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베트남] 햄버거힐의 서전, Dak To 1967 (2)

구름위 2013. 11. 2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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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닥 토 전투 당시 생생하게 찍힌
173공수여단 503공수연대 4대대원들의 장면이다.

이 기관총사수는 여러장의 사진을 남긴다.
아마도 본격적인 닥 토 전투의 약 2-3일차
정도로 보인다.

이어질 기고에서 여러가지 닥 토 전투당시의
사진을 조금씩 올릴 것인데, 출처도 모르는
매우 생생한 이 베트남 전투사진들이 많은
수가 닥 토 사진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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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 토 전투란, 173공수여단만이 아닌 여러 부대가
혼성으로 참가한 전투로, 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의
국경이 모여 있는 곳에 침투한 대규모 월맹군에 의한
'남베트남의 미군에게 톡톡히 맛을 보여주기'위한
전투가 되었으며, 이중 닥 토 서남쪽의 3-5개 고지군에서
전투를 벌인 173공수여단의 피해가 매우 커서 173공수여단이
이 작전에서 상징적으로 언급되게 된다. *

* 이 내용은 현 베트민을 격하하거나 우롱할만한
사항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읽다보면 월맹군의
가공할만한 (또한 희생을 마다않는) 전투력을
부가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이 지역적인 혼성전투에서 미군은 285명이 전사
했으며, 월맹군은 1천 4백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중 많은수는 포격과 공중폭격에 죽었다. 지상
에서는 아주 견고한 참호와 매복호를 파고 있었기
때문이다. 285명의 과반수는 173공수여단 소속의
전사자들이다. *

* 공중폭격에 많은 월맹군이 전사했다고 우습게 볼
필요는 없다. 그 근접항공지원도 바로 미군 그
자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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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토의 3개 중대 (알리 샌더스톰)


<지루하지만 꼭 필요한, 전투 전의 상황들>


1954년 2월초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면서 물러났다.

이 전쟁의 말기에 베트민은 콘텀시의 북서쪽에 있는 프랑스군의
전초기지에 대대 급의 드라마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2월 7일이
되자 프랑스 최고사령부는 이제 콘텀 지역의 사수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생각하고 프랑스군은 도시를 비우고 철수했다. 그리고 이
중부고원지대는 이후 거대한 공산주의의 본거지가 됐다.

13년이 지난 후, 그때의 공산주의자는 다시 이곳 콘텀 지역에
대한 병력을 재편성했다. 상황은 프랑스 때와 아주 비슷했다.
이때 월맹군은 베트남주둔 미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호치민루트-중부고원지대를
통한 깜짝파티형식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월맹군의 목적은 콘텀지역의 미군 포스트를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린베레 캠프는 그 대표적인 목표였다.
골치 아픈 존재였다. 작전후에 입수된 월맹군의 지도에는
그 목표에 '닥 토(Dac To)'가 펜으로 언더라인이 되어 있었다.
그 지역은 과거 1954년 유린된 프랑스군의 기지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동일한 지역에 있었다.

호치민 루트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라는 나라의 국토에
약간의 실례를 하고 있었기때문에, 월맹도 정치적인
이유로 루트의 감소를 막기 위해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정치적인 이유로 해서
세 나라의 국경이 모여 있는 이곳은 결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라오스 남단의 루트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캄보디아의 국토였기 때문에, 골통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닥토는 미 육군 특전단 그린베레가 훈련시키고 구성시킨
CIDG캠프가 있는 곳이었다. 콘텀지역의 서쪽 중앙에 있었다.
콘텀시로는 플레이쿠에서 14번 국도로 연결되어 있었고,
서쪽으로는 512번 도로가 있어서 닥 토로 연결되고 있었다.

