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케산의 해병 : 공동묘지 861과 881고지||베트남전쟁

구름위 2013. 11. 25.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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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베트남전쟁의 케산이란 명칭을 기억한다.

미군의 디엔 비엔 푸라고도 일컬어지는 케산. 닉슨

과 미군이 전술 핵폭탄 투하까지 고려했었다는 케산.

 

그러나 그 포위전이 케산의 전부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미 해병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미 해병대

출신을 만나서 케산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경우

그 해병은 반드시 물을 것이다.

 

"Do you know that HILLS BATTLES of 1967 ?"

 

그렇다. 미 해병대는 케산에 들어앉아 포위방어전

만 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의 시점은 1967년 4월로

이때는 케산진지의 해병대는 소수였고, 또한 케산

진지만 점령한 것이 아니라, 주변 고지들을 공격해

점령했었고, 포위전이 되면서 그 고지들을 포기하고

진지로 축소된 것이다.

 

이 글은 제목보다 상당하다.

 

케산진지 주변의 고지에서 미 해병대가

총 158명이 전사하고 443명이 다쳤기 때문이다.

 

- 전사에서 여러 부대와 제대가 여러 번 언급

  되면서 짜증이 나거나 복잡해 보일 수 있는데,

  이 글은 약간  만 집중하면 제대 명칭에서 별로

  안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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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l 881 KHE SANH 1967

 

 

이 내용은 케산 참전자 협회의 회보에 나온 내용으로

제목은 [케산 Hill Battles 30주년]이다. 레이 스터브가

공식 기록들을 찾아 구성한 것이다. 일부 글짜나 내용

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배경: 케산은 남베트남과 라오스 사이의 자연적으로 형성된

거친 산악지대로 다이 라오(D'Ai Lao)라는 다른 지명이 있다.

월맹군은 이른바 호치민 루트를 통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

고 남으로 내려왔다.

 

케산 일대는 월남 9번국도가 서쪽으로 흘러 라오스로 계속

들어가는데, 이 도로는 1282년 베트남의 참족 전사들이 서진

할 때 닦여진 길이다. 1666년에 베트남인들은 다시 팽창해

이 길을 따라 라오스로 들어갔고, 1827년에는 시암왕조가

베트남을 침공하기도 했었다.

 

 

9번국도. 케산 마을. 케산 미 해병대 진지. 랑베이 특전단 캠프... 왼쪽에 수직으로 라오스 국경선...

 

 

라오스 쎄뽄(Tchepone)까지 이어지는 9번국도는 1961년 5월에 일대

를 북베트남군이 점령했고 미군은 이에 대처하고자 1962년 7월 케산

마을에 미 육군 특전단 A-팀을 투입해 북베트남 이동로를 견제하려

했다.

 

그 지역 브루 산악족들은 국경선 양쪽에 살고 있었고 미국인들에게

호치민 루트 정보를 모아 주었다. 근처 프랑스 커피농장의 주인도 9

-번국도를 따라 라오스 사바나켓까지 여행해 정보를 주었고, 1962년

12월에는 이 특전단 기지에 월남군 공병이 활주로를 만들었다.

 

1964년 3월에 케산의 특전단 A-팀 팀장 플로이드 톰슨 대위가 북베트

남에 포로가 되었고, 근처 커피농장의 프랑스 주인 Eugene Poilane이

9번국도 상에서 살해당했다. 그는 1918년 케산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의 농장을 받아 운영하며 자식을 10명이나 두었으며, 그중 다섯 자식

은 그가 60이 넘어 본 자식들이었다. 64년 말 특전단 캠프는 여러

벙커를 더 만들어 보강했다.

 

1965년 12월 22일, 케산의 특전단 팀은 짙은 정글에서 월맹군 정찰대

와 조우해 전멸시켰다. 그리고 66년이 되자 1월부터 월맹군은 특전단

캠프를 120밀리 박격포로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케산은 유입하는

북베트남군을 막기 위해 정말 중요해졌다. 특전단은 라오스까지 정찰

해 정보를 모았고 적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특전단은 개별적인

첩자를 만들었고 지역경찰과도 연계하며 미 공군과 CIA와도 협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MACV-SOG는 푸 바이에 1번 전진기지를 1966

만들었고, 발진할 때에는 케산 특전단 캠프로 들어간 다음 침투

했다.

 

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은 해병제3상륙군을 설득해 케산 비행장에

해병 3연대 1대대를 투입하고, 1966년 10월부터는 베트남 5특전단

직할정찰대인 프로젝트 델타를 이용해 케산 근처 비무장지대를 정

찰했다. 이 1966년 12월에 델타의 특전대원 3명이 실종되었고, 특

전단은 캠프를 랑베이로 재전개했다.

 

케산 근처의 북베트남군은 정말 벌떼처럼 증가했다. 지압 장군도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지압과 그의 친

동생은 바로 그 다이 라오 지역 수용소에서 라오스군에 의해 투옥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 1월이 되자 교전은 종종 일어났고 케산에서 첫 미군 전사자

가 나왔다. 바로 미 해병대 제3정찰대대 중대장인 마이클 존 스캘론

대위였다. 이때 헬기가 하나 격추되자 미 해병대는 2월 초 해병 9연대

1대대를 투입했다. 이때 활주로 부근에서 교전이 일어났고 적은 일대

에 매우 많다는 게 알려졌다. 3월 중순에는 교전으로 해병 18명과 미

공군 조종사 한 명이 전사했다.

 

보고서는 이렇게 올라갔다.

[월맹군은 우리 진지보다 높은 산악에 준동하며

 그곳을 요새화하고 있다.]

 

당시 한 SOG 정찰팀장은 라오스로 들어가기 전에 현지민 대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케산 북쪽 881고지와 남쪽 861고지를 정찰했다. 이

정찰팀은 수도 없는 벙커와 적을 발견했다. 그러나 정찰 결과에 대한

반응은 달랐다.

 

"... 정말 아주 많이 수도 없이 공중폭격을 하고 포격과 탄막을 거기

퍼부었다. 심지어 우리가 정찰하는 동안에도 우리 앞에 포탄이 떨어

졌다. 그러나 해병대 대위는 우리 말을 듣고 ‘말도 안 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린 분명히 보고 했습니다.’라 말하고 걸어 나왔다. 일주일

정도 지나 해병 소총중대가 그 고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갔다."

