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니하 (Nhi Ha) 전투

구름위 2013. 11. 2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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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하 (Nhi Ha) 전투.

 

미 23보병사단(아메리칼 사단)

21연대 3대대의 14일간..... 

 

 


처음에 공격은 매우 조용하고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선도 중대의 보병들은 모래와 덤불이 있는 일대를 진출하는

것에 극단적인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더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엄폐할 곳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일대는 평탄한 개활지대였고, 모래 언덕이 끝나는 곳이었으며, 늦은 관목

들이 있었으며,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그리고 적은 최근에 그 일대로

들어와 있었다. 땅에는 포탄상자들이 널려 있었고,  이전 교전에서 버려진

물건들이 보였다.


선도 중대의 목표인 사막과 같은 지형에 있던 한 마을에 사고 없이 도착했다.

그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하여 방향을 바꾸어 절박한 그 마을 ‘니 하(Nhi Ha)로

향했다.

 

이를 이끌던 소대장은, 방향을 바꾸면서 자신도 모르게 첨병의 위치에 서고

있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는 목에 총 멜빵을 걸고 가슴에 거취하고 있었다.

 

 “(소대장인) 내가 선두에 서면 안 되는데!”

 

그러자 그것을 안 다른 소대장이 뒤로 빠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중위는 계속 가면서 말했다.

 

“첨병이 너무 지쳤어. 내가 어떻게 하는지 시범을 보이지.”


2시간도 안되어,

 

그곳에 도달했던 중위와 두 명의 보병이 늘어선 관목줄기에서 폭발하듯

분출된 총알에 의해서 전사했다. 그리고 월맹군의 포탄이 떨어졌다.

이어진 전투는 가장 값이 많이 들고 오래 지구전으로 끌게 되는 기록적인

전투가 되었다.


작전은 1968년 5월 1일 늦게 시작되었다.

 

 

<아메리칼 사단 대대의 해병대 배속>

 

 

아메리칼 사단.

급조된 사단이기도 하다.

 

 

미군 제 23보병사단,

아메리칼 사단의 21연대 3대대장인 윌리엄 스나이더 중령은,

비무장지대 동쪽에서 대대를 미 해병3사단 3연대에 배속시켰다.

 

(아메리칼 사단 - 밀리이 학살 사건으로 유명해진 사단)


스나이더 중령은 해병3연대장인

밀톤 헐 대령의 CP에서 작전 브리핑을 받았다.

 

그는 해병3사단의 나머지는 월맹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서 보 디우 강에서,

해군과 해병대의 낡은 헬리콥터의 지원을 받아 전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 해병은 피해가 컸고, 강 근처에서 적을 좁혀들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를 건너서 아마도 새로운 월맹군의 부대가 들어올 두려운 상황

이라고 했다. 보 디우에서 이미 우회로를 통해서 동 하에 있던 해병3사단의

지휘소에 대한 공격시도가 있었다고 했다. 


해병3사단은 부대가 엷고 길게 늘어선 상태가 도움이 필요했다. 헐 해병

연대장은 스나이더 중령에게 3사단 본부의 오른쪽에 방어선을 만들고

전투가 벌어지는 방향에서 오는 월맹군을 막아달라고 말했다.

 

스나이더 중령은 비무장지대 9킬로미터 아래 '마이 악사 찬'이란 마을에

지휘소를 차리기로 했고, 그곳은 쿠아 비에트 강과 만나는 점이었다.

그곳의 좁은 지류는 당시 ‘존스 크릭’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 존스 클릭은 비무장지대에서 남쪽으로 뱀 모양처럼 늘어진 곳이었다.

그곳의 동쪽에는 북베트남 통킹 만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섬이 있었다.

마을의 동쪽은 해병 1개 대대가 점거하고 있었고, 그 대대는 10킬로미터

남쪽의 동 하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대대로 존스 크릭은 월맹군의 침투로였다.

 

헐 대령은 스나이더에게

 

“니 하와 람 옥산 마을을 꼭 붙들어. 그리고 놀라지마.

 월맹군들은 그곳 뒤에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헐 대령은 말하기를 그 두 마을은 해병이 점령하고 있다가

최근에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버렸다고 했다.

