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특수전 영웅- 딕 메도우즈

구름위 2013. 11. 2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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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전 영웅시리즈(2)- 딕 메도우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패이트빌시 근교에 위치한 포트 브랙기지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방문해볼 것을 권유받는 곳이 바로 특전단기념관(Special Forces Memorial Hall)이다. 기념관 앞에는 녹색베레모를 쓴 채 한 손에는 M-16 자동소총을 든 건장한 그린베레대원의 기념탑이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기념관 내부에는 특전단이 발족된 52년부터 최근까지 그린베레대원들이 참전한 각종 전투와 전쟁의 주요장면을 형상화한 벽화도 이채롭다.이 가운데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린베레의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 베트남전 당시 작전팀 기지모형이다. 베트남전 참전 경험이 있는 전직 그린베레들은 이 모형 앞에서 한동안 눈을 고정시킨 채 좀처럼 자리를 떠지 못한다. 아마 옛추억이 떠올라서일까. 필자(김선한씨)가 처음 그곳을 찾은 지난 94년 9월도 그런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기념관 관리직원은 오후 1시까지 기념관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는 수없이 필자도 노병들 틈에 끼어 잠시 기념관 문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막 기념관을 나서는 순간 노병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필자에게 말을 건넸다. 별 약속이 없으면 자신들과 함께 준비한 햄버거라도 나눠 먹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의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삶과 죽임이 매시간 교차하는 전장에서 온갖 풍상을 겪은 전직 그린베레대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우리는 기념관 바로 뒤 야외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명문 프린스턴대학 출신으로 그린베레 장교로 10년 가까이 근무했다는 그는 부드러운 남부사투리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무용담은 주로 베트남전에서의 일화가 주를 이뤘다. 그러다 그는 그린베레 영웅이 누구인지 알고 있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뱅크 아론 대령, 사이먼즈 대령, 찰리 벡위드 대령, 블랙번 준장 등 필자는 기억나는 이름들을 나열했다. 노병은 비슷한 이름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타이작전에서 지상공격팀장을 했고 나중에는 델타포스 발족에 숨은 공로자라는 사실만 아는데..." 필자는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50을 훨씬 넘은 노병은 필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다시 열었다. "딕 말인가? 딕 메도우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맞습니다. 그 양반 무용담은 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아요." 우리 두 사람은 딕 메도우즈 이야기를 놓고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것이 인연이 돼 우리 두 사람은 그날 저녁을 같이 했다.... 필자 개인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이후 딕 메도우즈라는 이름은 필자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됐음은 물론이다. 앞서 잠시 살펴본 것처럼 딕 메도우즈는 그린베레사회에서는 `전설'(Legend)로 통하는 인물이다. 전설은 그린베레에 발을 들여놓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우선 그는 15살 때인 47년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지금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전후 어수선한 와중에서 메도우즈는 나이를 속이고 쉽게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신병교육을 마친 후 그가 처음 배속된 부대는 바로 포트 브랙에 위치한 제82공수사단 456 야전포병대대였다. 전쟁이 없는 군대생활은 단조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는 다름아닌 한국전이었다. 메도우즈는 기다렸다는듯이 참전을 자원했다. 그가 전속된 곳은 제187공수연대 소속 674야전포병대대였다. 187공수연대는 서울 근처 문산에 대한 낙하산 강하 등으로 유명한 부대였다. 그는 전투에 참가해 뛰어난 리더쉽으로 전공을 세웠다. 이를 인정받은 그는 상병에서 불과 2년만에 상사로 진급했다.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미 육군사상 20살에 상사로 진급한 경우는 그가 처음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귀국한 그는 또다시 일상의 단조로움에 빠져들 것이 두려웠다.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은 병사로서는 좀더 짜릿한 경험이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구세주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갓 발족된 특전단이었다. 53년 그는 특전단에 자원했다. 특전단에서 그는 그동안 맛보지 못한 온갖 교육과 훈련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고공강하, 스쿠버다이빙, 레인저훈련, 통신.폭파, 게릴라전술 등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메도우즈는 빠른 속도로 특전단생활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런 그를 특전단 수뇌부가 그냥 둘 까닭이 없었다. 60년 그는 당시 제7특전단과 영국 22공수특전단(SAS) 사이에 체결된 교환프로그램에 따라 하사관으로서는 처음으로 SAS에 파견됐다. 이곳에서도 그는 자존심 강한 영국 특수부대원들을 매료시켰다. 