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검성 총원복전(塚原卜傳)

구름위 2013. 1. 1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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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천신강과 더불어 일본에서는 양대 검성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塚原卜傳(1490 ~ 1571)
가시마 신토류(新當流)의 창시자로써
정식명은 츠카하라보쿠덴다카모토(塚原卜傳高幹)로
일본 이바라키현(茨城県)가시마(鹿島)에서 태어났다
원래성(性)은 우라베(卜部)로 이름에서 알수있듯이 그의
아버지는 신궁에서 점을치는 신관이었다.5세때 츠카하라 야스모토
의 양자로 들어가 츠카하라가문을 이었다.
3세때부터 우라베가문의 가시마츄고류(鹿島中古流)라는 태도(太刀)
술을 익혔고 그를 입양한 츠카하라 야스모토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검술유파인 신토류(天眞正傳神道流)의 창시자인 이이시노 초이사이
(飯篠長威齊)의 제자였기때문에 그역시 신토류를 배웠다.
1518년 마쓰모토 비젠노카미(松本備前守)의 권유로 가시마카미야
(鹿島神宮)에서 천일간의 수련에 들어가 독자적인 검술 신토류(新當流)
완성하고 비전오의 이치노타치(一の太刀)라는기술을 만들었다.
이치노타치라는 기술이 어떤건지는 츠카하라 본인의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려지지않고 있으나(플스2판 태합4에서는 무조건 상대방
HP의 70%를 없앤다.) 20대에 일가를 이루었다는건 그의 재능
이 어떠한지 알려준다.
츠카하라 역시 일본 역사상 생애한번도 패하지 않은 검호중하나로
1512년 첫 출전을 시작으로약 오십여년 동안 39번의 참전,19번의
진검승부에서 212명을베고 100여차례의 목검,목창대련중에서 작은
부상조차입지 않았다는 그야말로 무적의 검호였다.
츠카하라의 특징은 단순히 검의 기술적 완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대결전에 이미 승리의 조건을 만드는 전략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 한 예로 이런일이 있었다. 츠카하라는1505년 1차 무자수행때 시미즈사(淸水寺)에서 오치아이 도라우에몽(落合虎右衛門)을
상대로 생애 첫 승을 거뒀는데 후에 일야성주(日野城主) 가모우 히사히데
(蒲生定秀)의 초대시 목숨을 부지했던 오치아이가 앙심을 품고 병풍뒤에
숨어있다 그를 공격해왔다. 츠카하라는 재빨리 물러나며 오른손에 협차(단검)를 뽑아들고 왼손엔 장도를 뽑지않고 들었다. 둘이 교차하자 오치아이의 가슴에는 협차가 박혀있었다. 그 신속함에 놀라며 가모우가 장도를 쓰지 않은 이유를 묻자 츠카하라는 가까운 거리에서 적이육박하면 장도를 뽑을시간에 당할거라 판단하고 협차를 썼다고 대답했다.
냉철한 판단력의 승리였다. 또 다른 예로 한번은
츠카하라가 비파호에서 배를 타고 가던중 같은 배에 타고 있던 30대거한이 자기의 힘을 자랑 하며 떠들자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에 대한은 츠카하라를 노려보며 거만하게 유파를 묻자 츠카하라는 '무수승류'(無手勝流)라고 대답했다.
자신을 놀리는것이라 여기고 화가난 거한이 결투를 청하자
츠카하라는 선상에서 결투를하면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되니
중간에 섬에 내려서 대결하자고 제안하고 일단 수긍한 대한은 조그만
섬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듯 칼을 뽑고 내렸다. 그러자 츠카하라는
사공에게 그냥가자고 말하고 배는 거한만 섬에두고 떠났다.
말그대로 손안쓰고 이기는것(無手勝流)이 된것이다.
이것은 훗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한 후 여러 제장들을
모아놓고 병법에 관해 토론하던 중 싸우지않고 이기는것이 병법의
최상이라고 말하며 예를 든 유명한 일화였다.
총탄이 빗발치던 전국시대를 살면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도 82세까지
장수할수 있었던것은 무와 지를 다갖췄기 때문이었다.
1523년 2차무자수업에 들어가 천하를 돌다 양부의 부음을 듣고 1533년
귀향에 츠카하라성(塚原城)을 잇고 결혼했으나 10년만에 사별하게 된다.
그의 대결중 유명했던 상대로는 가지와라 나카도(梶原長門)가 있었다.
가지와라는 천하무적 난도(청룡언월도같이 생긴창)의명인으로 불리우며
대결전에 상대방의 신체를 예고하고 베는걸로 유명한 공포의 존재였다. 결투당일 가지와라는 날길이 1척오촌(50cm)에 구척길이의 자루를 가진 난도를 들고 나왔고 츠카하라는 2척팔촌의(80cm)도신을 가진 태도를 들고 나왔다. 결투가 시작되자 츠카하라는 순식간에 가지와라의 공격을 모두
피하고 거리를 좁힌후 난도와 그의 얼굴을 통채로 양단 내버렸다.
츠카하라는 이 대결을 끝으로 진검승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1556년 양자에게 성(城)을 물려주고 3번째 무자수업에 들어갔다.
그는 유명한 제자를 많이 두었는데 아시카가 요시테루,요시아키형제를
비롯해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호소카와 후지다카(細川藤孝)
유일하게 비전오의 이치노타치를 전수한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具敎), 검호 모로오카 잇파(師岡一羽)등이 있다.