 

 “거기에 그들이 있을 거야.”


한밤중에 스나이더 중령은 대대로 돌아왔고, 어둠이 내릴 무렵 헬기를 타고

'마이 악사 찬' 동쪽을 정찰했다. 당시 해병이 전투지역에 계속 조명탄을

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을 볼 수 있었다.

 

스나이더는 말투가 부드러운 웨스트포인트 출신이었다.

그는 물이 찬 논들을 보면서 그의 중대장들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가옥을 M-60으로 불사르고 있는 101사단 병사)

 

 

 

<작전의 시작>


아침에 해병 포병의 준비사격이 끝나고, 21연대 3대대는 (D중대는 예비로 남았음)

존스 클릭을 통해서 두 개의 굴대로 공격을 개시한다고 말했다. B중대는 람 옥산

마을의 서쪽 묘지 부근으로 공격하고, C중대는 화력지원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C중대에 이어 A중대가 뒤를 따라 가게 되어 있었다. 민간인들을 이미

마을을 모두 떠난 상태였다.


작전은 5월 2일 아침 시작됐고, 오후 1시 정도에 C중대는 니하 마을로 이르는

중간에 이르렀다. 마을은 길고 좁은 형태였고, 외부에 두터운 수풀이 진입을

막고 있었으며, 비교적 개활지 형태였다.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이 마을은 벌판에 두 개의 관목줄기가 벌판을 가르고 있어,

보병의 공격작전에는 매우 노출되고 위험한 지형이었다.


벌판으로 마을에 접근하고 있던 C중대는 참호를 파고 있는

월맹군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관목줄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존스 크릭에서 내려와 마을로 들어온

월맹군 270연대 4대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초 사격의 충격은 C중대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오른쪽의 소대장인 에드워드 커트리 중위는 첨병을 대신해서 니 하 마을로

계속 향했다. 그리고 첫 방의 총성이 울리면서 중위는 머리에 총을 맞았고,

그것이 무엇인가 느끼기도 전에 전사했다. 그리고 소대 선임하사도 사망

직전의 부상을 입었으나 결국 살아났다.


소대장이 전사하고, 8명의 소대원이 뒤죽박죽인 엄폐한 상태로 죽거나 죽어

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일어나서 응사를 하지 않았다. 일부 용감한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뭉쳐 응사를 했다. 잡석이 된 벽의 뒤에서도 쏘고

있었다. 전사자와 부상자들은 뒤로 끌어내졌다.


왼쪽 소대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3명이 전사하고 몇 명이 부상당했다. 소대

선임하사는 엄폐한 가운데, 할 수 없었거나, 혹은 내키지 않은 상태로 사격을

하고 있지 않았다. 소대가 흩어진 가운데 개활지에 있던 대원들은 엄폐물이

없어 그냥 머리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중대장이 C중대 지휘권을 인수했다.  그러나 그는 교전이 일어나는 와중에

마을 뒤에서 쇼크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 중위는 이전의 전투에서 높은 훈장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교전은 힘겨운 것이었다. 결국 중위는 무전기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중얼거렸다.


화력은 월맹군이 완전한 우위였다.

 

그 당시 왼쪽 소대에서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 것은

다른 소대 선임하사인, 제임스 고우드 하사와 로저 스타 병장뿐이었다.

 

기관총 분대장이었던 스타 병장은 선임하사 고우드와 함께 M-60 기관총을 들고

앞으로 나가 작은 흙무덤에서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총을

쏘고 있었고, 고우드 선임하사는 자신의 M-16을 가지고 있었다.

 

스타 병장은 M-60 탄박스를 열어 장전하고 총소리가 들리는 관목들을 향해서

쏘았다. 그들은 최대한 엎드린 상태에서 묘지의 맨 위 봉분을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 월맹군의 총알이 흙무덤을 때렸고, 그때 스타 병장은 왼쪽 팔 위에

무언가 뜨거운 파편에 맞아 소매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위에

충돌한 탄의 파편이 긁고 지나간 것이었고, 당시 그는 부상의 상태를 잘 몰랐다.


