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말없는 전장, 사이공 (월남군 레인저)||베트남전쟁

구름위 2013. 11. 2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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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에 살고 있는 과거 베트남 병사 출신의

글이다. 베트남 전쟁의 문제는 여러가지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내용은 자신들 남베트남의 여러가지 생각과

문제를 기술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한 뒤의 남베트남군의

전투도 비교적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의미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어,

일반전쟁사 란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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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TTLE OF SAIGON

 

(글쓴이) 느고 데 빈은 베트남전 당시 81레인저대대 출신이다.

그리고 ‘녹색 벨트’라는 책의 저자기도 하다. 그 책은 1971년

남베트남 국가문학상을 받았다. 아이러니컬하게 같은 이름의

유명한 베트남 작가가 있다. 그는 ‘사이공의 전투,’라는 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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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군 레인저 부대. 육군 중에서도 정예에 속하는 부대들이다.

 

 

캠프가 깨어나고, 우리 부대는 사이공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몇 달 간의 여러 작전으로 우리는 고난을 겪었다. 이 이동으로

병력들은 의기양양한 상태였다.

 

나도 같았다.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곳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사이공은 전쟁과 죽음의 영향

을 받고 있지 않았다. 어쩐지 내 마음은 피로하고 기운이 없었다. 난

모든 변화에 피곤했다. 새로운 임무와 책임에.


난 그 이전에 우리의 전투지대가 중부고원지대의 산들이 아니고 아마도

수도가 될 지도 모른다고 예기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가 처음 사이공

으로 들어간 것은 68년 테트 공세 때였다. 우리는 위장된 베트콩들의

거점을 매우 빠른 속도로 격파해 나갔다.

 

결국 다른 도시에서도 이런 작전을 해야 했다. 우리는 남베트남군 그린

베레의 전설을 만들었다. 81공수레인저대대는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리

고 상부는 우리를 도시 대게릴라전에 숙련가들로 만들었다. 그래서 대-

정부 활동이 포착되면 중앙 정부는 우리를 사이공으로 불렀다.


우리는 내일 다시 사이공으로 간다.

 

우리는 중부고원지대를 5회나 발로 작전을 뛰었다. 예외 없이, 베트남에

우기 시즌이 시작되면, 다른 저지대에 있는 부대들 모두 마찬가지로 산악

지역으로 집합해서 적의 큰 사단을 상대하곤 했다. 몇 개의 산을 발가벗

기고 무인지대의 도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중부 고원지대는 ‘가엾은 땅’이라고 불렸다. 닥 토, 추프롱, 플레이메 등은

정말 생소한 지형이었다. 다른 소수 인종들이 살고 있었고, 1년 마다 일대

에 불과 폭탄 시체더미를 만들었다. 정부의 대변인은  동 옥안 전투, 혹은

겨울-봄 전투를 우기 시즌의 최고 전투였다고 평하고, 공산주의자들을 날려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상, 양쪽간의 피해는 인도차이나 전쟁 개전

이후로 최고로 끔찍한 상태였다. 


느곡 토바스 지역으로 말하면, 남베트남군 1개 대대 전체가 전멸했다. 1007

고지의 화력지원진지 7번의 전투로 말하면, 적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나

적을 3천 명을 죽였다는 과도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정부의 라디오는

습관적으로 그랬다. 그리고 적 피해 현황도 미군 B-52를 통한 주야간 루트

폭격의 피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해 우기 시즌에는 처음으로 미 공군이 대대적인 폭격을 해주었다. 미군은

1만 오천 파운드의 폭탄을 퍼부었고, 이는 소형 원자탄 하나를 터트린 규모

였다. 폭격 지역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크레이터뿐이었다. 달의

표면과 같았다.

 

열대우림숲은 너무 험해서 헬기들이 랜딩하기 힘들었고, 들어가도 적에게

포위되기 일쑤였다. 그것을 몇 달간 지속되었고, 그 전투의 끝은 없었으며,

다음 해의 우기가 찾아오면 다시 재개 되었다. 우리가 다시 이 곳(중부고원

지대)로 오기 전에,  정글은 함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질식 개스가 사용되었

으며, CBU 크러스터 폭탄이 사용되었다.


마침내 우기가 지나가자, 항상 그래왔던 패턴으로 돌아갔다. 건기와 함께

전투는 중지되었고, 모든 부대들은 트럭을 타고 국도를 통해서, 각자 저지

대의 원래 주둔지로 돌아간다. 중부로 올 때의 트럭이 다시 떠나갈 때 적지

않은 수가 텅텅 비어 있다. 트럭에 타고 있는 병사들은 지치고 누덕누덕

했지만, 그래도 생존의 행운을 쥔 사람들이다.


