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베트남] 햄버거힐의 서전, Dak To 1967 (3)

구름위 2013. 11. 28. 11:39
728x90

햄버거힐의 서전, Dac To 1967(3)



앞 이야기의 압축

가. 캄보디아와 라오스, 베트남의 국경이 모여 있는
위도상에서 월맹군은 단기간에 강력한 공세를 1967년
후반기부터 준비하여 10월 말에서 11초에 그 징후가
나타나 전투가 시작된다. 그 지역의 가장 큰 전략적
주둔지가 바로 '닥 토(Dak To)'였다.

나. 이때 미군은 제 4사단이 이 지역 관할주둔군이었고,
173공수여단은 예하의 기동타격대 임무를 맡고 있었다.
미군은 증강과 방어태세에 들어가고, 기동타격대에게는
수색/섬멸작전의 일환으로, 산악에 숨어들어와 있는
월맹군은 수색하라고 명령받는다.

다. 이로써 173공수여단은 닥 토 서쪽에 있는 800고지군에
대한 수색섬멸작전을 시작한다. 이 월맹의 공세의 주인공은
월맹군 정예사단이었고, 이 173공수여단의 수색지역은 1개
월맹군 연대가 들어와있는 것으로 예측되고 있었다.

라. 이때 173공수여단의 2대대, 4대대가 작전에 들어갔고
나머지 대대는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총 6개 중대가 수색
작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67년 11월 4일 최초로 4대대가
월맹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시작한다.

마. 이와 동시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2대대로 접전이
시작된다. 결과적으로 이후 일주일 동안 주둔지에 있던 173
공수여단의 대부분이 증강투입되고 173공수여단은 베트남전
역사상 보기 드믄, 단일 제대상의 20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된다.

바. 호치민루트를 통해서 닥 토 지역에 들어온 월맹군은
예상를 훨씬 웃도는 물자를 비축하고 터널과 참호를 구축한
상태로 있었다. 월맹군은 참호방어자. 미군은 고지공격자가
되어 전투가 진행된다.

사. 이 전투는 베트남전 미군의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섹스전투이다. 해도해도 끝이 안나고 점차 늪으로
빠져들고 마는....

-----------------------------------------

2편에 이어서....

(173공수여단 503연대 4대대의 D중대는 823고지에
접근했다가 돈좌되어 전에 볼 수 없었던 월맹군에
의한 포위상태/혹은 월맹군의 중심부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투를 계속된다)



173D Airborne Brigade Under Fire on Hill 823

D중대장 발드리지 대위는
이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난 3소대를 앞으로 내보냈다. 난 그 당시 월맹군의
웃음소리와 고함소릴 들었다. 끔찍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호전적으로 우리 앞에서 들으라고 떠들었다.
달링 중위과 그의 소대원이 경계선 3-40미터에서
총탄에 맞았다. 우리는 버텨야만 했다."


그는 서쪽 방어선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발드리지대위는
조니 릴리 하사에게 무전을 보내서 3소대 전면 100미터
지점에는 60밀리 박격포를, 250미터 전방에는 81박격포를
날리라고 명령했다. 박격포반원들이 병력의 좌로 이동해서
포격을 시작했다. 박격포판원들조차도 총을 들고 사방의
내습에 대기한 상태로 포격을 해야 했다.

릴리 하사의 박격포는 세명을 구했다. 그들은 달링 중위의 일행을
뒤따라 아래로 내려가던 병력이었다. 당시 월맹군이 이 세명에게
총을 쏘았고 모두가 부상당했다. 그리고 폭격 크레이터에 피신해
있었다.

이들은 교대로 사격을 했는데, 먼저 두 명의 실탄이 떨어지고
이어서 마지막 사람의 마지막 탄창이 비어졌다. 그리고 월맹군이
다가왔다. 그때 바로 60밀리 박격포탄이 크레이터 전면에 떨어졌다.

그것이 그들을 구제했다. 이들은 이 포화 속에 중대 방어선으로
돌아왔고 이후 헬기로 후송되었다. 이 포격 이후 월맹군은 다시
고지를 향해서 올랐다. 그리고 3소대의 전면 수미터까지 접근했다.

2소대와의 경계접합점이었다. 약 15명의 결연한 월맹군이 선두에서
돌격했다.