당시 14번 국도는 월맹의 잦은 공격으로 상태가 아주 나빠졌고
그로 인해서 CIDG 캠프가 있는 Dak Seang으로 보급과 기타가
나빠졌다. 그리고 좀 더 멀리 북쪽에는 닥 펙이라는 캠프가
있었는데 상황은 더욱 안 좋았다. 닥 팩의 캠프는 월맹이
꾸준히 공격했고 공중재보급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당시 존웨인 영화처럼 매일매일 박격포탄이 떨어졌다)

닥 펙의 그린베레 지휘관은 전술적인 철수를 고려하는 전문을
나트랑의 5특전단본부로 송신했지만, 과격한 5특전단장은

"그렇게 때문에 너희들을 거기에 쑤셔넣은 거야! 이 멍청아!"

하고 일언지하에 요청을 거절했다.



이 일러스트는 당시 닥 토 전투를 소개한
미국 뉴스위크지에 그려진 지역을 간략히
그린 그림이다....닥 토의 위도를 더 내려가서
호치민 루트 종착점을 오른쪽으로 틀면 캄보디아에
실례를 해야하는 이유가 잘 그려져 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아주 전통적인 역사적인
악연이 많다. 그러므로 닥 토를 조심스레
낼름낼름 애무해서 긴밤자고 싶었던 것이다.



1967년 동안 이 콘텀의 CIDG캠프들은 월맹의 공격으로
한두번씩 후퇴했다가 회복한 경력이 있었다. 이 고립된
캠프에 대한 책임은 지역주둔군 미보병4사단에 있었다.

1967년 10월 초, 미군4보병사단은 콘텀지역을 월맹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하여 기계화대대 하나를 파견했다. 그리고 10월
말에는 월맹군1사단의 지휘를 받는 풀 옵션의 월맹군 1개
연대가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서 콘텀지역으로 들어온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이 월맹군 1사단의 주력은 목표가 플레이쿠였고 그중 1개 연대는
컨텀이었다. 미군은 이 정보에 놀라서 바로 응전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이때쯤 호치민 루트의 중요성을 미군도 알고 있었다.



잇빨중사가 갓태어나서 자대적응하고 있던, 1967년.

10월 28일, 미4보병사단은 기계화대대를 12보병연대와 함께 원래
대로 위치시켰다. 그리고 장거리 정찰팀들을 내보냈다. 12연대
3대대의 정찰대는 즉각 닥 토 남서쪽의 월맹군의 이동을 발견했다.
이 정보는 앞의 정보에 대한 확증이었다. 담당제대인 4사단 본부와
그 상급부대인 1야전군은 강력은 전투를 준비했다.

29일, 4사단은 예하 1여단의 본부를 닥 토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부대간의 경계를 강화하고 정찰대를 내보냈다. 공중정찰도
강화했다. 그리하여 월맹군이 최근에 구축해서 사용한 듯한 베이스
캠프와 탄약 은익소 등을 발견했다.

월맹군1사단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었다. 미군은 전율했다.

'이미 들어와 있다. 찰리들의 든든한 맏형들이.....'



미 제4보병사단 (죄송. 떨어져 있는 패치를 못발견해서)



미 173공수여단 (찾아보셈)


<173공수여단의 투입>

1야전군의 사령관인 윌리엄 로손 중장은 컨텀 지역을 조금 더
멀리 강화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11월 1일, 173공수여단 휘하에
있는 503연대 4대대를 푸옌 지역에서 닥토로 공수했다.

당시 닥토에는 3개의 미군대대가 있었다. 173공수여단은 바로
얼마전의 여름에 닥토의 남쪽에서 월맹군과 피를 부르는 전투를
치른바 있었다. (173은 이른바 기동예비대였다)

그리고 부가적인 정보로는 최근 24시간 동안 적의 규모와 배치가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1967년 11월 2일, 월맹군 66연대
정찰대의 일부에서 낙오한 부 홍이라는 포로에 의하면, 512번
국도 근처의 박 리라는 마을을 자신의 50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이미 포위하고 122밀리 박격포와 로켓진지가 구성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연대는 닥 토에서 서쪽으로 18킬로미터
지점에 새로 만들어지는 그린베레 CIDG캠프도 목표라고 전했다.