메도우즈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작전소대장직에 올라 아라비아반도의 오만 등지서 對게릴라전과 무기밀매단 소탕 등의 실전경험을 쌓았다. 1년간의 교환근무기간을 마치고 귀국을 서두를 무렵 SAS는 SAS휘장을 선물로 줬다. 물론 공식석상에서 휘장을 패용해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귀국하자마자 그를 기다린 것은 베트남전이었다. 이미 5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에 대한 군사고문단을 파견한 특전단에서는 현지의 사태가 계속 악화일로로 치닫자 보다 많은 특전단원들을 이동훈련단(MTT)나 베트남주둔 미군군사고문단 요원으로 급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특히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을 앞두고 국방부 수뇌부로서는 남베트남은 물론이고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접국에 대한 적정수집이 절실했다. 특히 라오스는 남베트남해방군(베트콩)에 대한 북베트남측의 군수지원 루트로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적격이었다. 메도우즈는 바로 이 라오스를 무대로 비밀정보수집작전(Operation White Star)에 참가했다. 당시 그의 상관은 그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사이먼즈 중령이었다. 이 작전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치적인 복선이 너무 많이 개입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라오스를 통한 보급로(일명 호지명 통로(Hochimin Trail) 개척과 확대에 부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한 성과를 거뒀다. 지금까지는 비정규전의 양상만을 띠어온 베트남전이 점차 정규전으로도 확대할 기미가 보이면서 베트남주둔 미군사고문사령부(MACV)는 비밀공작을 수행하는 `연구관측단'(Studies and Observation Group(SOG)를 발족했다. SOG의 주작전무대는 남베트남보다는 주로 북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해남도를 포함한 중국 남부지역 등이었다.(SOG에 대해서는 후에 좀더 세밀하게 알아보자). SOG가 수행한 비밀공작은 공해상에서 조업중인 북베트남 어민들을 나포해 일정기간 세뇌시킨 뒤 석방시켜 남베트남체제의 우월성을 전파시키는 심리전에서부터 적요인 납치.암살, 적의 항만이나 해안레이더기지와 방공망 파괴 같은 고도의 위험성이 요구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메도우즈도 SOG 산하 지상작전팀에 배속돼 라오스, 북베트남 등지서 적정관측.정보수집.교란활동 등을 전개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메도우즈는 불과 10m도 안되는 거리에서 적에게 포위를 당한 상태서도 대원들과 함께 무사히 귀환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그의 무용을 당시 베트남주둔 미군총사령관이었던 웨스트몰런드 대장이 그냥 지나칠리 없었다. 웨스트몰런드 대장의 특명에 따라 메도우즈는 작전중 일약 대위로 특진했다. 역시 유례가 없는 파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메도우즈의 성가를 더 높인 것은 손타이 포로구출작전이었다. 작전의 실제 지휘관격인 사이먼즈 대령은 메도우즈를 지상공격팀장으로 기용했다. 1년에 가까운 준비기간 동안 메도우즈는 그린베레와 레인저 자원자들을 규합해 플로리다주 포트 월튼비치의 이글린 공군기지 주변 등서 훈련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손타이작전에서만은 메도우즈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작전당일 그와 지상공격팀 대원들을 실은 헬리콥터는 마치 추락하듯 수용소 운동장에 착륙했다. 이어 헬기에서 내린 공격팀대원들은 전광석화 같이 수용소 내부에 진입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수용소는 텅비어 있었다. 다만 공격팀은 경비병숙소에 대한 공격과정에서 1백여명이 넘는 중국군사고문단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작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손타이작전은 한동안 비난보다는 찬사를 더 많이 받은 작전으로 평가됐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메도우즈는 이글린 기지 내에 있는 레인저학교의 정글과정 부책임자로 근무하다 77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러나 예편을 했다고 해서 특수전과의 인연이 결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메도우즈는 민간인 신분으로서 對테러부대인 델타포스 발족과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SAS와의 20년 넘는 친분이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메도우즈가 다시 군사회는 물론이고 언론의 각광을 다시 받은 것은 바로 이란주재 미대사관 인질사태 때였다. 팔레비왕조가 몰락한 후 새로운 권력의 정점으로 등장한 지도자 호메니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과격대학생들에 의해 외교관들과 주재관들이 인질로 사로잡힌 이 사건에서 메도우즈는 찰스 벡위드 대령이 이끄는 델타포스팀의 작전에 앞서 단신으로 테헤란 현지에 잠입, 인질 및 이들을 지키는 경비병력 배치 상태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구출작전에 투입된 대원들을 실은 수송기와 헬리콥터가 충돌, 혼란이 야기되는 바람에 작전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적의 집요한 추적망을 통해 국경을 통과해 제3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그는 관계정보기관에 계약직으로 고용돼 중남미지역을 무대로 마약밀매범 소탕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메도우즈는 지난 95년 7월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사망 직후 백악관측은 그에게 시민명예장(Citizen's Medal for Distinguished Service)를 수여했다. 명예장을 수여하는 편지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특수전분야에서 그가 보여준 업적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의 특수전사들에게 표본이 됐다"고 적시했다. 여자에는 사죽을 못쓰는 클린턴으로서도 이때만은 제대로 사람을 알아본 모양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