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김일성, “남로당 봉기” 박헌영 말 믿고 사전 축배

구름위 2017. 1. 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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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남로당 봉기” 박헌영 말 믿고 사전 축배

<6> 北 서울 점령 후, 왜 3일 동안 쉬었나?


박헌영 “남로당원 20만 명 양성…서울만 점령하면 전쟁 끝난다”

남로당 봉기 않자 골든타임 놓쳐 유성철 전 인민군 작전국장 “서울 함락 이후의 계획 없었다”

 

 

기사사진과 설명

6·25전쟁 당시 서울 남대문 부근을 통과하는 T-34 전차.


기사사진과 설명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들.


전쟁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물리적 강제수단이다. 내적으로는 국민통합과 단결을 도모하고 적에게는 굴복을 강요하며 더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그러나 승자나 패자 모두 엄청난 희생이 뒤따른다. 6·25전쟁은 3년1개월 동안 치러진 장기전이었으므로 희생이 더욱 컸다.

전사·부상·실종 등으로 국군 62만여 명, 공산군 92만5000여 명, 미군도 17만여 명이나 희생됐다. 민간인 피해자 99만 명과 1000만 명의 남북 이산가족을 더하면 그 희생과 고통은 너무 참혹했다.

이처럼 엄청난 희생을 치른 이 전쟁에서 침략자 김일성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김일성의 남침목표는 ‘한반도의 공산화’ 즉 ‘공산통일’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남침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을 때, 그는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줄 알고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유성철의 증언에 의하면 6월 28일 서울 점령 하루 전날인 27일 저녁에 고위 간부가 중앙청에 들어와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평화롭던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 ‘악마’에게 하늘은 유엔을 통해 철퇴를 가했다.



6·25전쟁의 핵심적인 의문 두 가지

6·26전쟁과 관련해 큰 의문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의문은 북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남한에서는 무엇을 했으며, 또 전쟁이 일어날 줄 알면서도 왜 남침 전날 장병들을 외출 내보내고 육군본부 간부들은 술 파티를 벌이고 있었는가(다음 회에 다룰 예정), 둘째 의문은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한 후, 왜 남쪽으로 더 밀고 내려가지 않고 3일 동안 쉬면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국군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반격은 불가했고 건제부대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또 미군이나 유엔군은 아직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사흘은 남쪽 대구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만약 그렇게 밀고 내려갔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고 부산도 위협받는 상태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어째서 서울에서 멈추고 축배를 들었을까! 이 점을 예리하게 분석,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공비토벌·숙군작업 등 남로당 사전 봉쇄

지금까지 정설로는 인민군이 서울에서 사흘 동안 쉰 것은 김일성이 박헌영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쪽에 남로당원 20만 명을 양성해 놓았으므로 서울을 점령하기만 하면 인민봉기가 일어나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박헌영이 남로당을 재건하고 제주 4·3사건, 여수 반란 사건 등의 반정부 사건이 벌어졌지만,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 대부분 좌익분자와 위험인물들을 사전에 제거했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 의문점에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최근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에 거주하며 6·25전쟁에 큰 관심이 있는 주영세 목사가 미국을 방문 중이던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소련 망명)을 만나 “서울 점령 후에 왜 사흘 동안 멈추었느냐?”고 물었더니 “서울이 그렇게 쉽게 함락될 줄은 몰랐어요. 그 후, 남쪽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 계획이 수립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유성철의 말대로 우리는 3일 만에 너무 일찍 서울을 뺏겼다. 그만큼 우리 군의 대비태세가 무방비 상태였다. 침략자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였는데 어째서 통일로 연결하지 못했을까? 김일성은 아마도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결국, 박헌영을 숙청해 버렸다.

한편 북한이 골든타임을 놓친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 됐다. 그 3일 동안에 국군은 후퇴하던 장병들을 시흥에 집결시켜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었고 이후부터는 비록 후퇴하더라도 지연전을 펴며 서서히 후퇴했다. 국군은 밀리긴 했으나 패망하지는 않았다.

침략자가 서울에서 사흘 동안 쉰 것은 김일성의 큰 실수다. 전쟁 경험 부족과 오만이 가져온 결과다. 아랫사람의 말만 믿고 최고 사령관으로서 예리한 판단을 하지 못한 결과, 통일의 기회를 완전히 놓치고 오히려 자신들이 극한의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그 3일 동안 미 지상군의 파견이 결정되고 7월 1일 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유엔군도 속속 한국전에 참전했다.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은 국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워 주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쟁을 역전시켰고, 38선 넘어 압록강 국경지대까지 밀고 올라가는 승전보도 전해주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낙동강 방어선 구축이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신화 이면에는 김일성의 실수가 한몫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과 철저한 준비를 했더라도 ‘허점’이 없는지 재확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