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디엔비엔푸 전투 오만한 프랑스군의 몰락

구름위 2013. 11. 2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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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배경.

 

제2차세계대전 중 대일본제국의 대동아권영으로 프랑스 지배하의 인도차이나는 독립아닌 독립을 하게됩니다. 물론 새로온 일본군역시 프랑스와 같은 지배자로 왔습니다. 베트남을 비롯한 캄보디아, 라오스등은 일본의 괴뢰정부에 맞서 투쟁을 하게됩니다. 지원은 미국의 OSS가 해주게 되죠. OSS는 일본군에게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중국과 연합하도록 베트남을 돕습니다. 아리러니컬하게도 일본을 향했던 총부리는 미국에게 향하게 되죠. 베트남이 죽을힘을 다하여 일본을 몰아내자 프랑스가 다시 돌아옵니다. 호치민은 평화적인 독립을 희망했고, 1946년 3월 독립예비협약을 합니다. 프랑스군의 북부주둔을 허용하고 프랑스 연방의 테두리안에서 독립하는 이협약에 대해 호치민이 불만이 없었던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한 양보였죠. 하지만 4월 프랑스가 갑자기 남부에 임시정부를 세우게 됩니다. 협약을 파기한 프랑스는 11월 전면공격을 개시합니다. 결국 12월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났고, 호치민이 원한 베트남 민족의 평화는 깨졌습니다. 도미노이론에 입각한 미국의 전면적인 지지를 얻은 프랑스는 미국이 지원한 무기들로 베트남에서 연승을 거두지만, 1947년의 전반뿐이었습니다. 호치민의 월맹군은 프랑스의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고, 가을에 베트바크지방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습니다. 1948년부터는 본격적인 반격에 들어갑니다. 그러자 프랑스는 1949년 6월 해외에 망명중이던 베트남 왕조의 바오다이황제를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세우고, 프랑스군과 연합시켜 전투를 벌여갑니다. 하지만 월맹군은 대일본항전때부터 전투에 잔뼈가 굵은터라 바오다이의 신생군대는 월맹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50년부터 월맹이 주도권을 잡고, 라오스, 캄보디아등이 독립을 선포고 국제여론으로 부터도 질타를 받자, 1954년 4월 제네바9개국 국제회의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5월 한전투의 배패후 국내여론으로 부터도 외면받아 7월 휴전협정을 조인하게 됩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마무리시킨 이전투 그것은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입니다.

 

전투의 시작.

 

1950년 2월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원정군이 분리해지자 고등 변무관 겸 원정군 최고사령관에 드라트르장군을 임명합니다. 1950년부터 1952년 중병으로 사망할때까지 효과적으로 월맹군을 저지합니다. 후임이었던 살랑은 치졸한 전투로 신임을 잃었고, 새로운 총사령관에 나바르장군이 되었지만, 프랑스는 월맹에게 밀리고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병력을 살펴보면 월맹군 - 7개사단 및 독립연대 12만 5천명, 지방군 15만명, 민병대 7만 5천명 도합 35만명이었고, 프랑스군 - 아프리카군, 파견군, 외인부대, 월남인부대, 공군, 해군포함 18만 7천명, 월남지방군, 월남민병대 20만명, 도합 37만명이었지만, 제대로 전투를 치룰수 있는 부대는 3개사단 정도였습니다. 나바르는 보구 엔 지압의 부대를 유인 섬멸하고 전세를 역전시킬수 있는 작전을 계획했고, 월맹군 점령지역의 한가운데인 디엔비엔푸가 결정되었습니다. 1953년 88개의 프랑스 부대중 44개의 부대가 디엔비엔푸가 있는 델타지구에 투입되었고,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1953년 11월 20일 C-47 정찰부대가 정확히 하노이에서 2시간 걸리는 디엔비엔푸를 폭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공수부대의 강하가 시작되었습니다. 카스트리준장 휘하의 8개 대대 15,00명이 디엔비엔푸로 강하하여 비행장을 중심으로 길이 16km,폭 10km의 방어진을 구축합니다. 11월 20일 첫전투는 월맹군 2개 중대와의 전투였습니다. 40명이 사망했지만, 2개 중대는 전멸했습니다. 시작은 좋았고, 사기는 높았습니다. 1954년까지 디엔비엔푸에는 17개 보병 대대, 10개 독립 중대, 포병 3개 포대(105mm 25문, 155mm 4문, 75mm 12문.), 공병 1개 대대, 전차 1개 중대(M24로 이루어진 10대.), 마지막으로 1개 비행중대(6개 전투기.)등 총 16,000명이 주둔했습니다.

