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케산의 해병 : 881고지 백병전|베트남전쟁

구름위 2013. 11. 25.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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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지만 증언 멘트가 상당히 많습니다.

휴일, 여유 있게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이 내용은 케산 참전자 협회의 회보에 나온 내용으로

제목은 [케산 Hill Battles 30주년]이다. 레이 스터브가

공식 기록들을 찾아 구성한 것이다. 일부 글짜나 내용

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출처 : namvets.com. Vietnam Veteran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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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l 881 KHE SANH 1967 (2)

 

 

 

[앞의 상황 : 해병정찰대와 SOG, 랑베이 특전단 캠프는 케산 지역에

 점차 적들이 모여든다는 보고를 계속 올렸다. 케산진지를 막 구성한

 아직 소규모의 미 해병대는 그럴 리 없다면서 861고지에 9연대 1대대

 B중대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들이 고전을 하자 다시 K중대를 투입했고, K중대 역시 고전

 하자 1군단지역 동쪽 동하에서 증강병력을 더 불렀다. 최초 교전부대

 인 9연대 B중대가 큰 전상 속에 고지전투에서 빠지자 미해병 3연대 3

 대대가 정식으로 이 일대 작전을 맡으면서 병력들이 케산진지에서

 라오스 국경 방향 서북쪽의 세 고지로 계속 들어가게 된다...]

 

 

전에 올린대로 이 전투 8개월 뒤의 미 해병대 케산 배치 그림으로, 861과 881고지는 왼쪽 위에 보인다.

'N'으로 표기된 881 북쪽고지는 881S 위쪽에 노란 점으로 표시되었다. 사실상 다른 고지다. 

 

 

 

[861, 881N, 881S 세 고지에 해병대 병력을 투입한지 4일 차인...]

 

1967년 4월 27일

 

공중정찰에서 약 20명의 월맹군 관측소가 목격되었고 대형 포

두 문도 보였다. 동이 트자 3연대 3대대는 전상자 후송을 완료

하고 케산기지로 복귀했다. 오후에는 빠진 9연대 B중대를 대신

할 3연대 M중대가 케산에 들어왔다.

 

9연대 B중대는 C-130 수송기를 타고 동하로 빠졌는데 며칠 후

케산의 상황을 무전기로 듣게 된다. 문제가 생겼다는 것.

 

“도대체 어떻게 돼가는 거야?”

 

이어 케산에 3연대 F중대가 들어와 예비로 대기했고 새 포대도

도착했다. 27일에는 전투지역 북부에 정찰팀 두 개가 들어가게

되고 그 중 하나는 (그 유명한) ‘브레이커’팀이다.

 

조종사는 돈 맥페론 대위와 2호기는 토마스 베리 중위. 멕페론이

랜딩시키고 베리 중위는 상공에서 지켜봤다. 맥페론의 헬기가 땅

에 닿자마자 자동화기 사격을 강하게 받았다. 이들을 쏜 적은 불과

10미터 거리. 맥페론 대위는 이륙을 시도해 2,800피트까지 올라갔

다가 결국 지상에 추락했다.

 

베리의 헬기 역시 4인 정찰팀을 태우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자를

구할 수 없어 베리 중위는 케산으로 가 정찰팀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왔다. 9명의 생존자는 여전히 적과 싸우고 있었고 건쉽헬기

가 지원하고 있었다.

 

베리 중위 헬기가 다가갔으나 생존자들이 사격을 피해 숨어 안

보였다. 이때 멕페론의 부조종사 브레웰린 중위가 폭격 구덩이

에 서서 손을 흔들었으나 일대는 매우 가파라 착륙할 수 없었다.

결국 오른쪽 바퀴만 땅에 대고 수평을 유지했고, 이후는 정찰대

선임하사인 메드베키 중사가 지휘했다. 그와 부하들은 내려가

생존자들을 끌고 왔다.

 

헬기 주변 땅에 총알들이 박혔고 적은 주로 조종석을 조준했다.

그러나 베리 중위는 차분히 위치를 지켰고 결국 모두 올라타자

부조종사 파커 소위가 후미 문을 올리고 이륙해 가파르게 하강

하며 속도를 되찾았다. 두 번째 정찰팀은 안전하게 침투했으나

적이 너무 많아 두 시간 뒤에 퇴출된다.

 

[결국 안전하게 침투한 정찰팀 ‘브레이커’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해병 정찰팀 ‘브레이커’의 작전은 특수전 게시판에

 따로 게시될 예정입니다.]

 

작전을 준비중인 미 해병 정찰대대 포스리컨 팀.

 

 

이날 포대 두 개가 하루 종일 쐈고,

항공기도 고폭탄와 네이팜을 계속 861고지에 투하했다.

 

 

1967년 4월 28일 861고지 점령

 

28일 공격계획은 세 방향으로 861고지(1)와 881남쪽고지(2)와

북쪽고지(3)다. 861고지를 포위하는 형태로 (1)번 루트에 2개

중대가 공격했으나 적은 거의 조용했다. 밤에는 B-52폭격까지

있었고 3개 중대는 결국 고지를 거의 손에 넣었다. 이 [Battle of

the Hills]는 불모지에 가까운 곳에 두 개의 적 부대가 현지민

가이드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콜슨 대령은 통신지프를 몰고 나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

는데, 통신지프 근처에 브루 산악족 현지민 몇 명이 나타났다.

당시 861고지에는 엄청난 폭탄과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중.

날씨가 맑아 잘 보였다.

 

그런데 이 산악족 중 한 명이 영어를 하며 말을 걸어왔는데 적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했다. 그리고 산에는 터널이 엄청 파진 걸 왜

미국인들은 모르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고지 후방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지는 거의 점령됐고 미군 장교들은 왜 터널을

이전에 말해주지 않았냐고 묻자, 당신들이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말하며 가버렸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861고지에

는 원래 천연동굴이 세 개 있다고 했다.

 

 

1967년 4월 29일

 

29일, 공격에서 9연대 M중대가 적 소대와 11시에 조우해

오후 1시까지 전투해 해병 2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다쳤으

며 월맹군 2명 전사에 10명 전사 추정이 되었다.

 

M중대가 방어를 취하려고 할 때 적 진지들에서 소총과 자동

화기를 쐈고 중대는 즉각 응사했다. 이때 2소대 통신병 존슨

상병이 개활지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고 의무병이 끌고 오려

다 포기했다. 그러자 3.5인치 로켓반이 백린탄을 넣고 적 진

지에 사격했고 백린탄의 연막차장을 통해서 결국 무전병을

끌고 왔다. 후송시키려고 했으나 무전병은 자기가 가진 실탄

을 모두 소모하기 전에는 후송되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의무

치료도 거절했다.

 

9연대 M중대는 2소대를 선두로 출발다가 최초 교전에서 중상

당한 몇 명을 후송시키고 3.5인치 로켓발사기를 가져왔다.

교전 동안 M중대의 다른 제대는 남쪽에서 이동하다 월맹군 20

명이 이동하는 모습이 봤다. 그 동안 미군 포대는 적 82밀리 박

격포 대포병 계산을 통해 의심지역을 포격했다. 이때 M중대 제

대가 정상으로 다가서면서 이전에 전사한 미 해병 시체 네 구를

목격.

 

861고지 정상에는 벙커 25개와 참호 62개가 발견되었고 상당히

위장이 잘되어 있었다. 고지 주변에서 총 400개의 전투 참호가

발견되었고, 후사면에는 케산진지 방향으로 구축된 박격포 진지

들이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 흔적을 없었다. 고지 주변에는 부서

진 병기나 땅에 묻은 병기들과 함께 시체들에서 풍기는 냄새가

강하게 났다.

 

거기 있던 월맹군 18연대는 심하게 두들겨 맞았고 결국 325C

사단은 18연대 대신 95연대를 투입한다. 325C사단의 나머지

연대인 101연대는 라오스 내 9번국도 근처에 예비대로 있었다.

 

북베트남군 18연대는 규율과 기강이 매우 좋은 부대였고 터널도

파고 벙커 축성도 매우 잘 했다. 위장은 항상 미군이 지나가기

직전까지 모를 정도. 그들은 엄청난 포격과 공중폭격에서 살아남

았고 심지어 땅을 뚫고 들어가 터지는 지연뇌관이 당착된 1-2천

파운드 폭탄에도 견뎠다. 사격 규율도 매우 좋고 사격 솜씨도 상당

해서, 총에 맞은 해병대는 대부분 머리와 상체에 총알을 맞았다.

 

861고지의 적은 저격수를 운영하고 30과 50기관총, 60과 82밀리

박격포를 사용했다. 3연대 2대대가 고지를 점령했을 때 발견된

미군 시체들은 모든 장비를 누군가 벗겨간 상태.