매 킬로미터마다 트럭 행렬은 도로를 고치면서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플레이쿠

(Pleiku)시에 도착하면서 예년과 같은 일을 겪었다. 도시민들은 우리가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많은 레스토랑과 간이식당들이 피해를 입을 까봐 자동

적으로 문을 닫았다. 2군단 지역의 경찰들이, 중부지대에서 돌아오는 군인들

의 파괴행위를 눈감아주고 있다는 루머가 돌았다. 우리가 사람을 죽이기도 한

다고 소문이 났다. 너무 과도한 루머였다.

 

 

포로를 잡고 기뻐하는 남베트남 레인저 부대원..

 


도시에 도착한 첫날, 피닉스라는 이름의 장교 클럽에서 장군과 고급장교들은

우기 시즌의 성공적인 전투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 죽은 자들은 언급되지

않았고, 생존자들은 전설과 같은 위업을 달성한 훌륭한 인물이 되어 버린다.

그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만으로 참석자들은 걸출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1007고지의 7번 화력지원진지의 지휘관은 토아 대위였다. 그는

키가 매우 작았고, 어두운 피부색에 굳어진 얼굴로 호된 시련을 겪은 것이

느껴졌다. 그와 나는 과거 마이크포스 부대에서 같이 근무했었다. 우리는

방어선의 깊은 지하 대피소에서 포격의 폭우를 맞으면서 30일을 버텼었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적 공격에 맞서야 했었다.


그곳에서는 93레인저대대의 대대장인 소령이 참모들과 같이 적의 봉쇄를

뚫는 거대한 업적을 만들었다.  그의 비범한 능력으로 부하들을 통솔하는

것을 보고 미군 고문관은 "the world's best"라고 평했었다.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면서 반격에 성공했다. 그 3일간의 전투는 격렬했다.


빈(Binh) 소령도 망각해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는 예의와 용감함을 모두

갖춘 젊은 조종사였다. 작전 기간 동안, 그는 215헬기전대장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그래서 갈색 베레모를 쓰는 레인저 부대와, 적색 베레모를 쓰는

공수부대를 효과적으로 지원하여, 반격으로 7번 화력진지를 다시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적은 지상에 매우 두꺼운 부피의 대공화기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소령과

전대원들은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수백회의 병력, 탄약과 식량을 수송했

다. 연기가 나는 적의 심장부의 크레이터에 과감하게 랜딩했다. 모든

헬기에 총격이 없는 기체가 없었다. 그 자신이 탄 지휘통제헬기에도 20개

이상의 총알구멍이 있었다. 한번의 위기 상황에서, 빈 소령은 1001고지

정상에 랜딩했고, 적의 가차 없는 포격 속에 아군을 구출했다.


그리고 군의관 바오(Bao)도 명예로웠다. 그는 1003고지의 3번 화력지원

진지에 자원하여 들어간 유일한 군의관이다. 그리고 강렬한 포위공격을

당했다. 그는 구출이 되기 전  15일 동안 기지의 지하에서 수많은 외과

수술을 하면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상황은 이러했다. 그 바위투성이의 계곡에서 많은 항공기들이 격추되었다.

그러자 장군은 명령을 내려서 적의 압력이 줄어들 때까지 공중지원을 중단

시켰다. 물론 며칠을 버틸 식량과 탄약은 있었지만, 중상자를 비롯한 후송

이 필요한 환자들이 매우 많은 상황이었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바오

군의관은 위험임무를 자처했다. 이 임무에 두 대의 미군 헬기가 사용되었다.


투입작전의 D-day 이른 아침, 1003고지를 둘러싼 산과 숲은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바오 군의관과 동료들은 깊은 불안의 호흡을 해야 했다. 구름

위의 높이에 있던 OH-6A 경정찰헬기는 마치 낙옆이 떨어지듯이 하강하여

기지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그리고 바오 군의관과 의료품 등을 바로 부렸다.

 

이 헬기는 원래 코브라 헬기의 사격목표를 유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국

이 헬기는 대공사격을 받으면서 착륙했고, 결국 바오 군의관과 두 명의 미군

조종사는 격렬한 전투 와중에 기지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하

벙커에서 밤낮으로 일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병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자원해서 날아와 성실하게 일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전선에서의 활동을 위해서 군의관이 되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무명의 병사

들이 죽어가는 곳이 자신에게는 낙원이라고 했다. 


나는 군사복무에서 내가 셀 수 있는 많은 이름들을 기억하고 있다는데 놀

란다. 그날 저녁 그러한 영웅들이 모두 피닉스 클럽에 모였다. 우리 레인저

부대와 정찰팀들도 훌륭한 작전을 했다. 그들은 대담하게 작전했고, 적

에게 포위가 되었을 때, 오히려 도로 차단작전으로 적의 인원과 물자의

통행을 저지했다.