<173공수여단의 출동>

당시 503연대 4대대장인 제임스 존슨 중령은 대대에게 11월 2일,
닥 토 서쪽의 적을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그 날 오후에 그는
173공수여단 503연대 4대대 C중대를 반 헷으로 통하는 도로로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대대가 뒤를 이어 진출했다.

당시 새로 만들어지는 CIDG캠프 안에는 공병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존슨 중령은 화력지원점을 구성했다. 그리고 보병4사단의 2개 대대로
닥토의 남서쪽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11월 3-4일간 이 대대는 처음으로 월맹군32연대와 아주 처절한
전투를 했다. 그러나 지원포병이 있어서 미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많지는 않았다. 포격과 공중폭격은 월맹군연대에 타격을 주었다.
이 포격과 공중폭격은 닥토에 있는 특전단 캠프의 강력한 방어막
중에 하나였다.

월맹군이 주춤하였으나 정보에 의하면 월맹은 미군을 다시 공격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주춤한 시기에 다시 월맹군66연대가
고원지대를 통해서 반 헷의 남서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군으로써는 정규월맹군연대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것은 게릴라전이 아니라 공세였다. 존슨 중령의 자신의 대대가 반헷의
새로운 화력진지의 남서쪽 7킬로미터 지점의 계곡에서 월맹군 연대와 가장
먼저 접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령은 B중대는 캠프건설의 경계로 남기고
A.C.D중대를 평행으로 하여 반헷의 남서쪽으로 무력정찰로 진출시켰다.
그리고 중대장들에게

"전면 어느 곳에 분명히 월맹군 대대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베트콩이 아니라 월맹군 말입니까?"

"히트 앤드 런 말고, 반자이 돌격 월맹군 말이야!"

라고 주의를 주었다.



닥 토에서 정찰작전중인 173공수여단 대원들. 이들 소대원들은
보통 3일치의 레이션과 M-15 실탄 500발. M-60 예비탄약 200발.
수류탄 4발. 연막탄 2발. 세개의 수통. 그리고 베트남에서는
조금 확실한 명령인 조정간을 '완전자동상태'로 명령받고
이동했다.



<173공수여단 503공수연대 4대대 3개 중대의 진출>

첫날의 진출에서 접전은 없었으나 서쪽으로부터 닥토로 향하는
월맹군의 군사적인 행동은 느낄 수 있었다. 세 개 중대는
야간경계에 들어갔다. D중대가 중앙, C중대는 서쪽, A중대는
동쪽에 자리잡았다.

사실 공수중대의 무장으로는 임무로 보기에 월맹군은 힘겨운 상대였다.
중대는 3명의 장교와 85명의 사병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의 소대도
2개 소대병력으로 편성되어 있고, 풀티오의 보병소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화기소대가 없었다. 중대의 중화기는 M-60기관총이 가장 컸으며,
D중대의 경우는 박격포와 무반동총도 없었다. 그들은 공수부대원이었다.


그러나 미군공수부대의 경우 베트남에서 일반 보병과 동일한 작전을 했다.
그러나 단점은 화력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탄약
휴대량이 많았고(공수부대의 콤플렉스 중에 하나.....) 군장은 50파운드가
넘었다. 거기다가 식량은 3일치를 가지고 있었다. 약 20킬로그램....

이들은 보통 500발 이상의 실탄을 휴대했는데 탄입대에 안 들어가면
크레모어 천주머니에 휴대했다. 그리고 4개의 파열수류탄, 2개의 연막탄,
200발의 M60예비실탄, 수통 세 개를 모두 휴대하고 있었다.

그때 '청동산악인'이라는 닉네임의 CIDG병력 1개 소대가 같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닥토의 특전단캠프에서 지원 나온 병력들이었다.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은 남베트남 특전단 상사인 키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30명과 함께 주로 D중대를 엄호했다. 그들은 주로 미군의 탄약과 식량을
짐으로 지고 지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장은 M1과 카빈 브라우닝
자동소총, 미국산 기관단총들이었다.  