 

월맹군의 기다림.

 

베트남의 뛰어난 명장 보구 엔 지압은 바로 반격하지 않고 상황을 살폈습니다. 지압은 근처 마을을 징발하여 지휘소를 짓고, 충분한 준비를 했습니다. 총 4개사단이 준비될때까지 지압은 정찰을 했습니다. 적의 벙커와 포대, 비행장, 의무실등의 위치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비행기의 보급시간등을 관찰했습니다. 적의 약점을 공중보급으로 결정한 지압은 프랑스군에게 반격을 가하지 않고 적이 긴장을 풀때까지 기다립니다. 프랑스군은 그들대로 약6주간 의심지역을 폭격합니다. 1953년 2월 4개사단이 모이고,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자 전투를 마음먹습니다. 200문이상의 포를 보급받고 계속 병력을 충원하자 월맹군은 프랑스군의 3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약점을 모두 알고있던 월맹군은 1954년 3월 12일 공격을 개시합니다.

 

본격적인 싸움.

 

프랑스군의 보급은 포도주 4만 9천병을 포함한 완벽한 보급을 갖추었지만, 공중보급이라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월맹군 역시 코끼리, 인간, 트럭등을 이용하여 포탄 44만발, 박격포탄 24만발, 대공기관총 100정등의 완벽한 준비였습니다. 월맹군은 3월 12일 오전 예비공격후 3월 13일 야간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합니다. 수개월간 은밀한 지뢰제거작업을 모르고 있던 프랑스군은 월맹군이 덫에 걸린줄 알고 좋아했으나, 덫은 프랑스군이 걸렸습니다. 월맹군의 무자비한 포격은 500명의 프랑스군을 사살했고, 나머지들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준비된줄 몰랐고, 이렇게 가까이 있는줄 몰랐고, 그들이 우리의 위치를 모두 알고있는 것도 몰랐다!" 포병책임자 랑그레대령의 말처럼 모두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12시쯤 베아트리체요새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수비를 책임지던 700명의 병사중 살아남은 사람은 200명 뿐이었습니다. 충격에 빠진 수비대 책임자 샤를 피로트는 참패의 충격으로 자살합니다.

3월 15일에는 가브리엘과 앤 마리요새를 공격합니다. 자원자들로 구성된 죽음의 특공대는 중앙참호까지 죽음의 진격을 펼쳤고, 프랑스군은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는 자들이다!" 디엔비엔푸가 함락당할지도 모른다는 급보에 나바르장군은 비제아중령의 대대를 급파합니다. 한가지 사실은 비제아중령의 대대는 복무기간이 약1~2개월 밖에 안남았다는 것 입니다. 하여간 급파된 비제아중령과 랑그레대령, 방어 총 책임자 카트리대령 세사람은 합심하여 방어전을 펼칩니다. 디엔비엔푸에 급파된 비제아중령은 공군력과 화력을 이용하여 반격을 펼치고 월맹군 1개대대를 섬멸합니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첫승리를 거두자 3월 27일 월맹군은 보급로인 비행장 엘리앙-1을 총공격합니다. 부상병을 태우고 돌아가던 수송기와 보급중이던 수송기들을 파괴하고 퇴각합니다. 프랑스군은 한숨돌렸지만, 이퇴각은 피해가 심해서가 아니라 대대적인 공격을 위한 퇴각이었습니다. 베아트리체, 가브리엘, 앤 마리, 도미니크요새가 합락되자 프랑스군은 클로딘, 이자벨, 위귀에트, 엘리앙등을 중점적으로 방어합니다. 지압장군은 4월 1일부터 4일까지 충돌시키지 않았던 정규군 3개사단을 출동시킵니다. 월맹군의 맹공에 엘리앙요새의 반절을 빼앗깁니다. 공중보급을 위해 날아오는 C-47은 지압장군의 대공포화에 갈수록 높은 곳에서 낙하산 보급을 펼쳤고, 프랑스군의 회수율은 40% 정도였습니다. 비행장을 되찾기위해 비제아중령은 반격을 개시했고, 엘리앙-1을 탈환합니다. 월맹군은 2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휴식을 취합니다. 1만5천명의 프랑스군 중 의사는 4명이 이었지만, 4만의 월맹군 중 의사는 1명이었습니다. 지압장군은 땅굴을 파기시작했고, 더이상 프랑스군의 폭격과 포격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소강상태가 길어지자 제네바에서는 치열한 외교싸움이 벌어집니다.