 

자신도 부상 당한 채, 부상당한 전우를 끌고 가는 모습

 


이날 밤, 장군은 왼쪽 어깨 부근의 고통으로 멜빵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 중부 고원지대 전투의 리듬과 같이, 장군의 관절염은 우기에 시작해서

건기에 끝났다. 이 파티에서, 장군은 ‘투옹’이라고 하는 튜닉 계열의 화려한

민간 전통의상을 입었다. 예하 장교들의 눈에는 장군이 좀 더 너그럽게

보였고, 2군단 지역의 국경지대는 안정된 것으로 느껴졌다. 


일반적인 관습의 환영의 말이 끝나자, 장군은 위스키 잔을 들어 우기 시즌

동안의 승리에 대해서 건배했다. 그 후 장군은 댄스 플로어에 한 화려한

복장의 여자와 나섰다. 그리고 기호에 맞는 발걸음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소는 거친 말과 웃음소리로 활기를 띠었고, 공기는 담배연기로 가득

찼고 강한 술냄새로 가득 찼다.

 

밴드가 생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여자들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모든 자유의 분위기는 느슨해졌고, 서늘한 가운데 관능적인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공포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지울 수 있었다. 나는

와인잔을 입에 대면서 내 인생에 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의 송장 대신에.


문제는 어떻게 잊으려고 노력하는가 하는 것이며, 지울 수 없는 전장의

참혹한 기억 중에 하나는 바로 시체가 썩는 냄새였다. 한 동료가 잘못된

기총소사로 얼굴이 완전히 날아갔다. 그리고 다른 이미지들: 추락한 한

헬기 조종사의 시체가 정글에서 발견되었다. 그들 끌어내는 것은 죽음의

게임과 같았다.

 

한 가깝고 의지가 되는 준사관이 우리 부대에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다양한 전투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이공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그날 죽었다. 그의 시체는 그가 죽은 지 2일 후에 빽빽한 수풀 속

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내가 본 첫 번째 부상이었고, 우리는 쓰러진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동했다. 생존과 위험을 피하려는 본능으로,

그는 아마도 수풀 속으로 기어들어갔던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조를 기다린 것 같다. 아니면 위엄 있게 죽음을 준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군장에 머리를 기대고 휴식하는 것처럼 죽어 있었고, 그의

정글모는 가슴에 놓여 있었다. 이 이미지는 내 마음에 계속 남았고, 

정직하게 말하면 평생 잊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주 오래 동안, 제81레인저대대의 지휘관인 중령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보기에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았고, 수석 외과 군의관도 그들과

같이 있었다. 이 승전 축하의 중간에서, 그들은 파티의 가장자리에 있을까?

불안한 마음과 근심이 파티에 적응을 못하게 하고 있었고, 결국은 전쟁에서

의 생존을 생각하게 했다.

 

 

전투 중 부상을 당한 남베트남 레인저 부대원

 


토아 대위가 나에게 물었다.

 

"이봐, 매(Hawk), 언제 사이공으로 돌아가지?"


"Hawk"는 이 외과 수석 군의관의 별명이었다.

전쟁에 호전적인 별명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보기에, 참석자의 모두는 사이공의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대위의 눈빛이 즉각 말해주고 있었다.

 

"거기에 당신이 돌아가면, 매, 그리고 불만이 있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면 말야. 우리 화력지원진지 7번으로 배달해 주겠나."


와인 잔을 들고 있는 그는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조종사인 빈(Binh) 소령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맡겨, 자네는 아마도 최루탄이나 로켓을 사용하고 싶지

  않을 거야. 내가 필요한 것은 몇 정의 기관총이야. 그것을 거리

  코너에 두고 그들을 기다리는 거야."


정치적인 의사를 말하는 것은 당시 유행 같았다.


소령이 군의관에게 얼굴을 돌렸다.

 

"음, 당신은 어때, 닥터 지바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데모나 하는 녀석들 말이야."


군의관은 자유로우면서도 원리원칙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평온을 되찾은 목소리로 군의관은 대답했다.

 

"난 오랫동안 대학에 있었고, 요즘 대학생들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면,

  당신들의 전쟁에 관한 상태와 같이 완전히 구석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애.  나는 그들을 성가셔하는 당신을 이해해. 그러나 같은 시간

  그 버둥거림의 동기를  인정하기도 해. 공부를 버리고 데모를 하는

  그들이 완전히 불합리한 것은 아니야.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강한 동기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기도 해."


이 군의관의 양심적인 말에, 자리는 거북해졌다.