"그것은 태평양 전선의 일본군과 같았다. 무서웠다."

미군은 사격와 함께 M79를 직사로 퍼부었다. 이후 20분간
사격전은 지속되었고 진출이 좌절된 생존한 월맹군은 기어서
고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조금 아래의 무성한 대나무밭에는
특별한 목적으로 30명의 월맹군이 숨어 있었다. 이들은 동료들의
공격 시에 조공을 할 목적으로 보였다.

이후 정적이 흘렀고 병력들은 공격으로 파괴된 갭을 채우고 있었다.
재편성은 완료되었고 다행히도 그 가운에 공격은 없었다. 공격은
오후 3시 15분 다시 같은 방향에서 시작됐다.

"챨리. 챨리! 챨리! 사격해. 사격해!!!!"

공격은 즉시 격퇴되었지만 3소대는 4명 이상의 부상자가 생겼다.
이 공격에는 1소대와 3소대 중간에 있는 폭격 크레이터에서 미군이
기관총과 90밀리 무반동총을 거취하고 사격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이후 오후시간과 밤에 될 때까지 월맹군도 상당히 지쳐보였으며
간헐적으로 기어와서 크레이터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이
15분간의 전투에서 B중대는 7명이 전사하고 13명이 부상했다.
한시간 후에 이들은 헬기로 후송됐다. 823고지 근처에서
월맹군의 징후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관찰됐다.




<구출을 위해 늪에 다시 빠져든 A중대>

이 상황 속에서 A중대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행군해가고 있었다.
선두는 몽타나족 포인트맨이 서고 있었는데 행군은 이날 두 번
정도 멈춰야 했다. 오전 11시경, 약 8명의 월맹군이 목격되어
행군을 중단했다. 정찰병을 보냈으나 징후는 사라졌다.

D중대는 상부에 월맹군의 유선 통신선을 따라가 봐도 되겠냐고
요청했다. A중대의 멀둔대위는 이 교신을 듣고 있었다. 그는
D중대가 흔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테라자스 병장과 교신을
하고 있었다. 거리는 가까우나 중대는 거의 1분에 50미터씩도
못나가고 있었다. 사방에 부비트랩이 깔려 있었다.


그는 즉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테리자스 병장에게 D중대와
일시적으로 연합하라고 지시했다. 서쪽 수킬로미터 지점에서는
C중대장 윌리엄 콘놀리 대위가 D중대에 접근하려고 힘겹게
노력하고 있었다.

오후 2시에 연대장 존슨대령은 고지대를 청소함으로써 베어드
대위의 중대 서쪽의 압력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30분
후에, 존슨 대령은 멀둔에게 D중대를 증원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대위는 앞으로 좀 더 이동하여 야간방어를 구성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나 다시 턴하여 D중대가 고착된 방향으로 향했다.

계곡을 이동하는 동안 무전병 테라자스 병장은 중대장의 입을
대신해서 A와 D중대 사이에 적의 활동이 감지된다고 보고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동시에 돈좌된 각 중대들>

당시 중대의 첨병은 4인조였는데,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지역에
대나무가 너무 많아서, 항상 이동 시에 소리가 많이 들렸기에, 이
4명의 포인터들이 최대한 기도비닉으로 나아가야 했다.

A중대의 첨병 4명중 2명이 또 앞서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두명의 첨병, 허맨 슬레이바우 상병과  데니스 라이더스 상병이
먼저 3명의 월맹군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들은 천천히  월맹군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월맹군들은 점차 소대장인 데니 중위가 교신하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결국 소리를 질러주었다.

"챨리! 접근! 5시 방향!!!!!!!"

그러나 이 소리에 놀란 월맹군은 달아나기 시작했고 미군은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격은 너무 이른 상태였고 월맹군 3명중 한 명만이
사격에 맞았다. 능선의 위쪽에서 테라자스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는
총소리 방향으로 나침반을 대서 방위각을 쟀다. 그런데 얼마후 중대는
또 다른 통신선을 발견했다.

오후 5시가 가까워지자 A중대는 D중대의 방어선에 근접했다. 통로의
왼쪽에는 자그마한 불이 나 있었다. 거기에 15명 가량의 죽은 월맹군
시체가 있었고 주변은 그을려 있었다. 두시간 전에 투하한 네이팜탄의
위력이었다.  