 

29일도 엄청난 포탄과 폭탄이 투하되었고 881고지 주변에

공중정찰을 하는데 월맹군 대공포좌들이 숨겨져 있었다.

 

 

전투, 살육, 정복 : 4월 30일

 

3연대 3대대 M중대장이었던

데이빗 로저스 대위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4월 30일 아침은 아름다웠고 구름 한 점 없었으며 멀리까지

보였다. 안개도 연기도 없었다. 그곳엔 월남 민간인은 하나도

없고, 북베트남군, 미 해병대, 블루 산악족, 그리고 야생동물이

전부였다. 가끔 호랑이도 있었다. 881남쪽고지 월맹군은 정말

위장의 천재들이었다. 안개가 없어도 안 보인다. 고지를 오르

면서 지옥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난 포격 요청에서 먼저 백린

지시탄을 요구했는데, 그 중 한 발이 앞에 있던 해병 두 명

근처에 정말 가깝게 떨어졌다. 난 케산에서 제원산출 정확히

하라고 통보했다."

 

4월 30일 동이 트자 3연대 H중대는 M중대 근처로 들어갔다.

그런데 적은 H중대를 자신들 벙커 100미터 앞까지 오도록

놔둔 다음 50기관총과 저격을 시작했다. 저격수는 고배율

스코프를 쓰는 것 같았다. 적은 약 50명으로 벙커와 참호에

숨어 잘 안 보였다. H중대는 교차사격을 당해 즉각 큰 사상자

가 났고 특히 3소대 피해가 컸다. 월맹군은 높은 곳의 진지

에서 쏘고 있었고 H중대는 꼼짝 못 하게 된다.

 

기가 눌려 있던 부중대장 스펜서 핵켓 중위는 적의 발포 위치를

보고 있다가 일어서 싸락눈 같은 총알 속에서 30미터를 혼자 돌

격했고 이에 해병 M-60이 엄호사격을 했다. 2소대 기관총사수

유진 메틀러는 효과적인 사격지원을 위해 유리한 위치로 이동했

다가 심하게 맞았다. 그러나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그 자리에서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기관총을 쐈다. 심지어 다친 해병에게 뛰어

가 예비 기관총 실탄을 받아 계속 쐈다. 포격 지원을 받은 후에야

메틀러는 치료를 받았다.

 

2소대장 에드윈 그리스머 소위도 첫 총격에 심하게 맞았으나 그는

계속 지휘하면서 소대를 위험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기동시켰다.

소위는 의무후송을 거부하며 계속 지휘했고 부상자와 전사자를 빼

기 위한 엄호사격에도 동참했다. 그러나 피를 너무 흘려 곧 의식을

잃었다.

 

의무병도 모두 다치거나 전사해서 마크 블랙만 남았고 그가 여러

해병의 목숨을 건졌다. 돌격했던 부중대장 헤켓 중위가 부상자 후

송을 지휘했고 이 과정에서 중대장 통신병도 무전을 소통하려고

높은 곳으로 오르다 저격당해 전사했다. 이때부터 부대는 가져온

3.5인치 로켓을 벙커 파괴에 사용한다.

 

H중대는 큰 전상과 함께 근접항공지원을 이유로 뒤로 빠졌다.

 

이 교전으로 해병 9명이 전사하고 43명이 다쳤고 (29명 후송),

월맹군 14명을 사살하고 25명은 사살추정.

 

3연대 2대대 E중대 역시 측면으로 기동하다 고전했다. 결국

건쉽을 불러 사격하는 동안 부상자를 후송했는데 E중대원들

은 항공기가 나타날 때마다 빽~~! 하는 경고음을 881고지 부

근에서 들었다. 적들의 경계전파음이다. E중대는 병력 구역을

줄이고 포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지 정상에 다시 다가가자 또 사격을 받았고, 월맹군

저격수들은 높은 정상에서 정말 정확하게 사격을 가해왔다.

“당시 가장 유효한 공격은 그 위로 수류탄을 던지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섬뜩한 정적이 찾아왔다.

 

선두로 가던 로딘 상병은 문득 적 벙커를 하나를 발견했는데,

총이 작동하지 않아 무릎을 꿇고 조치를 취하다 적 저격수 총

알에 폐와 어깨를 관통했다. 루벤 산토스 하사가 와서 붕대를

감아주는데 총알구멍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어두워져 더 이상

나갈 수는 없었다. 그때 피터 헤써 소위가 분대를 이끌고 측면

으로 돌아 벙커를 파괴하고 여럿을 사살했고 소대선임하사 산

토스 하사도 갑자기 일어나 벙커와 벙커를 뛰어다니며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 마지막에 산토스 하사와 한 해병 사이에 수류탄이 떨어졌고

산토스 하사는 그걸 집어 벙커에 되던져 둘 다 살았다. 전투 가

능한 병사들은 그렇게 앞으로 나가며 벙커들을 파괴했다. 결국

완전히 컴컴해지자 중대는 원형 사주 방어진을 구축했다.

 

바로 이때 콜맨 상병은 쓰러진 트래비스 슈미츠 상병이 적 벙커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콜맨 상병은 주저 없이 벙커

앞으로 가서 슈미츠 상병을 붙잡아 끌어내려고 했다. 이때 안에

있던 월맹군이 슈미츠 상병의 몸에 사이로 총을 쏴 콜맨 상병이

다섯 군데나 맞고 땅에 쓰러졌다. 다리에 총을 맞았지만 다시 기

어가 슈미츠 상병을 끌어내려고 했다. 슈미츠 상병은 아직 살아

있었다. 바로 그때 산토스 하사가 도착해 콜맨을 끌어내 소대

의무병에게 데려갔다.

 

산토스 하사는 돌아와 전혀 겁먹지 않고 콜맨이 끌던 슈미츠를

벙커 구멍에서 끌어내려고 했다. 월맹군은 여전히 슈미츠 상병

몸 사이에 총구를 놓고 총을 쐈고, 총구 섬광으로 인해 산토스

하사의 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었다. 결국 슈미츠가 죽은 것 같았

고 밤이라 전상자가 더 생길까 두려워 산토스는 벙커 주변에 병사

들을 배치해 도주를 못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벙커를 수색해보니 적 병사 둘이 죽어 있고 한 명은

여전히 살아 수류탄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중간에

낀 슈미츠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 전투에서 3연대 2대대 G중대는

 2명이 전사하고 9명이 다쳤다.

 

4월 30일 아침, 3연대 M중대는 881-S고지 (2)번 루트를 통해 진출

하며 전날 포격에 대한 결과물을 수색했다. 월맹군 전사자 다섯과

부상자 둘을 발견했으나 부상자 한 명이 도주하려고 해 사살했다.

남은 부상자는 포로로 잡았으나 부상이 심해 결국 사망했다.

 

M중대장은 휴가를 떠난 중대장을 대신해 항모 엔터프라이즈의

해병 분견대장이었던 오하이오 출신 레이몬드 베넷 대위가 맡았

고 공격은 오전 8시 개시되었다. 1-3소대 공격, 2소대는 사격지원

과 예비대.

 

881S에는 두 개의 높은 둔덕이 있고 중간이 안장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던 적은 대대급 이하. [Note: 월맹군의 제대는

미 해병대와 전혀 다르다. 월맹군 1개 사단은 약 6천 명 이상이고,

연대는 약 1,500명, 대대는 400명 정도, 중대는 100명, 소대는 30

명이다.]

 

두 높은 둔덕은 방어선의 확고한 거점으로 그 중간 능선은 방어가

형성되어 있었다. 근처에 박격포좌 세 개가 있고 적 CP와 통신선

으로 연결된다. 각 둔덕에는 적 1·개 소대가 방어.

 

전날의 포격 때문인지 881고지 남쪽은

비교적 조용했으나 그 위는 알 수 없었다.

 

M중대 지휘부는 레이몬드 베넷 중대장과 함께 12포병 C포대

관측장교 데이빗 로저스 대위, 부중대장 조셉 카이론 중위와

통신병들이 있었다.

 

"... 우린 881고지 남쪽이 어떤지 정확히 몰랐다. 외관만 보고는

절대 모른다. 누군가 거기 월맹군 대대가 있다고 말한다면 난 미친

소리 말라고 했을 거다. 무엇보다, 북베트남군의 존재는 눈에 하나

도 안 보인다. 위에 있다는 것만 느꼈다. 생각보다 적지 많지 않나

의심했다. 우리는 벙커 다섯 개를 식별했다. 나머지는 철저하게

위장이 되어 보통 우리 해병이 걸으면서는 어디 있는지 식별조차

불가능하다."

 

아침 8시 30분, 월맹군 네 명이 보여 포격을 요청하고 10시 정도

에 M중대 선도 소대가 위로 올라갔다. 소대장 크루스 소위는 간

헐적인 사격을 받았으나 별 도리 없이 중대장 베넷 대위는 계속

올라가라고 했다. 그러나 점차 적의 저항이 강해져 2소대가 지원

을 위해 올라갔다.

