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일본의 두 닌자무리

구름위 2013. 1. 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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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대 닌자 服部半藏,風馬小太郞

1.服部 石見守 半藏(핫도리 이시미노가미 한죠)

닌자란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에 지는 사람들이다.
역사의 한쪽에서 대활약을 했어도 이름다운 이름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가는것이 닌자의 일생이다.
그러나 여기 제법 지혜롭게 일생을 보낸 닌자가 있다.
伊賀(이가)의 그사람 이라고 하면 알 핫도리 한죠이다.
百地,藤林,服部 이 세가문은 ~伊賀三大上忍~이라 불리고 있다.
그중의 服部家(핫도리)는, 이가의 일을 百地,藤林에게 맡기고,
足利義晴(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봉공했다. 그러나
아시카가가의 장래에 실망을 느껴 핫도리가는 아시카가가를 벗어나
三河(미카와)의 松平元康(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일의 德川家康)에
봉공했다.
한죠의 첫번째 전투는 16세때의 일로 이가군단을 이끌고
三河의 宇土城 야전에 참가했다.
그후도 朝倉 대 織田,德川연합의 전투인 姉川(아네가와)의 전투,
武田과의 전투였던 나가시노의 전투등 德川家의 여러 전투에
참가해서는 그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한죠의 출세의 열쇠가 되었던것이 1582년 6월의 ~伊賀越~
이라 부르는 사건이었다. 이때 明智光秀(아케치 미쓰히데)에 의해
本能寺(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堺(사카이)를 구경하고 있던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머뭇머뭇하고 있으면 아케치의 세력이랑 봉기한 一揆軍에게 당하고 말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자결을 결의하고 있었다. 이때 이에야스의 궁지를 구한것이
핫도리 한죠였다. 각지에 숨어있던 총 300명에 이르는 伊賀,甲賀의 닌자를
집결시켜 이에야스를 무사히 三河까지 호송했던것이다.
이 대역활에 의해, 한죠는 德川家의 伊賀,甲賀忍群의 수령이 되고,
德川(도쿠가와)安定政權에 봉사하기 시작했다.
이런일로 인해, 한죠는 닌자라기 보다 도쿠가와의 충의의 무장중 한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江戶城(에도성)에 한죠의 이름을 딴 ~半藏門~이라는 문이 남아있는것이
한죠의 무장으로서의 활약을 전해주고 있다.
[半藏(한죠)란 이름은 服部(핫도리)가의 수령만의 이름이다]



2.風馬小太郞(후마 코타로)
전투중에서도 평지전만은 병사수로 승패가 결정되어지는예가 적지 않다.
그러나 北條氏康(호죠 우지야스)의 河越의 夜戰은 전형적인 평지전임에도
적은 아군의 10배였음에도 불구하고, 氏康軍(우지야스)은 압승을 거두고 있다.
뭔가, 이 전투에는 어떤 특수한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는것이 보통의 생각일까
그 특수한힘이 , 코타로가 이끄는 風馬衆이었다.
풍마중이라고 하면 닌자의 군단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실은 험준한 箱根山(하코네)을 근거지로 하는 게릴라전 전문의
강병집단이었다는것이 오늘날의 설이다.
게릴라집단의 무서움은 근대전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특히 베트남전쟁에서는 병수,장비면에서 압도하면서도 미군은 실질적으로
패배했다. 베트공이 게릴라전과 부비트랩 을 이용해, 미군의 사기를
철저히 떨어뜨렸던것이다.
이런 전투를 풍마중은 전국시대에 행하고 있었다.
그예가 河越의 夜戰인것이다. 또 이전투에서, 풍마중은 적진영의 혼란이랑
적의 전선 지휘관의 암살등도 행했다.
이것이야말로 호죠 우지야스군이 10배나 되는 적을 타도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또, 그것만이 아니고 北條家가 자리했던
小田原城(오다와라)은
견고함뿐만이 아니라 범죄발생률이 최저(당시 전국시대)인 町였다
그 비밀도 역시 풍마중에게 있었던것이다.
오다와라의 성밑 마을은 여기저기 다니는 여행객에게도 전혀 불안감이 없었다
라고 한 유랑승의 수기에남아있다.
그것은 風馬衆이 도적이랑 불량낭인들을 단속하고 퇴치한데 그 이유가 있다.
그런 그들이 箱根山(하코네)에 은거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었일까?
정규군을 넘어서는 전투력과 통제력을 지닌 풍마중이었지만, 그런 그들이
산에 은거하고 있었던 이유는 大名家나 통치자에 관리 되어지는 일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自由人의 집단만이 아니라, 반권력이라는 확고한
신념이야말로 풍마중은 일심동체로서 그 힘의 발휘가 가능했던것이다.
어떻게 보면 풍마중은 일본판 수호전의 양산박이라고나 할까.
어찌되었던 풍마중은 小田原城下의 무뢰배들에게 질시와 경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풍마중도 北條家의 멸망과 동시에 저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단지, 사대째인지 오대째의 小太郞(코타로)가 吉原을 근거지로 하는
야적의 장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들었던 일이
사료에 남아 있다. 德川幕府(도쿠가와 바쿠흐)에 대해서도, 풍마중은
반권력을 행사한것이었다.
[小太郞(코타로)란 이름 역시 대대로 수령에게 전해지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