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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 협상 ‘지지부진’… 美, 군사비 4배로 늘어나

구름위 2017. 1. 7.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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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 협상 ‘지지부진’… 美, 군사비 4배로 늘어나

<26> ‘지루한 휴전회담’ 계속


공산세력 축출 아닌 현상 유지 정책

미, 2차 대전 이후 군사비 대폭 축소

 

강한 소련 부상으로 많은 국방비 필요

군수산업 급성장 세계 최강자 자리에

 

 

 

기사사진과 설명

1951년 7월 개성에서 시작한 휴전회담은 같은 해 10월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계속됐으며,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사진은 1953년 7월 6일 회담이 열린 판문점 일대 모습. 유엔군과 공산군 측의 군인과 기자들이 보인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맥아더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워싱턴이 중공과 소련의 참전 여부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때, 맥아더는 만주 폭격 주장과 중공의 참전 여부를 둘러싸고 워싱턴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웨이크 섬으로 불렀다.

1950년 10월 15일 오전 10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의 회담이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열렸다. 회담에는 합참의장 브래들리, 육군성 장관 페이스, 태평양함대 사령관 래드퍼드 제독, 대통령 공보관, 법률고문, 유엔대사가 동행했고 기자단 35명도 함께했다. 회담의 목적은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할 것인가 아닌가를 현지 사령관에게 확인하는 것이었다. 합참의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맥아더 장군께서는 한국전쟁이 언제쯤 끝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나는 적의 저항이 추수감사절(11월 23일)까지는 끝날 것으로 보고 있으며, 크리스마스까지는 8군을 일본으로 되돌려 보낼 생각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물었다.

“중공과 소련의 개입 가능성은 어떻소?”

“참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들이 개입할 의지가 있었으면 벌써 지난 8월쯤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왔을 것입니다.”

“만주에 중공군은 어느 정도 있소?”

“정보에 의하면 30만 정도 있고 압록강 국경지대에 20만 정도 있으나 중공군은 전차와 항공기가 없고 화력이 약합니다. 유엔군이 제공권을 가진 이상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육군성 장관이 질문했다.

“중공군 참전 가능성에 대한 장군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현재로는 중공군이 대부대로 참전할 징조는 보이지 않습니다. 만주의 중공군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회담은 1시간20분 만에 끝났다. 전 세계에 보도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들러 “한국전쟁은 추수감사절까지 끝날 것이고 미 8군 병사들은 크리스마스까지 고국에 돌아올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맥아더는 영웅이 됐고 대통령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기사사진과 설명

트루먼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미국 의회 명예훈장’을 받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DB




 

 

 

그러나 이 무렵 중공군은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흘 뒤 압록강을 건넜다. 전쟁이 해를 넘겨 1년 동안 지속되자 미국은 전 소련대사 조지 캐넌을 통해 말리크에게 휴전 의사를 타진했다. 미국이 제시한 협상 조건은 ‘전쟁 발발 이전 상태인 38선으로 서로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많이 북상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은 구미가 당겼다.

본국의 훈령을 받은 말리크가 6월 23일 뉴욕에서 밤 9시 뉴스를 통해 ‘휴전회담’을 공식 제안했다. 미·소 양국이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분위기는 휴전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1년 반 안에 전쟁은 종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3년1개월 동안 지루하게 지속됐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종학 교수는 세계적인 군사전략가 웨드마이어(Wedemeyer)의 회고록을 인용, ‘한국전쟁은 사전에 방비할 수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트루먼의 정치적 목적은 ①공산세력 축출이 아니라 현상유지를 하는 ‘제한전쟁(Limited War)’이었으며, ②한국전쟁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줄어든 미국의 ‘군사비를 증강’하는 데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국전쟁 당시 극동문제 전문가로 국무장관까지 지낸 러스크(David D. Rusk)는 회고록 ‘내가 본 대로(As I Saw It)’에서 한국전쟁은 1년 만에 끝날 수 있었는데, 트루먼 대통령이 적군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늦어졌다고 회고했다.

휴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노력해도 양측의 입장과 주장이 달라 합의에 이르기까지 2년이 걸렸다. 1953년 7월 27일 비로소 정전협정이 이뤄졌다.

트루먼 대통령이 포로 송환을 거부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도적 차원에서였다. 즉 과거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던 소련군이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스탈린으로부터 심하게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포로 송환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전쟁이 조기에 종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군사비가 극도로 축소됐다. 많은 부대가 해체되고 병사들은 고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전보다 더 강한’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을 만나게 돼 ‘군사비 증액’은 불가피한 당면과제가 됐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대통령은 이 기회를 최대한 이용했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국방비가 크게 상승했다. 1950년 120억 달러에서 1953년 500억 달러로 4배나 증액됐다. 3년 동안 지출한 전쟁비용은 총 670억 달러로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약 7000억 달러 (767조 원)다. 또 군수산업이 급성장해 전쟁비용을 다 충당하고도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경제효과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후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세계의 ‘최대 강자’ 자리에 올랐고, 이 시기에 중요한 프로젝트인 우주정복사업도 1인자 자리를 고수하게 됐다. 한국전쟁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은 충분히 달성됐다. 이는 미국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트루먼 개인은 맥아더 해임과 전쟁 장기화로 인기가 점점 떨어졌다. 결국, 1952년 11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전쟁을 조기에 종식하겠다고 공약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후보가 당선돼 정권은 공화당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