 

적은 참호를 파 위장하고 있었고 월맹군 저격수들이 나무 위에서

위장하고 매달려 총을 쐈다. 결국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일정하게

올라가 벙커를 통과하면 월맹군은 그대로 놔두었고, 그들의 사격

군기는 정말 훌륭했다. 그 능선을 올라섰다가 내려가는 하향길이

되자 그때 월맹군은 집단 발포했고 해병들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전투는 여섯 시간을 경과하고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하다. 881고지 남쪽은 미군 155밀리 자주포가

포격지원이 불가능하다는 것. 케산진지의 포들은 대부분 구형 견인

포였고 땅은 진흙탕이었다. 로저스 대위의 말.

 

"난 중대 지휘부에서 부중대장, 무전병들과 같이 다녔다. 내 전용

무전병도 있었고. 처음에는 앞에서 폭발이 들리더니 괜찮다고 그

랬다. 그러나 북쪽에서 폭발들이 들렸고 우리 CP는 눈으로 상황을

볼 수 없었고, 소음이 강해지면서 무전기로 적 저항이 강력하다고

보고했다.

 

곧 밝혀졌지만, 우리 M중대는 죽음의 덫 안으로 들어간 거다. 정말

완벽한 매복이었다. 돌아 나오려면 높은 곳으로 넘어서 돌아와야 한

다. 거의 포위된 것 같은 상태에서 꼼짝 없이 살인적인 교차사격을

받았다. 사냥꾼이 사냥감이 된 것. 전상이 보고되는데 나와 친하던

소대장 미첼도 전사했고, 나중에 지휘부와 교신한 건 무전기 딱

하나다.

 

곧 우리 지휘부는 죽음의 구역 모서리에 있는 폭탄 구덩이로 들어갔

는데, 그 안에는 죽거나 다친 해병대원들과 월맹군으로 가득 차기 시

작했다. 구덩이는 안전한 편이었으나 박격포탄이 떨어지는데 대책이

없었다. 하나가 내 앞에 떨어지면 두 번째는 내 뒤에 떨어진다. 그 다

음에는 정중앙에 떨어지고.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크레이터 안

의 우리 모두 다 죽을 걸로 생각했다.

 

거기서 봤던 한 흑인 해병이 기억난다. 갑자기 박격포탄이 돌격하며

올라가던 그의 뒤에 떨어졌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10초 정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서 다

시 가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중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잠시

뇌진탕으로 정신만 어찔했던 것 같다."

 

1소대장 크루스 소위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앞쪽에 나가 병사들을

위로 이끌었다. 박격포탄이 터져 다쳤지만 소위는 계속 소대를 이끌

어 앞으로 나갔다. 짙은 수풀과 월맹군의 강렬한 사격으로 인해 1소

대는 여러 무리로 갈라져 그렇게 다섯 시간이나 있어야 했고 한 분대

는 앞에 떨어져 나가 있었다.

 

전투는 계속 격렬하게 이어졌고 월맹군이 공격으로 나오자 앞에 있던

분대는 그걸 막으면서 탄약이 떨어져갔다. 앞에 있던 분대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피해가 매우 컸다. 전상자가 여러 명 생겨

이동도 힘들어진 상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에 나간 분대에게 실탄을 빨리 전달해줘야 한다

는 사실. 도로시 윌리엄스 일병이 노출이 됨에도 불구하고 탄약을 들고

앞으로 기었다가 어깨에 총을 맞아 고통스러워했지만 돌아오라는 말을

거부하고 계속 앞으로 기었다. 결국 10미터 정도를 나가 탄창 몇 개를

분대에 전달했다. 바로 이때 월맹군들이 짙은 수풀을 이용해 앞으로 질

주해 나왔고 이에 윌리엄스 일병과 월맹군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발포

했다. 윌리엄스도 적을 맞췄지만,

 

윌리엄스 자신은 머리에 총알을 맞아 전사했다.

 

2소대는 1소대 측면에서 기동했는데, 한 벙커와 조우해 큰 피해를

보며 소대는 정지했다. 첨병 랜디 맥피 일병은 첫 매복사격 시작에

맞아 전사했고 그 다음에 가던 해병 세 명도 몇 초 뒤 맞았다.

 

"첨병을 선 랜디 맥피는 두 번째 참전이었다. 그 특별한 전투를

통해서 우린 그를 ‘해병 중의 해병’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맥피

는 선임하사가 가기 전에 쓰러졌는데, 그는 작전 전에 ‘이번에 거기

내가 가면, 난 죽는다’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린 맥피가

겁쟁이가 되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갔고,

가슴에 두 방 맞았다."

 

결국 2소대는 맥피의 시체를 놔두고 뒤로 빠져야 했다. [2일 동안

강력한 포격을 퍼붓고 나서 전사자 시체를 수습하러 들어갔는데,

맥피의 시체는 식별할 수가 없었고 그는 MIA 명단에 올랐다.]

 

그 거점을 꼭 격파해야 한다는 것 깨달은 M중대 로켓발사기-분대장

제임스 와이즈헌트 상병은 과감하게 총알이 쏟아지는 개활지로 나가

정확하게 조준해 로켓을 발사했고 다른 M-79 사수도 유탄을 발사했

다. 이 로켓은 정확하게 벙커에 적중했고, 이에 와이즈헌트는 다시

개활지를 건너가 다시 정확하게 한 발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와이

즈헌트 상병은 기관총에 치명상을 당했다.

 

거의 정상에 도달한 캐롤 바우어 하사는 박격포 포열에서 텅 하는

발사음들을 듣고 다른 동료들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말하고 자

신은 그 자리에 엄폐했다. 바우어 하사의 판단은 많은 목숨을 구했다.

다가오는 해병을 보고 적이 박격포로 일제포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일제포격이 끝나고 바우어 하사는 다친 동료를 돕다 월맹군 저격수

에게 맞아 중상을 당했고, 비슷한 시간 의무병인 해군하사관 헨리

코넬은 자신의 위험을 마다않고 돌아다니며 치료해 거의 10명에

달하는 죽을 수도 있는 중상자를 구했다.

 

박격포반의 토마스 냅 일병도 주목할 용기를 보였다. 그는 아예

자기 소총을 놔두고 박격포만 들고 포격에 유리한 지점에 달려가

포격을 했는데, 포격 도중 부사수가 총에 맞아 죽었으나 계속해서

혼자 다섯 발이나 유효사로 박격포를 발사했다. 그 역시 머리에 부

상을 당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동료들을 도왔다.

 

1소대 로버트 쉴리 상병도 기관총팀을 이끌고 개활지를 건너가

과감하게 사격해 적에게 굉장히 큰 피해를 입혔다. 탄약이 떨어

지자 쉴리는 본인이 직접 기관총 예비탄약을 수거하러 뛰어다니

다 어깨에 총을 맞았다. 역시 후송을 거부했고 끈질기게 계속 기

관총을 쐈다. 결국 쉴리 상병은 부상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

했다. 그는 여러 번 월맹군의 역습을 막았다.

 

전체적으로는 M중대가 돈좌된 상태였지만

해병들은 적어도 기에서는 눌리지 않았다.

 

M중대 3소대 역시 동쪽에서 큰 피해로 주춤하고 있었고 소대장

로버트 미첼 소위도 쓰러졌다. 소대장 통신병 돈 호색은 소대장

의 경동맥 출혈을 막다 하늘의 건쉽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들었

고, 그 장면은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있는 베트남전 참전모역에

동상으로 제작되었다. 소대장은 파편이 턱을 때렸으나 뇌에는

지장 없었다. 이제 전투는 총 여섯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M중대장 레이몬드 베넷 대위의 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내가 본 미국 젊은이들의 행동이다. 머리를

기르고 락엔롤 음악을 듣는 그들은 보기에 참 약한 세대라는 공통

의 생각이 있었다. 내가 뛰어가는 동안 총에 맞아 중상을 당한 두

명을 봤다. 둘은 죽을 게 명백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명을 지르지도

울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 병력이 지금 어디

있고 적 기관총이 어디 있는지 새로운 정보를 나에게 차분히 말해

주었다."

 

압도적인 사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M중대는 지원을 요청했고,

특히 강력한 공중폭격이 날아왔다. 포병 관측장교로 폭탄 구덩

이에 있었던 데이빗 로저스 대위.

 

"해병들이 천천히 뒤로 밀려 고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일부는

부상자를 데리고 우리 쪽으로 왔다. 한 해병은 가슴을 온통 맞은

것 같이 보였고 90도 직각 방향에서 맞은 것 같았다. 한쪽 살이

뜯겨져 나갔고 죽을 것 같았다. 한 하사 [테렌스 레오 메이어

하사]도 보였는데 그는 하사관 중에 가장 걸출했고 리더였다.