Montagnard Irregulars (몽타냐드 비정규군)  


당시의 몽타나(몽타냐드) 병력들. 이들의 문제는,
왜 싸우는지를 교육시키는 것보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 더 어려웠다고 그린베레 대원들은 말한다.
오히려 공산주의를 나쁘다고 교육시키는 것보다, 공산주의
보다 더 많은 선물/물자를 주는 것이 더 빨랐다고....

이들은 정확히 말해서 전쟁터에 끼워져버린 불쌍한
사람들이다. 월맹은 이들도 전후에 재교육대상으로
놓고 고통을 부여하게 된다. 무장은 대단치 않았다.
가장 알려진 것이, 2차세계대전 당시 기름칠이 된
A급 상태로 노획된 독일군 마우저 소총도 있었다.
CIA 아자씨들이 날라주었다. 초기에는....

이들에게 대단한 전투력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다만, 지역을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고 자연과 친화력이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11월 4일, 세 개의 중대는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4사단의 정보부는 당시 월맹군 40포병연대가 반헷 남동쪽 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4대대장 존슨중령은 A중대장
'제임스 멀둔' 대위에게 명령해서 진로를 바꾸어 이 부대를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그 날 오후 1시쯤 멀둔대위는 진로를 동쪽으로 바꾸어 저녁 8시까지
행군했다. 이 하루도 모든 중대의 접전은 없었고 서로가 1.8에서
2킬로미터씩 이격이 되었다. 5일 아침이 되었지만 적의 징후가 없었다.
그러자 멀둔대위의 A중대는 다시 턴하여 D중대의 측면으로 복귀했다.
중대원들은 고통스럽게 행군했다.


그리고 이날 11시 30분 C중대가 북잡한
산악지대에서 월맹군의 이동흔적을 발견했다.

보급기지에서 5킬로미터 지점이었다. 거기서 C중대는 월맹의
터널도 발견했다. 다른 중대도 남쪽에서 일부 참호를 발견했다.
미 보병4사단 1여단장인 리차드 존슨 대령은 대대장인 제임스
존슨 중령에게 보다 가까이 전투지원지점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정찰기가 공중정찰을 통해서 이 지역의 가장 유력한
고지인 823고지를 정찰했다. 그리고 B중대가 헬기로 다음날
11월 6일 아침 9시 고지에 랜딩했다. A, C, D 중대는 새로
만들어진 베이스로 향했다.  

(그리고 823 고지를 선정한 것은 크나큰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미 들어온 월맹군은 참호와 진지를 파고 보급품을 비축해
놓았는데, 그중 하나가 823고지였다)



11월 6일 공수부대원들은 체력적으로 힘들어졌다.

그들은 4일간 콘텀의 무성한 정글지대를 행군한 것이다.
A중대가 먼저 야간방어에 들어갔다. 그곳은 얼마 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병력은 헬기로 보급품을
받았다.

다시 아침 9시에 행군이 시작되자 그들은 D중대와 많이 벌어진
것을 알았다. A중대 1.5킬로 거리에는 토마스 베어즈 대위가
지휘하는 D중대가 있었다. 중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적은 안보였다.

상병 에모리 조르젠센이 A중대의 포인트맨이었다. 그는 전진을 하다가
유선통신선을 발견했다. 11시 30분이었다. 200미터 정도 라인을 따라서
정찰을 보냈으나 피트헬멧 하나밖에는 발견을 못했다. 통신선은 서쪽을
향해서 능선의 정상으로 위쪽으로 가고 있었다.

베어드 대위는 방향을 바꾸어 통신선을 따라가 보겠다고
대대장에게 요청했다. 당시 상공의 지휘헬기에 타고 있던
대대장 존슨 중령은 이를 허가했다. 대위는 중대를 방어
구성하고 2개 분대를 정찰로 내보내고 포병에게 연락을
해 놓았다. 2개 분대는 4방으로 정찰을 나누어 나갔다.
그러나 징후는 여전히 없었다.

