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한국을 살린 UP통신의 ‘아침 길거리 특종’

구름위 2017. 1. 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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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살린 UP통신의 ‘아침 길거리 특종’

<9> 전쟁과 보도전쟁


잭 제임스 기자, 25일 아침 8시 길에서

무초 주한 미 대사 만나 남침 소식 듣고

9시50분 ‘한반도 전쟁 발발’ 기사 전송

이승만 대통령 보고받은 것보다 빨라

美, 곧바로 국무회의 열고 대책 논의

 

 

기사사진과 설명

6·25 전쟁 중 전황 브리핑에 참석한 종군기자들.




기사사진과 설명

전선 시찰 중인 맥아더와 워커 장군에게 질문하는 종군기자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보도전쟁’도 불러왔다. 보도는 정확성도 중요하지만 누가 얼마나 더 빠르게 보도하느냐 싸움이다. 6·25 전쟁에서 첫날 기선을 잡은 매체는 UP통신이었다. 북한은 김일성의 남침명령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부터 38선 전역에 걸쳐서 포문을 열고 공격준비사격에 들어갔고, 새벽잠에 취해있던 국군 초소는 순식간에 피로 범벅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이보다 한 시간 전인 새벽 4시쯤 북한의 공격이 시작된 서부전선 옹진반도는 초전에 희생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 사상자를 추스르는 데도 힘이 부족했다. 이곳을 방어하던 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는 순식간에 병력의 3분의 1인 750여 명의 전투력 손실을 보고 지휘체계까지 흔들리게 됐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함께 있던 미 군사고문단 2명(5명 중 3명 외출)이 잠을 자다가 날벼락을 맞는 현장을 목격하고 즉시 서울에 있는 미 대사관과 육군본부에 남침 소식을 전하면서 ‘빨리 철수할 수 있도록 비행기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이 첫 보고였다. 그러나 통신 사정이 나빠 육본 상황실과 통화된 것은 5시30분이었다.

한편 새벽 5시가 되면서 문산·포천·춘천 등 38선 전역에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춘천에 있던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5시20분쯤이었다. 이후 육본 상황실로 사단별 보고가 차례로 들어왔다. 그러나 육본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9시30분이나 돼서였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된 시각은 10시30분이었다.

이 시각 미국에서는 벌써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보도가 나갔고 워싱턴 정가는 발칵 뒤집혔다. 국무부는 곧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UP통신의 빠른 보도가 지구 반대편에서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국무부는 펜타곤보다도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UP통신이 서울발 기사로 9시50분(현지시간 24일 밤 7시50분)에 ‘특종’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옹진으로부터 남침 소식 보고를 받은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 대사는 상황 파악을 위해 아침 8시쯤 을지로 입구 반도호텔 2층에 있는 대사관으로 들어가려다 길거리에서 UP통신의 잭 제임스 기자를 만나게 됐다.

“대사님 이른 아침에 어딜 가십니까?”라는 기자의 인사를 받고 무초 대사는 “38선에 전쟁이 터진 모양이야!”라는 한마디를 던지고 대사관으로 들어갔다. 기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특종’이라는 생각이 번쩍 뇌리를 스쳐 갔고, 재빨리 반도호텔 1층에 있는 외신기자실로 뛰어들어가 간단한 확인을 거쳐 ‘한반도 전쟁 발발!’ 기사를 전송했다.



UP통신의 ‘특종 보도’ 워싱턴 정가 흔들어

한편, 한국에서는 10시30분에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오후 2시에 첫 국무회의가 소집됐다. 첫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참모총장은 “서울에 잡혀 있는 거물 간첩 이주하와 김삼룡을 구출하기 위해 도발한 것 같다. 그러나 4일만 시간을 주면 평양까지 밀고 올라갈 수 있다”고 허황한 말만 늘어놓았다.

한국에서의 첫 보도는 7시5분 KBS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라디오 방송을 청취한 사람은 얼마 안 됐고 파급효과도 적었다. 대통령과 장관들도 전쟁 소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육본 당직사령으로부터 보고받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아침 7시쯤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했고, 신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경무대로 들어갔다. 이날 아침 대통령은 창덕궁 비원에서 산책과 낚시를 하고 10시30분쯤 경무대로 돌아와 신성모 장관으로부터 남침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즉시 도쿄에 있는 맥아더 장군과 워싱턴에 있는 장면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지원을 받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오후 2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장면 대사는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황급하게 국무부로 달려갔다. 현지시간으로 24일(토) 밤 12시쯤 도착했는데 국무부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벌써 딘 러스크 극동 담당 차관보, 히커슨(John D. Hickerson) 유엔 담당 차관보, 페이스(Frank Pace) 육군장관 등이 대책을 협의하고 있었다. UP통신의 재빠른 보도 덕분이었다.

한편, 우리 군에서는 10시부터 “외출 나온 장병들은 즉시 부대로 복귀하라”는 거리방송을 했고, 11시에 경향신문 ‘호외’가 나갔으며 12시 KBS 정오뉴스를 통해 더 정확한 보도가 나갔다. 조선일보·동아일보는 다음 날(26일) 보도했다.

이처럼 6·25 전쟁 발발과 동시에 보도전쟁도 시작됐다. 국방부에서는 종군기자단을 편성해 수시로 국민에게 전황을 알렸고, 외신기자들도 몰려와 특종을 찾느라 목숨까지 걸었다. 한국전쟁에서 순직한 외국 기자는 17명이나 됐다. 한국기자는 1명(서울신문 한규호)이다.

통영상륙작전에서 ‘귀신 잡는 해병’을 보도한 마거릿 히긴스 여기자는 퓰리처상을 받았고, 평양 철수 시 피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폭파된 대동강철교를 곡예사처럼 매달려 건너오는 사진을 촬영한 기자도 퓰리처상을 받았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