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펜 대신 총’ 든 영웅들 “조국 수호” 외치며 포화 속으로

구름위 2017. 1. 7. 20:25
728x90

펜 대신 총’ 든 영웅들 “조국 수호” 외치며 포화 속으로!

<23> 전국에서 일어난 10만 학도병
 

군번도 없이 참전…대부분 15~18세

2~3일 사격 연습만 하고 전선으로

처음엔 피난민 구호·가두선전 투입

‘대한학도의용대’ 조직 후 전투 참여

일본 교포 학생 1000여 명도 지원
다부동·백마고지전투 등서 큰 공

 

 

기사사진과 설명

6·25전쟁 당시 학도병.


 




6·25전쟁 초기 국군은 기습적인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만 거듭했다. 유엔군이 속속 참전했지만 초기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누구의 지시도 없이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학생들이 일어났다. 오직 우국충정의 애국심 하나로 조국을 구하겠다고 일어선 것이다. 공식기록에 의하면 국방부 정훈국에서 각급 학교 간부 200명을 모아 1950년 6월 29일 수원에서 ‘비상학도대’를 조직하고 학교별로 학도의용군을 모집하도록 권고한 후 곧바로 2만7000여 명이 지원한 것이 그 시초였다. 이보다 이틀 전인 6월 27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 20여 명이 ‘학도위문대’란 이름으로 서울 미아리와 청량리에서 전투 중인 군인들을 위문한 일도 있었다. 그 후 전국에서 8만여 명이 낙동강 전선으로 모여들었고, 각 지역에서 부상군인 간호, 위문, 선무공작에 참여한 여학생까지 합하면 10만 명은 된다는 것이 당국의 추산이다.

국방부에서는 처음엔 학생들을 전투보다 피난민 구호, 가두선전 등 선무활동에 참여시켰다. 그러다 7월 1일 대전에서 ‘대한학도의용대’가 조직돼 전투에 참여했다. 이러한 학도병들의 지원은 국군이 대구까지 밀렸을 때 절정에 달했다. 남부지방은 물론 서울에서도 많은 학생이 대구로 몰려갔다.

학도병들은 다부동전투·안강전투·포항전투 등에 참전했다. 이들은 군번도 없이 자발적으로 현지 부대에 들어가 오직 애국심 하나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군복도 입지 않고 학생복 그대로 소총만 받아 2∼3일간 총 쏘는 연습만 하고 참전했다. 15∼18세가 대부분이었다.

 



기사사진과 설명

낙동강전선에 자원 입대한 학도병.


 

 

3사단 22연대, 26연대, 25연대는 대부분 학도병으로 채워졌다. 학생들이 김석원(金錫源) 장군이 지휘하는 3사단으로 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김 장군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3일 수도사단장으로 보직됐다. 그는 카이저 콧수염을 길러 위엄있고 멋져 보였다. ‘호랑이’ 사단장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수도사단이 7월 초 ‘진천전투’에서 북한군에 승리하자 명성이 더욱 높아졌고 학도병들은 김석원 장군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다. 8월 초, 김석원 장군은 수도사단에서 3사단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는데 학도병 71명이 따라갈 정도였다.

학도병들은 새로 M1 소총을 받고 3사단의 후방지휘소가 있는 포항여중에 배치받아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8월 11일 북한군 5사단이 포항 시내로 공격해올 때 포항여중도 기습을 받았다. 당시 포항여중에는 학도병 2개 소대만이 있었고 이들은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선전했으나 실탄이 떨어지고 수류탄도 부족해 결국 이 전투에서 학도병 47명이 전사했다. 포항 시내 전투에서도 학도병 87명 중 48명이 전사했다. 매일 100∼200명씩 학도병이 충원됐으나 절반은 희생됐다. 이들의 희생은 낙동강 방어에 큰 힘이 됐다.

워커 8군사령관은 유엔군 병력이 부족하자 서부전선 방어를 전투경찰에 맡겼다. 그러나 경찰이 부족해지자 그 공간을 학도병들로 채웠다. 군산고등학교 125명을 비롯한 호남지역 학생들은 여수·순천·하동 전투에 참여했다. 7월 25일, 하동 방향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6사단을 맞아 치러진 화개전투에서 학도병 180명 중 70여 명이 전사했다.

군에서 직접 모병한 사례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진 중이던 군은 1950년 10월, 학도병을 모집했다. 지원자들을 용산고에 모이게 하고는 ‘미군이 신형 무기를 주었는데 이를 운용할 병력이 부족하니 조국을 위해 3개월만 싸워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용산고·덕수고 등 여러 학교에서 500명이 지원했다. 이들에게는 특별히 군번이 부여되고 7사단 포병으로 참전했다. 개성·평양 등 전투에 참여해 200여 명이 전사했다. 서울지역 학생들은 직접 낙동강으로 몰려가 군의 작전을 도왔다. 영덕상륙작전에 참가(772명)했다가 희생된 학도병 대부분이 그들이었다.

강원도 학생들도 군부대를 직접 찾아가 학도병이 됐다. 태백중학교의 경우 학도병 126명이 봉화군에 있는 육군3사단 23연대에 들어갔다. ‘학도중대’로 편성돼 5일간의 기초훈련을 받고 1951년 1월 20일 전선에 투입됐다. 영월 전투, 인제·간성·김화 전투 등에 참전해 18명이 전사했다.

일본에 사는 교포 학생들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조국의 전쟁 소식을 듣고 도쿄·규슈 지방의 학생 1000여 명이 지원했다. 결혼한 자 등을 제외하고 642명이 최종 선발됐다. 이들은 미8군으로 입소해 2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9월 인천상륙작전, 10월 원산상륙작전에 참여했다. 또 한국군에 편입된 일부 학생들은 백마고지전투, 김화전투 등에 참전해 많은 공을 세웠다. 이들 가운데 52명이 전사, 83명이 실종됐다.

포항전투에 참여했던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심금을 울린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지금 내 옆에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기를 기다리며 뜨거운 햇살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언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은 너무 많은데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쩌면 오늘 제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도 못 본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집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그럼…. 1950년 8월 10일 이우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