멀둔대위는 D중대보다 조금 아래에 황급히 방어선을 구축했다. 더 이상
나갔다가는 큰 위험이 있었다. 월맹군들은 야음에도 청음과 이동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항상 밤에 이동하기 때문에 미군에 비하여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중대 상황으로 볼 때 자신의 중대간의 사이의 갭이 있어서
유기적이지 못하니 자신의 중대만이라도 방어를 준비한 것이다.
의무병을 불러서 부상자는 치료를 시켰다. 그리고 인접한 베어드
대위에게 자신들의 좌표를 수정하여 날렸다. 주로 신병들이
방어선에서 많이 전사했다. 월맹군은 높은 곳에서 관찰하면
정확히 사격하고 있었다.  

두 개 중대가 만나기 전에 다시 또 다른 공중폭격이 시작됐다.

F-100 전폭기는 아주 정밀하게 던져진 노란색 연막에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에도 불구하고 후송헬기가 도착하자 월맹군의 치열한 자동화기
대공사격이 날아왔다. 대부분의 헬기들이 지상에서 날아오는 벌집같은
소화기 대공화망에 걸렸고, 몇대가 떨어지고 몇대는 바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173공수여단 대원들은 쉽게 자신들이 구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했지만,
전사자의 몸을 수색해서 모든 실탄류를 수거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간간이 울리는 소화기 소리 외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멀둔대위는 데니 중위에게 명령해서 고지로 올라가서 적의
시체가 없는지 찾아보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의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중에 숨겨진 세대의 월맹군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이 첫 사격에서
데니 중위의 부하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했다.

결국 완전한 어둠이 오기 전에 생존자들은 중대 방어구역으로 기어
들어왔다. 야간에 그들은 반드시 나타날 것이기에 앉아서 죽는니
복귀하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기어들어왔다.

이 틈을 이용해서 구조헬기가 날아왔고 그들은 먼저 심각한
부상자를 태웠다. 이후 계속되다가 멀둔대위는 밤 10시에
이를 중단시켰다. 야간에도 월맹군의 사격이 헬기로 계속
날아왔기 때문에, 위험한 행동이지만 일부 헬기는 모든
조명과 등을 꺼버렸다.


닥 토 전투에서 헬기가 랜딩하고 있는 당시 촬영사진.
산악지역이라서 대원들은 힘겹게 랜딩존을 수작업으로
깐 것이 눈에 보인다.


월맹군은 중대의 방어선에 지속적으로 기관총을 쐈댔다. 미군도
월맹의 기관총에 정확히 응수하기 위한 장소로 기관총을 이동시켰다.
밤 동안 월맹군은 수류탄과 유탄발사기, 그리고 박격포로 이 미군
두 개 중대를 향해서 날렸다. 이것들은 주로 시야가 트인 동쪽에
많이 떨어졌다.


포격을 관찰한 지휘부는 이 포격이 1.2킬로미터 남동쪽으로 떨어진
고지에서 날아오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무전으로 바로 보고하여
곡사포를 그곳에 포격요청했다. 그러자 월맹의 포탄이 잠잠해졌다.

A중대는 유일하게 60밀리 박격포가 있었으나 포격을 하지 못했다.

불꽃과 사격음으로 인해서 월맹군이 관측을 통해 위치를 파악할까봐서였다.
일부 병력들이 야간전투에 대비해서 취침에 들어갔다. 밤이 되자 미 공군의
스푸키 건쉽인 AC-47이 날아와서 조명탄을 쏘더니 이웃한 능선에 미니건을
사격했다.

이 것과 포격은 미군의 사기를 되살렸다. 멀둔의 부하인 퓰쳐 상병은
319포병 3대대 B포대의 포격을 유도했다. 그러나 박격포는 항상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날아왔다.

"그렇게 끝없이 쏘아대는 찰리들의 박격포는 처음이었습니다.
보통 쏘고 도망가곤 했는데, 도망간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죠.
베트남의 미군들은 공격을 받고는 발을 뻗고 자곤 했는데,
이때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콘놀리 대위의 C중대는 그 날 위쪽의 A 중대 멀둔 대위의 장소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곳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90분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날은 저물고 그 장소에서 야간방어에 들어갔다.

