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조국 위해 희생한 학도병들
- <14> 장사상륙작전의 진실
“연합군, 곧 영덕·군산 상륙”
거짓 정보로 북한군 속여
학도병 772명 문산호에 올라
동해안 장사상륙작전 펼쳐
심한 파도에 배는 요동치고
바다로 몸 던진 학도병은
실종되거나 전투에서 희생
1997년 좌초됐던 문산호 발견
위령탑·공원 등 조성해 넋 기려
경북 영덕군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복원된 문산호. 연합뉴스 |
장사상륙작전에 동원된 문산호. |
영덕과 군산에서 펼쳐진 ‘양동작전’
맥아더 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동해안(영덕)과 서해안(군산) 두 지역에서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쳤다. 이는 북한군을 속이기 위한 전술이다. 특히 군산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은밀하게 흘려보냈다. 1950년 9월 13일 미주리호를 동해안 삼척 부근 해역으로 보내 구경 40㎜ 함포 사격을 하고 또
서해안에서는 9월 12일 밤, 영국함대가 미 육군과 영국 해병 코만도 부대를 군산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리고 14일 미 공군은 전단 살포를 통해
‘연합군이 곧 군산에 상륙하니 시민들은 내륙으로 피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모두 적을 기만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북한군은 여기에 속아 인천에는
경계를 소홀히 한 반면 군산과 영덕 지역에 집중 방어 대책을 세웠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1950년 8월, 피아의 모든
군사력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고 있을 때, 학도병들은 분연히 일어나 낙동강 전선으로 모여들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15∼18세) 군에서
받아주지 않자 떼를 써서 학생 신분으로 부대를 배치받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군번도 없이 군복도 입지 않은 채, 학생 신분으로 소총만 지급
받고 군인이 된 학도병! 겨우 4∼5일 동안 총 쏘는 기초훈련만 받고 참전한 학도병들은 전국에서 3만여 명이나 됐다. 주로 낙동강 전선인
안동·영천·안강·포항전투 등에서 군을 도우며 큰 공을 세웠다. 한 학교에서 100∼200명씩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평양탈환작전·백마고지전투 등
격전이 있는 곳마다 참전했다. 그만큼 희생도 많았다.
그중 희생이 가장 많았던 전투는 1950년 9월 14일 새벽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에서 벌어진 ‘장사상륙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맥아더 사령부가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하면서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적에게 거짓
정보를 은밀히 흘리고 실제로 이 지역에서 상륙작전을 하는 것처럼 기만하기 위해 실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적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인천상륙작전 바로 전날인 9월 14일 새벽 5시에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적은 이 지역에 2개 사단을 배치하고 집중적인
방어에 들어갔다. 적이 완전히 속은 것이다.
장사상륙작전기념비. |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다음날 인천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모습. |
학도병 772명 “조국 위해 죽겠다”
한편 양동작전 명령을 받은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이곳에 투입될 군 병력이 부족했으므로 현역 군인 대신 학도병 772명을 투입했다. 학도병들은 처음부터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정규군과 같은 중무장도 하지 않은 채, 2700톤급 해군 수송선(LST) ‘문산호’에 실려 작전지역으로 보내졌다. 이들에게는 ‘오직 조국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뿐이었다.
그러나 희생이 너무 컸다. 그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다. 나머지도 소수의 생환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실종됐다. 작전 당일 동해안에 심한 파도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학도병을 태우고 영덕 해안까지 달려온 문산호는 해안에 정박하기도 전에 심한
파도에 휩쓸려 배가 요동쳤다. 그러나 용감한 학도병들은 상륙을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중 절반은 상륙에 성공했으나 나머지는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실종됐다.
당시 생존자 채종만(82) 옹은 ‘성난 파도에 휩쓸려 해안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와중에도 많은 학도병이 상륙에 성공, 장사리 남쪽 고지를 점령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고 전한다. 상륙한 병사들도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희생됐다.
군에서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해군 수송선을 보냈지만 대부분 전사하거나 실종돼 돌아올 수 없었다. 그들은
군번도 없는 무명용사였으므로 현충원에 위패도 없이 이름만 남겼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에는 이처럼 뒤에서 희생한 수많은 학도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기억해야 한다.
한편 학도병을 태우고 최초 상륙작전에 투입된 2700톤급 ‘문산호’는 결국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좌초했으며,
오랫동안 갯벌에 파묻혀 있다가 1997년 3월 6일 해병대에 의해 발견됐다. 이전까지는 기록에만 있을 뿐 그 실체가 분명치 않았으나 좌초했던
배가 발견됨으로써 장사상륙작전이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는 당시 상륙작전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늦었지만
2013년 장사상륙작전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남정면 해수욕장에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위령탑’을 건립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선 학도병들! 그들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학도병들의 희생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길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할 때마다 장사상륙작전도 함께 기억됐으면 좋겠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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