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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 피로 누적·보급 두절에 “남진 중지” 명령 ?

구름위 2017. 1. 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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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 피로 누적·보급 두절에 “남진 중지” 명령 ?

<16> 중공군은 왜 수원에서 멈추었는가?

중공군, 1951년 1월 10일 이후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 휴식·정비

유엔군, 기회 놓치지 않고 대반격

적 38선으로 축출 주도권 재장악

 

 

 

기사사진과 설명

펑더화이


 

 


기사사진과 설명

1·4후퇴로 전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리지웨이(맨 왼쪽) 미8군사령관이 1951년 1월 4일 한강부교 설치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중공군의 개입은 6·25전쟁을 힘들게 만들었다.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산속에 숨어 있다가 10월 25일 1차 공세를 시작해 국군과 유엔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밀어냈고, 2차 공세(1950년 11월 25일) 때는 38선까지 밀고 내려왔으며, 3차 공세(1950년 12월 31일)로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수원(일부는 평택)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1951년 1월 10일을 기해 수원에서 갑자기 공세를 멈추고 자체 휴식과 정비에 들어갔다. 조금만 더 밀고 내려왔으면 미국이 한국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마치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 동안 쉬고 있었던 상황과 유사하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한국으로서는 하늘이 도와준 기회라고 믿을 수밖에 없고, 미국은 반격의 기회를 얻어 ‘한국 포기’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8군사령관 리지웨이(Ridgway) 장군은 부임한 지 2주밖에 안 돼 여러 측면에서 노심초사하며 적정파악과 작전구상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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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3월 육군총참모장 정일권(왼쪽) 중장과 미8군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작전을 토의하고 있다.




한국 전선에서 맞붙은 리지웨이 8군사령관과 펑더화이 중공군 총사령관

당시 중공군 최고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서울을 점령한 후 수원까지 내려가자 1월 7일 갑자기 ‘추적 정지명령’을 내렸다. 매우 의외의 조치였다. 평양 주재 소련대사 ‘라츠와예프’는 계속 남진할 것을 요구했으나 펑더화이는 이를 거절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라츠와예프 대사를 즉각 해임했고 펑더화이를 선견지명이 있는 군사전략가라고 칭찬했다.

따라서 중공군은 1951년 1월 10일을 고비로 더는 남하하지 않고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했고 제50군(군=군단 규모), 제38군 및 제42군 예하의 각 1개 사단씩만 한강 남쪽에서 방어하게 하고, 일부 병력은 서울, 고양, 동두천, 마석우리, 가평 및 김화에 집결해 휴식과 정비에 들어갔다. 북한의 인민군도 제2군단, 제5군단은 정면의 적을 경계하는 한편 일부 병력은 홍천, 횡성 동쪽에 집결해 휴식에 들어갔다. 유엔군은 적이 수원에서 더는 내려오지 않자 이상히 여겨 위력수색을 통해 적의 진의파악(적의 규모, 전투능력 등)에 들어갔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워커 장군 순직 후 철수 중에 부임했으므로 처음부터 후퇴만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적정도 제대로 모르는 가운데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적의 능력과 전투 의지를 파악하기 위해 위력수색을 계획하고 미 제25사단 27연대로 하여금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의 지원을 받는 증강된 전투여단을 편성해 ‘강력한 위력수색’을 실시하도록 명했다. 이것이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이다.

이 위력수색은 평택에서 수원에 이르는 공간에 대해 1월 15일부터 이틀 동안 시행됐다. 그리고 이 작전이 뜻밖에 성공해 유엔군 지휘부는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증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됐고 지금까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리지웨이는 자신감이 생기자 1월 25일부터 대반격에 들어갔다. 마침 중공군이 휴식에 들어간 기간이었으므로 반격작전은 처음부터 성공했다. 절호의 기회를 틈탄 것이다. 마치 한 사람에 의해 연출된 듯 중공군은 멈추고 유엔군은 반격했다. 이 ‘절묘한 조화’로 유엔군은 승리하고 한국은 위기에서 회생할 수 있었다.

유엔군의 반격작전은 1월 25일부터 5단계에 걸쳐 시행됐다. 선더볼트(Thunderbolt), 라운드 업(Round-Up), 킬러(Killer), 리퍼(Ripper), 러기드(Rugged)&돈트리스(Dauntless) 작전이 그것이다. 이 반격작전은 모두 성공해 적을 38선으로 축출했으며, 작전의 주도권은 다시 유엔군이 장악하게 됐다.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정지명령’ 사유

그러면 펑더화이는 왜 갑자기 남진을 정지시켰는가? 필자는 그 해답을 중공군이 저술한 ‘중공군의 한국전쟁사(1991)’에서 찾았다. 중공군은 장기간에 걸친 피로와 보급 두절로 전투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즉, 중공군의 자체평가에 의하면 중공군은 3차에 걸친 대공세에서 계속 승리함으로써 사기가 충천했고, 또 현대무기를 갖춘 유엔군과 싸우는 데 어느 정도 전투경험도 터득했다. 그러나 기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장기간에 걸친 전투를 하다 보니 피로가 쌓여 있었다. 더구나 전선이 남쪽으로 확대되면서 보급선이 550∼700km로 연장됐고, 유엔군의 맹렬한 폭격으로 수송이 어렵자 탄약과 식량이 부족해졌다. 겨울철이라 식량의 현지조달도 어려웠다. 이런 상태에서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낼 만큼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불가능했다.

한편 유엔군은 계속된 패전으로 한반도 철수 문제까지 고려했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의 판단은 달랐다. ‘적이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충분한 휴식’을 한 다음 강하게 밀어붙여야 조선 해방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펑더화이가 수원에서 중지한 것은 마오쩌둥과 사전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중공군이 수원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유엔군의 대반격 작전이 시작됐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휴식을 갖지 못하고, 병력도 보충받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쫓기며 패전을 거듭하는 신세가 됐다. 전세는 역전돼 국군과 유엔군은 38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용문산전투와 파로호전투에서 중공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기세가 완전히 꺾여 더는 유엔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