 

한 편으로는 자신의 책무에 대한 걱정거리가 떠올랐고, 다른 편으로는

대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은 미국의 반전운동과 비슷한 것처럼 생각됐다.

대학생들은 반미감정이 있었다. 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랐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다는 것.


평상시와는 다른 반대의견이 나오자

대령이 이 정치 토론에 끼어들었다.

 

"좋아, 군의관, 만약에 우리가 사이공에 있는 의과대학

 건물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최근의 학생들을 불안했고, 사실상, 그것이 사이공의 의과대학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대령의 이 질문은 우리를 포함한 군의관까지 모두

웃게 했다. 그러자 군의관은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물론, 방독면을 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응급차는 모는 것이지요.

  그리고 양쪽 모두의 부상자를 치료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군의관은 대령을 응시했고,

군의관은 신뢰성 있는 매너로 말했다.

 

"만약 사이공에서 내 임무가 명확하게 내려오게 되면, 저는

 이 부대에서 벗어나 다시 중부 고원지대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군인이 되어 복무를

 할 수 있는 확실한 신념이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사이공의 지루한 전투에는 모두 지쳐 있었다.

우리는 산악과 숲이 친숙했고, 내 지휘 하의 병사들도 사이공에 있는

때와는 아주 다른 들짐승들 같았다. 사이공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욕구를 저하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 막사에 감금된 것처럼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고, 방독면과 대검에 익숙해져야 한다.

 

대원들은 다양한 데모자들을 해산시키는 일을 해야 하고, 방어라인을 

형성하고 예비대로 마름모꼴을 만드는데 시간을 보내야 한다. 명령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데모자들에게 무자비한 진압을 해야 한다.


상대를 보면, 학생들은 젊고 이상주의로 불타오르고 있다. 그들은 배가

고픈 고아나 미망인 같았다. 그들은 전쟁에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우리가 그들의 악몽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불쾌한 기억은

날카롭게 남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우리가 경험한 것을 체험한다면...

 

중부지대가 아닌 사이공에서의 것을 말이다. 우리는 지난 8개월 동안

고립된 산악과 정글에서 길고 긴 하루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우리는

수도로 급파되고 있다. 우리는 사이공에 정통하고 있다. 높은 건물들

과 매춘부들,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인 것들과 마장마술 클럽 등등.


이 장소의 변경은,

그저 공간과 거리의 이동만을 뜻하지 않았다.

 

전장이 아닌 세상에도 죽음과 공포와 파괴가 존재하며, 군인들의 아내와

자녀들도 역시 똑같은 고난과 수난을 당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

었다. 더 나아가면, 우리는 모국의 땅에 있었지만 우리와 격리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또한 위쪽의 세상과는 더욱 격리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군인들은 행복과 초연히 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리는 병사들

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고, 자신들이 광대하고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결국, 이러한 어리둥절함은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과연

무엇을 보호하고 있는지 의문하게 했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무엇을

지키고 있고, 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가.

 

그들은 피로 흐르는 강에 떠 있는 사치스러운 보트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강에 동료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사치스런

고위층의 여가를 즐기게 하기 위하여 싸우기도 싫었고, 특권층을 보호하는

충실한 개가 되기도 싫다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마장마술 공연장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불쌍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무엇이 되어야 했다. 이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병사들은, 항상 준비가 되어 전장에서 전투를 통해 자신을

희생시켰고, 왜 그들이 수도 사이공으로 가야하는지도 몰랐다. 왜 우리의

명백한 꿈과 열정이 고급사회의 파수꾼으로 전락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고속도로 경찰대와 같은 모습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하는가. 육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사회 개혁프로그램을 수행했고, 그로 인해 왜 역사를 가로

막는 것이 되어야 했으며, 왜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도로차단점의 붉은

등이 되어야 했을까?


병사들은 단지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총을 들었고, 그들은 성서의 이상과

정의처럼 자신을 희생시켰다.  자신들 개인이 피해를 보지 않았음에도.

병사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산악과 정글에서의 고갈됨을 보충하고 있었지만, 무언가 잃어버

렸다. 그들이 경험하던 잔혹한 전장과는 다른 새로운 전선에 그들은

직면했다. 바리케이트는 피곤하고 지루한 것이었다. 이 타락한 사람들

과 정의로운 사람들 모두, 우리에게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30년이 흘렀고,

그곳에는 많은 전쟁 영웅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평화의 마음으로 보면,

그 전투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일까?

 

병사들의 진짜 전 중부고원지대의

전장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진짜 도전적인 전장은 바로 사이공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느고 데 빈, 1971년 닥토에서...

 

 

남베트남이 월맹에 함락되던 날, 대통령궁에서 사로잡힌 남베트남 육군 병사들.

그들의 암울한 미래를 예감하고 있는 듯, 허탈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