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천신강과 더불어 일본에서는 양대 검성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塚原卜傳(1490 ~ 1571)
가시마 신토류(新當流)의 창시자로써
정식명은 츠카하라보쿠덴다카모토(塚原卜傳高幹)로
일본 이바라키현(茨城県)가시마(鹿島)에서 태어났다
원래성(性)은 우라베(卜部)로 이름에서 알수있듯이 그의
아버지는 신궁에서 점을치는 신관이었다.5세때 츠카하라 야스모토
의 양자로 들어가 츠카하라가문을 이었다.
3세때부터 우라베가문의 가시마츄고류(鹿島中古流)라는 태도(太刀)
술을 익혔고 그를 입양한 츠카하라 야스모토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검술유파인 신토류(天眞正傳神道流)의 창시자인 이이시노 초이사이
(飯篠長威齊)의 제자였기때문에 그역시 신토류를 배웠다.
1518년 마쓰모토 비젠노카미(松本備前守)의 권유로 가시마카미야
(鹿島神宮)에서 천일간의 수련에 들어가 독자적인 검술 신토류(新當流)
완성하고 비전오의 이치노타치(一の太刀)라는기술을 만들었다.
이치노타치라는 기술이 어떤건지는 츠카하라 본인의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려지지않고 있으나(플스2판 태합4에서는 무조건 상대방
HP의 70%를 없앤다.) 20대에 일가를 이루었다는건 그의 재능
이 어떠한지 알려준다.
츠카하라 역시 일본 역사상 생애한번도 패하지 않은 검호중하나로
1512년 첫 출전을 시작으로약 오십여년 동안 39번의 참전,19번의
진검승부에서 212명을베고 100여차례의 목검,목창대련중에서 작은
부상조차입지 않았다는 그야말로 무적의 검호였다.
츠카하라의 특징은 단순히 검의 기술적 완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대결전에 이미 승리의 조건을 만드는 전략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 한 예로 이런일이 있었다. 츠카하라는1505년 1차 무자수행때 시미즈사(淸水寺)에서 오치아이 도라우에몽(落合虎右衛門)을
상대로 생애 첫 승을 거뒀는데 후에 일야성주(日野城主) 가모우 히사히데
(蒲生定秀)의 초대시 목숨을 부지했던 오치아이가 앙심을 품고 병풍뒤에
숨어있다 그를 공격해왔다. 츠카하라는 재빨리 물러나며 오른손에 협차(단검)를 뽑아들고 왼손엔 장도를 뽑지않고 들었다. 둘이 교차하자 오치아이의 가슴에는 협차가 박혀있었다. 그 신속함에 놀라며 가모우가 장도를 쓰지 않은 이유를 묻자 츠카하라는 가까운 거리에서 적이육박하면 장도를 뽑을시간에 당할거라 판단하고 협차를 썼다고 대답했다.
냉철한 판단력의 승리였다. 또 다른 예로 한번은
츠카하라가 비파호에서 배를 타고 가던중 같은 배에 타고 있던 30대거한이 자기의 힘을 자랑 하며 떠들자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에 대한은 츠카하라를 노려보며 거만하게 유파를 묻자 츠카하라는 '무수승류'(無手勝流)라고 대답했다.
자신을 놀리는것이라 여기고 화가난 거한이 결투를 청하자
츠카하라는 선상에서 결투를하면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되니
중간에 섬에 내려서 대결하자고 제안하고 일단 수긍한 대한은 조그만
섬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듯 칼을 뽑고 내렸다. 그러자 츠카하라는
사공에게 그냥가자고 말하고 배는 거한만 섬에두고 떠났다.
말그대로 손안쓰고 이기는것(無手勝流)이 된것이다.
이것은 훗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한 후 여러 제장들을
모아놓고 병법에 관해 토론하던 중 싸우지않고 이기는것이 병법의
최상이라고 말하며 예를 든 유명한 일화였다.
총탄이 빗발치던 전국시대를 살면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도 82세까지
장수할수 있었던것은 무와 지를 다갖췄기 때문이었다.
1523년 2차무자수업에 들어가 천하를 돌다 양부의 부음을 듣고 1533년
귀향에 츠카하라성(塚原城)을 잇고 결혼했으나 10년만에 사별하게 된다.
그의 대결중 유명했던 상대로는 가지와라 나카도(梶原長門)가 있었다.
가지와라는 천하무적 난도(청룡언월도같이 생긴창)의명인으로 불리우며
대결전에 상대방의 신체를 예고하고 베는걸로 유명한 공포의 존재였다. 결투당일 가지와라는 날길이 1척오촌(50cm)에 구척길이의 자루를 가진 난도를 들고 나왔고 츠카하라는 2척팔촌의(80cm)도신을 가진 태도를 들고 나왔다. 결투가 시작되자 츠카하라는 순식간에 가지와라의 공격을 모두
피하고 거리를 좁힌후 난도와 그의 얼굴을 통채로 양단 내버렸다.
츠카하라는 이 대결을 끝으로 진검승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1556년 양자에게 성(城)을 물려주고 3번째 무자수업에 들어갔다.
그는 유명한 제자를 많이 두었는데 아시카가 요시테루,요시아키형제를
비롯해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호소카와 후지다카(細川藤孝)
유일하게 비전오의 이치노타치를 전수한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具敎), 검호 모로오카 잇파(師岡一羽)등이 있다.
1571년 82세를 일기로 츠카하라는세상을 뜬다. 신토류(新當流)라는 이름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붙인이름이다. 현재 가시마에서 신토류는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 있다. 유명한 저서로 [塚原白首]를 남겼다.
일본에서 항상 츠카하라는 20여년 연하이긴하지만 카미이즈미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서로 대결해보지 않았다점 때문에 역시
20여년의 나이 차이에 동시대를 살았지만 대결해보지 않은
미야모토 무사시(1584 ~ 1645)와 야규 쥬베이(1607 ~ 1650)와 함께
누가 강한지 비교대상이 되곤한다.
다만 츠카하라와 카미이즈미 둘에게 모두 검술을 배워본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카미이즈미가 천하제일이라고 했기때문에 상대적으로
카미이즈미가 우위에 있는것 같다.
신토류를 소개하는 글에 그를 이렇게 말한 부분이 있다.
5百年來 無雙の男 - 5백년내 무쌍의 남자
검성 상천신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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