남군 탱크가 9번국도 북쪽에서, 베트남 전쟁 사상

처음으로 탱크끼리 기갑전을 벌였다. 이후 2. 25 - 3. 1일 화력지원진지31이 함락될 때

까지 이 침공의 중요한 세 개 전투가 벌어졌다. 공중폭격 지원 아래 남베트남군은 PT-

76 17대와 T-54 6대를 격파했고, 남베트남군은 M41 탱크 다섯 대 중 세 대를 잃고 장갑

차 25대도 파괴당했다. 3월 3일에는 이동하던 월남군은 기갑이 없는 월맹대대를 우연히

조우해 B-52 폭격으로 400명을 죽였다.

 

라오스 영내에서 공격 중인 미 육군 Bell AH-1 코브라 헬기

 

 

이 모든 화력지원진지의 전투에서 월맹군은 미군 포격은 물론, 폭격기-전투기와

무장헬기로 인해 무시무시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월맹군을 보고 미군이 느낀 것은 공포와 프로패셔널한 전투능력과 확고한 의지

였고, 미군/남베트남군에게 충격적이었다.

 

북베트남의 공식 기록에 빠르면, 전장에는

  3개 보병사단(2, 304, 308),

  320사단 64연대,

  2개 독립여단(27, 28),

  8개 포병연대,

  공병연대 2개,

  탱크대대 3개와 대공포대대 6개가 있었으며,

  새퍼대대까지 8개가 있어,

총병력은 전장에 약 35,000명을 헤아렸다.

 

 

월맹군이 점령한, 남베트남군 화력지원진지-31

 

남베트남군 탱크를 노획한 월맹군.

 

 

쎄뽄을 향해....

 

라오스로 밀고들어간 남베트남 주력군은 반 동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3주나 정체했고, 그

동안 도로 측면방어를 맡았던 공수부대(남)와 레인저부대(북)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러자 티우 대통령과 람장군은 목표인 쎄뽄에 직접 공수공격을 해버리기로 결정했다. 미군

장군들과 뉴스 통신원들이 람손719작전의 주목표 쎄뽄이 이미 버려졌다는 사실을 남베트

남군에게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월맹군 보급망은 사실상 쎄뽄에서 서쪽으로 이미 후퇴했다.

티우 대통령은 쎄본만 어떻게든 점령하면 작전을 ‘승리’라고 규정하고 병력을 자국 영토로

복귀시킬 생각이었다.

 

 

남베트남공화국 느구옌 반 티우 대통령

 

람손719 작전을 바라보는 티우 대통령의 생각은 약간 역사적인 숙고에 의한 면이 있었다.

병력이 정지하면서 3천 명이나 되는 전상자가 나오고 있었고, 그 역시 ‘승리’라는 개념만

만들면 병력을 바로 빼낼 생각이었다. 그 목표를 쎄본으로 정한 것이다. 그는 다음 선거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공수공격은 기갑부대와 연합된 게 아니었고 1사단 병력을 참가시켰다.

티우는 일단 9번국도 남쪽의 화력지원진지를 증원군으로 들어온 월남 해병대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귀중한 시간을 또 낭비한다.

 

이 쎄뽄 공격은 3월 3일 시작되어 1사단 병력은 헬기를 타고 9번국도 남쪽 화력지원진지

두 개(롤로, 소피아)와 랜딩존 리즈로 들어갔다. 이때 화력진지 롤로를 향해 대대를 나르던

수송헬기 11대가 격추되고 44대가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3일 후, 구 케산진지에서 2연대 2-3대대를 태운 UH-1헬기 276대가 코브라 헬기와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이륙했다. 목표는 라오스 쎄뽄(Tchepone). 이는 베트남 전쟁

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중강습이었다. 헬기 한 대만 격추되고 비교적 안전하게 이들은 쎄뽄

북동쪽 4km 지점에 랜딩시켰다. 그리고 2일 후 이들은 쎄뽄에 도달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

이라곤 공중폭격에 죽은 월맹군 시체들이 전부였다. 월맹군은 없었고 쎄뽄과 롤로 진지에

매일매일 월맹군 포격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사진 아래 글을 읽어보시면 설명이 됩니다.

