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저주받은 성, 이나바산성

구름위 2013. 1. 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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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구치(井ノ口) 있는 이나바산성(稻葉山城) 338m 높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킨카잔(金華山)이라고도 불리는 이나바산은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북측은 절벽이고, 나가라가와(長良川) 접해있다.

남측은 산으로 둘러쌓여있고, 동측과 서측은 깎아지른 낭떠러지도 많고 급경사이다.

정상에 쌓아올려져 있는 것이 이나바산성이다.

여기에 처음으로 성을 쌓은 것은 가마쿠라(鎌倉)시대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나바산성이라는 본격적인 성을 쌓은 것은 사이토 도산(齊藤道三)이었다.

동시에 때부터 이나바산성은 저주받은 성이 되었다.

폐성이 때까지의 역대 성주들이 왠지모를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우선, 사이토 도산에 의하여 그때까지의 성주였던 나가이 나가하루(長井長張) 살해당하였다.

이나바산성 성주였던 사이토 도산은 대폭 수리를 가하여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었다.

이나바산성은 미노(美濃) 수비를 담당하는 거성이 것이다.

텐분7년이 되어 도산은 아들인 요시타츠(義龍)에게 이나바산성을 물려주고, 자신은 나가라가와의

맞은편에 있는 사기야마성(鷺山城)으로 옮겼다.

해에 노히메(濃姬)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시집을 간다.

 

이윽고, 요시타츠는 도산이 동생에게 후계자의 지위를 물려주려한다는 의심을 품게된다.

게다가 요시타츠는 실은 도산의 아들이 아니라고 출생의 비밀을 듣게된다.

도산에게 나라를 빼앗긴 토키 요리나리(土岐賴藝)야말로, 요시타츠의 친아버지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친아버지의 원수인 도산을 친다라는 대의명분도 성립한다.

 

요시타츠는 도산이 부재중인 틈을 , 동생 두사람을 이나바산성으로 불러, 참살한다.

요시타츠가 이나바산성 성주가 되고 7년뒤인 코우지(弘治)원년의 가을에 일어난 일이다.

 

도산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다음해 4, 도산과 요시타츠는 결전의 때를 맞이하였다.

토키계였던 사람들의 태반이 요시타츠의 편을 들어, 수는 175백명이라는 대군이었다.

반면, 도산의 군세는 27백명이었다.

, 요시타츠의 군세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가담하고 있었다.

또한 도산은 사위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요시타츠의 대군은 나가라가와를 매꾸어 도하작전을 감행하였다.

금새 도산의 군세는 붕괴되었다.

도산은 코마키 겐타(小牧源太)라는 자에게 목이 베어졌다.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의 오오라구치(大良口)까지 출진하였지만, 도산이 죽었다라는 소식을 듣고,

오와리로 물러났다.

 

여기에서 나가이 나가하라에 이어, 예전의 이나바산성 성주였던 사이토 도산도 비참한 최후를 고한 것이다.

도산 63.

 

명실공히 이나바산성 성주가 사이토 요시타츠는 불과 5년후에 병으로 35세라는 젊은나이에 죽었다.

 

다음으로 이나바산성의 주인이 ,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는 6년후인 에이로쿠 10년에 노부나가에 패하여 사이토 3대의 멸망의 때를 맞이하였다.

 

노부나가가 이나바산성에 입성한다.

노부나가는 이노구치를 기후(岐阜) 고쳐, 이나바산성도 기후성이 된다.

기후성을 본거로 하기위하여 노부나가는 수리라기보다는 신축에 가까운 개수를 행하였다.

결과, 근세성곽의 견본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즈치성(安土城) 모델이라고 있는 기후성이 완성된 것이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거관(居館)이나 위의 성곽에 대하여 칭찬을 기록하고 있다.

 

외곽은 길고 높은 석벽을 두르고, 거대한 어전의 1층에는 자시키(座敷)라고 하는 아름다운 방이 21실이 있다.

방은 교묘한 방법으로 마치 미궁과 같이 되어 있다.

판자문이나 병풍의 금장식, 거기에 못은 전부 순금이다.

2충에는 왕비가 휴식하는 방이나 시녀의 방이 있고, 한층 화려하게 되어 있다.

자시키에는 금수를 놓은 비단이 쳐져있다.

3층에는 다실이 있다. 4층건물인 어전의 최상층은 전망대로 되어있다.

산위에도 어전이 있고, 경비는 엄중하다.

 

9년뒤, 노부나가는 텐쇼 4 2월에 신축완성한 아즈치성으로 이동하였다.

기후성은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6년후인 텐쇼10 6월이 되어, 이나바산성 다시말하여 기후성의 초대성주인 노부나가, 2대째 성주인 노부타다는 모두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에 의하여 죽음을 고하였다.

 

다음으로 성주가 것은 노부나가의 3 노부타카(信孝)였다.

노부타카는 불과 1 ,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편이 되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싸워, 패하고 자살하였다.

 

입성한 것은 이케다 노부테루(池田信輝) 장남인 모토스케(元助)이지만, 다음해 나가쿠테(長久手) 합전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다음 성주는 모토스케의 동생인 테루마사(輝政)지만, 이케다 테루마사만은 기후성에서의 6년간을 무사히 보내었다.

이나바산성 기후성의 역대 성주중에서 다다미 위에서 생을 다한 것은 이케다 테루마사가 유일하였다.

 

이케다 테루마사의 뒤를 이어 기후성주가 것은 히데요시의 양자인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였다. 히데카츠는 2년후에 조선 출병시에 출진중에 병사하였다.

 

다음으로 기후성에 들어간 것은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이었다.

히데노부는 혼노지(本能寺) 노부나가와 함께 니죠성(二條城)에서 패사하였던 노부타다의 장남이었다.

유명이 삼포우시(三法師) 꼭두각시로서 히데요시에게 이용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히데노부는 입성후 8년이 지난 케이쵸5 세키가하라 합전에서 서군의 편에 섰다.

때문에 세키가하라 합전이 일어나기 3 정도 전에 기후성은 일찍이 동군의 공격을 받게되었다.

도쿠가와 쪽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6, 이케다 테루마사가 28, 총군세 44천으로 기후성을 동서에서 공격하였다.

수비병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원군을 포함하여, 65백여명이었다.

이길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3일만에 낙성되어 823일에 히데노부는 항복하였다. 포박되어 기후성을 나온 히데노부는 가미카노우(上加納) 엔도쿠지(圓德寺) 옮겨져, 거기에서 출가하였다.

코야산(高野山)으로 흘러간 히데노부는 5년뒤인 케이쵸10, 26세에 쓸쓸히 세상을 떴다.

이로써 오다의 적류(장남의 자손) 단절되었다.

또한 오다 히데노부가 기후성의 최후의 성주로서 역대의 저주받은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기후성의 파괴를 명하여, 폐성으로 하였던 것이다.

 

노부나가의 묘가 있는 수우후쿠지(崇福寺) 본당의 천정판에 기후성의 피로 물든 바닥판이 사용되었다.

피로 물든 판이 이나바산성에서 기후성에 걸쳐진 역대의 성주들의 비운의 역사를 여실히 이야기하고 있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