이렇게 Ngok Kom Leat(고지의 실제 베트남 이름)능선에 대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월맹군은 11월 6일 정오를 넘어서 B중대의
방어선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존슨 대령은 오후 3시 30분경 정찰기를 타고 상공을 돌았다. 돌면서
그는 자신의 부대원들이 박격포공격을 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한 발은 중대 지휘소에 맞아서 발드리지대위가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본부의 제리 밥 상사와 6명이 같이 부상을 당했다.


존슨대령은 헬기를 착륙시켜서 직접 중대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헬기가 하강하자 싸락눈 같은 월맹군의 총알들이 날아왔다.
헬기에는 작전장교인 리차드 스코트 소령과 포병연락장교인 셜리 드래퍼
대위, 그리고 테드 아서 주임상사가 타고 있었다.

이때 여단의 사기를 우려한 테트 아서 주임상사와 몇명이 목숨을
걸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결국 싸락눈 같은 사격으로
인해서 헬기는 다시 상승했고 재급유를 위해서 벤 헷으로 돌아갔다.
테드 아서 주임상사가 뛰어내린 것은 전투에 참가하기 위함은
아니었고, 랜딩한 후에 지상의 상황을 보고하고 부상자 후송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랜딩한 주임상사가 방어선에서 몇 미터 떨어져있는 부상자를
구하려고 다가가자 소총사격과 함께 수류탄이 날아왔다. 주임상사는
몸을 날려서 피했고 래리 오다 병장이 두 개의 수류탄으로 응사해서
그 월맹군들을 죽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 크레이터 안의 사람들은(2편에 기술된 고립된 병력)
1소대와 2소대의 방어접점인 전방의 대나무밭에서 무언가 이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한 병사가 상황을 보려고 크레이터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앞 5미터에 월맹군 병사가 있었던
것이다. 서로 놀라서 고함을 질렀고 미군 병사는 바로 직사해서 그의
머리를 M-16을 자동으로 긁어서 날려버리고 M79를 한방 날렸다.

이 사격전을 필두로 야간에 근접거리에서 수튜탄 투척전투가 일어났다.
야간 동안에 823고지의 곳곳에서는 개인 혹은 분대규모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북쪽의 3소대방향은 날이 샐 때까지 조용한 편이었지만,
1소대의 경우 어두워지자 바로 공격은 시작됐다.

"이 엿같은 새끼들은 어둠을 기다리고 있었어!"


173여단본부는 2-3일째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지도와 무전기
가까이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냥 히트 엔드
런으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다른 모든 남아 있는 여단의
전투제대는 실탄과 식량을 지급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상부에서 지시도 내리지 않았는데, 병사들은 이미 예감을 한 듯
규정보다 매우 많은 실탄과 수류탄을 릭샥에 쑤셔넣고, M-60
예비탄약도 평상시보다 더 릭샥에 감아두고 있었다.



다시 823고지.

잠시후 스푸키 건쉽이 나타나서 조명탄을 쏜 뒤에 약 15분간 맹렬히
사격을 해주었다. 그러나 수류탄은 지속적으로 방어선에 날아왔다.
일부는 천천히 방어선으로 기어와서 크레모어 지뢰의 방향을 돌리거나
전선을 끊기도 했다.

새벽 3시30분 8-10명의 월맹군이 1소대와 3소대 사이에 나타났다.
그들은 많은 량의 수류탄을 던지고 갑자기 RPG rocket을 쏘았다.
이로 인해서 방어선이 뚫리는 듯 하였으나 미군의 맹렬한 응사로
격퇴되었다. 미군 측에서는 1소대의 카브레라 하사가 이때 전사했다.  


보기에 월맹군은 823고지의 지형을 잘 아는 듯 했다. 3소대는
야간전투로 매우 지쳤다. 한번은 2개 분대 정도의 병력이
공격했는데 미군은 포사격을 유도해서 격퇴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생존자가 있었는데 그는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수류탄을 던졌다. 날이 샐 즈음 6명의
월맹군이 소총과 RPG를 메고 전진해와서 북서쪽 방어선에 있는 폭격
크레이터로 뛰어들었다. 크레이터의 병력들은 고립된 위험한 상태였지만,
거꾸로 월맹군이 보기에는 D중대 본진으로 돌격하려는 중간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돌격조였다.