 

 

1967년 4월 24일: 미 해병 9연대 1대대 B중대 1소대와 3소대가

861고지 서쪽에 들어갔다. 2소대는 케산진지 방어를 위해 남아

있었다. 그 작전은 악몽이 된다. 첨병이었던 톰 라이언을 이렇게

훗날 말했다. "대령은 2개 소대를 보내면서 ‘두 소대가 각각 양편

을 맡아서 정리하고 와!’라고 말했다. 정말 미친 소리였다!"

 

 

이 그림은 이 전투 8개월 정도 뒤인 1968년 1월의 상황. 테트 공세 전에 미 해병대이렇게

케산진지 부근의 고지들에 (당연히) 병력을 내보내 전초로 삼았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는

고지 861은 깃발 그림 왼쪽에서 두 번째이고, 이와 함께 두 봉우리로 된 881고지에서도 전투

동시에 일어났다. 케산에서 라오스 방향. 1968년 초 테트 공세가 일어나기 직전에 케산

진지는 미 해병 26연대 관할로 넘어갔다.

 

 

 

이 2개 소대는 저녁 6시에 합류해 거기서 밤을 보냈는데,

모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적이 이동하는 소리

가 들렸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정찰을 시작하면서

861고지로 향했고, 비가 오는 가운데 일부 해병은 C-레이

션을 먹으면서 행군했다.

 

이때 행군하다 3소대 첨병이 카키색 군복을 입은 월맹군 4-5명

발견했고, 소대장 카터 소위도 다가오는 적을 봤다. 적이 해

보고 50미터 거리에서 먼저 발포했다. 이때 옆으로 기동하

던 카소위는 들것에 실린 적으로 보고 사살했고, 소대원 한

명도 백린수류탄으로 인해 전사했다. 이때부터 강력한 사격

속에 해병대는 돈좌된다.

 

이때 소대 박격포는 적의 기관총좌를 향해 포격했고, 예비포탄

가지고 있던 윌크 일병이 포탄을 포반에 전달하러 뛰어가다

중상을 당했고 다른 병사가 다시 뛰어가 포탄을 전달했다. 포탄

이 기관좌에 적중하자 적 사격이 조용해졌다. 이 와중에 1소대

도 사격을 받아 무전병이 전사.

 

전투는 혼란이었다.

3소대 기관총 사수 브라운 상병의 말.

"우린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우리의 이동은 숙련되지 못했고, 적이 어디서 쏘는지도 몰랐다."

 

이 두 소대는 총 4명의 전사자에 이르렀다.

 

 

그 24일 오전 일찍, 토마스 킹 소위가 81밀리 박격포반과 포탄 120발

을 휴대한 30명을 이끌고 861고지 남쪽 몇 킬로미터 지점의 700고지에

랜딩했다. 그러나 이동 중 9시 반 정도에 동굴에서 쏘는 적의 사격을

받았고, 킹 소위는 포격을 요청하면서 2개 소대가 고전 중인 861고지

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5명의 소대 지휘부에게 정찰을 명령했다.

 

그러나 오전 11시 경 이들은 2-30명의 참호를 판 월맹군에게 매복을

당했다. 첨병이 맞았고 한 병사는 진흙으로 인해 소총이 기능고장 났

고 한 병사는 월맹군 총알이 소총 소염기를 때려 총을 못 쓰게 만들

었다.

 

"결국 우리는 밑으로 퇴각하기 시작하며 최대한 빨리 뛰었다. 사격은

정말 강했으나 우린 일어서서 그냥 죽어라 뛰었다. 그런데 국gook들

의 그림자가 보였고 우린 포위된 듯 했다.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다.

두려움 속에 우린 계속 뛰었다.."

 

이때 무전병이 가슴을 맞고 쓰러졌고 다른 병사들은 사라졌다. 병사

마크스는 무작정 앞만 보고 뛰어 넘어지고 찢어지면서 계속 갔고 사

방에 총알이 때렸다. 결국 61밀리 박격포반이 보였고 마크스는 쓰러

지면서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모두 전사했습니다. 4명 모두.

정찰조 모두 죽었습니다."

 

마크스는 아스피린을 받고 쉬라고 명령 받았지만 동료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킹 중위는 네 명의 시체라도 찾으려고 분대를 내보냈

다. 매복 장소에 갔을 때 시체 2구는 보였지만 나머지 둘은 안 보였다.

 

게다가 다시 사격을 받자 분대는 퇴각했고 킹 소위는 참호화 된 861

고지의 월맹군에게 포격을 요청한다. 이때 B중대장 체이어스 대위가

무전으로 자신이 헬기를 타고 직접 날아가겠다고 통보를 해왔다.

 

헬기는 적성 50기관총 사격을 받았으나 중대장 세이어스 대위

무전병은 랜딩했고 헬기는 날아가버렸다. 킹 소위는 즉각 적 대공

기관총 위치에 대고 박격포를 발사했다. 적 병사 하나가 공중에 튀

오르는 게 목격되었고 분대가 수색했으나 적은 더 이상 없었다.

 

킹 소위는 다시 9명을 이끌고 이전 매복장소를 정찰했으나 사격은

없었고 아군 시체 2구를 회수해 돌아왔다. 시체 한 구는 정글화 외

에 모든 것이 벗겨진 상태였다. 다른 시체도 일부 장비를 벗겨갔다.

20분 뒤 다시 한 번 찾았으나 적이 시체 2구를 끌고 간 듯 했다. 킹

소위는 세이어스 대위에게 퇴각을 요청했다.

 

"그런 상황이 싫었다. 너무나도 조용했다. 심지어 벌레도 안 운다.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적은 분명히 준비하고 있었다."

 

적당한 지형에 이르자 킹 소위는 시체를 후송할 헬기를 요청했다.

 

"헬기의 주파수도 들어가자 조종사가 연막탄을 까라고 했다. 헬기

가 머리 위에 나타났고, 조종사는 다른 연막을 하나 더 까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헬기 바퀴가 거의 땅에 닿을 무렵, 정말 861고지 온 산

이 중형 자동화기와 함께 폭발하듯 쏘기 시작했다. 헬기는 서른 세

군데나 맞았으나 승무원은 안 맞았다. 우린 그저 엎드렸다. 정찰기

가 무전기에 등장해 고지 정상에 완편 중대급 월맹군이 보인다고

알려왔다."