(4방정찰: 미군은 크로바식 정찰이라고도 한다)

대위는 다시 4명으로 구성된 2소대의 첨병을 세워 진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오후 1시 능선에 도착했다. 접전의 팽팽한 가능성이 흘렀다.
그때 찍힌 지 얼마 안 되는 발자국이 발견됐다. 그리고 대나무들에
통신선이 감겨서 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인간의 배설물이 발견됐다. 적은 근처에 있었다.

베어드 대위는 다시 그 자리에 방어구성을 했다. 적의 매복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소대장 버톤 중위가 두 개의
분대를 이끌고 높은 곳으로 정찰을 나갔다.

(정찰임무에 대한 약간의 교습을 받은 분들은,
유선통신선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어떤 제대급
인지 아실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일반적으로
상대하는 급보다 높은 급이다. 적어도 대대급.)



<전투의 시작>

당시 2소대 1분대장은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50미터
전방에서 자동화기의 총소리가 타타타탕 나기 시작했다. 4일만에
적을 만난 것이다. 버톤 중위는 1분대에게 후퇴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측면을 이용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에서는 2분대가 엄호하고 있었다. 2분대는 월맹군의 사격을
잠재우기 위해서 기관총과 M79유탄을 발사했다. 1분대는 측면으로
월맹군을 향해 올라갔다. 당시 찰스 모스 상병이 그곳에서 녹색의
군복에 AK47을 휴대한 병사를 목격했다.

상병은 그를 M16으로 쓰러트렸고, 서로간에 사격전이 시작되었다.
베어드 대위는 버톤 중위에게 중대가 있는 곳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후퇴하는 동안 다른 소대가 엄호사격을 했다. 이 사격을 계기로 높은
곳에서 중대를 향해 전면적인 사격이 시작됐다. M60사수와 한 명이
부상을 당했다.  


중대는 방어구성을 했고 CIDG병력도 능선 쪽의 측면에 전개했다.
베어드 중대장은 1소대를 드러난 측면에 보강했다. 그리고 선임하사와
윌리엄콜린 상병이 제대를 편성해서 후미경계를 구성했다.

베어드 대위는 공중폭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전폭기를
당시 바로 날아올 수가 없었고 헬기건쉽이 날아와 일부 압박이
경감됐다. 그리고 이어서 319포병단의 3대대 B포대의 105밀리
포격이 날아왔다. 6킬로미터 거리에서 날아오는 것이었다.

"탄막에 공간이 생기면 바로 후퇴해!"

그러자 2소대가 후퇴했다. 버톤 중위와 두 명의 기관총사수가
2-3분대의 후퇴를 엄호했다. 그리고 중대가 후퇴하여 D중대를
만났고 이어서 고지에 대한 공중폭격이 시작되었다. 베어드
중대장은 다시 부대를 평행으로 놓고 공격을 준비했다.
부대의 배치모양은 달걀모양이 되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인 줄을....>


2소대가 모두 중대의 방어선으로 후퇴하자,
마이큰 프랜크하사와
에드워드 스미스하사,
그리고 레로이 로스웰 상병이
3명 1개조의 청음초로 2분대 전방 20미터 지점에 나갔다.


그들은 자동소총과 M7유탄발사기로 무장했다. 그러나 적의 추적과
반격은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자 AK47을 든 15-20명이
서서히 은폐에서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2분대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돌격했다.

미군 2명이 맞았다.

맞은 사람은 분대장 제임스 샤퍼상병이었다. 그는 치명적인
관통상을 입었다. 1분쯤 지나자 같은 규모의 월맹군이 다시
3분대를 향해서 공격했다. 1분대가 엄호사격을 했다.
이 공격은 격퇴됐다.