나 하의 월맹군은 람 욱산 서쪽에 진출한 B중대를 향해서도 총을 쏘았다.

한 명이 전사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중대는 존스 클릭의 강변

둑에 모두 웅크리고 있었다. 


비무장지대 쪽으로부터 월맹군의 포탄이 니 하와 람 욱산 마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부상자가 더 났고, 그동안, C중대는 뭉쳐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중대의 전방 관측장교인 존 자퀴즈 소위는 정확하게 포격을 유도했다.


그 동안 로저 헤이브 중위가 이끄는 소대가 마을 뒤에서 접근했다. 소대원들은

거점과 거점으로 약진했다. 그리고 그들은 앞에 희생자들을 끌어낼 조를 편성

했다. 3명의 전사자는 양측의 사격권 중간에 있어 손을 대지 못했고, 나머지

부상자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사진은, 미  173공수여단의 교전 사진)

 

 

<점점 늪으로 빠져드는....>

 

 후퇴해야 할 시간이었다.

 

스나이더 중령은 B중대를 떠나 A와 B중대에 화력을 유도했다. 그리고 포격

속에서 C중대에게 뒤로 빠지라고 명령했다. 3개 중대가 다시 모이기로 한

지점은 니 하 동쪽 600미터 부근의 버려진 작은 마을이었다.


스나이더는 니 하를 밤새도록 포격시켰고, 공격은 3월 3일 다시 하기로 했다.

그리고 공중폭격을 요청했다. 월맹군은 참호에 매달려 있었고, A와 B중대가

동쪽으로부터 이동하자 사격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월맹군은 마을 서쪽 벌판의

관목줄기에 숨어서 자동화기, 경기관총, RPG를 쏘고 있었다. 거기다 월맹군의

박격포탄이 불협화음을 내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도 소대는 물이 찬 도랑으로 뛰어들었고,

이어서 벌판 외곽의 관목줄기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벌판 건너에 대고 응사를 시작했다.

 

계속 먼지와 연기가 나고 있어서 월맹군의 거점은 식별할 수 있었다. 그 곳을

향하여 미군은 60기관총과 M-79유탄발사기를 쏘았다. 미군 포병도 포격을

다시 시작했고, 그 중간에 제트기가 나타나 네이팜탄과 고폭탄을 월맹군 참호

쪽에 일제 투하했다. 그 파편들이 양쪽 진영에 모두 날아왔다.


그러나 충분하지가 않았다. 월맹군은 여전히 참호에서 견고하게 버텼고, 수가

막인 전투는 6시간 째 계속 되고 있었다. A와 D중대에서 2명이 전사하고 22명이

부상 중이었다. 스나이더 중령은 두 중대에게 명령해서, 후퇴하여 니 하 동쪽의

경계선으로 가라고 했다.

 

 

<경악하는 미군>

 

 


후퇴는 공중폭격이 엄호했다. 월맹군은 제트기가 다가오는 곳을 향해 대공

사격으로 다량의 AK-47을 쏘아 집중했다. 그 대공망 사격이 제트기에 도달한

것은 많지 않지만, 한 대의 1인식 미 해병 A-7 콜세어 기가 엄청나게 맞았고

상승이 불가능해졌다.

 

이 콜세어기는 어렵게 지상착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땅에 한번 튕기면서 화염이

일었고, 전투기는 비행기 코가 먼저 땅에 박고 말았다. 그것은 보병들에게 소름

끼치고 사기가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월맹군의 용감한 보병들이 공중의 제트기를

추락시킨 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


스나이더 중령은 지휘소에서 그가 가장 신뢰하는 C중대장 데니스 리치 대위를

만났다. 그는 같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엄청나게 공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휴가를 떠나려고 준비하다가 바로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대가 월맹군의

매복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스나이더는 리치 대위에게, 3개

중대를 재편성해서 니 하를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치 대위는 자신의 C중대를 이끌고 5월 4일 공격을 개시한다. D중대 오른

쪽이었다. 이 두 중대는 측면으로 경쟁적으로 진출하다가 결국 무자비한 적의

사격을 만나 멈추었다. 2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13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재보급하던 휴이 헬기 한대가 추락했다.