그 하사는 부상자 하나를 들쳐 업고 소총 두 자루를 들고 있었다.

하사는 고지 쪽으로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얼마나 앞쪽에서 쓰라

렸는지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난 그 하사에게 최고훈장

을 상신했지만 수여는 되지 않았다. 그 하사는 몇 달 뒤 수막염

으로 다낭의 해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수많은 영웅적인 행동과 그런 병사들이 있었다. 특히나 다친

동료들의 구조에는 정말 영웅적인 행동들이 많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전사자는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다.

 

케산 포위전 당시의 매우 유명한 사진.

 

 

[K중대]

 

9연대 킬로(K)중대는 881고지 남쪽 진행로를 따라 이동하다 정지

해 360도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이들은 다른 중대에 문제가 생길

경우 투입될 예비대였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있는데 정상 쪽에서

지옥과 같은 전투 파열음이 시작되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우리도 그 박격포와 소총의 소음 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알았다."

 

킬로중대는 M중대의 임무를 교대해 받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정오 경에 K중대는 진출을 시작했다.

 

그렇게 고지로 올라가는 중간의 작은 둔덕에 도착했을 때 K중대

1소대는 한 저격수의 사격을 받아 돈좌되면서 로켓반이 맞아 중상

을 입었고 소대장도 맞아 누군가 "Corpsman Up!"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의무병은 저격수에 의해 정확히 두상을 관통 당해 쓰러졌다.

 

월맹군 한 명이 개활지로 혼자 뛰어왔는데 그는 해병들의 집단사격

에 거의 몸이 뜯겨져 죽었다. 부상자를 도우려고 다시 한 명이 앞으

로 나가다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3.5인치 로켓반이 사격

을 했고 이 틈을 이용해 소대는 뒤로 물러났다.

 

1소대장은 퇴각명령을 내렸고 모두 빠르게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린 내려가 앉아서 밤을 기다리면서 또한 더 내려올 동료를 기다

렸다.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들려 내려왔고, 정말 좋게 볼 장면이 아

니었다. 죽거나 심하게 다친 동료들 중에는 나와 친한 사람들도

있었다."

 

2소대의 경우는 첨병 데일 파티 병장이 기관총 벙커를 먼저 발견해

은밀하게 기습을 유도함으로써 그걸 파괴할 수 있었다. 이때 적의

사격 가운데 오리 린 상병이 혼자 은밀하게 기어가 적의 거점에 간파

되지 않고 도달했다. 그는 45구경 권총 하나만 들고 있었는데 그걸로

적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등을 모두 사살했다. 거길 통과해 그러나

2소대가 더 올라가자 이들 역시 개활지와 함께 저격수를 만났다.

 

"우리 소대도 몇 명을 잃었고 그 중엔 내 친구들도 있었다. 우린 벙커

를 격파하고 그 숲 와지선에 대기했다. 산의 측면으로 멀리 볼 수가 없

었고 사격은 계속 날아왔다." 이 상황을 보고하자 위에서는 부상자부터

구하라고 했고 병력들은 약간 올라가 폭탄 구덩이의 부상자들을 뒤로

빼냈다. 이 과정에서 월맹군 저격수는 정말 문제거리였다. 특히 보나논

상병은 저격수에게 나보란 듯이 뛰어다니며 부상자를 뒤로 빼냈다.

[보나논 상병은 다음 작전인 5월 21일 전사했다.]

 

2소대는 약 50미터 폭의 개활지와 벙커 세 개를 만나 강력한 사격을

받았다. 상황을 판단한 버터워스 병장은 자신의 분대를 이끌고 그 개

활지에서 돌격을 감행해 결국 벙커 세 개를 모두 잠재웠다. 적이 반격

을 시도하자 파티 병장과 버터워스 병장이 자신의 분대를 동원해 정확

한 조준사격으로 이들에 대항했고 적은 크게 피해를 입으면서 결국

달아났다. 두 분대장이 아니었으면 2소대는 정말 위험할 뻔했다.

 

9연대 K중대는 방향을 바꾸어 협곡을 따라 881-북쪽고지로 이동했다.

수풀은 짙었고 고지로 가는 길은 협소했다. 이때 3소대는 다른 소대들

이 적의 사격에 꼼짝도 못하는 걸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고지로 가

는 길에 전혀 사격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올라가는데 아마도 우릴

발견하지 못하고 우린 뒤통수로 다가설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우리가 적을 과소평가한 거였다."

 

월맹군은 3소대를

덫 안으로 들어오게 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존 브랙톤 우달 중위이 지휘하는 1소대는 즉각, 자신들이 정교하게

이어진 벙커지대의 중간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숨겨진 벙커에

두 첨병이 다가서자 그때부터 사격이 시작됐다. 두 명이 치명상을

었고 그들을 살리려면 즉각 응급조치가 필요했다. 우달 중위가

갑자기 소총을 잡더니 적의 사격을 무시하고 벙커를 향해 정확한

조준을 했다. 이어 중위는 벙커로 돌격해 벙커 안에 적 두 명을 모

두 사살했다. 이어 치명상을 당한 소대원 두 명을 뒤로 빼내며 본인

이 엄호사격을 했다. 그러나 우달 중위도 월맹군 저격수에 맞아

치명상을 입는다.

 

그때 “의무병!”하는 고함이 들렸고, 의무병은 뛰어가 다친 기관총

사수를 치료했으나 기관총사수는 오히려 자신은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상은 처음 상태보다 심각해졌고 곧 기관총사수는

죽었다. 이어 의무병도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K중대 1소대 1개 분

대가 완전히 전멸한 것이다. 다시 “나머지 분대는 위로 향하라!”라는

소리가 들렸고 1소대는 다시 고지를 올랐다. 최초로 해병 6명이 고지

정상에 올랐으나 이내 사격에 돈좌되었다.

 

적은 U-자 형태로 벙커를 축성했고 그 끝은 유동적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필자도 이 전투 참가자다. 잇빨 주] 수류탄

이 날아오면서 맹렬한 소총 사격이 시작된다. 적은 벙커를 나와 수

류탄을 던지고 다시 벙커로 들어갔다. 특히 한 벙커에서 유독 그랬

다. 수류탄 하나가 떨어지면 또 하나가 날아온다. 기관총인지는 모

르나 굉장히 큰 구경의 총알도 우리 앞에서 날아왔다.

 

1소대 남은 분대들은 첨병분대 전상자들을 데려오려고 올라갔다.

"우리가 그들을 찾았을 때, 모두 왼쪽 코너에서 죽었다는 걸 알았다.

첨병분대가 들어간 곳은 거의 360도 방향으로 벙커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동안 3소대는 고지 밑으로 내려와 재편성한 다음 전사자와 부상자

를 회수하려 다시 고지를 향해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박격포가

그들을 맞았다. “박격포탄이 3미터 앞에 터졌으나, 난 안 다쳤고 몸에

상처 하나 없었다. 그러나 내 뒤에 있던 사람과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 박격포탄에 맞았다. 60밀리 박격포였다. 60밀리 포격은 처음 들어봤

다. 3소대는 대부분의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폭탄 구덩이에

마침내 도착했다. 저격수들과 기관총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사자는

정말 들고 오기 힘들었다."

 

부상 해병을 빼내려면 엄호사격이 필요했고 결국 엄호하던 병사까지

전사하는 일이 생겼다. 엄호를 위해 3.5인치 로켓과 기관총을 5분간 마

구 난사했다. 이어 백린 연막탄을 요청해 때리고 그 사이 3소대는 부상

자들을 데리고 후퇴했다. 그러나 고지에 여전히 37구의 해병 시체가 방

치된 상태. 시체를 데려오려면 또 다른 목숨이 대가로 치러져야 했다.

 

"참담했다. 가면 죽는다. 그러나 기초군사훈련에서 절대로

 전사한 해병을 두고 와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교육받았었다."

 

대대(M/3/3, M/3/9, K/3/9)는 이제 적 사격권 밖으로 빠져 야간방어

를 준비했다. 부상자를 헬기로 모두 후송했고 그건 881남쪽고지의

4월 30일 마지막 수난이었다. 해병 43명이 전사하고 109명이 다쳐

90명이 헬기로 후송되었으며, 월맹군 125명을 사살하고 약 85명은

사살추정.

 

이날 미군의 사상자는 대부분 최초 교전부대인 3연대 M중대였다.

881고지의 수습하기 힘든 조각난 해병들 시체는 33구나 되었다.

결국 5월 2일 밤 9시에 시체 조각들을 한 백에 넣어 기지로 후송

시켰다.