 

 

퇴각

 

라오스 내의 원래 목표가 성취되자 티우 대통령은 3월 9일 철수를 명령했고, 철수는 3월 말

까지 계속 됐다. 604기지구역은 모든 물자나 도로가 파괴되었는데, 이때 아브람스 장군은

티우 대통령을 찾아가 바로 라오스에서 철수시키지 말고 몬순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 호치민

루트에 대한 파괴작전을 간청했다. 불행히도 전투는 하노이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월맹군 대공포들은 여전히 헬기들을 위협해 베트남군은 재보급을 못 받았고, 곧 이어 월남군

은 철수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북베트남은 남베트남군이 영토로 넘어가기 전에 최대한

격파하는 작전으로 전환한다. 대공포로 여전히 보급은 막히고 월맹군은 다시 약한 화력지원

진지부터 공격한다. 이어 9번국도로 후퇴하는 남베트남군이 매복공격을 당하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점령당한 화력지원진지 Lolo

 

9번국도에서 남베트남군을 공격하는 월맹군

 

남베트남군은 최대한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려고 했지만, 단호한 결심을 한 월맹군은

이들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퇴각하는 남베트남군이 지속적으로 공격 받자, 퇴각은

빠르게 패주의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화력지원진지들은 하나씩 월맹군의 손에 넘어

갔고 퇴각은 비싼 값을 치루며 진행되었다.

 

3월 21일, 월남군 해병대가 들어가 있던 화력지원진지 델타에 포격과 함께 강력한

월맹군 지상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부대는 퇴출을 시도했고 이때 헬기 7대가

떨어지고 50대가 피해를 입었어 결국 퇴출시도는 중단되었다. 결국 해병대는 포위

망을 뚫고 동쪽 화력지원진지-호텔로 퇴각했고 진지는 급하게 버려졌다. 2연대를

뽑아내는 작전에서도 헬기 40대 중에서 28대를 피해를 입었다.

 

라이프지나 이런 명확한 사진은, 공격 직전이나 남베트남군이 베트남 영내로 들어왔을 때 사진이다.

 

 

기갑부대는 좀 나은 편이었으나 매복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차량이 고장 나 버려졌다. 퇴각

동안 60%의 탱크와 APC 50%가 파괴되었고 105mm 포 54문과 155mm 28문도 버려졌다. 그

장비들은 월맹군이 노획해 사용할까봐 미 전폭기들이 파괴했다. 9번국도를 따라 퇴각하는

작전은 1기갑여단과 공수사단이 엄호했다. 당시 포로를 잡아보니, 퇴각로 앞에 월맹군 2개

연대가 매복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갑여단장 트롱 루앗 장군은 동 장군에게 이를 알렸고, 동 장군은 공수부대 병력을 헬기로

빼내고 도로를 비웠으나, 이를 기갑여단장 루앗은 통보받지 못 했다. 루앗 장군은 도로를

이용하면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도로를 벗어나 정글을 통해 복귀를 시작했다. 남베트남

국경까지 5마일이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 행렬은 가파른 세 폰 강에 이르렀고, 병력이 여기서 다시 덫에 걸린다. 북베트남

군은 이들을 따라붙으며 후위에서 야만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강을 넘기 위해 불도저 두 대

가 공수되어 여울목을 만들었고, 이들은 3월 23일 걸어서 남베트남 안쪽으로 복귀했다. 작전

이 시작된 지 45일 째인 3월 25일, 나머지 생존자들이 라오스를 떠났다. 그들이 걸어서 케산

 진지로 향하는 동안 월맹군은 여전히 포격을 퍼붓고 새퍼들을 이용해 공격을 가해왔다.