 

중기관총을 포함한 적의 사격에 더 전사하고 더 다쳤다. 헬기는

간신히 떠났고 다시 생긴 전상자를 위해 소대는 다른 랜딩존을

찾기 위해 이동했다. 다른 헬기가 오자 다시 적의 사격이 엄청나

게 날아왔고 다시 전사자와 부상자가 생겼다. 헬기는 착륙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밤을 보내기 위해 전사자와 부상자를 옆에

누이고 참호를 팠다.

 

"비가 왔고, 정말 비참했다. 난 한국전에도 참전했었다.

그러나 그 날이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알 코펠. 9연대 1대대 B중대 화기하사관]

 

 

다른 소대는 야간방어 장소를 고르다 몇 분 지체했는데, 곧바로

소총과 박격포와 중기관총이 반대편 능선에서 날아왔다. 모두

점프해 엎드렸고 나무로 가 응사하려 노력했다.

 

“우리가 뭘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우린 그저 이동했고 앉았고

사격이 시작됐다. 앞을 보니 수풀에 총구 섬광 두 개가 보였는데

참호에서 쏘는 것 같았다. 응사했지만 적의 총알은 매우 가깝게

떨어졌다. 가만히 있는 게 장땡이었다. 총을 쏘면 섬광으로 우리

위치가 노출되어 바로 사격을 정확히 받는다. 어리둥절했다. 두

명이 맞아 비명을 지르는데 나도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멍했다.

 

결국 뒤로 빠지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난 장비를 반이나 거기 두

왔다. 돌아가서 가져온다는 건 불가능했다. 계속 움직여야 했다.

박격포반 두 명이 다쳐서 의무병이 치료하는 게 보였다. 한 명이

뛰다가 발에 맞아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한 명은 팔과 다리에 여

러 방 맞아서 심각했으나 정신은 차리고 있었다. 모르핀을 두 방

맞았으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완강했다. 그리고 매초 마다 고통

으로 찡그렸다."

 

급조들것으로 부상자를 날랐다. 한 기관총 사수는 기관총을

건네고 한 다리를 맞은 로켓분대 부상자를 업었다. 후송할

랜딩존으로 가는데 월맹군의 매우 정확한 박격포탄이 따라

왔다. 브라운 상병.

 

“우린 정말 무서웠다. 어떻게 도리가 없었다. 그냥 그러는 수

밖에. 우린 길을 따라 내려갔고 후미에 의무병은 정말 힘겨웠다.

아군 항공기가 나타나서 폭격하는데 너무 가까웠다. 내 분대에서

6명이 죽었다. 빨리 뛰어서 내려가자고 말했다. 제트기가 우릴

폭격해 내 분대 반을 날려버렸다. 우릴 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폭탄 두 개가 더 떨어졌고 너무 늦었다. 소대장과 무선은 끊겼고

말로 의무병이 필요한 중상자가 저 위에 생겼다고 들렸다. 의무병

을 찾으라고 뒤로 전달했다. 의무병이 올라오자 우린 같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사방에 장비들이 흩어져 있고 사람 몸 조각들도

널려 있었다. 소대 선임하사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고

소리쳤다. 우린 쓸만한 장비를 들고 랜딩존으로 부상자를 운반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가 오후 5시로, 265전대의 헬기 조종사인 하우스 대위는

네 시간 간격의 재보급을 위해 가고 있다 비상 의무후송 요청

을 받았다. 하우스 대위는 윙맨인 닉 대위와 같이 날았다. 861

고지 근처에 랜딩하자마자 적의 사격이 쏟아졌다.

 

"세 명을 실었는데, 조종석 포함해 사방의 모든 유리가 박살

났다. 그들은 분명히 철갑판을 쐈다. 랜딩존에 착륙했을 때

아무도 맞은 사람은 없었으나, 이후 우리 기총수가 무릎 아래

에 12.7인치 대공포를 맞았다. 헬기가 착륙해서 후미 도어를

내릴 때 사격이 시작됐고 우린 861고지를 말굽형태로 보고

있었다. 왼쪽에서 쏘더니 사방에서 발포했다."

 

승무원장 로건 하사가 50기관총으로 응사하는 가운데 승무원

더글라스 듀르드가 내려서 부상자를 태웠다. 부상자들은 25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자동화기 총알들이 동체를 때렸으나 다행히

옆이 긴 풀들이 있어 듀르드는 여러 번 부상자를 데려오기를

반복했다.

 

곧 랜딩존에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격은 여전히

강력했다. 듀르드는 세 번을 그렇게 부상자를 나르고 다시

마지막 사람을 찾아 헬기로 돌아왔다. 그러자 승무원 장이

조종사에게 이륙해도 좋다고 보고했다. 듀르드는 지쳤지만

이어 부상자들을 돌보고 시작했다.

 

B중대 1소대와 3소대는 야전삽이 없어 수통컵과 대검으로

최대한 참호를 팠다. 이 두 소대는 단기임무라고 생각해서

군장도 없이 단독군장에 왔기 때문이다. 다리에 총알을 맞

은 3소대 병장 하나가 “우린 모두 죽게 될 거야!”라고 말했

다. 81밀리 박격포와 함께 들어왔던 B중대 3소대는 세이어

스 대위가 대부분 데리고 케산 기지로 돌아갔다.

 

4월 24일의 결과 :

 

미 해병 전사 14명, 부상 18명, 실종 2명, 월맹군 약 100명 전사.

지원 : 105밀리 포 660발. 전투기 8소티. 6,500파운드 투하.

 

 

이건 미 해병대 사진인데, 2차대전도 이오지마도 아니다. 바로 1967년 881고지 전투시에 따라왔던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소총을 보면 즉각 알 수 있다. 수 많은 폭격과 포격으로 초토화된 가운데

미 해병대는 고지를 점령하려고 쓰러지고 쓰러지면서 올라갔다. 세 고지를. 861. 881S. 881N.

 

 

 

안개 속에서 1/10명 꼴로 죽다.