1571년 82세를 일기로 츠카하라는세상을 뜬다. 신토류(新當流)라는 이름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붙인이름이다. 현재 가시마에서 신토류는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 있다. 유명한 저서로 [塚原白首]를 남겼다.

일본에서 항상 츠카하라는 20여년 연하이긴하지만 카미이즈미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서로 대결해보지 않았다점 때문에 역시
20여년의 나이 차이에 동시대를 살았지만 대결해보지 않은
미야모토 무사시(1584 ~ 1645)와 야규 쥬베이(1607 ~ 1650)와 함께
누가 강한지 비교대상이 되곤한다.
다만 츠카하라와 카미이즈미 둘에게 모두 검술을 배워본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카미이즈미가 천하제일이라고 했기때문에 상대적으로
카미이즈미가 우위에 있는것 같다.
신토류를 소개하는 글에 그를 이렇게 말한 부분이 있다.
5百年來 無雙の男 - 5백년내 무쌍의 남자

검성 상천신강

上泉信綱 (1508 ~ 1582) 신카게류(新陰流)의 창시자인
카미이즈미노부츠나의 정식명은 카미이즈미이세노카미노부츠나
(上泉伊勢守信綱)로 일본상주(上州)지방의 호족으로 관동관령
으로 있는 우에스기(上杉)가에 속해있던 상천성주(上泉城主)인
요시츠나(義綱)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복(元服)하기전에 이름은 겐고로(源五郞)였으며 원복후엔
히데츠나(秀綱)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검술과 관련이 깊어 그의 조부 도시히데(時秀)는
일본 3대 검법원류의 하나인 텐신세이덴신토류(天眞正傳神道流)
의 시조인 이이시노 초이사이(飯篠長威齊)와 또 다른 3대 원류의
하나인 카게류(陰流)의 시조 아이쓰 이고사이(愛州移香齊)에게
검술을 전수받았고 아버지 요시츠나역시 초이사이의 제자 마쓰모토
마사노부 (松本政信)에게 검술을 배웠다 노부츠나도 아버지와같은
스승에 입문해 17세의 나이에 텐신세이덴신토류의 오의를 깨우쳤다
21세의 나이에 노부츠나는 오오모리(大森)가의 딸과 결혼한다
그의 나이 23세때 조부 도시히데의 죽음직전에 잠시 상천성에 방문한
이고사이는 그를 만나보고 그의 비범한 재능에 반해 '나의 카게류를
전수받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라고 했다
이고사이는 결국 노부츠나에게 카게류의 비전서를 전했고
1년 후 노부츠나는 카게류의 정통 후계자가 된다 그 후 검술
수련에 더욱 정진해 자기만의 검법인 신카게류(新陰流)를 창시한다

