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미도 등댓불 밝힌 최규봉, 전세 역전 희망불 밝혀
- <12>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공로자 (상)
맥아더 장군, 팔미도 등대 점등 특명
6명의 대원 칠흑 어둠 뚫고 임무 완수
불 켜지자 연합군 대대적인 진격작전
작전 성공 후 맥아더 장군 직접 격려
최규봉 켈로부대장. |
북한의 남침으로 전 국토의 90%를 빼앗기고 며칠을 더 버티느냐 패망하느냐라는 운명의 순간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
맥아더 장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1950.9.15)은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키고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세계전사에 빛나는 대작전이었다. 그런데 그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목숨을 걸고 적지에 들어가 첩보활동을 하면서 ‘등댓불’을 켠 특공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규봉(崔奎峰·당시
24세·켈로부대장·2016년 90세로 사망) 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작전일 2주 전 맥아더사령부로부터 특명을 받고 다른
특공대원들과 함께 미리 영흥도에 들어가 명령을 기다렸고, D-1일 명령이 떨어지자 팔미도로 잠입해 등대에 불을 밝혔다. 역사는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그를 발굴해 냈다.
인천 팔미도 등대(사진 앞쪽). 팔미도 등대는 2003년 신축 등대(사진 뒤쪽)가 건립돼 운영을 중단했다. 연합뉴스 |
특명 “15일 00시30분 등댓불을 밝혀라.”
1950년 9월 15일(D-day) 새벽,
7만5000명의 병력을 태운 261척의 함선들은 상륙작전을 위해 인천 앞 먼바다에 집결해 작전 신호인 ‘등댓불’이 켜지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갯벌이 많아 바닷길을 안내해 주는 등댓불 없이는 대형 함정들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불을 켤 수
없었다면 상륙작전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01시50분 등대에 불이 켜졌다. 약속 시간보다 80분이나 늦었지만, 작전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맥아더의 속은 타들어 갔을 것이다. 맥아더는 불이 켜지자 월미도를 향해 전진명령을 내렸고, 02시부터
함정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05시에 월미도에 폭격이 시작되고, 05시30분에 선발대가 17척의
상륙용 단정을 이용해 월미도 상륙을 개시했다. 미 제5해병연대와 제1해병연대가 선두에 섰다. 한국 해병은 그 뒤를 따랐다.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돼 다음날(16일) 새벽 01시30분에 인천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경인가도를 따라 영등포를 거쳐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빠른 속도로 북진해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고, 10월 19일에는 평양까지
탈환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처음 계획했을 때 성공률이 5000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도 작전은 성공했다. 그
이면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적지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한 켈로(KLO)부대의 눈부신 활동이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작전 당일(9월 15일) 새벽
00시30분에 ‘팔미도 등대’에 ‘등댓불’을 밝히는 것이었다.
등댓불을 직접 켠 사람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은 그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월간조선(2003), 조선일보(2010), KTV 등에서는 ‘인천상륙작전 비사’를 소개하면서 당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힌
사람은 켈로부대장 최규봉 씨라고 밝혔다.
최씨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8월 말, 맥아더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팔미도를 미리 점령해 ‘등댓불’을 밝히는 ‘블루 하트(Blue Heart)’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KLO부대 요원들을 투입했다. 특공대는 한국인
3명과 미국인 3명 등 모두 6명으로 구성됐다. 미 해군 첩보대대 유진 클라크 해군 대위가 총책을 맡았다. 대원은 클락 혼 미 육군소령, 존
포스터 육군중위 그리고 한국의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延禎) 해군소령, 그리고 한국 KLO 고트대(隊) 대장이었던 최규봉이었다. 특공대는 해군의
도움을 받아 영흥도에 미리 상륙, 첩보 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9월 14일 특명이 떨어졌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 해병대원들이 아군의 함포사격으로 검은 연기에 싸인 해안으로 상륙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다. |
“15일 00시30분을 기해 등댓불을 켜라.”
최규봉 등 특공대원 6명은 팔미도로 향했다. 기습적으로 팔미도에 상륙해 인민군
경계병 8명을 사살하고 마침내 등대를 점령했다. 9월 14일 밤 23시30분쯤이었다. 그러나 ‘등댓불’을 켤 수 없었다.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헤매다가 지쳐서 바닥에 엎드렸다. 이때 최 대장은 손에 무엇인가 잡히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나사못이었다. 이 나사못을 연결하는 순간 등대의 불이 켜졌다. 특공대는 아군이 점령했음을 알리기 위해 등대 난간에 성조기를
게양했다.
등댓불이 켜진 시각은 약속보다 1시간20분 늦은 새벽 1시50분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 사령관은 불빛을 확인하자
연합군 함대에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를 신호로 연합함대 261척은 곧바로 상륙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등대작전’을 성공시킨
이들은 오전 10시쯤 발동선을 타고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고 있는 마운트 매킨리함으로 가서 맥아더에게 격려를 받았다. 최 대장은 등대에 게양했던
성조기를 선물로 받아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1955년 미국에 기증했다. 성조기는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상은 최씨의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 첩보부대장으로 이 작전에 참여했던 미 해군 클라크 대위가 쓴
‘수기’에서 등대에 불을 켠 사람은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수기는 그가 죽은 후 발견됐다. 두 사람의 증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를 규명해 ‘역사의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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