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군번도 없이 빗발치는 총알 뚫고 탄약 최전선 보급

구름위 2017. 1. 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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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도 없이 빗발치는 총알 뚫고 탄약 최전선 보급

<20> 민간인 특수지원부대 ‘지게부대’의 활약

35~60세 제2국민병 징집

1951년 6월 한국노무단 창설

3개 사단·2개 여단 규모 편성

 

부상병 후송·진지 공사·교량 보수도

2064명 전사 등 9000명이나 희생

밴 플리트 장군 “지게부대 없었다면 미군 10만 명 더 필요했을 것” 극찬

 

 

 

기사사진과 설명

1951년 봄 대구보충대에서 지게부대원들이 장비검사를 받기 위해 도열해 있다. 지게부대는 최전방 부대에서 탄약 운반과 부상자·전사자 후송, 도로 보수 등을 했다.


 




6·25 전쟁 당시 군인이 아니면서도 현역 군인과 함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한 민간인 부대가 있었다. ‘지게부대(A-Frame Army)’다. ‘지게’의 모양이 알파벳 A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미군들이 그렇게 불렀다. 정식 명칭은 ‘노무 인력 부대’다.

우리나라는 70%가 산악지대여서 탄약과 식량 등 보급물자를 실은 차량이 고지를 오르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유엔군의 요청으로 전쟁 초기인 1950년 8월부터 지게부대가 운용됐다. 대통령령으로 군 징집 대상에서 벗어난 35~60세까지의 제2국민병들을 징집해 노무자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사단별로 관리했지만 1951년 6월에는 이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한국노무단(KSC)을 창설하기도 했다. 총 3개 사단과 2개 여단 규모로 편성됐다.

그러나 군인이 아니었으므로 희생이 돼도 적절한 예우를 받지 못했다. 한 사람이 매일 평균 45㎏의 짐을 지게에 지고 50∼80리씩 걸어서 운반했다. 매일 중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육체적 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 스트레스도 쌓였다. 또 산에 오를 때는 보급품을 지고 가고 내려올 때는 부상병들을 옮기는 역할도 했다. 그 외에 진지공사·도로공사·교량보수 등도 이들의 몫이었다.

전쟁 기간에 동원된 노무자는 총 30만 명이나 됐다. 특히 험난한 산악지대였던 춘천·화천·평강·인제·속초 지역에 3개 사단이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이것으로도 부족해 2개 여단을 추가로 징집, 배치했다. 이들은 군인은 아니었지만 급할 때는 총을 들고 싸우기도 했다. 만약 이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작전에 큰 지장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James Van Fleet·1892~1992) 장군은 만약 노무부대가 없었다면 미군 병력을 10만 명이나 더 증원했어야 했을 것이라며 이들의 공을 치하했다. 워싱턴 DC의 ‘한국전쟁기념공원’에는 노무자들이 탄약을 운반하는 모습도 함께 새겨져 있다. 그들의 공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알 수 있는 증거다.

기사사진과 설명

1953년 2월 즉석에서 만든 지게로 탄약을 운반하고 있는 한국인 노무자와 미군 병사. 편안한 모습으로 지겟짐을 능숙하게 지고 있는 한국인 노무자와 두 다리로 버티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미군 병사의 모습이 사뭇 대조적이다. 연합뉴스 DB


 

 

 

한편 이들 노무단은 흔히 ‘보국대’에 끌려간다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급품을 져 날랐다. 군복을 받은 사람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군복이나 철모도 착용하지 않고 민간 복장 그대로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희생자도 많았다. 전사 2064명, 부상 4282명, 실종 2448명 등 9000명이나 희생됐다.

철의 삼각지대라고 부르는 평강·김화·철원 지구 전투에서 노무자들의 눈물겨운 희생 장면을 목격한 종군기자는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군 포진지에서 탄약 부족을 느낄 때 생사를 가리지 않고 포탄과 식량을 날라다 주는 지게부대의 신뢰도는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평강전투에서 포탄이 떨어져 공격을 중지해야 할 경우가 생겼는데, 본부에서 지게부대에 긴급하게 포탄을 운반해 달라는 연락을 취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지게부대는 상황의 긴박성을 인식하고 400명이 동원돼 1인당 20~30㎏씩 짊어지고 50리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40리를 1시간 반 만에 달려갔을 때, 포진지에서도 마중을 나와 이들은 결국 2시간 만에 포탄을 보급했다. 5시간 거리를 2시간으로 단축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포탄이 신속하게 보급된 덕분에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역습으로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그 공로로 지게부대원 400명에게는 부대장의 표창이 수여됐고 환희에 넘치는 표창식이 거행됐다.(조선일보 1951년 6월 13일 6·25전쟁 비화 4권)’

그러나 이들이 임기를 마치고 귀향할 때 받은 것은 ‘징용 해지 통지서’와 종군기장, 기차표가 전부였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애국심 하나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지게부대! 그들이 진정한 영웅이다. 일선 지휘관들이 노무사단을 가리켜 ‘전투의 절반은 그들이 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