 

 

 

4월 6일, 람손719 작전은 완전히 종료된다.

 

 

전투가 끝나고...

 

 

 

4월 7일 텔레비전 연설에서 닉슨 대통령은 이렇게 주장했다. "오늘 밤 나는 베트나미제이션

정책이 성공했다고 보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 하에서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는 작전의

생존자들을 만나 “사상 최대의 승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람손719 후에 북베트남의 라오스

보급작전은 원래대로 다시 돌아갔고, 작전 직후에 호치민루트의 트럭행렬은 오히려 더 늘어

났다. 미군사령부도 제한적인 범위의 성공이라고 표현했다:

 

먼저 월맹군 탱크 88대를 잡았고, 그 중 59대는 전폭기 타격으로 잡은 것이었다.

남베트남군의 능력부족은 여실히 드러났다. 작전계획, 조직, 지휘력, 동기부여,

작전 숙련도... 모두 모자랐다.

 

 

북베트남군은 이 작전을 ‘9번국도 승리’ 혹은 ‘남부 라오스 승리’라고 부르며 완벽한 성공

이라고 여겼다. 이후 호치민루트는 오히려 더 팽창했다. 라오스 정부군은 곧 월맹군에 밀려

메콩강을 향해 후퇴했고 호치민루트 폭 60마일은 90마일로 더욱 늘어났다. 이 호치민루트

의 강화는 다음해 1972년 초 공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것이 누구옌 후에 공세,

혹은 부활절 공세다.

 

 

 

람손719 동안 미군 작전기안자들은 북베트남군이 격렬히 저항하여 벌판에서 결전을 벌여

잡을 거라 믿었고, 미군 항공력으로 1/10은 잡힐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개념은 공중폭격과

공중기동을 염두에 두었고 남베트남군이 전장기동에서 앞설 것이라 생각했다. 항공파워는

분명히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작전은 적이 선호하는 쪽으로 흘렀다. 항공파워는 분명히

중요했다. 그러나 결정적이지는 못했다. 만약 그게 없었다면 북베트남군은 재난 수준으로

남베트남군을 격파하고 광트리를 향해 계속 진군했을 것이다."

 

 

 

수많은 헬기가 떨어져 미육군항공은 충격을 받아 빠르게 헬기 교리에 관한 평가를

수행하게 되었다. 일예로, 101공정사단에만 총 84대의 헬기가 파괴되었고 430대가

피해를 입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 합해서 헬기 총 108대가 파괴되었고 618대가 피해를 입었다. 람손719

동안 미군 헬기는 총 16만 회 출격을 기록했고 미군 헬기승무원 19명이 전사했고 59명이

다쳤으며 11명이 실종됐다. (101공정사단 항공대는 규모가 매우 컸는데, 람손719는 101사단

헬기부대에 악몽 그 자체였다. 잇빨 주)

 

남베트남군 헬기 또한 총 5,500출격을 기록했다. 미 공군 전술항공기는 작전 동안 총 8천회

출격을 기록했고 2만 톤의 폭탄과 네이팜을 투하했다. B-52 폭격기도 1,358회 출격해 3만

2천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군 고정익 항공기는 라오스 남부에서 총 일곱 대가 떨어졌다.

미 공군은 총 6대가 격추되어 2명은 죽고 2명은 실종됐고, 미 해군 전투기도 하나 격추되어

항법사가 전사했다.

 

람손-719는 재난 수준으로 끝났다. 또한 양쪽이 서로 이겼다고 주장했다. 서로간의 피해를

보면 북베트남군이 피해는 훨씬 컸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과를 논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작전의 목표대로 적의 보급기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월맹군

의 저돌적인 전투력에 밀려 패주와 같은 퇴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미국이 떠나게 될

때에, 이런 전투력으로 과연 남베트남 군대가 버틸 수 없다는 것도 미국은 알게 되었다.