 

M중대장 데이빗 로저스 대위는 CP에 참모들을 모아 회의를 가졌다.

이때 메이어 하사는 미첼 소위가 어떻게 전사했는지를 장교들에게

전했다. “얼굴에 총을 맞았습니다.” 정말 속이 뒤집어졌다. 난 감정에

못 이겨 밤 동안 거의 잠을 못 잤다. 난 속으로 시를 지었고 다음 날

일기장에 적었다. 그 고지에서 전사한 사람들에게 이 글을 헌납한다.

 

 

1967년 5월 1일 - 준비

 

병력들은 881남쪽고지에서 모두 빠졌고 5월 1일 동안 하루 종일

폭탄과 포탄이 때렸다. "한 대가 폭격하면 다음 한 대가 곧바로

이어졌다. 그 고지에 사람이 살아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천 파운드 폭탄 130개나 투하했고 고폭탄 외에도 투하한 것 더

있었다."

 

M중대와 교대하기 위해 3연대 2대대 F중대가 헬기로 들어왔다.

기지로 복귀한 3연대 M중대는 케산에서 수송기를 타고 동하로

돌아갔다.

 

5월 1일 이른 아침, 881북쪽고지 경사면에 있던 3연대 E중대는

약 20발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고 그 결과로 해병 3명이 전사하고

16명이 다쳤다. 이로 인해 E중대 공격계획은 중단되었다.

 

[상황 : 861고지는 점령되고, 이제 881 남쪽고지와 북쪽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해병 5개 중대가 작전하고 있다. 잇빨 주]

 

그 동안 G중대는 881고지 남쪽과 북쪽 중간에서 벙커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때 G중대의 의무병 랄프 와이크란 병사가 있었는데 교차

사격 속에서 앞으로 질주하다 넘어졌다. 본인은 그냥 넘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중상이었다. 소대장이 부상자들을 뒤로 빼낼 때,

와이크는 전사한 다른 해병의 머리와 팔에 눌려 고통스러워했고

그래서 동료들이 보기에는 전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장면은 여류 사진기자 캐서린 레로이에 의해 촬영되어

 1967년 5월 19일자 라이프지에 실렸고 76-77년에 나온 베트남전

 사진 시리즈 책자 표지로 실렸다.)

 

바로 아래 사진이다. 가끔 인터넷에 도는데 설명이 잘못 된 경우가 많다. 881고지 사진.

설명으로 따지면 위에 살아 있던 병사는 결국 아래 사진처럼 죽었고,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후송을

시키지 않은 아래 깔린 병사 와이크가 살아난 것이다. 고지 공격선까지 올라가 이 사진을 찍은 여성

기자도 참 대단하다.

 

와이크의 친구 제리 마치는 나중에 이렇게 노트에 적었다.

"와이크는 그게 첫 전상이었고 전투에 들어온 지 2주차였다.

참 개성 있는 친구로 키는 160을 조금 넘었으나 딱 보면 해병

처럼 생겼다. 그는 소방호스 같은 친구로, 나와 매우 친했다.

우리들 넷은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에서 비슷하게 성장했다. 그는 의무병인 걸 자랑스러워했고

훈련소에서 의무병에 뽑힌 걸 자랑스러워했다."

 

이 위험한 전장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은 여성 기고자 캐서린 레로이.

 

그녀가 찍은 다른 881고지 전투 사진.

 

이 전투는 2차대전을 떠올리는 고지전이었다. 또한 미 해병대와 상대한 월맹군은 태평양전쟁의 일본군에

못지 않았다. 게다가 대중은 케산...하면 포위전만 생각한다. 그러나 800고지 시리즈 전투는 정말 엄청났다. 

 

케서린 레로이가 찍은 다른 해병 사진.

 

 

 

 

 

1967년 5월 2일 - 881 남쪽고지 점거

 

아침 동안 F중대는 공격 대기지점으로 가 최후 공격을 준비했다.

881남쪽고지 공격은 M중대와 K중대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제와 전혀 딴판이었다. 고지에는 월맹군도 없었고, 나무도 없었고,

그냥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맨땅이었다. 10분 만에 봉우리에 도착했

고 거긴 죽은 시체의 냄새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린 벙커들을

파괴했고 장비를 모았으며, 전사자들을 헬기로 후송시켰다.“

 

"그때서야 월맹군이 그 고지에 얼마나 잘 진지화하고 있었는지 주목

했다. 그 정상에 인간이 살 곳이 아니다. 그들이 만든 벙커는 3일 동안

의 포격과 공중폭격에도 버틸 정도로 훌륭해서 여전히 벙커가 견디고

남아 있었다. 벙커 지붕은 통나무를 다섯 단이나 쌓았고 땅 위로는 60

cm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벙커의 출구는 두 개였고 그 바로 옆에는

또 참호들이 있었다.

 

881남쪽고지에만 벙커가 200개가 넘었다. 그걸 파괴하는 방법은

1-2천 파운드 폭탄에 지연신관을 장착하는 것. 벙커들 옆에는 1천

파운드 폭탄이 남긴 구덩이들이 있었다. 2일 동안 폭격했지만 벙커

75개는 여전히 서 있었다. 대대장은 그 한 벙커에 들어가 봤다. 벙커

안은 사실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적의 거점들은 보통 나무가 시작되는 와지선에 있었고 철저하게 위장

되어 있었다. 상당히 많은 벙커는 통나무를 구하지 못해 쓰러진 나무

그루터기를 톱으로 잘라 얹었다. 881남쪽고지가 점령되자 일대를 수색

해 미 해병 시체 27구를 찾아냈다. 한 해병 시체에는 구멍이 난 머리에

수류탄을 넣고 인계철선을 부상부위에 연결해 놓은 것이 있었고 부비

트랩은 폭발하기 전에 다행히 발견됐다.

 

"M중대가 결국 전체 목표를 달성했고 저녁 6시 정도에 대대CP가

이동하는데 그때 본 장면은 정말로 내 인생에서 잊을 수가 없다. 고

지에 북베트남 병사 시체 딱 한 구만 보였다. 북베트남 병사 하나!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 해병대였다. 북베트남 병사들은 철저하게

자기들 시체를 끌고 간 것이 명백했다. 아마도 라오스 쪽으로 모두

회수해간 듯하다. 총도 탄약도 시체도 없었다. 오직 해병대 시체만

있었다."

 

K중대와 M중대는 881남쪽고지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2-3일 간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근처에 정찰을 내보냈지만 적은 보이지 않

았다. 고지가 점령되자 12포병 2대대 F포대의 105미리 포 세 문

을 헬기로 들어 고지 정상에 설치한 후 라오스 국경 쪽으로 방열

했다. 유일한 문제는 그 무거운 포탄을 헬기가 계속 날라야 했다

는 것.

 

 

881고지 전투 후반부에 예비대로 있던 I-중대에서 바라 본 881고지. 저런

나무도 거의 없는 초토화된 곳에서의 전투는 전술이고 나발이고 없다. 적

의 총구 섬광을 보며 뛰어 공격할 정신력 밖에는... 그게 사실 보병이다.

 

 

1967년 5월 9일, 이제 남은 881고지 북쪽 봉우리

 

3연대 G중대와 E중대는

서로 떨어져 각각 881북쪽고지로 향했다.

준비 포격으로 포병은 1,400발을 쐈다.

 

케산 지역의 적은 이제 연대급으로 추측되기 시작했다.

 

오후 3시가 가까워올 때 G중대 앤드류 맥팔레인 소위가 이끄는

1소대는 881 북쪽고지로 향하는 좁은 능선에 이르렀다. 맥팔레인

소위는 1948년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서울을 둘러 장진

호 전투까지 경험한 사람으로 당시 37세였다. 또한 중대 안에는 미

해군사관학교 동문이 세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곧 상황은 최악으로

흐른다.

 

토터 상병이 자기 분대를 이끌고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진출했으나

적 사격은 없었고, 오히려 일어나서 뛰어가는 월맹군 2명을 목격했다.

토터 상병과 분대는 그들을 추적했고 숨겨진 무기를 발견해 파괴했다.

그렇게 계속 진행하다 갑자기 적 자동화기가 왼쪽 앞에서 쏘기 시작

했다.

 

공격은 일시 중단되었고 토터는 대원들에게 탄창을 교체하라고 지시

했다. 그때 두 명이 다쳤는데 분대 2번과 토터의 무전병이었다. 재장전

후에 다시 일어서 두 번째 공격을 시작했으나 새로 받은 M-16들이 기능

고장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5명이 전사하고 5명이 다쳤으며 M-16은

세 정만 작동했다. 2분대가 올라오는 가운데 밑과 통신이 불가능한 상태

에서 토터 상병은 분대를 후퇴시켰다.