그러나 베어드 중대장은 두발의 총을 맞았다. 오른쪽 가슴에 한방,
그리고 왼쪽 팔에 맞았다. 그러나 부상을 참고 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로렌스 크루리 대위는 319포병의 3대대에서 관측장교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포를 유도하다가 그도 부상을 당했다. 결국 포병의
포격유도는 어니 풀쳐 상병이 하루종일 맡아서 했다. 로렌스 대위는
다친 가운데도 상공의 FAC와 교신을 하면서 공중폭격을 유도했다.  

(미군의 상병계급이 지휘권이 있는 코퍼럴과 지휘권이
없는 스페셜리스트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잘 아시시라,
그러므로 지휘권이 있는 코퍼럴의 진급은 미군에서
쉽게 짬밥에 따라서 허락하지 않는다. 포격 요청도
위의 상병이 코퍼럴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후 2시가 되자 308전술전투비행단의 F-l00가 날아와서
1소대 2분대 외곽을 폭격했다. 250파운드의 폭탄과 네이팜,
그리고 20밀리 캐논포를 사격했다. 전장의 통나무에 구부리고
있던 2분대의 스미스하사와 동료들은 너무 폭격이 가까웠음을
몸으로 느꼈다.

특히나 하사의 위치는 너무 가까웠다.

"두 번째 폭격은, 바로 우리에게 떨어졌다........."

라고 그는 나중에 기억했다.

"만약에 내 앞에 큰 통나무가 없었다면 난 거기서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전폭기가 무언가를 떨구고 갈때...우리도 공포를 느낀다."


의무병은 전방의 동료를 구출하러 기어갔다가 보람 없이
금속파편에 맞아 전사한 동료만 발견했다. 그러나 베어드
대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폭격이라도 있어야
자신들이 살수 있다는 사실을.......

중대장 베어드는 현재 많은 수의 월맹군에 포위되어
있음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월맹군의 강화된 주둔지로 173공수여단의
정찰부대인 3개 중대가 알아서 걸어들어온 것이다)


가장 앞으로 나갔던 청음조의 프랭크와 로스웰은 앞의 사격전에서
이미 부상을 입었다. 그들은 마지막 폭탄이 떨어질 때 필사적으로
다시 기어 들어왔다. 스미스도 자신이 가진 실탄을 모두 쏘면서
같이 기어 들어왔다. 그러나 스미스 하사는 나무 위의 월맹군
저격수에게는 아주 뚜렷한 목표였다. 스미스가 맞았다. 당시
그랜드 매디슨 상병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동료들은 당시 전사자의 것이라도 M-16과 M79의 실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오른쪽의 한 나무를 향해서 총을 쏘면서 달렸다. 다가가서 보니
저격수는 아주 기괴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그는 나무에 로프로 몸을
묶은 상태에서 사지가 밑으로 향해 늘어져 있었다.

오후 3시가 되자, 로스웰이 스미스가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그러자 1분도 안되어 AK47의 총알이 날아왔다. 2소대의 전면에는
약 15명 정도의 월맹군이 있었다. 그들은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오른쪽에서 우리를 향해서 나무를 스치면서 뛰어왔다."

로스웰은 기억한다.

"우리는 그들을 자동소총을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분대도 정말 있는 대로 다 쏘아버렸다"

스미스 하사가 말했다.

"우리는 덤불아래서 쏘았기 때문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오른쪽으로 사라졌고 그 뒤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사격을 해왔다."  


오후 3시 10분, 증강된 분대 규모의 월맹군이 D중대 구역에서
1소대 섹터로 대나무 밭을 이용해서 이동했다. 몇 명의 몽타나족
대원이 접근하는 그들을 보았고, 그들의 지휘관인 키 상사와
몇 명이 응사를 했다.

이들의 효과적인 격퇴로 A중대 테라자스의 분대가 경감 받았다.
그러나 왼쪽 후미에서 다시 이동하던 그들은 F-100이 네이팜을
떨어트리자 이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D중대에 대한 압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때 미군 건쉽헬기가 지상으로부터 사격을 받아서 헬기내에
한 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지상의 부정확한 연막탄의
마킹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근접항공지원은 힘들어졌다.