  - 1967년 4월 25일

 

 

케산은 3연대 3대대 K중대가 지키고,

투입된 9연대 1대대 [워킹 데드] B중대는

부상자를 후송하고 아침부터 861고지를 향해

다시 작전에 들어갔다. 안개가 엄청 끼었다.

 

오전 8시 15분, 탄약과 장비를 준비하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뒤를 봐! 뒤를 봐! 이봐, 여기야!” 소대 첨병인 톰 라이언에게

월맹군 병사 하나가 걸어와 항복했다. 그는 이제 그만 하고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Gook과 대화를 하다니! 당시 포위

됐다고 생각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린 그를 묶고 안대

를 하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우린 앉아서 기다렸다. 적이 우릴

보고 있을 게 뻔했다. 그냥 앉아 있었다."

 

투항자는 북베트남군 부 반 티크로 월맹군 32연대 4대대였다.

그는 항복하기 4일 전에 이미 부대에서 탈영한 상태였다. 헬기

가 랜딩존에 하나 내려왔고 다시 싸락눈 같은 소총 사격을 받고

잽싸게 이륙했다. 그게 그날 안개 속에서 내려온 유일한 헬기가

된다. 포로를 실어갔다.

 

B중대 3소대는 이동을 시작했고 중대장 세이어스는 전날 갔던

길로 가지 말라고 했다. 짙은 수풀 지대에서 30분 정도 걷는데

10미터 앞도 안 보였다. 소대 선임하사는 매복을 조심하라고 전

파했다. 이동하다 시체 세 구와 상당한 장비를 보고 소대원들은

장비를 회수했다. 특히 물은 중요했다. 대원들은 이미 지쳐 있었

다. 저녁 6시 정도가 되자 짙은 안개가 다시 끼어 5미터 앞이 안

보였다.

 

"중간고지 정상에 올라섰다. 죽은 사람들이 사지를 뻗고 쓰러

있었다. 우린 더 이동해 길을 따라 50미터 정도 내려갔다.

거기도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말이 전달되어 대열 마지막 세

명이 그 아군 시체를 옮기라고 했다. 70미터 정도 더 가니 또

전사자가 보였다. 우린 전사자를 끈으로 묶어 가지런히 만들

었다. 거의 어두워질 무렵, 안개가 짙게, 정말로 짙게 깔렸다.

그러자 돌아갈 길이 안 보였다. 우린 전사자 세 명을 들어

일단 갔다. 소대에 도착해 전사자를 내려놓고 야간방어선

을 구축했다."

 

25일 1소대는 3소대와 갈라졌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후송

하고 밤 9시 정도에 진흙투성이 지대에 도착했다. 너무나도

지쳤고 식량은 없고 물만 약간 있었다.

 

[앞의 전투로 병력이 더 보강되면서] 사실 해병 3연대 3대대가

K중대 스피비 대위와 함께 케리 와일더 중령의 지휘로 25일

정오에 케산 기지를 나와 이동해오고 있었으나 안개로 인해

지체되었다. 와일더 중령의 노트. "저녁이 되어 중대장과 대화

를 나눴다. 고지의 두 개 소대와 만나야 했으나 은밀히 이동하

기가 힘들었다."

 

게리 와일더 중령은 원래 제3정찰대대 대대장이었다. 3정찰대대

는 북쪽의 월맹군 324B사단을 간파했고 동하에서는 헤이스팅스

작전으로 월맹군 1,995명 전사를 확인했다. 그러다 정찰대대장에

서 3연대 3대대장으로 부임했다. 9연대 1대대를 교대하기 위해 들

러온 것으로 9번국도 북쪽 호치민루트 탐색이 목표였다. 비무장지

대와 평행으로 흐르는 9번국도는 '산타페 길'이라 불렀다.

 

해병 정찰대와 9연대 1대대 B중대는 케산진지 부근에 월맹군

메이저급 부대들이 산재해 있다고 보고했으나 케산기지 지휘관

은 그런 보고를 믿지 않았다. 기지 지휘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 일대에는 베트콩 30명 정도 밖에 없어. 82밀리 박격포

2정을 휴대했다고 들었고. 우린 정보가 확실해. 자네가 과거

정찰대대장이었던 건 알지만, 그만 해!”

 

와일더 중령이 자꾸 그렇지 않다고 하자

지휘관은 갑자기 정찰대 주임상사를 보고 물었다.

 

“주임상사, 저기 정말로 어떤 상태라고 보나?”

 

그러자 주임상사가 곧바로 말했다.

 

“네 지휘관님. 우린 두 달 전부터 저 씨발 고지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죠. 저 고지들에 북베트남군이

바글바글합니다.”

 

지휘관이 말했다.

 

“난 믿을 수 없어.”

 

 

(3연대 3대대) K중대 스피비 대위는 와일더 중령으로부터

861고지를 점령하고 그 (9연대) B중대를 도와 북서쪽으로

더 진출해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오에 고지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포격이 있었다. 그리고 오후 4시부터 소대별로

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지 바로 밑에서 다시 한 번

포격을 요청했고 오후 4시가 넘었다.

 

K중대는 가파른 산악을 올랐다. 그리고 고지 정상이 300미터

남은 시점인 오후 5시 직후부터 벙커로 강화된 적에게 사격을

받기 시작했고 고지 반대편 경사면에서 쏜 박격포들이 날아왔

다. 적을 관측하기도 힘들었고 결국 K중대는 M-79 유탄과

LAW를 발사하며 응사했다.

 

30분이 지났을 때 약 100미터 전진했고, 병력들이 사라져갔다.

K중대 1소대는 싸울 수 있는 병력이 고작 10명이었다. 15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다쳤다. 전상자를 뒤로 뺄 수도 없었다. 1소대

1분대장이 쓰러지자 분대장을 리 헉킨스 상병이 인수받아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사격은 더욱 더 강해졌고 결국 정지했다. 탄약도 부족

했고 너무 드러난 지형에다가 부상자를 도와야 했다. 헉킨스

상병이 분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두 명과 함께

있던 자리에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상병은 수류탄을 바로 집어

들어 던졌고 날아가면서 터졌다. 중대장도 다쳤지만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지휘했다.