 

[M-16에 대한 완전한 기능 이해와 점검이 안 된 시점으로 보인다. 잇빨 주]

 

2분대가 올라오자 내려가던 토터는 다시 올라가 노출된 상태로 부상자

를 구조하러 몸을 돌렸다. 그러나 사격에 물러서고 다가가고를 반복. 사

격은 점차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터는 부상자를 구했으나 모두

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올라간 토터 상병은 나머지 부상자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토터는 내려왔고 중대장

에게 실종자가 생겼다고 보고했다.

 

이어진 포격과 공중폭격은 실종자가 생긴 높은 지대였고, 해리 스피어

주니어 병장은 격앙된 해병대원들을 이끌고 위의 둔덕을 향해 다시 올라

갔다. 그러나 휴이 건쉽헬기 두 대가 도착해 그 지역을 쏘기 시작했고

게다가 월맹군 저격수도 쏘기 시작했다.

 

공중지원은 점차 불가능해졌다. 오후 4시가 넘어서자 극단적으로 강한

스콜성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은 시간당 40마일 속도로 불었다. 이로 인

해 비전투손실 3명이 생겨 후송되었다.

 

오시틴 드웰과 같은 참호에 있던 해병이

“신이 모든 걸 우리 반대편에서 한다.”라고 말했다.

 

드웰은 그 장면을 자신의 책 Hill Battles에 삽화로 그려 넣었다. 험악한

날씨와 함께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13명의 해병은 둔덕을 공격하고

실종자를 찾아야 했다. 그 남은 13명 중에서 세 명은 소대장, 소대 선임

하사, 통신병이었다. 빗줄기는 너무 강해졌고 안개가 영원처럼 무겁게

깔렸다. 그런 수의(壽衣) 같은 안개 속에서 전진한다는 건 너무 불길했다.

 

실종자 두 명은 작은 개활지 풀밭에서 보였고 짙은 수풀 속으로 사라졌

다고 보고되었다. 해병들은 그들을 찾으려고 했으나 적 자동화기 때문에

오히려 분대장 한 명이 더 전사하고 한 명이 다쳤다.

 

"실종자들은 그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방이 수풀로 인해

안 보인다. 부상자를 후송하는데 갑자기 중공제 파쇄수류탄이 하나 날아

와 터졌고, 그 이후 두 명이 또 보이지 않았다."

 

월맹군이 가장 좋아하는 전술은,

상대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그를 구하러 오는 사람을 죽이는 거였다.

 

"날씨는 좀 나아졌으나 곧 포병이 때릴 계획이어서 일단 뒤로

빠져야 한다고 중대장이 말했다. 우린 실종자 네 명을 뒤에 두

고 퇴각했다."

 

[5월 5일 12시 50분에 실종된 4명 중 1명에 대한 해병대 공식 기록.

"한 해병은 소총을 양 다리 사이에 끼우고 총을 청소하고 있었다. 또

한 그는 한 손에 주머니칼을 쥐고 있었다. 그가 M-16 소총을 보는데

약실에 실탄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분대장에게 말한 다음 이전

처럼 총을 말끔하게 닦았다. 그건 (총기) 기능불량이었다. 총알이 머리

를 관통하는 걸 거기 있던 모든 해병들이 목격했다."]

 

정말 격렬한 기상이었고 결국 병력은 야간방어로 전환했다.

 

 

1967년 5월 3일 에코중대의 참화적 공방전

 

E중대 2소대장 제임스 캐논 소위의 말.

 

"점차 어두워지는 가운데 우린 이전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도착하자

밤이었고 비가 계속 내렸다. 모두는 피곤하고 비참했으며 계속 내리는

비로 뼈 쏙까지 으스스했다. 그 전에 했던 경계구역을 소대별로 다시

맡았다. 정말 비 엄청 내렸다. 우린 조명지뢰와 크레모어를 설치하고

50% 경계 50% 취침으로 밤을 보냈다. 참호에 두 명이 들어가 한 명은

자고 한 명은 경계하는 것.

 

나와 소대 선임하사(모닝스타 하사)와 통신병(호비츠 상병)이 같이

있었다. 새벽 4시, 비가 그치고 섬뜩한 고요가 고지를 감돌았다. 난

정글화와 양말을 벗어 양말에 물을 짜내고 군화를 뒤집어 물을 밖

으로 부어냈다. 사방 모든 게 조용했다."

 

2소대 분대장 빌리 조 라이크 병장은 방어선 안쪽으로 점검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고, “거기 누구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대답은

자동화기 총격이었고 라이크 병장은 배에 총을 맞았다. 라이크 병장

은 배에 총을 맞았지만 계속 서서 소리쳤다. “적이 공격한다!!!”

 

이 고함소리로 인해 중대가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다.

적의 대규모 공격에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2소대장 캐논 소위. "도전에 직면했다. 소대 방어선 북쪽 반이 폭발

했다. 난 모닝스타 선임하사에게 ‘자 갑시다!’라고 소릴 질렀고 우린

튀어 일어나 벙커 입구로 질주했다. 내가 뛰고 있을 때 내 위쪽 해병

하나가 날아갔다. 중상이었다. 난 선임하사에게 그를 돌보라고 하고

무전병에게 오라고 말했다. 우측 2시 방향에 적 기관총들이 우리경계

선을 향해 긁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적 박격포가 고지 전체에 떨어지

기 시작했다. 1분대 방향에서도 전투소음이 들렸다. 판단하건데

그건 탐침이 아니라 공격이었다."

 

의무병 왈터 영이 즉각 부상자를 향해 달렸고 첫 번째 부상자는

다름 아닌 처음에 총을 배에 맞은 분대장 라이크 병장이었다. 그

지역에 적은 이미 경계선 안쪽으로 돌파해오고 있었다. 소총과

수류탄이 난무했고 왈터 영이 라이크 병장을 치료하는데 적은

이미 몇 미터까지 접근했다.

 

영은 양 팔에 부상을 입었지만 라이크 병장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놓고 다시 다른 부상자를 찾아 어둠 속을 뛰었다. 상황

은 급박했다. 적들이 미군 안쪽에 들어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

다. 통신병 뮤즈 일병은 무전기 송수화기를 잡고 교신하면서

소총으로 월맹군 다섯을 사살했다.

 

소대 기관총분대장 로날드 콜로드지 병장은 최초 교전에서 부상

을 당했지만 기관총팀을 재빨리 전개시켜 우월한 화점을 만들었다.

자신도 기관총을 계속 쐈는데 결국 기관총이 망가져 수리가 불가

능하자 보병분대로 뛰어가 소총을 하나 찾아 끝까지 싸웠고 여섯

시간을 싸운 뒤에야 후송을 본인이 허락하고 뒤로 빠졌다. 장장

여섯 시간의 혼전으로 동이 터도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이때 E중대에 배속된 공병 토마스 웜블 상병은 적 수중에 넘어간

돌파장소로 뛰어가 탄약들을 회수해왔다. 그때 그가 가져온 기관

실탄과 박격포탄은 정말 절실한 물건이었다. 그는 그렇게 여러

번을 뛰어가서 아군 탄약을 회수해 분배했다. 나중에는 그 역시 자

신의 M-14 소총을 들어 사격에 동참했으나 결국 적 자동화기에 맞

아 전사했다.

 

[격렬한 전투에서 마구 쏘다 보면 소총이 고장나는 일은 사실

 그렇게 희귀한 일이 아니다. 총은 매일 저녁 정말 꼼꼼히 닦아

 야 한다. 소총을 대충 닦는 건 전투에서 목숨을 대가로 한 도박

 과 다름 없다. 잇빨 주]

 

2소대장 캐논 소위 역시 벙커에 머물지 않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방어를 점검하고 무너진 곳을 보강했다. 이때 캐논 소위는 관통해

들어온 월맹군 병사와 마주쳤고 백병전을 벌여 그를 때려 죽였다.

 

캐논의 소위의 회상.

 

"전상자가 많았고 상황은 절대절명이었다. 무전기를 들어 중대장

에게 지원요청했고 포병과 조명탄 항공기도 불러달라 했다. 그러나

불가능한 거다. 조명탄 항공기는 포병이 쏠 때 상공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난 둘 다 원했다. 기다렸으나 포격은 날아오지 않았고 난 ‘그럼

시팔, 조명이라도 뛰워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선임하사와 통신병에게

벙커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중대장은 1소대 1개 분대를 보내겠다고 했으나 오지 않았다. 안 온

게 아니라 우리에게 도달하려다 실패한 거다. 다가오던 분대도 심하

게 당했다. 내가 직접 중대 CP로 가려고 부중대장(잭 앤디놀피 소위)

의 벙커에 갔더니 이미 전사했다. 난 말했다. ‘하느님, 결코 포로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무전기로 중대장에게 3.5인치 로켓으로 우리 앞의

기관총을 좀 때려달라고 했다.

