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6·25 터지자 맥아더에게 전화 “당장 도와주시오”

구름위 2017. 1. 7. 20:30
728x90

6·25 터지자 맥아더에게 전화 “당장 도와주시오”

<28> 이승만의 전쟁 리더십
2016. 11. 09   17:53 입력


강력한 리더십작

전권 이양하고 유엔군 활용

“38선 돌파 ” 특명…자주권 행사

 

놀라운 통찰력

1953년 미·소 휴전 분위기 속

통일 갈망하는 국민의 뜻 반영

세계 지도자들의 비난 각오하고

반공포로 2만 7천여 명 석방 강행

미 특사, 이승만 요구 모두 들어줘

 

 

기사사진과 설명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뒤 환담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뒤 환담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맥아더 사령관에게 명령하듯 강하게 요구

6·25전쟁이 발발한 날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창덕궁에서 산책하다 10시쯤 남침 소식을 듣고 급하게 경무대(현 청와대)로 돌아왔다. 10시30분이었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전쟁 소식을 처음 보고했다. 대통령은 즉시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아침, 북한 공산당의 김일성 군대가 38선을 넘어 전쟁을 일으킨 것 아시오? 이게 다 미국 때문이오. 미군이 철수할 때 무기를 놓고 갔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다 갖고 가는 바람에 김일성이가 우리를 얕보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오. 미국이 좀 더 관심을 두고 우리를 도와줬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책임이 미국에 있지 않소? 빨리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당신만 믿소.”

그리고 워싱턴에 있는 주미대사 장면(張勉)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국무부에 들어가 한국을 도와달라고 하시오”라고 했다. 오후 2시에는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대통령으로서 신속하고 필요 적절한 조처를 한 것이다. 특히 맥아더 사령관에게 명령하듯 강하게 요구한 것은 대단한 배짱이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강한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사사진과 설명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휴전반대 시민궐기대회

휴전반대 시민궐기대회




유엔군 참전하자 자발적으로 작전권 위임

또한,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자 7월 14일 작전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했다. 맥아더가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준 것이다. 전쟁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작전권을 양보하고 그들을 이용했다. 형식적으로는 양보했지만 38선 돌파 때는 ‘자주권’을 행사해 미군의 눈치 보지 말고 국군이 주도적으로 ‘빨리 38선을 넘어 북진하라’고 정일권 총장에게 특명을 내렸다.

정 총장이 “각하. 작전권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대통령께서는 “정 총장은 어느 나라 장군인가? 작전권은 임시로 빌려준 것이고, 내가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어. 그러니 잔말 말고 빨리 38선을 넘으라고 해!” 라고 강한 어조로 명령해 정일권 총장은 한동안 입장이 난처했다고 한다. 그는 그후 강릉에 있는 사단장으로부터 ‘지금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급한 보고를 받고 “돌파하라”고 명했다. 미군의 동의 없이 38선을 넘은 것이다. 육군3사단 23연대 3대대(대대장 허형순 소령)가 10월 1일 11시에 38선을 넘어 양양으로 치달았다. 미군의 명령은 다음 날 나왔다.



미군 눈치 안 보고 “38선 돌파” 명령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8선이 회복되고 북진을 계속하자 소련은 휴전을 들고 나왔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은 휴전 제의를 공식화했고, 미·소 양국이 받아들임으로써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회담은 험난했지만 6개월 뒤인 1952년 1월 27일 군사분계선이 타결되고, 5월 2일 중립국 감시위원단도 합의됐다. 1953년 6월 휴전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이때 이승만은 휴전반대·북진통일을 들고 나왔다. 휴전반대 시위는 전국을 휩쓸었다.



한국의 운명 바꾼 반공포로 석방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이 성사될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그것이 1953년 6월 18일, 비밀리에 단행된 ‘반공포로 석방’이다. 반공포로 2만7300명의 석방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미국의 허를 찌른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소와 참전 우방국 모두에게 비수를 던진 격이 됐다. 이승만이 노린 승부수였다. 반공포로가 석방되자 미·중의 계획이 수포가 됐고 트루먼 대통령의 체통도 다 구겨졌다.

이승만의 성격을 잘 아는 미국 사람들은 트루먼에게 조언하기를 이승만은 절대 물러설 사람이 아니니 차라리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휴전회담에 동의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트루먼은 극동 담당 국무차관보 로버트슨을 특사로 보내 이승만과 회담을 하도록 했고 그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라고 했다.

로버트슨은 한국에 오자 서울 분위기를 읽었다. 그리고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회담에 들어갔다. 보통이라면 1∼2일이면 끝날 회담이었지만 로버트슨은 장장 18일 동안 14차례나 대통령을 만나 그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합의했다. 이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배경이다.



미, 이승만 강한 태도에 불만 제거계획까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회고록 ‘다뉴브 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이승만은 지혜롭고 존경할 만한 애국자다.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나는 소년처럼 작아진다’라고 술회할 정도다. 반공포로 석방은 세계 지도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통일을 갈망하는 국민의 의지를 관철한 놀라운 통찰력이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세계를 향해 보여준 위대한 통수권이었다.

미국은 한때 이승만의 강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계획 ‘에버레디 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그만큼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작지만 큰 나라와 겨룰 만큼 강한 리더십의 소유자. 그것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승만은 결단과 리더십, 국제적 감각과 외교력, 뛰어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