 

전투가 고조되는 가운데 K중대 1소대에는 마이클 깁스 의무병

이 즉각 앞으로 나가 치료를 시작했다. 먼저 약간 뒤로 끌려나온

가슴에 총상을 입은 해병을 치료했고, 깁스는 다시 몸을 노출하

면서 두 번째 부상자를 찾았다. 그 부상자를 치료하는 동안 깁스

자신도 등에 부상을 입었으나 치료를 계속 했다. 이어 세 번 째

부상자는 다리가 부러진 해병이었다. 어둠 속에서 깁스는 최대한

다리를 고정하는 작업을 했고 소대 전체는 야간방어를 위한 안전

지역으로 이동했다.

 

(깁스 상병은 다음 날 아침 박격포 공격으로 전사했다.)

 

[1967년 7월 7일 해병 13연대 1대대 W중대가 861고지 근처

 에서 참호를 파는데 지갑이 하나 나왔고, 펼쳐보니 그건 마이

 클 깁스 의무병의 지갑이었다.]

 

K중대장 스피비는 와일더 중령에게 대대본부와 함께 행동하며

예비로 있던 2소대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진행이 느려 싸

우고 있던 1-3소대에 밤이 되어 도착했다. 9연대 1대대 B중대는

여전히 861고지 서쪽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태양이 사라지고 밤

이 되자 병사들은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해병들은 적 바로 아래

있었고 스피비 대위는 적 때문에 1소대와 접촉을 못 하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사격이 날아왔다.

 

다가가던 1소대는 오히려 큰 충격을 받았고 4명이 전사했다.

그러자 오히려 2소대가 1소대 쪽으로 가 구원했고 사체 4구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영웅적인 병사들이 있었다. 병사

들은 엄청난 사격 속에서 부상자와 전사자를 안전한 구역으로

끌고 갔다.

 

앨런 크로포드 상병은 깁스 의무병의 부사수였는데 사방을 기어

다니며 부상자를 돌봤다. 사방에 나타나 치료를 하고 병사들을 격

려하며 동료들을 고무시켰다. 박격포와 함께 기관총에 공격당하는

가운데 크로포드는 파편상을 입은 올리버 상병에게 기어가 붕대를

감아준 다음 안전하게 뒤로 끌어다주었다. 어디선가 "Corpsman!"

이란 고함이 들리면 그는 참호에서 뛰어나와 부상자에게 달려가

치료하고 뒤로 끌어냈다.

 

[상황: 처음에 케산진지에 있던 9연대 1대대 B중대에게 861고지를

 점검하라고 내보냈다가 피해가 크자, 케산의 전투부대인 3연대

 3대대가 지원을 위해 먼저 K중대를 861고지에 내보냈다.]

 

K중대는 오후 5시 5분에 교전을 시작해 박격포 일제사격을

3-5회 받았으며 여전히 능선 상에서 이동했다. 박격포 반격

과 포격지원은 효과가 미미했다. 적 박격포는 고지 뒤에 참호

를 파고 있는 듯 했다. 지휘부는 약간 뒤로 빠졌으나 전술항공

지원반 앨런 그레고리 일병은 여전히 앞에서 남아 항공기와

교신했다. 밤이 되자 K중대도 모두 참호를 파고 들어갔고,

C-47 스푸키 건쉽이 나타나 사격을 해줬다.

 

3대대장 게리 와일더 중령의 노트. "... 정말 상황이 흥미롭다.

밤이 되자 적들이 케산을 향해 로켓을 발사했는데, 공중에 계

속해서 날아갔다. 내 머리 위로 날아간다. 누군가 ‘머리를 들어.

놈들이 온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조명탄 항공기인 C-47이 날

아왔고 그 중 한 대는 미니건을 장착하고 있다. 적이 다시 로켓

을 발사하자 그 섬광을 보고 항공기가 미니건을 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음 날 알았지만) 그날 바로 그 시간에 1군단지역 전체에서

동시적이 공격했다. 시간이 똑같았다. 나중에 정보를 보니

적은 케산공격할 계획이다. 야간에 완전히 점령할 목적.

 

케산 진지에는 당시 보병소대 하나와 약간의 보충병 밖에 없

었다. 그런데 케산을 공격하려 했던 861고지의 적들이 우연히

우리 병력과 조우해 싸우게 된 것이다. 그들은 라오스를 통해

1개 사단이 이동해왔고 한 연대가 우리가 전투한 세 개 고지

(861, 881S, 881N)에 들어왔다.

 

다른 1-2개 연대도 목표는 케산진지 점령이었다. 차후 관측

으로 보면 우리와 싸운 고지의 적 연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다른 적 연대가 반격에 나섰다. 결국 강력한 전투로 인해 적

3개 연대 중에서 2개 연대가 거의 소모되었다."

 

25일 오후 동안, 해병정찰팀 3AI, 호크가 능선에서

월맹군 10-15명과 조우했다. (3AI : 제3정찰대대 알파중대 I팀)

 

 

"1시에 뭔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우린 작은 둔덕에

위장하고 있었다. 측면에서 뭔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모두 헬멧을

쓰고 무장해 전투준비가 된 병력이었고 몸에 온통 풀을 꼽았다. 계

속 가까이 왔다. 15미터 거리에 이르렀을 때 우린 높은 지역에 숨은

상태였고, 분대장인 로버트 와커 상병이 방아쇠를 당겼다.

 

마치 폭죽 소리 같이 소리가 섞였다.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그 다음으로 당긴 건 루디로 문제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 뒤에 대원.

그때 뭔가 충격이 왔다. 82밀리 박격포탄인지 수류탄인진 모르겠다.

심하게 맞았다. 우리 오른쪽에서 터졌고 우린 모두 충격을 받았다.

 

내 옆의 테리 버톤은 마치 얼음땡놀이를 하듯이 완전히 정신이 나

갔다. 다른 대원이 기어와서 ‘베이커, 우린 빠져나가야 돼.’라고 말

했다. 전투 시작하고 15-20분 지나서였다. 탄약이 떨어져가고 있었

다. 우린 착검까지 하고 백병전에 대비했다.

 

‘부팀장 루디가 나에게 퇴출하자고 했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3면에서 기관총이 겨누고 있었다. 난 주

저하면서 내 M-21 저격총을 들어 쏘기 시작했다. 총을 잡은 손이

불타는 것 같았다. 죽을 거 같았다. 난 열렬한 신자가 되어 기도했다.

