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파된 한강대교… 종로엔 탱크가 들어왔다
- <10> 서울이 점령되던 날
6월 27일 밤, 최후 격전장이 된 미아리고개
점령군은 죄수들 석방·국군 부상자들 사살
남로당의 거물 간첩 이주하·김삼룡 처형
미 제1해병대대 장병들이 영등포 인근에서 부서진 한강철교를 감시 |
서울의 북쪽 관문이 뚫렸다. 미아리고개는 6월 27일 밤
최후의 격전장이 됐고 유재흥 7사단장과 이응준 5사단장은 서울로 통하는 관문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전방에서 쫓겨 철수해오는 장병들을
모두 미아리고개와 길음고개에서 한데 모아 방어선 구축에 들어갔다. 육군본부의 일부 병력도 서울 사수를 위해 미아리로 보내졌다.
28일 새벽 1시30분, 적은 탱크 9대를 앞세워 미아리고개에 나타났다. 후퇴하던 국군은 결사항전을 결의하며 다시 뭉쳤다. 선두로
달려드는 탱크 1대를 부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미아리고개를 넘은 적은 동쪽으로는 신설동 방향으로 돌아 동대문으로 향했고, 남쪽으로 내려온
적은 창경궁 앞에 설치해 놓은 바리케이드 앞에서 일전을 치르고 시내로 들어왔다.
오전 11시30분, 105탱크여단 소속의 탱크
1대가 종로까지 들어왔다. 곧이어 인민군 제3, 제4사단 병력이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에 들어온 탱크는 돈암동에 2대, 창경궁에 1대, 동대문에
1대, 중앙청 1대, 종로 네거리에 1대, 필동에 2대 등 총 8대에 불과했다. 탱크는 이후 계속 진입해 들어왔다. 서울 시민들은 놀라고
두렵기도 했지만, 탱크는 구경거리가 됐다. 애들은 물론 어른까지도 탱크 주변에 몰려들었다. 서울이 점령되는 순간이었다.
점령군은
곧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가 죄수들을 석방했다. 죄수들은 ‘인민군 입성 만세’ 플래카드를 들고 환영했다. 적십자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는 입원한
국군 부상자들을 전부 사살했고, 일부 환자는 석탄가루 더미 속에 산 채로 매장해 창경궁 주변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새벽 1시30분 미아리고개 탱크 출현, 2시15분 한강대교
폭파
6월 28일 새벽에 적 탱크가 미아리고개에 나타나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아침 11시에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너무
늦었다. 회의는 소집했지만 결사항전의 결의도 없이 끝났다. 마음이 다급해진 채 총장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대교를 폭파하라고 명하고 자신은
시흥에 있는 후방 집결지로 떠났다. 한강대교는 장경근 국방부 차관, 미 군사고문단, 이형근 2사단장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8일 새벽
2시15분에 폭파됐다. 너무 서두른 탓에 아직 서울 부근에서 철수 중이던 6개 사단의 병력이 큰 피해를 보았다.
27일 오후부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서울을 빠져나가기 시작한 시민들은 밤이 되면서 수만 명으로 늘었다. 다리가 폭파되기 직전에는 4000여 명이 다리 위에
있었는데 그때 폭파한 것이다. 따라서 희생이 컸다. 한강대교를 꽉 메운 피난민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폭파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폭음과 함께
이슬처럼 사라졌다. TNT 3600파운드가 폭발하는 순간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강 밑으로 떨어졌다. 주변은 시체와 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다.
한강이 폭파된 후 1사단 장병들은 행주 나루를 건너 시흥으로 집결했고, 일부
시민과 군인들은 한데 섞여 아직 부서지지 않은 철교(중앙, 단선)의 침목을 하나하나 밟으며 강을 건넜다. 김창룡 방첩대장은 서울을 떠나기 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돼 있던 남로당의 거물 간첩 ‘이주하’와 ‘김삼룡’을 처형했다. 만일 이들을 처형하지 않고 떠났다면 남로당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을 것이고 역사는 남로당의 완전한 승리로 기록했을 것이다.
육군본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은 KBS 국영방송을 폐쇄하기
위해 방송국에 들어갔다가 미리 방송국을 점령한 남로당원들에게 피살됐다. 고위 간부로서는 두 번째 희생자다. 장교 중에는 서울을 빼앗긴 울분을
참지 못해 권총으로 자결하는 이도 생겼다. 김일성은 서울에 들어가면 4여인(임영신·김활란·박순천·모윤숙)을 꼭 잡아오라고 명했는데 4분 다
피신해 무사했다. 모윤숙은 KBS가 폐쇄되기 전 육본 보도과장 김현수와 함께 방송국에 들어가 국군이 지금 잘 싸우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마지막
방송을 내보낼 때, ‘국군들은 잘 싸운다’라는 시를 낭송했다. KBS 라디오 방송의 ‘안심하라’는 보도를 믿고 집에 있다가 인민군에게 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정치인·법조인·언론인·교수·목사 등 사회지도급 저명 인사들이 많았다.
화염에 휩싸인 한강철교. |
일부 적색분자들의 인민군 환영 ‘붉은 깃발’ 등장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흑석동을 비롯한 몇
군데에서는 붉은 깃발을 흔들며 인민군을 환영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다음날부터 서울 동네에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여맹’이 조직됐으며 어디서
왔는지 붉은 완장을 낀 사람들이 제 세상 만난 듯 기세등등했다.
하루 사이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어제만 해도 고개도 못 들고
다니던 사람들이 인민군을 앞세워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큰소리쳤고 ‘동무’니, ‘반동’이니 하는 용어를 써가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들에게
끌려가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인민재판은 그들의 인간 사냥터였다. 그러나 박헌영의 예언과는 달리 서울에서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남로당을 재건하고 김삼룡이 ‘제주 4·3사건’을 일으켰지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좌익세력 일제검거에 나섰고, 공비토벌·숙군작업·보도연맹척결로 좌익이 와해돼 힘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점령군 앞에서
의연했던 서울시민의 자세다. 비교적 차분하고 조용히 적군을 맞이했으며, 인민재판 앞에서도 변명하거나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순한 양 떼처럼
순응했다. 현실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아니면 일제 식민지 생활을 거치면서 훈련된 민족성 때문일까? 억울함도 호소하지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졌다. 앞에서 죽이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도 아닌, 한동네에 살던 토착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희생자의 가족, 친지,
이웃 사람들이 ‘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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