 

이런 경우의 수에서, 베트남전 초기의 명목으로 볼 때, 위험하니 더 도와주어야 한다고

미국이 생각하겠지만, 그건 국제정치에 냉정한 미국을 모르기에 가능한 생각. 미국의

결정은 단순하다.

 

“북베트남이 마을 먹고 덤비면 이길 수 없는 전쟁,

 더 이상 돈을 들여 봤자 결과는 같다.

 그러므로 이제 우린...... 손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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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제1레인저단의 LAM-SON 719

 

람손 719작전은 1971년 2월 초 계획되어, 북베트남군의 성소인 604군사기지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 604는 라오스 남부의 작은 마을 쎄뽄(Tchepone)

에 있었고, 당시 정보에 따르면 북베트남은 이곳에 거대한 양의 탄약, 식량과 군

수품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 기지는 전투 후에 월맹군 부대들이 라오스로 퇴각

하여 휴식과 재충전도 하고 신병도 훈련시키던 곳이었다. 당시 이들은 라오스 국경

을 넘어 베트남으로 들어가 광트리 지방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604기지 남쪽 국경

과 가까운 곳에 611이라는 북베트남 기지가 또 있었는데, 그곳은 남베트남의 고도

후에를 공격할 베이스였다.

 

람손 719작전은 1971년 2월 8일 오전 7시 시작되었다. M-41 탱크와 M-113

장갑차를 내세운 남베트남군 1기갑이 9번 국도를 따라 라오스로 진격했는데,

지형이 험하고 이동로의 폭이 좁아 이동은 느렸다. 그 동안 남베트남군 비행

대대들이 케산 진지에서 헬기로 남베트남 공수부대-1보병사단-제1레인저단

을 라오스로 날랐다. 또한 케산 진지에는 남베트남 육군 1군단 지휘소가 들어

와 이 작전을 지휘했다.

 

이 작전에서 제1레인저단에서 투입된 대대는 두 개. 제21레인저대대와 제39

레인저대대였고, 나머지 37대대는 예비대로 남베트남 영내 지휘소 부근를 방어

했다. 1레인저단 전체는 라오스 국경과 가까운 타 밧이란 곳으로 이동했고, 작전

과 동시에 제21대대는 헬기로 ‘Rangers South’에 들어갔는데 이곳은 30번-화력

지원진지 북동쪽 5km거리. 3일 후, 제39대대가 ‘Rangers North’에 헬기로 랜딩

했는데, 이곳은 21대대가 들어간 Rangers South의 북동쪽 3km 거리였다. 두

대대는 모두 북베트남군의 이동의 센서 역할을 하면서 화력지원진지(30과 31번)

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거나 지연시키는 임무를 받고 있었다. 만약 적이 30번과

31번 화력지원진지를 붕괴시킬 경우 9번국도가 차단되어 남베트남의 퇴각로가

막히게 된다.

 

 

두 레인저대대는 랜딩하자마자 랜딩존 부근에 방어선을 개척하고, 그 뒤에 사방

으로 중대는 내보내 적을 찾아 수색작전을 펼쳤다. 람손작전 6일차인 2월 14일,

39대대의 선도소대가 월맹군과 조우해 총격전이 벌어졌고 대대는 포격지원을 요청

했다. 레인저는 당시 푸 록의 64포병대대가 전담하고 있었다. 오후 4시, 39대대

모든 중대가 교전에 들어갔고 64포병대대는 105밀리 6문으로 포격을 해주었으나

지속적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39대대의 포병관측장교는 30번-화력지원진지

44포병에게 포격을 요청했고 30진지의 포병은 매우 정확히 포격해 월맹군이 뒤로

물러났고, 39대대도 방어를 구성한 랜딩존 거점으로 돌아가 방어로 전환했다.