 

결국 로켓팀을 부중대장 전사 지점 부근에서 만났고 그들에게 목표

를 지정했다. 그런데 그때 뭔가 터졌다. 로켓팀은 모두 쓰러졌고 난

아직도 서 있었다. 정말 터무니없게도 내 몸에 아무 것도 때리지 않

았다. 난 벙커로 들어가 부상자를 돌봤다. 내가 아는 한, 내 벙커에서

살아남은 건 나 혼자다. 적 기관총 정말 살벌했다. 조명지뢰가 터져

서 살펴보니 1-2분대는 아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사방에는

움직이고 있었다.

 

내 소대는 큰일 났다. 도움이 필요했다. 난 결국 중대 지휘소에 도착

했고 보니 부중대장이 있었다. 살아서 보니 정말 기뻤다. 부중대장이

중대 지휘권을 인수했다. 현재 1-2소대는 거의 전멸 수준이고 다른

소대도 비슷했다.

 

다친 중대장 라이온스 대위는 F중대 한 소대가 우리 후방에서 돕기

위해 오고 있다고 한다. 난 이 말을 소대에 전파했다. 생존자들은 모

두 벙커에 모여 있었다. 어디에 누가 살아있는지도 몰랐다. M-16을

잡아 쏘는데 기능고장이 났다. 난 그걸 던져버리고 M-14를 잡았다.

 

월맹군 일부는 우리 방탄조끼와 철모를 쓰고 'Marine, you die.'라고

소리쳤다.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거의 지근거리 바로 앞에서 가슴에

대고 쏴야 그들은 멈춘다. 일부 대원은 야전삽이나 손에 잡히는 아무

거나 들고 그들을 때리고 찍었다.

 

백병전은 아침에 더욱 가중되었다. 아군 해병 중에는 기능고장 난

M-16을 만지다 죽은 것을 봤다. 전투에서 몇 초만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곧 F중대의 소대가 도착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절대로 조심

하라고 했다. 내 소대선임하사와 무전병은 다쳐 벙커에 있었다.

 

난 지원 온 소대와 함께 앞으로 나가 적 기관총에 대고 마구 갈겼다.

옆에서 쏘던 기관총 사수가 갑자기 ‘이런 개 같은 기능고장!’하는 소

리가 들렸다. 옆에서 총소리가 안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얼굴

에서 피가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내 쪽으로 굴러 쓰러졌고

그러자 부사수가 기관총을 잡았다."

 

새벽 4시 반부터 6시 반까지 E중대 2소대의 방어선은 붕괴되어

월경 당했다. 한 대원은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그 옆에 월맹군

6명이 죽어 있었다.

 

캐논 소위. "동이 트자, 휴이 헬기 소리가 들렸다. 로켓을 몇 발

발사하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로켓이 우릴 향해 날아왔다.

그중 하나가 우리 중대 지휘소를 때렸고 중대장과 포병관측장교

가 다치고 몇 명은 죽었다. 중대 선임의무병은 턱에 맞았다."

 

지원 나온 F중대 1소대장 존 슈웜 소위는 관통된 방어선에 반격을

시도했다. 거의 아침 8시가 다 되어 시도해 결국 적을 밀어내고 방

어선을 복구했다. 아침 동안 계속 전투는 이어졌지만 점차 소강상태

로 들어갔다. 해병은 로켓과 LAW까지 동원해 적을 밀어냈다.

 

소대원 하나는 넘어졌는데 그 앞에 월맹군 참호가 있었고 거기에

대고 난사해 네 명을 사살했다. 적 기관총을 만나자 45구경 콜트

권총만 들고 기어가 벙커의 월맹군을 죽인 병사도 있었다.

 

[이 전투에서 북베트남군 포로 둘이 있었는데, 모두 일병으로

 레 반 란과 나 후 차우였다. 그들은 325C사단 소속으로 3월

 13일 남베트남에 들어와 20일에 케산에 도착했다고 했다. 란

 일병의 말에 의하면 연대의 반 정도가 고작 16세 정도였다고

 한다. 세 번째 포로는 마이 탄 탄 일병으로 부상으로 인해 심문

 을 할 수 없었다.]

 

캐논 소위.

 

"난 내 두 분대가 거기 반드시 도달하길 빌었다. 그들이 살아 있기

를 기도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건 우리 모두 알았다. 구하고 싶었다.

계속 총소리가 들렸다. 우린 기다렸다... 마침내, 내 3분대장이 돌아

와 상황과 내가 할 일을 전했다. 난 모두 엎드려 기어서 가며 반드시

방어선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린 그렇게 했다.

 

총격전은 5월 3일 아침 11시 반까지 이어졌다. 우린 방어선 앞까지

도달했다. 모닝스타 선임하사가 벙커 밖으로 기어 나와 있었는데 그

의 얼굴을 보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린 지옥에 일곱 시간 동안

있었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선임하사는 두 달 뒤에 저격수 총알 한

방에 전사했다.

 

난 1-2분대 위치를 살펴봤다. 공격한 적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시체

가 사방에 있었고 대부분 월맹군으로 시체는 약 80구였다. 고지 여러

곳에도 시체들이 있었다. 그들이 시체를 얼마나 끌고 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흑인 해병이나 백인 해병이나 모두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는 것이다.

 

난 울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나중에 울었

다. 그때는 눈물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젊고 용감했던 해병들

과의 추억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한다. 공식적인 월맹군 확인 시체는

137구였고 노획된 총기는 236정이다. 고지 정상에 죽은 월맹군 병사

하나를 봤다. 그의 목에 직사각형 금속 박스가 걸려 있었다. 그 박스

의 반에는 무선장비들이 달려 있었고 쌀로 짓던 밥도 보였다. 그들은

거기 머물렀던 거다.

 

전사자와 부상자를 헬기로 후송하고 나자 난 파트리나스 중사와

같이 앉았다. 부소대장이 있던 자리에.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몇

명이 후송되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내 소대로만 말하면, 11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을 당했다.“

 

 

1967년 5월 4일의 공격

 

바로 이때 랑베이 특전단 캠프가 공격당했다. 박격포에 이어 적

1개 대대가 케산 마을 쪽에서 지상공격했다. 공격은 이미 캠프

안에 들어와 있던 베트콩 침투자들이 조력했다. 그들은 보초를

죽이고 폭탄통을 이용해 철조망을 파괴하고 들어왔다. 이 베트콩

특공대는 랑베이 캠프 통신벙커와 지휘벙커를 파괴했고 핵심 그린

베레 대원들을 죽였다. 팀장과 부팀장도 죽였다. 안에 침투한 적의

첩자는 딘 논이란 자로 ClDG 병사에 모병해 들어와 캠프를 스케치

하고 방어와 보급 정보를 월맹군에 넘겼다.

 

특전단 팀장 빌 스텝토가 30명을 이끌고 비무장지대 북부를 정찰

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정찰 결과 월맹군 1개 사단이 존재한다고

하자 케산의 해병대 지휘관인 대령은 “말도 안 돼.”라고 말했다.

 

케산의 해병대 진지에 도움을 요청한 건 새벽 3시 30분이다. 그러나

포병을 위한 포격 제원은 보내오지 않았다. 랑베이 그린베레 캠프에

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미국인은 빌 스텝토 뿐이고,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신체 불구판정을 받고 제대했다.

 

랑베이 캠프 공격 동안, 케산의 해병대 지휘부는 단일 전투단으로

개편되었는데 불만들이 많았다. 골든 소령의 말. "케산진지 안에

여러 부대들이 섞여 있었다. 일부는 보안이었기에 그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나도 몰랐다. 해병 중령은 거기서 아무 실권도 없었다.

정말 문제였다. 병력을 컨트롤을 못하는 거다. 병력이 움직이면

기쁘기까지 했다. 우린 병력들이 뭘 하는 건지 전혀 몰랐다. 이

질문에 대답은 정말 간단하다. 다양한 부대를 하나의 명령권으로

묶어 움직여야 했다."

 

5월 4일, 3연대 2대대는 881남쪽고지를 수색하고 881북쪽고지

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시도한다. 3연대 2대대 E와 F중대에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밤이 올 때까지 고지 모서리에 도착했다.

이날 케산 진지에 해병 26연대 병력이 처음으로 들어왔다.

 

[잘 알려진 케산 포위전의 주역은 바로 미 해병 26연대다. 잇빨 주]

 

 

1967년 5월 5일 881고지 북쪽 점령

 

E중대장 애리놀피 중위는 소대장들을 모아 881고지 공격을 설명

했다. 계획은 2개 중대 공격이다. 비교적 병력 손실이 없는 E중대

와 약 250명 규모의 F중대가 나란히 공격하는 형태. E는 오른쪽 F

는 왼쪽. 밤에 준비포격이 있었고 두 중대는 공격 위치를 잡았다.