이제는 아예 연막이 공중에서 햇볕으로 인해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월맹군의 광폭한 공격은 수그러들었고 저격수의
사격이 간간이 이어졌다. 방어선은 팽팽하게 침묵했다. 포병의
단단한 사격은 고지의 정상에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시간쯤 지나자 월맹은 다시 공격했고 고지공격은 힘들었다.
월맹은 미군은 고착시키고 있었다.



D중대의 남쪽 1.4킬로미터 지점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침동안 공중폭격이 다섯 번 있었으나 정해진 구역에
요청한 보강병력을 받을 랜딩존을 청소하는데는 실패했다.

Hill 823고지의 그곳은 UH-1D헬기들이 앉기에는 충분했으나
지상의 수풀로 인해서 땅에 내릴 수는 없었다. 원래
공중강습시간은 오전 9시였으나 조금 지연됐다.

존슨대령은 안전한 랜딩을 위해서 2회이상의 공중폭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수북한 잡목과 정글은 접근하는 헬기를 쏘아서 떨어트리기에
적격이었다. 헬기들은 대나무들로 인해서 좀더 높이 떠서 병력들을
뛰어내리게 해야만 했다.

335비행중대의 헬기는 결국 동쪽으로 사라지고 살벌한 높이에서
뛰어내려 랜딩한 공수부대원들은 주변으로 산개했다. 그리고
그들은 slope를 향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823고지로
올라가는 동안 그들은 몇 개의 총기류조각과 월맹군의 륙색을
발견했다. 아마도 공중폭격이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때 버림받은 고지 정상에 조지 발드리지 대위가 섰다.
그는 새로운 고지의 정복자였다. 정상에서보니, 823고지는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모든 방향의 사계가 트여있었다.

'이곳에 월맹군의 참호와 터널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풍성한 우림의 계곡이 꼭대기에서 갈라져나와 D중대가
고착된 부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오히려 서쪽과 북서쪽이
공격하기에는 적당한 지형으로 보였다. 반면 북쪽은 경사가
너무 급했다.

발드리지 대위는 자신의 1소대를 북쪽과 북서쪽에 방어선을
배치했다. 2소대가 동쪽과 남쪽을 맡았다. 그리고 자신은
박격포소대에 위치했다. 그리고 3소대를 지휘하는 로버트
달링 중위에게 약간 밑에 있는 작은 봉우리를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내려간 달링중위는 그곳에서 약 100미터 아래에 2인1조의
포스트를 설치하고 월맹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아래의 고지에
도달하자 달링 중위는 클라렌스 밀러 상병과 루이스 밀러 상병을
경사면을 내려가서 다시 감시포인트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둘은 서로 관계가 있는 밀러는 아니었다.

그러나 10분후 이 두명의 밀러는 죽는다.

달링도 자신이 보낸 감시포스트에서 격렬한 소총사격음을 들었다.

아주 근접거리의 사격이었다. 결국 무전병을 포함해서 구출대를
보냈다. 그 전초에 도착하자 주변은 조용했다. 그리고 소대규모의
월맹군 매복이 있었다. 전진이 좌절됐다. 이 정적을 깨는 총소리가
시작될 때 발드리지 대위는 고지의 한족에 있던 2중대 위치에 있었다.

그는 바로 무전기로 달링 중위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후 무전기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노벰버! 난 아주 고통스럽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전병 제임스 엘리스 상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교신이었다. 중위가 구성한 구출팀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사했다. 살아남은 로버트
비켈 상병도 중상을 입었다.

그는 기어서 자신의 소대로 돌아왔다. 그는 동료들을 구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고, 녹색과 회색의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나무
뒤에서 자신들을 쏘았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버트 맥콰이어터
하사가 복수를 했다.

그의 1분대에서 외곽 측면으로 접근하던
월맹군 소총수를 냉정하게 사살했다.  

그리고 확인사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