‘하느님 제게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 저 악마들을 제가 멈추겠습

니다.’ 난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때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65전대 헬기 두 대가 팀 퇴출에 나섰다. 1호기는 피티스 대위로

너무 빠르게 통과하고 기총까지 고장 나 그냥 통과해버렸다. 그러

나 윙맨 하우스 대위가 능선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헬기

는 즉각 자동화기 사격을 받았고 정찰팀과는 75미터 거리. 램프도

어가 열린 채 하우스 대위는 정찰팀 위치를 향해 매우 어려운 수평

후방기동을 했다. 정찰팀 호크의 프레드 베이커는 승무원과 함께

정찰대원들을 헬기로 끌었다. 정찰팀 가운데 6명이 심하게 다치거

나 의식이 없었다. 적의 사격은 무자비했다.

 

승무원장 다니엘 듀르드.

 

"적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정찰팀에 AK를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당장 좆됐구나 생각이 들었다. 정말 생생하게 기억난다. 헬기 전동

장치에서 유압이 누수되어 정말 힘겨웠다. 램프도어 입구가 그 유

압액으로 미끄러워 사람이 오를 수가 없었다.

 

정찰대원들이 기내로 들어오는데 시간이 정말 영원한 것처럼 보

였다. 난 그(베이커)와 둘을 끌어다 태웠으나 아직 세 명이 타지

않았다. 둘은 부상자였고 남은 하나는 그(베이커) 자신이었다.

 

우린 다시 부상자를 찾으러 뛰어갔다. 결국 마지막 대원을 끌어

올리고 램프도어를 닫았고 이어 떠났다. 팀원 전체는 모두 다낭

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우리가 떠나자 휴이 건쉽이 적을 향해

퍼부었다. 적 위치에서 2차 폭발이 하나 일어났다고 들었다.“

 

 

바로 이때 케산에는, 제럴드 길스 대위가 지휘하는 해병 9연대

3대대 K중대가 (앞에 언급한 K중대는 3연대임) 캠프 캐롤에서

케산으로 들어왔다. 9연대 K중대 화기소대 분대장이었던 헨리

로즈 주니어 상병의 말. "...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중대는 즉각반응 투입부대였기 때문

이다. 시키면 그냥 거기로 가야 했다." 이 당시 해병들은 항상

급박하게 어딘가 투입되는 경우가 많아 혼란스러웠다.

 

케산을 맡고 있던 해병3연대는 점차 미트그라인더로 갈리듯이

점차 중대들을 새롭게 보내기 시작한다. 9연대 E중대와 B중대,

3연대 K중대, 그리고 이제 9연대 3대대 K중대. 해병대 사령부는

케산에 적이 없다고 믿고 있었으나 점차 그 위험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3연대 K중대장 스피비 대위. "우린 거기에 월맹군 중대급 이상

은 없다고 알았다. 지형이 거칠어 그런 지형에 적이 대규모로

이동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긴 정말 이동도 힘들다.

동하, 지오 린, 콘 티엥에서 경험한 적들은 모두 박격포 등의

고립된 제대들이었다. 아군 헬기들은 9번국도에 나타나는 적

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우리 케산진지 서쪽 4마일 거리의 특전

단 랑베이 캠프는 라오스 국경 근처에서 적의 위협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적과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포로 심문과 노획 서류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 이들은

북베트남 325C사단 18연대로 라오스를 통해서 4월 초에 안개

와 짙은 구름이 낀 날을 통해 일대에 들어왔다.

 

목표는 케산진지 지상공격. 연대는 마치 삼각형과 같이 861고지

와 881남쪽고지, 881북쪽고지에 위치했다. 포로 증언에 의하면

이 18연대는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120밀리 박격포 10문과

75밀리 무반동총 10정을 가졌다.

 

 

케산 진지에서 바라본 861고지...

 

 

 

고통과 번민, 1967년 4월 26일

 

4월 26일 동이 틀 무렵인 새벽 5시, 3연대 2대대 CP는 82밀리

박격포 공격 200발을 받았다. 이와 동시에 케산기지도 박격포

55발과 75밀리 무반동총 55발의 공격을 받았으나 탄들은 거의

경계선 외곽에 떨어졌다. 그러자 조명 항공기가 발사지점에

미니건을 퍼부었고, 미군 전상자는 이 포격으로 없었다.

 

 

해병 9연대 1대대 B중대는 881남쪽고지에서 안개 속에 월맹군

목격했다. 세이어스 대위가 조용히 무전기로 포병을 불렀다.

그러나 조명탄까지 띄워도 계곡은 잘 보이나 고지는 안 보였다.

태양이 떠오르자 3연대 3대대 K중대는 다시 861고지로 향하다

다시 월맹군에 돈좌되었다.

 

그러나 K중대 3소대만은 은밀하게 적 북동쪽으로 접근하고 있

었다. 여명이 튼 직후 이 3소대는 적을 향해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1-2소대도 3소대를 돕기 위해 기동을 시작했다.

 

3소대장 커티스 프리스비 소위는 적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은밀히 접근했다. 그러나 공격을 준비하던 오전 8시 15분 갑자

기 적 자동화기가 폭발하고 수류탄이 날아왔다. 이때 프리스비

소대장이 맞아 중상을 당해 결국 후송된다.

 

서쪽에서 접근하던 9연대 1대대 B중대는 이 교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3연대 K중대장 스피비 대위는 자신의 중대 현

병력으로는 861고지를 공격하기에 힘들다고 생각했다. 고지

의 방어가 너무 견고했다.

 

스피비 대위는 와일더 중령에게 건의해서 3소대를 뒤로 빼

부상자 후송을 위한 랜딩존을 만들었다. 그런데 헬기가 앉

을 유일한 작은 개활지는 861고지에서 너무 가까워 저격수

가 쏠 위험이 있었다. 거리가 100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일단 부상자들이 거기 모였는데 적 기관총과 저격수들이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부 부상자들이 싸우겠다고 앞으

로 돌아갔다. 이어 로켓이 날아왔고 3소대원들은 개활지

에 있던 부상자들을 다시 수풀이 있는 곳으로 끌어냈다.