 

당시 E중대 2소대장 짐 캐논 소위는 전날의 적 기습으로 보유한

소대 병력은 28명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 고작 17명이었다. 공격

동안 포병은 아군 50미터 앞을 계속 포격하며 고도를 높여 지속

할 계획이었다.

 

2소대가 공격하다 소총사격을 받았고, 소대장 크리톤 소위는 앞

으로 질주했으나, 앞에는 견고하게 구축한 월맹군 벙커 10개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3소대도 몇 명이 쓰러졌고

결국 2--3소대는 뒤로 후퇴해 포격과 공중지원을 요청했다.

 

크리톤 소위는 몸을 노출하며 소대를 다시 공격에 이끌었고 적

10미터 앞까지 도달했다. 다른 소대원들은 포복했지만 소위는

서서 뛰면서 병사들에게 공격하라고 독려했다. 부상자들에게는

잘 버티라고 용기를 줬다. 이때 수류탄이 하나 날아와 터졌고 소

위는 쓰러졌다. 그런데 크린톤 소위는 다시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

나 다시 자동화기 사격을 피해 앞으로 뛰었다. 결국 2소대는 벙커

를 평정하고 적의 거점을 점령했다.

 

오후 2시 45분 마침내 881북쪽고지가 점령되었다. 잭 애디놀피

소위는 폭격으로 파괴된 그 정상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역겨웠다. 죽음의 냄새가 사방에 풍겼다. 의심의 여지없이

 1-2천 파운드 폭탄의 대가는 끔찍했다. 군복과 몸의 쪼가리

 들을 발견했다. 그 외에는 뭐 적의 흔적 같은 게 없었다."

 

 

전투 승리

 

그 고지들 일대는 적이 이동하던 통로였다. 전투는 이겼고,

그 승리는 각 해병대원들의 영웅적인 단호함 때문이었다.

 

로저스 대위는 이렇게 썼다: "해병대원 각 개인을 보면 난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18세 19세였고 많아야 20세였다.

내가 해병대에 있으면서 경험한 각별한 전투였다. 우린 우리 일을

했고 위험을 알고 들어갔으며, 날려버렸다. 해병대원이 죽거나 다

친 동료를 끌고 가는 걸 본다면, 그 전우애가 얼마나 각별한지를

알게 된다. 진짜 형제 같다. 그리고 그게 해병을 구성하는 진짜

자부심이다."

 

 

숨어 있는 죽음의 냄새. 1967. 5. 9.

 

주요 전투를 이기고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했지만,

죽음의 천사는 아직 케산에 몰래 숨어 있었다.

 

5월 9일 3연대 2대대 F중대는 881고지에서 서쪽으로 2개

소대를 내보냈는데 시냇가와 함께 자주 다닌 흔적이 있는

길을 발견했고 길은 인접 778고지로 향하고 있었다.

 

3소대가 앞에서 가다 서너 방향에서 자동화기 사격을 받았으나

대단하지는 않아 첨병 분대는 1열로 계속 진행했다. 그러나 고지

대에서 쏘는 사격은 점차 강해졌고 그 결과 전상자가 상당히 생

겼다. 포병 관측장교 해리스 소위의 다리가 심하게 부서졌고 여러

명이 맞았다. 3소대장 캐롤 소위도 양 다리와 팔에 맞고 선임하사

왈츠는 어깨와 입에 맞았다. 이제 소대에 의무병은 딱 한 명 남았다.

 

3연대 2대대장 얼 드롱 중령은 E중대에게 F중대를 증강하라고

명령했다. E중대장 애디놀피 대위는 포격을 요청하고 F중대

전상자들의 후송을 도왔다.

 

캐논 소위의 말.

 

“우린 앞으로 나가 일단 F중대 앞의 높은 고지에 올라 바쁘게

방어를 구성하고 엎으려 앞을 주시했다. 난 야전 안경을 벗고

앞의 폭스트롯 중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려고 앞을 주목해

관찰했다.

 

내가 본 건 소름이 끼쳤다. 월맹군 병사가 F중대에 기어와 부상자

를 칼로 난자했다. 당시 F중대는 지형 중간에 가로막혀 꼼짝 못 하

고 있었다. 월맹군이 기어와 부상자를 공격하는 걸 내가 직접 봤고

난 M-60을 들어 F중대에 위해를 가하는 월맹군을 향해 쐈다. 난 기

관총을 아주 길게 갈겼고 능선과 수풀에 총알이 튀었다. 거리는 1,

100미터 정도. 난 화기소대 선임하사에게 다른 사람도 쏘라고 했다.

 

중대장이 뒤에 와서 소리쳤다. ‘총 내려 캐논!’ 난 ‘좆 까십시오.’라고

대답하고 계속 쐈다. 그건 중대장에게 감정을 표시한 게 아니다. 중대

장이 못 본 걸 내가 봤기 때문이다. 월맹군이 물러가자 난 사수들에게

그 일대를 잘 보고 있으라고 했다. 중대장은 대대와 교신하고 나서 내

게 ‘짐, 니가 지휘관이니까 저들을 빼와.‘라고 말했고 난 ’중대장님은

날 지원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중대장은 F중대 전체 중대가 돈좌되어 움직이지 못 한다고 했다.

중대장은 대대장이 한 말을 고스란히 내게 전했다. ‘저 아래 캐논

소위를 내려 보내.’ 난 1소대장 프랭크 렌어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했다. 난 항상 철모끈에 pen flare를 꼽고 다녔다. 그걸 몇 분마다

터트렸고 프랭크는 길을 수정해줬다.

 

갑자기 내 앞에서 빵 하고 총소리가 났다. 첨병이 쏜 거다. 그 첨병

은 총을 두 자루나 가지고 다녔고 하나는 어깨에 걸쳤다. 하나는 적성

소총으로 잠시 적을 혼동시키기 위한 거다. 첨병이 한 곳을 지시하는

데 거기 북베트남군의 묘지가 있었다. [총 203개의 무덤이 있었다.]

 

난 프랭크에게 연락해 F중대 후미로 들어간다고 통보해달라고 했고,

거기서 캐롤 소위와 해병 세 명을 만났다. 그 중 두 명은 다친 상태.

난 F중대를 돕는 게 기뻤다. 바로 6일 전 그들이 우릴 도왔던 걸 기억

하기 때문이다.

 

이후 내가 있던 803고지 정상에 돌아오자 대대장은 헬기로 106밀리

무반동총과 81밀리 박격포반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도 고지 북쪽에서

강력한 사격에 고전했고, 건의해서 내가 앞으로 나가겠다고 하자 중

대장은 사격이 너무 심해서 불허한다고 대답했다.

 

움직일 시간이었다. 난 반 개 분대와 기관총 하나를 이끌고 나갔고

그때 전투 사진작가도 하나 따라 나섰다. 우린 F중대를 향해 나갔다.

우리 분대 병력은 F중대를 지나쳐 앞의 모서리처럼 생긴 적 거점을

향해 공격했다. F중대는 적색 연막탄을 터트리고 손과 수기신호로

우리와 의사를 주고받은 다음 공격에 동참했다.

 

그렇게 공격하는데 우리 머리 위로 기관총알이 슝슝슝 날아갔다.

F중대에서 쏘는 것 같았다. 난 내 위의 한 흑인 해병에게 물었다.

 

“저 기관총 누가 쏘는 거야?”

 

그러자 그가 응답했다.

 

“왜! 알아서 무엇하게?”

 

그래서 내가 다시 말했다.

 

“우리를 살리고 있잖아!”

 

안도감이 들었다.

병기하사관으로 기억한다.

 

F중대를 지나서 우린 일어나 발포하면서 돌격했다.

내 소대원들도 뛰었고 쏘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점령했다. 이후 우린 헬기를 타고 88고지로 이동했다."

 

 

F중대는 24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다쳤다.

 

 

HILLS BATTLES 결과]

 

전상자 [미 해병] : 전사 168명, 부상 443명, 실종 2명.

 

적 전상 : 월맹군 시체 확인 807명. 전사추정 611명. 포로 6명. 귀순 1명.

 

지원: 포탄 23,472발. 공중투하 1,195톤. B-52폭격 23소티.

 

 

전투 동안,

케산 활주로에는 하루 평균 35대의

수송기가 약 20만 톤의 보급품을 날랐다.

 

 

이제는 길의 형태로 남아 있는 과거 케산진지의 활주로 사진. 전장의 진짜 주인은 나무와

풀로 된 식물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보통 몇 달 싸우고 떠나버리니까...

 

케산진지 포위전이 끝나던 시점. 9번국도를 따라 케산진지에 도착한 미 육군의 1기병사단.

 

 

라이프지가 촬영한 DMZ 근처 미 해병 3사단 사진. 1967년 봄 이전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