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참전·세계대전 확대 우려 美 ‘한반도 철수’ 고려
- <17> 미국은 왜 한국을 포기하려 했나
중공군 대규모 침공에 후퇴 거듭
맥아더, 미 합참에 추가 병력 요청
콜린스 참모총장 한국 전선 시찰
철수 결론 내리고 ‘1·4후퇴’ 단행
리지웨이 ‘위력수색’ 통해 대반
격적 38선으로 축출 철수 계획 철회
리지웨이(가운데) 장군과 맥아더(맨 오른쪽) 장군의 전선 시찰 모습. |
6·25전쟁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다. 이런 검토와 공론이 여러 번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 1, 2차 공세에 밀려 평양과 38선을
내주고 후퇴를 거듭한 유엔군은 3차 공세(1950년 12월 31일) 때 다시 서울을 내주는 불행한 사태를 맞았다. 중공군의 강력한 압박에 못
이겨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주는 ‘1·4 후퇴’를 단행했다. 중공군은 1월 5일 서울에 무혈입성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오산으로 쫓겨
내려갔다. 두 번이나 서울을 빼앗긴 국군과 유엔군은 참담했다. 설상가상으로 미 합참에서는 유엔군이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중공군의 위협은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고 소련의 참전과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묘안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소련은 이미 1949년 말에 핵을 갖기 시작했다. 또 최근 공개된 기밀문서에 의하면 1951년 2월 마오쩌둥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만일 미국이 만주를 폭격하면, 소련은 주일 미군 기지를 폭파한다”고 스탈린과 합의한 바 있다.
한편 맥아더로부터 적의 규모가
대규모이며 2개 사단의 추가 파병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은 미 합참은 12월 4일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Lawton J. Collins) 대장을
한국에 보내 직접 전선을 시찰하도록 했다. 콜린스는 귀국 후 한국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고 보고했다. 워싱턴 수뇌부는 12월 22일 회동을 하고
‘중공의 의도가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유엔군을 한국에서 철수시키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한국 포기를
의미한다. 이 계획에 따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과 국군1군단은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했고(흥남철수작전), 서부전선은 서울을 포기한 ‘1·4
후퇴’를 단행했다.
이 무렵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12월 23일 의정부에서 순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맥아더는 즉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을 후임자로 임명했고 그는 부임(1950.12. 26)하자마자 1·4 후퇴를 맞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 합참은 1950년 12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에게 ‘철수를 고려’하라는 지침을 보냈다. 만일 중공군이 ‘금강 방어선’까지 밀려오면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유엔군 수송선에 타려는 흥남부두 피난민들. 연합뉴스 |
맥아더는 분개했고 다음 날 보낸 서신에서 ①중공 해안 봉쇄 ②중공 본토에 대한 폭격 ③ 대만 국부군의 한국 파병 등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하면서, ‘만일 미국이 철수하게 된다면 자유세계는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일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게 되고 결국 3개월 뒤에 해임(1951년 4월 11일)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맥아더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 대통령은 철군을 종용했다. 합참에서는 제주도 철수계획을 세웠고, 콜린스는 철군 계획을 통보하기 위해 1951년 1월 15일 우리나라를 재차
방문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매우 난감했다. 부임하자마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수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엔군의 명예도
문제가 됐다.
리지웨이는 철수할 때 하더라도 며칠 더 기다리며 적과 접촉을 통해 그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싶었다. 노심초사 끝에
‘위력수색’이라는 묘수를 찾아냈고 1951년 1월 15일 탱크·포병·항공기를 동반한 연대전투단을 편성해 위력수색을 했다(16회
참조).
그 결과 중공군의 능력과 전투의지가 파악됐다. 적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자
공포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반격을 결심하고 1월 25일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5단계로 나눠 시행된 반격작전은 1단계부터 큰 성과를
거뒀다. 1월 30일 수원을 점령하고, 31일 서울의 관문인 판교를 접수했으며, 북한강과 남한강 사이에 있는 양수리까지 진출했다. 그 후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돼 적을 38선으로 축출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유엔군이 다시 장악하게 됐다. 결국,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중공군은 예상치 못했던 유엔군의 반격을 받고 서울에서 쫓겨 북으로 퇴각한 뒤, 전열을 가다듬고 2월 11일, 공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군의
선방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작전의 주도권은 계속 유엔군이 갖고 있었다.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6일), 용문산전투(1951년 5월
18∼21일), 화천 파로호전투(1951년 5월 22∼24일)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대승을 거뒀다. 1951년 4월과 5월, 두 번의 공세에서도
성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쫓기자 중공군은 최대의 피해를 보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 결과 ‘한국 철수’라는 말은 쏙 들어갔다.
리지웨이 장군은 승리의 화신이 됐다. 만일 워싱턴의 뜻에 따라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됐겠는가! 리지웨이 장군은 워커
장군 순직부터 맥아더 해임까지 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8군사령관으로서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최대 공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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