 

그러자 스피비 대위는 휴이 건쉽헬기를 부르고 1-2소대에게

가서 부상자 후송을 도우라고 명령한다. 오전 10시 반에 도착

한 휴이 무장헬기는 참 대단한 화력지원을 해주었다. 이 틈을

이용해 1-2소대는 전사자 시체와 부상자를 밑으로 운반했으나

정황이 심각해 전사자 4구는 여전히 데려오지 못 했다.

 

 

이날 오전 8시, 새롭게 도착한 해병 9연대 3대대 K중대는 케산

진지를 나와 이동해 결국 3연대 3대대 같은 ‘K'중대와 만났다.

새로 도착한 9연대 K중대는 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목격했다.

 

9연대 K중대가 보기에 3연대 K중대는 물도 무엇도 아무 것도

없었고 적은 참호를 파고 있었다. 결국 해가 질 때까지 모든

병력은 밑으로 전사자와 부상자 장비를 들고 내려와 후송에

힘썼다.

 

결국 거기서 밤을 보내고 9연대 K중대는 케산진지 방어를 위해

돌아가고 3연대 K중대는 헬기를 타고 동하로 돌아갔다. 3연대

K중대는 의무병 두 명을 포함해 19명이 전사했고 부상자 한 명

은 나중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거기다 실종이 2명, 부상자는

42명으로 36명은 후송되었다.

 

26일 동안 가장 먼저 들어온 9연대 1대대 B중대는 여전히 거기

남아 있었다. B중대 3소대는 전날 오후에 전사한 시체를 회수하

려 5명을 내보냈다. 그러나 5분도 이동하지 않아 교전이 일어나

3소대는 급히 그쪽으로 갔다. 가보니 5명 중 1명 전사 1명 부상.

 

결국 소대는 이들을 데리고 장비를 벗어놓은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 다시 사격이 날아와 한 명이 다리에

맞아 뼈가 부러졌고, 소대원들은 30초 만에 자기 장비를 찾아

들고 기관총에 응사했다.

 

B중대 3개 소대는 오전 10시 반 모두 만났다. 이 일대는

움직이기만 하면 교전이 일어났다. 세이어스 대위. “그때

12포병 2대대 F포대가 정말 정확한 포격을 해줬다, 그게

우리 목숨을 구했다.”

 

B중대 2소대 소대선임하사인 레온 번즈 하사는

1967년 5월 8일 그날의 과정에 관해 인터뷰를 했었다.

 

"... 동이 트자 우린 861고지로 향했다. 서쪽으로 500미터 가

작은 고지에 도달해 정상에 섰다. 저격수 사격을 몇 발 받았고

우린 반대편 면으로 피했다. 3소대와 1소대가 같이 와 합류했고

우린 중대본부 중앙에 있었다. 우린 거길 내려가 861고지 중심

을 향해 이동했고, 거기서 엄청난 자동화기 사격을 받았다. 그때

1소대장과 4-5명이 다쳤고 나도 분대장 하나와 M-79 사수 하나

를 잃었다.

 

우리 소대 기관총사수인 풀레오 상병은 자기 소총을 들어 쐈고

적어도 셋을 쓰러트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풀레오는 사격을 더

하다가 몸이 노출됐고 결국 왼손 엄지손가락을 잃고 2-3 군데

더 맞았다. 소대원 하나도 박격포탄이 터지면서 얼굴을 맞았다.

 

내 분대장 오톤 병장과 M-79 사수 하나가 앞서 나가다 기관총에

맞아 쓰러졌다. 소대원 빌츠도 거기 쓰러졌다. 빌츠는 어디나 나

나서 무슨 일이든 하던 친구이고 150파운드나 나가는 거구였

다. 그에게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의무병이 올라왔는데 다리와 엉덩이에 총을 맞아 그 일로 불구가

됐다. 쓰러진 사람을 구하려다 또 쓰러졌다. 중대장과 통신병 2명

도 벼랑 같은 곳 뒤에 엎드려 있었다. 죽거나 다친 사람 천지였다.

 

서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으로 공군 통제관이었으며 참 훌륭하게

해주었다. 이때 코브라가 쏜 로켓 하나가 근처에 날아와 중대장

바로 옆에서 터졌다."

 

부상자 몇 명은 후송 안 하면 죽을 것 같았다. 상병 두 명이 능선

의 작은 랜딩존으로 가서 책임지고 전사자 5명과 부상자 15명을

헬기로 후송시키려 했다. 헬기가 나타나자 번즈 하사가 연막탄을

까고 걸으면서 헬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먼저 부상자 세 명을 준비시켰는데 랜딩존은 861고지에서 완벽하

게 관측된다. 헬기가 내려오자 부상자들이 헬기를 다해 질주했다.

이때 박격포탄이 하나 떨어져 터졌고, 번즈 하사는 헬기에게 떠나

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게 유일하게 우리에게 접근한 헬기였다. 후송할 부상자가 매우

많았으나 헬기가 내려올 수가 없었다. 이 헬기가 떠나자 상황은 더

욱 최악으로 변한다. 랜딩존 근처에 박격포탄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 거다."

 

[흔히 우리는 박격포 주특기를 그냥 평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베트남전

과 한국전 같은 이런 조밀한 전투에서 박격포는 상대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는 대단한 근접화기다. 82밀리 박격포의 경우 근처에 터지면 사람

이 공중으로 2-5미터 뜬다는 목격담이 많다. 베트남 참전자에게 ‘박격포’

는 가벼운 단어가 결코 아니다. 잇빨 주]

 

중대는 무리를 지어 모두 부상자를 움켜쥐고 걸으며 고지 모서리로

향했다. 능선으로 처음 10명이 올라서자 다시 박격포탄이 쏟아졌다.

맞지 않으려도 모두 최대한 엎드렸다. 이때 일부 부상자가 죽었다.

 

해병대 장군이 케산으로 헬기를 타고 와 9연대 1대대 B중대에

관해 브리핑을 들었다. 이때 해병대다운 일이 일어났다. 페인

상병이 그 장군헬기에 대담하게 올라타 조종사에게 야전의 부

대로 데려다 달라고 한 것이다. 페인 병장은 그 B중대에서

부상으로 후송된 사람이다.