리치 대위는 포병과 전폭기에 최대한 화력을 퍼부어들라고 말했다.

 

“가진 모든 것을, 당신들의 귀가 아플 정도로 퍼부어라!”라는

중대장의 소리를 C중대 그레고리 하프 상병이 들었다.

 

중대원들은 M-16으로 75미터 거리의 월맹군에게 퍼부었다.

 

“20발 들이 탄창을 얼마나 비웠는지, 총이 뜨거워서 잡을 수가 없었다.”

라고 하프 상병은 회고했다.

 

“내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총열에서 하얀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난 총을 식히기 위해 세 통의 건오일 병을 모두 M-16 약실 빗장 안으로 부었다.”


하프 상병은 로프 일병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는 M-60 사수로 가지고 있던

탄을 모두 소모해 버렸다.  그래서 하프 상병은 총을 어깨에 메고 돌아다니면서

대원들이 가진 기관총탄을 회수해 와야 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로프 일병의 기관총신은 말 그대로 붉게 타 올랐다.”


공기는 덥고 먼지가 날렸으면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찌는 듯한 더위였다.

 

하프 상병, “나는 계속 중대 지휘소로 가서 탄약을 가져와야 했다.

한번은 포격 구덩이에 고여 있는 녹색의 물이 보였다. 너무 목이

말랐다. 그래서 난 바로 세 개의 수통에 그 물을 담았다. 그리고

정수제 6개를 넣고 최대한 빠르게 흔들었다. 정말 정수제를 흔드는

동안의 짧은 시간에도 마시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 수 막힘은 결국 5월 5일 깨졌다.

 

미 공군이 니 하 부근에 2천 파운드짜리 지연신관 폭탄들 떨어트렸다.

그것은 지상을 뚫고 땅 밑으로 들어가서 폭발했다. 엄청난 연기구름이

일대를 뒤덮었다. 그 쇼크 웨이브는 정말로 지진과 같았다. 

 

리지 대위의 정찰대가 마지막 폭발 뒤에 정찰을 나갔을 때, 그들은 엄청난

숫자의 죽은 잡동사니 속의 적군 시체를 보았다. 일부는 참호지붕이 날아

갔는데 사체에 머리가 없었다. 니하 부근에 살아 있는 월맹군은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도 떠난 것 같았다.


리치 대위는 니하 마을 서쪽에 A중대와 같이 참호를 팠다.

예비대였던 D중대는 람 욱산 마을을 향해 오고 있었다.

 

 

<끝난 줄 알았으나...>


월맹군은 5월 6일 해뜨기 전, 리치 대위 중대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당시

스타 병장은 그의 M-16으로 불길이 타고 있는 완전히 노출된 논으로 공격

해 오던 여러 명의 월맹군을 쓰러트리고 기뻐 날뛰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붉고 뜨거운 파편이 스타 병장의 오른쪽 눈에 날아왔다. 그는

이 공격으로 부상당한 단 세 명 중의 한 명이었다.


방어선 부근에는 34구의 월맹군 시체가 남겨졌다. 그때 폭격 크레이터 부근과

가매장묘 뒤에 월맹군들이 숨어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자 이들은 발견되었고,

항복을 권유했으나 그들을 거절했고, 모두 사살되었다. 리치 중대장의 회상

 

“그것은 정말로 염병할 turkey shoot이었다. 나는 당시 한 소대의 외곽으로

가서 같이 전투를 했고, 결국 병사들은 그들을 하나씩 조준사격으로 쏘았다. 

그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저항했다. 결국 모두 사살되었다.”


(turkey shoot: 칠면조를 쏜다는 어원으로, 거의 사격장에서 손쉽게 조준사격해서

쓰러트릴 수 있는 아군 측에 유리한 상황을 말한다. 유리한 가운데 학살에 가까운

전투 우위에서 많이 쓰는 슬랭.)

