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소련, 미·중공 싸움 붙이고 동유럽 침공 ‘어부지리’ 노려

구름위 2017. 1. 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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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미·중공 싸움 붙이고 동유럽 침공 ‘어부지리’ 노려

<8> 스탈린은 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나

유엔, 북 남침에 안보리 긴급 소집

거부권 쥔 소련 대표 말리크 불참

유엔군 참전 결의 일사천리 통과

미 과소평가 스탈린 계략은 실수

 

 

 

기사사진과 설명
스탈린.

스탈린.


미국을 아시아에 묶어놓으라

북한의 남침 소식은 토요일 밤(현지시간) 워싱턴 정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주말을 편히 보내고 있다가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가장 놀란 사람은 애치슨 국무장관과 국방부 사람들이었다. 애치슨은 불과 6개월 전(1950. 1. 12) 소위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선포하면서 한국을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했는데 그곳에서 공산군이 전쟁을 도발했고, 국방부 사람들은 안보의 실질적인 책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 전쟁 소식이 처음 알려진 것은 토요일(6월 24일) 저녁 7시50분 UP통신을 통해서다. 그리고 이보다 한 시간 반 늦게 무초 주한 미국대사로부터 북한의 남침 소식을 알리는 전문보고가 워싱턴에 도착(24일 밤 9시26분)했다. 주말을 즐기던 워싱턴 정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별로 우려하지 않았던 곳에서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국무부와 국방부 사람들은 신속하게 대처했고 유엔안보리를 소집했다.



유엔 안보리에 소련 대표 불참, 유엔군 참전 길 열려

국무부의 그로스 주유엔대사는 ‘트리그브 리(Trygve Lie)’ 유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했고, 국무부의 유엔 담당 차관보 ‘히커슨’은 리 사무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다. 리 사무총장은 노르웨이 사람으로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히커슨 차관보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즉시 안보리 이사국 대표들에게 긴급회의 소집의 긴박성을 통보하는 한편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이사회 소집 절차에 들어갔다.

한편 트루먼 대통령이나 애치슨 국무장관도 ‘일본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국이 필요하다’는 공통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조처가 예상 외로 빠르게 진행됐다. 리 사무총장은 사태의 긴박성을 인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후 2시에 ‘안전보장이사회의 특별회의’를 소집했다. 안보리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미·영·불·소·중의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의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돼 있다. 이날 긴급 소집된 ‘특별회의’에는 소련 대표를 제외한 전원이 참석했다.

리 사무총장은 유엔헌장을 파괴하는 북한의 침공이 이뤄졌으며, 유엔은 그 지역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보고했고, 발언권이 없는 한국의 장면(張勉) 주미대사에게 특별히 발언권을 줬다. 분위기는 처음부터 대한민국에 유리하게 진행됐다. 장면 대사는 ‘북한의 불법적인 침략행위를 보고하고 즉각적인 휴전과 북한군의 철수’를 호소했다.

이어 토의에 들어간 안보리는 ‘유엔안보리 결의 제82호’를 통해 ①북한의 불법 남침을 규탄하고 ②공격을 즉각 중지하고 38도선 이북으로 퇴각할 것을 촉구하며, ③한국을 돕기로 결의했다. ④또 모든 회원국은 유엔이 결의안을 집행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말고, 북한을 지원하는 것을 삼가라고 요구했다.

이날 회의는 본국의 지령이 없었는데도 유고 대표는 기권하고, 소련 대표 ‘말리크’는 불참해 거부권 행사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참으로 하늘이 도우신 것이다. 유엔 안보리에서 한국 문제를 이렇게 빨리 처리해준 것은 기적이다.



기사사진과 설명

유엔본부.


 

 

 

스탈린의 ‘역사적 실수’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거부권이 있는 소련 대표가 왜 불참했느냐 하는 의혹이다.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고 군사력까지 지원한 스탈린이 어째서 침략자를 규탄하는 회의에 자국대표를 불참하도록 지시했느냐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따라서 당시 말리크가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항간에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했다. 배탈이 나서 불참했다는 농담도 있고, 혹은 교통사고, 혹은 술에 취해서 등등이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스탈린의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그 속사정에 대해서는 말리크 자신만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비교적 정확한 정보는 1950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고트발트’가 스탈린에게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보고 답변을 받음으로써 알게 됐다. 이영훈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취지의 답변을 보내왔다고 한다.

첫째, 안보리에서 미국이 마음대로 결정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미국의 호전성을 국제사회에 부각하고, 둘째, 미국이 중공과 충돌해 싸우고 있는 동안 소련은 동유럽을 침공해 공산주의를 확대하며, 제3차 세계대전에 대비한 공산 진영의 힘을 배양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스탈린의 계략은 분명 착각이요 ‘역사적인 큰 실수’였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미 유럽과 아시아 등 2개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미국과 유엔의 참전이 가능했고, 그들은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패했으며, 소련은 침략자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