 

정치적 희망, 그리고 종말.

 

프랑스는 내심 미국이 참전하거나 더많은 도움을 주길 바랬습니다. 1953년 취임한 아이젠하워대통령역시 공산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참전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서 독수리작전을 계획했습니다. 마닐라에서 200여대의 폭격기를 동원하여 디엔비엔푸의 월맹군을 폭격한다. 그리고 3개의 전술 핵미사일을 월맹군의 주요시설에 투하한다. 하지만 의회와 전영국수상 처칠의 반대로 좌절됩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사령부에서 미국의 참전을 언급하자 랑그레대령은 미국이 온다고 부하들을 독려합니다. 하지만 5월 프랑스정부에서는 카트리대령을 장군으로 승진시킵니다. 모든장병들에게도 무공십자훈장을 수여합니다. 무기와 탄약이 아니라 훈장이 보급되자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집니다. 디엔비엔푸에 있던 유일한 여자간호사 즈느비에르에게도 레지옹 도뇌르훈장이 수여됩니다. 마지막 전투때에는 의지를 상실한 프랑스군을 월맹군이 손쉽게 제압합니다. 아직 전력이 팔팔한 2개중대는 돌파를 주장했지만, 거부당하고 오랜 회의 끝에 항복이 결정됩니다. 카트리장군이 하노이에 전투가 끝났다고 보고하고 랑그레대령은 항복을 선언합니다. "모두 끝났다. 전투를 중지하라. 하지만 백기는 올리지 말아라!" 프랑스군의 자존심을 월맹군은 존중하여 백기를 올리지는 않아도 항복으로 알겠다고 합니다. 5월 7일 프랑스군은 항복하게 됩니다. 55일간의 전투끝에 프랑스군은 약3천명이 사망했고, 3000명은 중상을 입었으며, 5134명의 부상자가 생깁니다. 월맹군은 약8000명이 전사하고, 150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월맹군은 투입병력의 절반가까이를 잃습니다.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말.

 

1954년 5월 8일 제네바에서는 충격에 빠진 프랑스대표단이 분리안에 합의합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동의했지만, 미국만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비제아중령은 포로수용소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습니다. 8000명의 프랑스포로가 60일간 걸어서 포로수용소로 갔고, 3개월 억류뒤에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약4000명 이상의 프랑스포로들이 사망합니다. 오직 프랑스의 명예를 위해서 싸운 병사들의 비참한 말로에 프랑스 국내여론은 분개합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나자 미국은 도미노이론을 철썩같이 믿게 됩니다. "4월은 난징이, 5월은 상하이가, 12월은 평양이, 이제 하노이만 남았다." 한 미국정부의 관료말처럼 도미노이론이 실현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참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프랑스군의 패배요인으로는 지나친 공중보급과신, 전투력과신과 월맹군을 낮게 평가했다는 것이고, 월맹군의 승리요인은 꾸준한 준비 몽고메리식 표현으로는 이길수 밖에 없는 싸움을 했다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