 

 


오후 일찍,

A중대장 스나이더 대위는 니하 마을 북동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작은 마을

‘옥솜 푸옹’을 정찰하려고 나섰다. 존스 크릭의 동쪽이었다. 월맹군의 공격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고 대위는 생각했다. 그러나 개활지를 만나자 중대원들은

굉장히 예민해졌다.  벌판을 따라서 2개 소대가 전진했고, 1개 소대는 예비대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바로 이런 지형이 전개된다...)


그렇게 건널 무렵 한 월맹군 병사가 공격선에서 마을 남쪽의 공동묘지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오른쪽 소대장이었던 윌리엄 킴볼 소위는 그를

사살했고, 두 개 소대는 모두 빠르게 이동하여 묘지에 엄폐했다. 마을로부터의

사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가던 월맹군 병사는 미끼였다.

 

적은 그 공동묘지에 있었고, 갑자기 킴볼 소위의 소대 쪽으로 적의 기관총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무덤이 기관총 벙커였다. A중대원들은 논의

도랑에 엄폐해서 응사를 했다. 그 벙커에 66밀리 로우 두 발을 쏘았다.

그러자 사격이 멈추었고, 연기가 나는 벙커에서 부상당한 월맹군 한 명이

기어 나왔다. 그리고 마을 쪽의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비틀거리며 가기 시작했다.

 


킴볼 중위 소대는 그 안에 적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사격을 계속했다.

중대장은 소위에게 그 벙커 주위를 점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선두 소대장

테리 스미스 중위가 묘지를 향해 뛰어가다가 많은 총알들이 날아왔고 오른쪽

허벅지에 총알을 맞고 돌면서 쓰러졌다.

 

스미스 중위는 묘지를 향해 기었고, 그리고 계속 기관총좌를 공격하려고 마음

먹었다. 스미스 중위는 간파되지 않았고 건너편의 소대는 엄호사격을 퍼부

었다. 그러나 또 다시 은익된 큰 벙커가 작은 산의 골짜기에 있었고, 중위는

그 중간에 엎드려 있었다. 

 

 

<악몽의 시작>

  

(한 월맹군 벙커의 입구 사진. 본 기고글의 사진은 아님)

 

 

오른쪽 소대에서

한 소대원이 벙커로 뛰어가서 수류탄을 던졌다.

 

용감했다.

 

그러나 그는 어디가 월맹군 참호인지 당황한 듯 했고, 그 은익된 벙커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곧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총알이 복부를 관통한 것이다. 

스미스 중위는 격노하여 달고 있던 수류탄을 꺼내들고 묘지 옆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총구멍으로 안전핀을 뽑아 던져 넣었다. 그리고 빠르게 옆으로 굴러서

내려왔다. 그것이 폭발하자 스미스 중위는 두 번째 수류탄을 다시 까 넣었다. 

 

벙커는 침묵했다.

그리고 선도 분대에 빠르게 올라오라고 수기를 했다.

그러자 분대는 오른쪽으로 뛰어 올라왔다.


스미스 중위는 분대가 위로 뛰어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혼란이 왔다.

 

스미스 중위는 소름끼치는 쇼크를 먹었다.

 

다른 위장된 벙커에서 기관총이 폭발했고, 뛰어오던 분대는 낫으로 풀을 베듯이

그 기관총에 모두가 쓰러졌다. 모두가 부상을 당했고, 그 중에 분대장을 포함한

3명은 전사하거나 치명적인 중상을 당했다.  뛰어온 분대는 정확히 월맹군의

은익된 벙커 정면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어 또 다른 숨겨진 월맹군 무리가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발포하기 시작

했다. 월맹군들은 녹색 군복에 철모를 착용하고 있었고 일부는 진짜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속보로 다가왔다.


“남베트남군인가?” 라고 한 미군 병사가 혹시나 하고 외쳤다.


“저 새끼들은 월맹군이야!”

 

하고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오른쪽에서 AK-47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총체적인 아수라장의 결과. A중대장은 오른쪽 소대에게 CP 쪽으로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공황상태의 소대원들은 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부상자는 더 발생했다. 이 폭풍과 같은 시간 속에서 병장 제임스 스톤 분대장은

자신의 분대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M-16 가늠자에 10미터 안되는 앞에 월맹군 한 명의 가슴이 들어왔다.

