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6대 불가사의의 진실

구름위 2017. 1. 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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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 전투력 공백 주범은 ‘군 내부 北 첩자’

<7> 6대 불가사의의 진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부관 ‘라엄광 중위’

북에서 파견된 남로당원…군적 없어

지위 이용 군 정보 넘기고 작전 오도

 

 

기사사진과 설명

북한군은 춘천전투 때 Su-76 자주포를 투입하는 등 아군보다 우월한 화력을 자랑했으나 국군의 선전에 밀려 수도권 포위에 실패했다.


북한의 남침은 예고된 일이었다. 남침이 있을 것이라는 징후와 정보판단은 계속 상부에 보고됐고 비교적 정확했다. 그런데도 ①정보보고는 무시됐으며, ②북한이 남침하기 전날 밤(1950. 6. 24) 육군본부에서는 댄스파티가 벌어지고 간부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③또한 전군 비상경계령이 해제됐고, ④병사들 3분의 1이 외출·외박을 나가 부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⑤기관총, 대포, 수송 차량 등 주요 장비들은 2주일 전부터 정비한다는 목적으로 후방에 있는 부평기지창에 입고돼 있었다. ⑥2주 전부터 전방부대 지휘관을 많이 교체했고, 부대 이동을 시켜서 ‘새로 부임한 지휘관이 낯선 지형에서 전쟁을 맞이하는 ‘최악의 사태’를 만들어 놓았다.

이는 마치 무장해제나 다름없다. 이런 가운데 다음 날(1950. 6. 25) 새벽 5시, 북한군은 242대의 탱크를 앞세워 38선 전역에서 기습적으로 남침했다. 적을 방어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개전 초기, 전투력 공백 상태에서 우리 군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파죽지세로 밀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가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남침 징후를 알면서도 설마 하고 안일하게 행동했던 군 지휘부는 역사와 국민 앞에 영원한 죄인이다. 상황을 이렇게 악화시킨 이면에는 군부에 침투해 중요한 역할을 한 북한의 첩자가 있었다.

당시 2사단장으로 참전했고 전쟁 직후 참모총장을 지낸 바 있는 이형근(李亨根) 장군은 회고록에서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라는 말로 이를 지적했다. 이형근이 제시한 의혹의 핵심은 군 지휘부에 적과 내통하는 첩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 두 사람을 지목해서 의혹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창인(전 육사 교수) 박사는 이형근 장군의 지적에 동의하며,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관사에는 ‘군적에 없는 가짜 장교’가 근무하고 있었고, 신성모 장관의 친인척 중에 공산당과 연루된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지적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군 원로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퍼져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전쟁 초기에 우리 군 수뇌부에 적과 내통하는 반역 행위자가 없었다면 그렇게 ‘초토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6사단의 경우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6사단장 김종오(金鍾五) 장군은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전쟁 분위기를 직감해 병사들의 외출·외박을 시행하지 않고 오히려 38선 경계를 강화했다. 그 결과 다른 곳은 다 뚫렸어도 춘천 지역은 3일 동안이나 버티고 있었다. 개전 초기에 북한군의 침략을 막아내고 ‘초전에 승리’한 유일한 부대였다.

과연 군 내부에 적과 내통한 첩자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준 사람이 있다. 현대사포럼의 대표이며 6·25 전쟁사 연구에 정통한 이선교(74) 목사다.

그는 2007년 5월 ‘6·25 한국전쟁’이라는 책에서 이형근 장군이 의심했던 사람은 ‘채병덕 참모총장’이 맞고, 뒤에서 첩자 노릇을 한 사람은 바로 총장 공관을 관리하던 부관 ‘라엄광 중위’라고 지목했다. 라엄광은 군적에 없는 가짜 군인(중위)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파견한 남로당원이며, 총장공관 부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첩자 노릇을 했다.

그가 어떻게 참모총장에게 접근, 공관을 관리하는 부관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육군에 병적도 없고 훈련받은 기록도 없다. 그러면서도 장교복을 입고 부관 행세를 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곧 잠적해 버린 것으로 보아 ‘북에서 심어놓은 간첩’이었음이 틀림없다.

그가 참모총장을 조종해 계획적으로 군의 전투력을 와해시키고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게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 속아 넘어간 채병덕 총장도 참모총장으로서 문제가 있었다. 그가 군 지휘에 얼마나 허점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주요 장면이 있다. 채 총장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6월 25일 오후 2시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적은 아마도 거물 간첩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출시키기 위한 책략에서 도발한 것 같다”고 안일하게 보고하고, 나흘(4일)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서울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6월 30일 총장에서 해임되고 영남편성군사령관으로 좌천됐다. 그리고 7월 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