 

결국 랜딩존에 데려다줬고 페인은 쓰러진 동료의 총을 잡아 계속

싸웠다. 그는 박격포탄이 터질 때 자기 몸으로 동료의 몸을 막아

파편을 안 맞게도 해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맞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살리고 전사했다. 페인에게 동성훈장이 추서되었다.

 

일부 부상자는 다시 맞았고 상황은 정말 불가항력이었다. 세이

어스 대위는 대대 작전장교에게 무전기로 부상자가 너무 많이

이동이 불가하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작전장교는 전사자 사체

는 버리고 부상자만 데리고 이동하라 했다. 세이어스는 그럴 수

없다고 답변했고, 최대한 안개를 이용해 다시 이동했다.

 

이를 시작으로 중대는

전상자들을 3일간이나 데리고 다니게 된다.

 

정말 엄청난 수난이었다. 세이어스 대위는 이렇게 썼다.

 

"우린 전사자와 부상자 모두를 판초에 뉘어 네 명이 들고 이동했다.

날씨가 더워 전사자 시체가 빠르게 부풀어 팽창했고, 어두워질 무렵

거의 이동이 불가능했다. 진흙탕에 비까지 내렸다. 판초에서 밑으로

굴러떨어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멈춰 다시 끌어 올려야 했다. 그게

누군지 알 수도 없었고 전사자는 군번표도 사라져 없었다. 그렇게

케산까지 가야 했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그 고지에

동료 해병을 두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B중대 1소대 프랭크 톰슨 상병은

1967년 10월 10일 이에 관해 미

해병대 역사기록부에 구두로 기술했다.

 

톰슨 : 3일 동안 내내 전사자와 부상자를 운반하며 다녔다.

 

- 어떻게 생각하는가?

 

톰슨: 최악이었지만, 우린 해야 했다.

 

- 상황이 안 좋았다. 기분이 어땠나? 어떤 생각이 들었나?

 

톰슨: [긴 침묵. 답변이 없다.]

 

- 가망이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나?

 

톰슨: 그건....

 

- 두려웠나? 해병들은 두려워했나?

 

톰슨: 총격을 받으면 누구나 다 두렵게 된다.

 

 

어둠은 빠르게 다가왔고 소대 선임하사 번즈는 들것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일부 병사나 나무를 잘라 장대를 만

들기 시작했다. 저녁 6시 경.

 

"그때 9연대 3대대 K중대 몇 명이 우릴 방문했다. 좋은

친구들이다. 그들을 보니 정말 반가웠다. 우리에게 없는

물까지 줬다. 우린 부상자들에게 물을 주며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은 9연대 K중대 7인 정찰팀으로 가진 물을 주고

정찰팀 의무병은 부상자들을 돌봤다. 다시 출발해야 했다.

 

"우린 전사자와 부상자와 그들의 장비까지 들었다. 그런 걸

들지 않은 건 첨병과 후위 엄호조뿐이다. 이동을 시작하자

비가 내렸고 안개가 짙게 깔렸다. 안개로 인해 북베트남군

우릴 보지 못 했고 그건 신이 내린 선물이다.

 

가끔 적이 총을 쐈으나 우리 위치를 몰랐다. 난 후방 엄호로 갔다.

나와 중대장과 기관총을 든 기관총 사수와 부사사가 같이 갔다. 정

찰팀과 같이 온 K중대장도 일익을 담당했다. 우린 전상자와 함께

군장을 최대한 짊어졌다. 무전병은 PRC-25를 짊어지고도 들것을

잡았다. 땅이 진흙이라 속도가 느렸다. 이어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

다. 힘겨웠지만 적을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잘 닦여진 길이 보였다.

월맹군이 왜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는지 나도 모른다."

 

 

해병들은 밤 동안 엄청난 폭우 속에서 미끄러지며 임시들것을

잡고 비탄에 젖어 걸었다. 사방에 적이 있었다. 그리고 새벽 5

시 마침내 3연대 3대대 CP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물을 마시고

쓰러져 잠에 빠졌다. 헬기가 와서 전사자 부상자 장비를 날랐다.

 

번즈 하사도 22명과 함께 헬기를 타고 후송되었다. 새로운

해병대 병력이 도착했고 마치 개미떼 같았다. 3소대 첨병

톰 라이언. "고지를 내려오는데 해병들이 보였다. 사방에서

고지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장면인가!

한 천 명은 넘어 보였다!"

 

남은 9연대 1대대 [워킹 데드] B중대는 걸어서 케산으로

복귀했다. 트럭이 있었으나 그들은 걸어서 복귀했다. 그

들은 4일간 지속적으로 싸웠다.

 

이 전투 후에, 3연대 2대대가 들어와 교대했고 지휘관은

드롱DeLong 중령으로 이때부터 작전명 BEACON STAR

로 전투는 진행된다. 그는 원래 자신이 근무했던 연대로

돌아온 경우였다.

 

선도제대가 정오에 도착했고 지휘부는 오후 3시 45분에

도착. 지휘부는 2개 중대에게 도보로 목표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마지막 세 번째 중대는 오후 4시 케산에

도착했다.

 

4월 26일 동안 작전 지원으로 포병이

1,076발 공중지원은 20 소티에 58,000 파운드를 투하했다.

 

4월 26일, 9연대 1대대 B중대는

전사 6, 부상 14명을 기록했고

3연대 3대대는 전사 5, 부상 24명이었다.

 

[워킹 데드], 9연대 1대대 B중대는

총 20명이 전사하고 실종 2명에

32명이 다쳤다. 전상 54명.

 

그러나

이 HILLS BATTLES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2] 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은 더욱 살벌합니다. 2차대전도 아니고 말이죠...

 

 

881남쪽고지에 공중폭격을 유도하는 공중통제관...

 

왼쪽부터 당시 미 해병대 사령관 웰레스 그린, 중간이 베트남 미 해병원정군 사령관 로버트

커쉬맨 , 오른쪽은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 이들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나중에 형성된 케산 정북 방향의 950고지 정상의 미 해병대원. 미 해병대는 케산 포위전보다 테트 공세

이전에 이 진지 부근 고지들에서 싸운 전투를 더 쳐준다. 173공수여단의 닥토 전투와 매우 비슷하다.

평범한 사진 같지만 샌드백 위를 한번 훑어보시길... 가려진 것 빼고 수류탄 만 여덟 개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