그는 죽은 동료의 시체를 확인하고 있었다. 스톤 병장은 한 발로 그를 쓰러

트렸다. 그러나 쏘자 마자 제2의 월맹군이 등장해서 총을 쏘았다.

 

스톤 병장은 그도 쏘아 쓰러트렸다.

 

그때 또 다시 제3의 월맹군이 총을 조준한 채로 자신을 찾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두 명의 월맹군이 더 나타났고 그들은 스톤 병장을 보고 총을 쏘면서

돌격했다. 도랑에 총알이 충돌하면서 그의 얼굴에 더러운 것들이 날아들었다.

 

순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들고 총을 쏘았다. 둘 중 한 명이

병장의 총에 맞아 쓰러졌고, 한 명은 숨은 것 같았다. 그러자 스톤 병장은

몸을 돌려서 뛰기 시작했다.


킴볼 소대장과 무전병은 포격 요청을 하다가 전사했다.

 

월맹군의 무리가 오른쪽 소대를 통해서 스미스 중위의 왼쪽 소대까지 몰려

들었다. 그들은 고함을 치면서 AK-47을 쏘았고, 서로가 교대로 폭격 크레이터를

하나씩 이동하면서 공격했다.

 

 

<넘어설 수 없었던 선>


그때 스미스 중위는 박격포탄에 다시 두 번째 부상을 당했다. 결국 지휘 불능

상태가 되었다. 소대장이 쓰러지자 왼쪽의 소대원들은 이성을 잃었다. 그들은

엄폐를 위해 한 소로 쪽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기어오르다가

뒤를 돌아본 버나드 버틀 병장은 소름끼치는 장면을 보았다.

 

소대 의무병이었던 리차드가 다리가 토막 난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기차드는 도와달라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버틀 병장은 모든 군장을 벗고

소총과 어깨에 걸치는 탄띠만 걸친 채 그를 향해 포복했다. 버틀 병장은 그의

권총벨트를 이용해서 의무병 리차드를 뒤로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거리가 멀어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결국 병장은 의무병을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함께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리차드에게 말했다.


그러나 버틀은 정말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리차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병장을 바라보았고,

그는 떠나지 말라고 간청했다.

 

버틀 병장은 죄의식을 느꼈다.

 

그는 소로길로 돌아가서 꼭 다른 이들을 데려와서 구출하겠다고

리차드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동료들에게 말했다.

 

 “해 보자, 우리는 데려올 수 있어!”

 

그러자 메이 상병과 벨 상병이 동의했다.

그리고 당시 월맹군의 사격이 뜸한 상태였다.

그들은 리차드를 향해서 뛰었다. 그리고 두 명은

팔과 다리를 잡고 리차드를 끌었고, 벨 상병이

그들 뒤에서 반대방향으로 엎드려 엄호사격을 했다.

그의 다리가 땅에 튀기지 리차드는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결국 구출했다.


결국 A중대장은 니 하를 향하여 후퇴를 명령한다.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 한 중대원이 고통스러운 내용을 적었다.

 

“한 부상당한 동료가 전장에 누워 울고 있었다.”

 

19명의 누더기가 된 부상자들을 중대가 끌고 나왔지만, A중대는

전사자와 누워 움직이지 않는 부상자 12명을 마을의 논 부근에

놔두고 후퇴해야 했다. 그들은 밤 동안 죽어갔다.

 

 

 


빌 베어드 상병은 다리와 등에 총을 맞은 상태에서 계속 총을 쏘다가

M-16에 기능고장이 났다. 그리고 월맹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한 월맹군 병사가 그를 지나쳐서 뛰다가 깜짝 놀라서 돌아오더니 베어드

상병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나 총알은 오직 귀만 자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월맹군 병사는 베어드 상병이 공격을 할 필요가 없는 부상자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병사들이 도착했고 그는 머리에 붕대가

감겨진 채 판초 같은 것에 굴려 넣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에게 그를

인도했다. 그들은 베어드 상병을 들고 비무장지대 쪽으로 향했다.

베어드 병장은 5년 후에 풀려나게 된다.

 

 

 

<월맹군의 참화...>  


그때 드라마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월맹군의 공세는 갑자기 사라졌다.

