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두 명의 美 전쟁영웅, 선후배 전우에서 라이벌로

구름위 2017. 1. 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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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美 전쟁영웅, 선후배 전우에서 라이벌로…

<27>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맥아더, 트루먼과 갈등 끝 해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쟁서 패해

 

맥아더 참모 출신인 아이젠하워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명성

美 34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기사사진과 설명

1951년 1월 27일 수원을 둘러보기 위해 지프차를 탄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와 미군 장교들. 연합뉴스 DB


 


극동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6·25전쟁을 책임지고 있던 맥아더는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만주에 대한 북폭을 주장하다가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결국 1951년 4월 10일 (한국시각 11일) 해임됐다. 맥아더의 후임으로 리지웨이(Mattew B. Ridgway) 대장이 임명됐다. 맥아더가 해임되자 확전을 우려하던 서방국가들은 크게 안심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해임은 전쟁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의 의지’가 없음이 드러난 것이다.

맥아더가 해임된 후 미국으로 돌아가자 언론들은 트루먼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맥아더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맥아더를 ‘신의 재능을 지닌 영웅’이라고까지 칭송했다. 4월 19일 양원 합동회의 연설을 통해 맥아더는 트루먼의 대아시아정책을 비난하고 “노병은 절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말로 끝맺었을 때, 엄청난 찬사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청문회를 통해 트루먼의 인기는 점점 낮아지고 결국 차기 대통령선거(1952년 11월)에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을 영입한 공화당이 승리했다.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을 상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영웅이 됐고, 그의 인기와 명성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을 무대로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 미국은 아시아의 맹주 맥아더 원수와 유럽의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원수를 키워낸 위대한 나라가 됐다. 이 두 사람이 6·25전쟁을 무대로 한 갈등과 전략에서 공생할 수 있었을까? 미국 국민의 선택이 매우 흥미롭다.

 

기사사진과 설명

1952년 제3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그해 12월 4일 한국을 방문, 클라크 주한 유엔군 사령관의 안내로 전선 시찰길에 나서고 있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두 사람은 미국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군벌이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보다 열 살이 많고, 사관학교 선배이며 장군진급도 당연히 먼저 했다. 1930년에 대장이 됐고 1937년에 퇴역했다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현역에 복귀, 1944년 원수가 됐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극동군 사령관으로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고 1950년 6·25전쟁으로 유엔군 사령관이 됐다. 아시아의 실질적인 맹주였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보다는 한참 아래지만 급성장해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전쟁영웅이 되고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또 맥아더가 6·25전쟁에서 유엔군 사령관이던 시절 아이젠하워는 유럽의 NATO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쌍벽을 이뤘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두 사람은 과거에는 선후배요 지휘관과 참모 사이였으나 이제는 경쟁자 관계가 됐다. 특히 맥아더가 해임돼 야인으로 있을 때,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었다. 평소 진급과 보직 문제를 둘러싸고 견제와 갈등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여기서부터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퇴임 후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영입설이 나돌았다. 이미 1948년부터 그를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정치에는 관심이 적었고 아직도 군 전략과 ‘북폭’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유럽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동안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국민의 인기는 맥아더에게 더 쏠렸다. 그리고 해임되자 인기는 더욱 높아져 최고조에 달했다.

이 무렵 아이젠하워는 1952년 NATO 사령관을 끝으로 퇴역한 후, 공화당 전당대회의 초청을 받고 후보경쟁에 참여했다. 트루먼은 6·25전쟁 처리문제와 맥아더 해임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차기 선거를 포기하는 한편 맥아더가 대통령 후보로 추대받는 것조차 견제하고 스티븐슨 지사를 영입했다. 반면에 아이젠하워는 자연스럽게 후보경선에 나오게 됐고, 공화당의 다른 경쟁자는 ‘테프트’ 상원의원이었다. 공화당 전당대회 하루 전날, 여론조사 결과 대의원 1206명 중 과반수인 604명을 확보해야 하는데, 아이젠하워는 427명, 테프트는 530명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나 테프트가 유리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부동표 중에는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예측 불허 상황이었다. (동아일보 1952년 7월 8일 자)

그런데 이때 정치에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졌던 맥아더가 테프트 상원의원 지지자로 등장해 기조연설을 함으로써 장내를 놀라게 했다. 맥아더는 테프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을 지목받았다. 그러나 맥아더의 연설은 주목받지 못했고 이때부터 인기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아이젠하워가 후보로 선정됐고 대선에서도 승리해 34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미국 국민들은 맥아더를 좋아하면서도 그의 완벽하고 권위주의적인 태도에 반감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결국, 공화당 전당대회 이후 맥아더의 인기는 하락하고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됐다. 이제 맥아더의 처지가 난처해졌다. 그러나 맥아더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인 1952년 11월 단독으로 만났다. 원자폭탄 사용을 건의했지만, 즉석에서 완강하게 거절당했다. 필승의 신념을 갖고 ‘이기기 위한 전쟁’을 했던 한 시대의 영웅에게도 내리막길은 준비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