1537년 상천가의 주가(主家)였던 센고쿠(扇谷) 우에스기가의 도모오키
(朝興)가 죽고 가독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 도모사다(朝定)는 적대관계
였던 호죠가의 산하에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상천가는 계속
우에스기가에 속해 있었다
1545년 9월 야마노우치(山內) 우에스기가의 노리마사(憲政)와 센고쿠
우에스기가의 도모사다는 6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호죠가의 맹장
츠나시게(綱成)가 지키고 있던 카와고에성(河越城)을 포위한다
이 와중에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晴氏)의 1만 5천 병사가 합류해
총 8만의 대군세로 호죠 우지야스에게 정면으로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이듬해 4월 우지야스(氏康)는 카와고에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다와라성
(小田原城)에서 출병하게되는데 고작 8천의 병력이었다
우지야스는 10분의 일에 불과한 병력으로 우에스기 연합군을 모략해
내분을 일으킨후 전격적인 야습으로 도모사다를 전사시키고 노리마사와
하루우지를 패퇴 시킨다 이른바 전국시대 3대기습전의 하나인 카와고에
야전(河越夜戰)이었다
이 전투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지방의 소영주들은 앞다투어 호죠가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고 호죠가의
본격적인 관동침공이 시작되는데 끝까지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
를 지지하는 명장이 있었으니 바로 기륜성주(箕輪城主)로 있는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였다 노부츠나는 나리마사의 부장으로 배속되
나가노 16창(長野十六槍)의 필두로 활약한다
그는 창술에도 조예가 깊어 上野一本槍 이라는 칭호도 얻는다
이 시절 그는 자신의 신음류의 후진양성을 위해 잠시 수행에 나서게
되는데 도중에 오다와라에 들러서 호죠 우지야스에게 신음류의 기술
을 보여주자 감탄한 우지야스는 호죠 츠나시게와 함께 입문하고
노부츠나는 츠나시게의 딸을 후처로 맞는다 ^^
이 인연으로 그의 아들 히데다네(秀胤)는 후에 북조가에 임관한다
또한 경(京)에서 많은 지식층과 고위 인사도 만나게 되는데 당시
대납언으로 있던 도키츠구(山科言繼)와도 교분을 맺는다
그는 이 여행에서 신영류(神影流)의 시조가 되는 오쿠야마 키미시게
(奧山公重)와 진신음류(眞新陰流)의 시조가 되는 오가사와라 나가하루
(小笠原長治) 두명의 제자를 얻는다

1551년 호죠 우지야스(北條氏康)는 다시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치기 의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게된다
영격에나선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패주하고 아들까지 잃게된다
노리마사에게 우에스기가를 물려받은 나가오 카게도라(長尾景虎)는
우에스기 겐신으로 개명하고 나가노 나리마사와 함께 관동을 수호
하게 되는데 새로운 강적이 나타나게 되니 가이(甲斐)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었다
1561년 다케다 신겐의 2만 군사가 기륜성으로 쳐들어오자 나리마사는
최후까지 분전했지만 결국 이 전투에서 후지이 모토타다(藤井友忠)와
나리마사의 아들이 전사하고 성은 함락된다
노부츠나는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다
후에 다케다 신겐이 그를 예우해 정식으로 초대해 임관을 청했지만
전국시대의 소영주로써 비애와 환멸을 느낀 노부츠나는 그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단호한 의지에 신겐은 다른가문에 임관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그를 놓아주며 그의 신의를 믿고 자신의 이름에서
신(信)자를 주었고 노부츠나는 이 때부터 信綱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을 돌며 염원하던 무사수행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노부츠나는 신의를 지켜 이후 죽을때까지 순수한 무예가로 남는다
제자들과 함께 수행에나선 노부츠나는 이마카와,마쓰다이라의 영지를
차례로 통과해 이세(伊勢)로 향하던 중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검호대명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具敎)였다
(태합4 시나리오 1번 안농진성 대명)
도모노리는 기타바타케가 마지막 당주로 일본검도사에 노부츠나와
쌍벽을 이루는 저 유명한 가시마신도류(鹿島新當流)의 창시자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傳)의 비전오의 이치노타치(一ノ太刀)를
전수 받은 유일한 제자였다
노부츠나는 이세로 들어와 도모노리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당시
종삼위 권중납언(從三位 權中納言)의 높은 신분인 그를 노부츠나 같은
일개 낭인이 만날수 있었던것은 신분을 초월한 검술의 열정 덕 이었다
당시 나이가 이미 50이넘은 노부츠나는 검술이 완숙기에 접어들었고
도모노리 역시 기량이 무르익은 시절이었다
20년 연상의 노부츠나는 도모노리와 검술얘기로 꽃을 피웠고 자신의
검기도 보여주었다 도모노리는 감탄해하며 야마토(大和)의 두 인물을
소개해 주었는데 바로 호죠잉 잉에이(寶藏院胤榮)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嚴)
였다

잉에이는 나라(奈良)흥복사 보장원에서 가쿠젠보(覺禪坊)라 불리는 보장원류창술의 시조로 십자창의 명수 였다(베가본드에서 인슌의 사부) 태합4에도 나오는카코 사이죠(可兒才藏)가 바로 그 제자이다
야규 무네노리는 일본 3대검법원류인 츄조류(中條流)와 신도류(新當流)를
익혔고 당시 기내(畿內:수도 사방 500리내))지방에서 가장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젊은 검호였다
노부츠나는 잉에이를 만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야마토로 향한다
노부츠나 일행을 정중히 맞이한 잉에이는 노부츠나와 대련을 하게 되는데
잉에이는 창을 들고 노부츠나는 후쿠로시나이(袋韜)를 들었다
후쿠로시나이란 대나무 조각으로 만든 검으로 오늘날 현대 검도에서 쓰이는 죽도(竹刀)의 시초로 바로 노부츠나가 직접 고안해 발명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진검승부 외의 대련에서 쓰이던 목검은 날(刃)만 없다 뿐이지 불구가 되기 쉬었고 제대로 맞으면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노부츠나는 동문끼리의 대련에서도 불상사가 일어나는게 안타까워 이런것을 만들게 된것이다 죽도를 실제로 본 사람은 알겠지만 타격시 소리만나지 충격은 크지 않다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나름대로 자부하던 잉에이는 완패를 당하고노부츠나의 실력에 반해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기를 청했고 편지를 보내 친구 야규 무네노리를 불렀다