미 육군과 해병의 전선에서 사라졌고, 동 하의 전투기지에서도 사라렸다.

리치 대위의 중대에는 간헐적으로 포탄이 떨어졌다. (리치 대위는 머리에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했다)


그런데 또 다시 월맹군 304사단 76연대는 밤을 이용하여 비무장지대를

통과해서 5월 9-10일에 니하로 접근했다. 그러나 공중에 떠오른 포병의

조명탄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이를 보고 받은 미군 포병은 무자비한

포격을 퍼부었다. 그들이 존스 클릭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이 내려오면 니하가 바로 앞이었기 때문이다.


미군 건쉽이 이 도살에 참여했다.

 

부상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이 밤새 들렸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작전을 이어갔다.

 

대낮에 월맹군의 포탄이 니하에 떨어졌고,

이어서 그들은 지상공격을 개시했다.

 

진출해오던 월맹군은 앞서 있던 A와 C중대 방어선에 정면으로 들이닥쳤고,

이 두 중대는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이 두 중대는 소총, 기관총, 크레모어,

유탄발사기를 이용해서 집중사격을 그들에게 퍼부었다. 월맹군은 반격할

기회조차 없었다. 월맹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소총 트레이서가

공기 중을 꽉 채웠으며, 이어 포병의 포격과 미군 박격포탄이 일대를 쓰레기

더미로 만들었다.


미군은 오직 청음초의 한 병사가 본대인 A중대로 돌아가다가 RPG에 맞아

전사한 한 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부상자는 30명이 나왔다. 두 대의 해병대

탱크가 C중대에 배속되었으나 두 대 모두 RPG 로켓에 맞아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월맹군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퇴각하지 않았고, 묘지 근처에서 미군을

향해 효과 없는 사격을 계속 했다. 리치 대위는 미 해병대 전폭기의 공중폭격을

요청했고, 폭탄들이 터지자 그들은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메리칼 사단 21연대 3대대는 전체 전투를 통해 월맹군 579명을 전사시켰고,

이들 대부분은 잘못된 독도법으로 미군 방어선에 들어선 그날 밤의 전사자들

이었다. 방어선에서는 토막 난 상처에서 나는 끔찍한 사체의 냄새를 맡아야 했다. 


이후도 월맹군의 탐침 시도가 있었고 포탄은 계속 떨어졌다.

 

아메리칼사단,

21연대 3대대는 총 29명이 전사하고

130명이 부상당했고 1명이 포로가 되었다.

한 병사는 고향에 이런 편지를 썼다.

 

“해병대가 불쌍하게 생각됐다.(그런 곳에 있는)”


1968년 5월 15일,

리치 대위의 중대는 해병대에 의해 교대되었다.

 

그러나 A중대는 후방으로 빠지는 동안 벙커라인의 폭격 크레이터에서

무언가 불타고 터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가보니 그곳에는 월맹군의

탄약들이 쌓여 있었다. 중대는 월맹군의 가방 폭탄을 이용해서 그 탄약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엄청난 화염이 일어났다.

 

다시 포격을 받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스톤 병장은

그곳에서 돌아오면서 느낀 점을 나중에 노트에 썼다.

 

“뒤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불타서 연기가 휩싸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니 하’다. 난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1997년 베트남 매거진에 케스 윌리엄 노란이 기고한 글.


<두 개의 리플>


난 일명 ‘흑사병’이라는 별명의 21연대 3대대와 같이 있었다.

난 196경보병여단 소속이었다. 그 전투는 내가 베트남에 1년

있는 동안 본, 정말 최악의 전투였다. (테드 멜, 전 상병) 


난 그곳에서 월맹군의 판 터널을 발견했고, 그것으로 우리 미군들을

파괴하려 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난 11공병대대였다. 결국 해군의

불도저를 가져와서 쿠아 비에트 강변을 밀어버렸다. 그 터널 막사를

완전히 청소했고, 천 구 정도의 월맹군을 B-52 폭격 크레이터에 밀어

넣고 매장했다. 잊을 수가 없다. 위치는 나도 모른다. (맥스 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