그들은 전면의 2개 미군 소대를 향해서 돌파하려고 공격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사살됐다. 서쪽에서는 날이 새도록 사격전이 지속됐다. 날이
새자 B중대는 구역 앞에 연막탄을 던졌다. 헬기 건쉽이 바로 월맹군의
위치를 식별하고 사격을 시작했다. 다음에 공군의 F-100이 날아왔다.
조종사는 방어선 200미터 앞에 폭탄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압력이
완화되었다. 그리고 3소대로 공격하는 월맹군에게 네이팜탄과 20밀리
캐논을 기총소사를 했다.  

병사들은 지속적인 야간공격으로 인해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HILL 823 After the Battle

잠시 정적이 찾아오자, 휴그 프로피트 소위의 2소대가 1소대를 거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slope남쪽의 돌출지점이었다. 그들은 적의 장비를
수거하고 적 사살인원을 카운트하기 위해서 그리고 갔다. 그런데 이
2소대가 사격을 받았다.

그러자 릴리중사가 박격포 15발을 그곳에 날려줬다. 그러자 잠잠해졌다.
점점 이동하면서 2소대는 벙커와 참호를 발견했다. 약 방어선에서
100미터 정도를 나온 지점이었다. 륙색과 축성도구가 일부 보였다.

그들은 이 정성들여서 만든 벙커와 참호들 때문에 포기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린 것이었다. 그곳에서 나무로 올라가는 로프사다리가 있어서
올라가 보니, 그곳에서 7킬로미터나 떨어진 미군의 화력지원진지가
보였다. 그리고 월맹군의 시체들이 보였다. 일부는 숨이 붙어있었다.

그들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몇 일간 계속 싸운 것 같았다. 사람의
살덩이들이 널려있었다. 몇 명의 자원자가 터널탐색(scout dog)에 나섰다.
인기척이 있어서 백린수류탄을 넣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들어가 보니
백린탄에 크게 부상당한 월맹군 장교가 아직도 싸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권총을 손에서 놓아. 당신은 죽어가고 있어!"

그러나 월맹군 장교는 말을 못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독기를 품은채 권총을 간신히 잡고 버티고 있었다.

결국 미군병사는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쏠 수밖에 없었다.
823고지의 일부에서 잔여병력이 사격을 가해왔지만, 결국 고지는
미군이 점령했고 미군이 이겼다.

(그러나 이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닌 전투의 시작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능선 Ngok Kom Leat의 월맹군은 11월 7일 주간 이후 완전히
종적이 사라졌다. 멀둔 대위의 병력은 여기서 하루종일 수색작전을
했다. 그리고 보급품과 환자후송을 기다렸다. 2개 중대는 결국
C중대와 아침에 서쪽에서 만났다. 이날 존슨대령은 이 중대들을
하나의 제대로 행동하게 했다.  전상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73공수여단의 여단장이 닥토에 도착했다.
그리고 정오에 823고지를 헬기로 와서 순찰했다.

다음날인 11월 8일,  존슨대령의 503연대 4대대는 이 고지에
모두 집결했다. 존슨은 서쪽으로 적을 추적하려고 했지만
상부는 부대에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고지에는 다른 중대로 교체됐다. 이 Ngok Kom Leat과
823고지의 전투는 이후 2주 반 동안의 닥토 전투의 서막이었다.

그들의 상대는 월맹군 66연대였다. 이곳에서 미군은 15명이
전사하고 48명이 부상했다. 월맹군은 전사 117명, 포로 1명,
AK47 주종의 노획화기 44정. 기관총 7대, RPG 로켓포 5대를
노획했다.  


마치 홍보용사진 같지만, 이는 가장 격렬했던 875고지
전투 중에 찍한 매우 희귀한 사진이다.

4편에서 계속....

-------------------------------------------------------

월맹군의 전투력을 무조건 신화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들은 만약에 공격을 거부할 경우, 즉결처분제도가
민주주의 국가보다 훨씬 강화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월맹의 전투력을 격하시킬 필요까지는 없으나, 마냥
어떤 인간이라도 월맹군의 군복을 입으면 전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며,
그들도 인간이고 미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즉결처분의 권한을 북한의 직책으로 말하면 말단
중대까지 나가 있는 정치장교의 권한이다. 이들은
전투 직전에 전투를 고양 독려시키는 하는 정치선전을
하는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