 

다음날, 39대대는 중대를 내보내 수색해 적 시체 43구와 37밀리 대공포 2정을

노획했다. 당시 월맹군은 레인저 북쪽에 엄청난 숫자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공수부대와 보병들이 적의 식량, 연료, 화기 등의 저장고를 발견했

는데, 저장고에는 그전에 실시한 B-52로 폭격으로 인해 죽은 월맹군 시체들만

있었다.

 

작전 10일차인 18일이 되자, 월맹군 제70B군단은 휘하 308사단, 304사단,

320사단, 324B사단과 탱크연대 포병연대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바로 이

날, 39대대 방어거점에는 인해전술로 적이 몰려들었다. 레인저는 용감히 싸

웠고 푸 록과 30진지의 포병도 포격지원을 해주었다. 이로 인해 월맹군 공격

은 격퇴되었고 전장에는 수백 구의 시체가 널렸다. 레인저는 총기류만 500개

를 노획했다.

 

다음 날 월맹군은 다시 공격했다. 전투는 곧 킬링존으로 변했고, 30번지 포병

은 레인저를 향해 계속 지원포격을 날렸다. 레인저 39대대는 하루를 또 버텼고

적의 연대급 공격은 다시 물러갔다. 레인저 경상자들은 치료를 받고 다시 참호

로 돌아갔다.

 

39대대는 그 운명을 알고 있었고 최후 결전을 준비했다. 2월 20일 아침, 월맹군

은 보다 강도 높은 새로운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는 오후까지 이어졌고 레인저도

점차 약해졌다. 30진지의 포병들은 39대대의 포병관측장교의 요청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월맹군은 39대대 거점을 거의 섭렵하고 있었다. 공중촬영사진에는 적어도

600구의 월맹군 시체가 보였고, 39대대 생존자들은 3km 떨어진 21레인저대대 거점

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자매대대에 합류한 39대대 생존자들은 21대대와 같이

계속해서 싸웠다.

 

39대대원들은 실탄이 떨어지자마자 마지막 총알을 쏘고 사방으로 빠르게 흩어

졌다. 기갑부대의 고문관이었던 몰리넬리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3일간

아무런 재보급도 받지 못했다. 탄약이 떨어지자 참호를 뛰어나가 적의 화기를

노획해 반격하고 계속해서 싸웠다."

 

39대대 거점이 무너지자 월맹군은 21대대 거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0일 밤,

21대대가 있던 Ranger South 상공에 조명탄이 터졌다. 그러나 화력지원진지30

의 지원포격은 끝났다. 이제 월맹군이 30진지에도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월맹군은 21일부터 21대대 진지를 공격했고 레인저는 계속해서 공격을 물리쳤다.

39대대 생존자를 포함한 21대대의 전투는 4일 주야로 계속 되었다. 월맹군은 일단

병력을 빼고 레인저의 신체적 정신적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122밀리와 130밀리

포로 거점을 때리기 시작했다.

 

25일 아침까지 버틴 21레인저대대 거점은, 결국 ‘Zulu 1’ 계획에 따라서 퇴출명령

이 떨어졌다. 여전히 포병은 포를 때려주면서, 오전 10시, 코브라 헬기 네 대가

엄호하는 가운데 헬기 전대가 21대대의 Rangers South에 내려앉아 병력을 화력

지원진지 30으로 데려다 주었고, 다른 헬기 전대가 화력지원진지30으로 날아와

레인저를 태우고 푸 록으로 향했다. 람손719작전에서 제1레인저단의 임무는 달성

되었으나, 21대대의 한 중대는 여전히 화력지원진지30에 남았다. 그 중대는 30화력

진지가 모두 퇴각할 때까지 남아서 그들을 엄호하며 전투하다 마지막으로 나왔다.

 

 

            Hieu D. Vu  (Dallas, Texas 07- 25th 1995)

 

 

 

라오스 쎄뽄 근처 550고지에서 다음 전투를 준비 중인, 북베트남군 보병 병사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