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토사이는역시 전국시대 불패의검호 중 한명입니다
伊藤一刀齋( 1560? ~ 1653? )
잇토류(一刀流)의 창시자인 이토 잇토사이의 생몰년도는 정확히 알려진바
없지만 에토시대 초기는 물론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야규 쥬베이
(柳生十兵衛)와도 분명 동시대에 생존했었다고 한다.
정식명은 이토 잇토사이 카게히사(伊藤一刀齋景久)로 카미이즈미,츠카하라등이 전국시대의 소영주 출신인데 비해 순수한 검술가 출신이다.
시코쿠(四國)의 한 섬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출생지 또한 불명이다.
이토 잇토사이 역시 생애불패의 검호로 진검승부 33회 목검대련62회
흉적타도 57인등 에서 무패를 자랑한다.
원래 이름은 야고로(弥五郞)였고 어려서부터 검에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14세 무렵부터 그는 스스로를 귀야차(鬼夜叉)칭했으며 미츠시마 신사(三島神社)에서 토미다 이치보(富田一放)를 상대로 공식적인 생애 첫 승리를 얻고그 시합에 감탄한 신사의 신주에게 보도를 하사 받는다
또한 신사에 든 5~6명의 강도를 손잡이도 없는 검으로 모두 베고 마지막 한명이술독에 숨자 독과 강도를 한꺼번에 양단낸 일은 일찍부터 그의 검술이 어떠했는지말해준다
그후 독학으로 검을 연마하다 카네마키 지사이(鐘捲自齋:베가본드에서 사사키코지로를 기르고 있는 노인)의 제자로 들어가 츄조류(中條流)를 배웠다.
5년간의 수련끝에 이미 가네마키의 벽을 넘은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33회의진검승부에서 모두 승리한다
독자적인 명상수련끝에 '마음이 몸에 통하고 몸에 검이 통하니 곧 심신도가 하나(心身刀一如)다' 라는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유파명을 잇토류(一刀流)라 칭하고 잇토사이(一刀齋)라고 개명했다
잇토류의 유명한 기술로는 잇토사이가 애인과 자고 있을때 타유파의 자객이 습격하자 자객과 내통한 애인이 검을 숨겨놓자 자객의 검을 빼앗아 베어버리며 깨닫고 습득한 홋쟈도(?捨刀)라는 기술과
츠루가오카 하치망구(鶴岡八幡宮)에서 뒤에서 다가오던 자객을 살기만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순간적으로 베어버리며 깨달은 무소우켄(無想劍)이 있다
이토 잇토사이는 카미이즈미와 함께 일본검도계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그의 수제자 미코가미 덴젠(御子神典膳:후의 오노 타다아키(小野忠明))은 야규무네노리와 함께 도쿠카와막부의 검술사범이 된다
막말시대 사카모토료마의 유파인 호쿠진잇토류(北辰一刀流) 역시 잇토류에서 파생된 유파이다
검호 류생종엄
하급무사 집안이던 야규가를 도쿠가와 막부의 검술사범가로 부흥시킨
시조라 할수있는 야규세키슈사이를 소개하겠습니다
柳生宗嚴(1527 ~ 1606)
카미이즈미로부터 케게류의 면허를받고 더욱 발전시킨 야규신카게류(柳生新陰流)를 창시한 야규 무네요시는 1529년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야마토(大和)에서 태어났다. 원복전의 이름은 신스케(新介)이고 정식명은 야규세키슈사이무네요시(柳生石舟齊宗嚴)이다. 그는 원래 카토리 신주로(香取新十郞)에게 츠카하라의 신토류(新當流)류를 배웠고 토미다 세이겐(富田勢源)에게 토미다류(富田流:소태도술),보장원의 잉에이(院胤)에게호죠잉류(寶藏院流)창술의 극의까지 두루 섭렵한 기내제일의 병법자(검술가)로 알려져있었다.
본래 그의 야규가는 관령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에 소속된 가문이었지만 1544년 호소카와가가 츠츠이(筒井)가에 패하자 츠츠이가를 따르다 1559년 마츠모토 히사히데(松永久秀)가 츠츠이가를 공격해왔을때 다시 츠츠이가를 배반하고 마츠모토가에 붙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이 전투에서 무네요시는 대활약을 하고 그 무명을 기내에 떨치게 된다.
그러던 와중 당시 보장원에 들른 검성 카미이즈미에게 패한 잉에이의 소개를 받고 검성과의 대결은 물론 그 제자에게도 패하고 자신의 자만을 깨닫고 검성의 신카게류에 입문하게된다.
무네요시의 열성에 검성은 3일간 집중적인 일대일 대련으로 신카게류의 극의를 전수했다. 무네요시는 수련끝에 일년후에 다시 찾아온 스승 카미이즈미(上泉信綱)에게 신카게류(新陰流)의 최대극의인 무토도리(無刀取り)를 보여주고 일국(一國)에 한 사람 에게만 허용되는 신카게류의 면허를 받게된다.
무토도리란 카미이즈미를 검성이라 불리우게한 기술로 맨손으로 상대방의 칼을 빼앗거나 봉쇄해 버리는 기술이다. 이 기술이 극에다다르면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제압할수 있기 때문에 검성이 표방하는 활인검(活人劍)의 경지라 할수 있었다.
후에 세키슈사이의 칭호를 받고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앞에서 이기술을 보여준 일화가있다.
맨손의 세키슈사이를 상대로 그의 아들 무네노리(宗矩)가 목도를 들고 내리치는 순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목도가 땅에 떨어졌다.
다시 무네노리가 목도를 돌려 세키슈사이를 찔러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이 광경을 본 이에야스는 결과에 미심쩍어하며 납득하지 못하고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게 다시 대련을 시켜보았지만 역시 같은 결과였다.
이번엔 이에야스 자신이 진검을 들고 세키슈사이를 내리쳤다. 그 결과 검의 손잡이부분을 쥔 이에야스의 손이 양팔과 함께 세키슈사이의 양손에 잡혀있었다.
결국 감탄한 이에야스는 세키슈사이를 검술사범으로 청하고 야규가는 대대로 장군가의검술사범을 맡게되는 영예를 얻게된다.
하지만 고령을 이유로 아들 무네노리에게 사범직을 맡긴후 야규가는 순수한 검술가를 고집하던 큰아들 요시가츠(嚴勝)의 오와리야규(尾張柳生)와 출세지향적인 다섯째아들 무네노리의 에토야규(江戶柳生)로 분열되는 사태를 겪는다.
만년의 세키슈사이에게 도전한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꽃을 베어 보내자 그 잘린 가지의 단면과 싱싱하게 살아있는 꽃을 본 무사시가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세키슈사이의 가장 큰 업적은 도쿠카와 막부시대의 일본 검도계를 신카게류로 잇토류(一刀流)와 함께 양분시키고 더 나가 장군가의 검술지남인 그 아들 무네노리로 하여금 야규가를 확고한 일본 최고의 검술가문으로 만들게되는 기틀을 마련케 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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