잉에이의 편지를 받고 단숨에 보장원도장으로 달려간 무네노리는 바로 대련을 원했지만 거절 당하자 노부츠나의 실력을 의심하게 된다
친구 잉에이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잉에이의 편지에 써있던 노부츠나 같은 실력의 경지가 존재한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노부츠나는 마지 못해 제자 히키다 분고로(疋田文五郞)와의 대련을 주선해 주었다 순간 무네노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된다
기내제일의 실력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자기에게 본인도 아닌 제자와의 대련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의외로 결과는 참담한 무네노리의 패배였다 3번 싸워 3번 모두 패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네노리는 다시 노무츠나에게 대결을 요청했다
제자에게 패하고도 그 사부에게 도전하는것은 당시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 었지만 노부츠나는 결국 승낙한다 역시 3번 승부에 들어갔는데 결과는 당연히 노부츠나의 승리였다
무네노리는 그자리에서 입문을 신청하고 그의 야규마을로 노부츠나 일행을 초대한다
야규마을의 풍광에 반한 노부츠나는 1564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무네노리를 지도했다
하지만 그해 호죠가에 있던 그의 아들 히데다네가 사토미(里見)가의 코노다이성(國府台城)에서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야규마을을 떠나게된다 제자 히키다를 그 곳에 남기두고 또다른 제자 진고 무네하루(神後宗治)와 떠나면서 무네노리에게 한가지 숙제를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노부츠나의 신음류 최대오의인 무토도리(無刀取り)였다

관동방면으로 돌아기기전에 경(京)에 들른 노부츠나는 도키츠구에게 방문해 잠시 몸을 의탁한다 그는 경에 머물던중 그의 소문을 들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의 초청을 받고 니죠(二條)어소로 가게된다
1564년 6월 노부츠나는 장군 앞에서 제자 진고와 검술시연 도중
한 젊은 검사를 만나는데 당시 25세였던 마루메 나가요시(丸目長惠)였다
나가요시는 큐슈(九州)의 대명 사가라(相良)가의 가신이었는데 그 큐슈
제일의 검술가라는 츄조류의 아마쿠사 이토노카미(天草伊豆守)에게 검을
배운 자였다 그는 검의 기량은 스승을 능가한다는 평을 듣고 있었고
노부츠나의 소문을 전부터 듣고 한번 대결해보길 원해오고 있었다
결과는 간단하게 노부츠나의 승리로 돌아갔고 나가요시도 즉석에서
입문을 청하게 되고 젊은 나가요시에 호감을 느낀 노부츠나도 수락한다
제자 진고대신 나가요시를 시연상대로 택한 노부츠나는 대성공을 거두고
감복한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천하제일(兵法新陰、軍法軍配天下一)
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또한 노부츠나의 추천으로 제자 진고는 요시테루 의 검술 사범을 맡게 된다

1565년 노부츠나는 다시 야규마을로 돌아와 무네노리와 상면하게 되는데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버린다는 신음류의 오의 무토도리(無刀取り)를 완성한 그를 칭찬하고 바로 신음류의 면허를 인가했다
이듬해 노부츠나는 또 한번의 비보를 듣게 되는데 바로 장군 요시테루의
죽음이었다

1570년 노부츠나는 다시 제자 진고와 함께 천황 앞에서 검술시연을 갖고
종사위하 무사시노카미(從四位下 武藏守)를 제수 받는다
1571년 노부츠나는 64세의 나이에 고향인 상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노부츠나는 전사한 아들의 추모식을 거행하고 후처인
호죠 츠나시게(北條綱成)의 딸 사이에 둔 두 아들이 검술사범을 하고
있는 호죠가로 향한다
1582년 오다와라(小田原)에서 전국시대 불멸의 검성 상천신강은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일본에서 그가 검성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의 온후한 인품과 실력도
실력이지만 신음류 및 거기에서 파생된 수 많은 검술 유파가 이 후의
검술 유파가 이 후의 일본 검도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음류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제자수를 자랑하고 있다

그에 대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단어가 나온다 '古今第一の 達人' - 고금제일의 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