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모진 고문에도 군사기밀 지킨 ‘군인의 표상’

구름위 2017. 1. 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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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고문에도 군사기밀 지킨 ‘군인의 표상’

<11>포로가 된 사단장, 딘 소장


딘 소장, 전북 진안서 체포

3년1개월간 생사 넘는 생지옥 경험

1953년 9월 4일 포로교환 때에 석방

 

포로는 불명예 꼬리표 붙지만

조국 배반하지 않고 본분 잘 지켜

석방 후 미국정부서 ‘훈장’ 수여

 

기사사진과 설명

1950년 7월 미 육군24사단 소속 포병들이 금강방어선에서 곡사포 사격을 준비하고 있다.



 

기사사진과 설명
딘 소장

딘 소장




로켓포 메고 인민군과 대적 전세 바꾸지는 못해

6·25전쟁에 최초로 참여한 미 제24사단 스미스대대는 초전에 실패했지만, 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이 이끄는 본대(34연대, 19연대, 21연대)가 7월 5일까지 부산에 상륙을 완료하고 전선에 투입됨으로써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7월 8일 미 34연대가 방어하던 천안이 무너지고, 7월 12일에는 21연대가 조치원에서 철수를 강요당해 금강으로 후퇴해야 했다. 서울을 점령하고 사기충천해 몰려드는 적 4개 사단을 미군 1개 사단으로는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딘 소장은 대전(大田) 방어를 결심하고 7월 12일에는 금강방어선, 14일에는 공주-대평리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적의 주공인 인민군 제3사단과 조공인 인민군 제4사단은 7월 17∼18일 이틀간 맹공을 퍼부어 공주와 대평리 사이에서 금강을 건너고 20일 새벽 대전을 점령했다.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시가전을 펴면서 사단장 자신이 3.5인치 로켓포를 어깨에 메고 적 탱크를 명중시키기도 했지만 전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19연대는 와해되고 사단 병력의 40%가 희생됐으며 장비도 거의 손실됐다. 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함에도 적을 가볍게 여기고 ‘준비 없이 임한 전투’의 결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년 동안 전쟁 없이 일본 점령군으로서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갑자기 한국 전선에 투입된 대가는 이처럼 참혹했다. 2차 대전을 경험한 선임들은 대부분 전역하고 전투 경험이 없는 후임자들로 구성된 부대, ‘전투 의지가 약하고 정신무장도 안 된 나약한 부대’가 겪는 현상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역사의 값진 교훈이다.

대전 방어에 실패한 미 제24사단은 워커 미8군사령관으로부터 영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대는 이미 전투력이 상실되고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사단장은 7월 20일 15시에 철수명령을 내리고, 마지막 소대가 철수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부관 클라크 중위와 함께 지프를 타고 불타는 대전을 빠져나가기 위해 과속으로 달리다가 그만 옥천-영동으로 가는 길목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36일 동안 산속 헤매며 ‘초인적인 삶’ 살아

부관이 갈림길을 지나친 것을 알고 산내면 부근에서 차를 돌리려고 할 때, 적의 매복공격을 받았다. 급하게 산으로 피신했다가 야간에 길을 잃고 말았다. 딘 소장은 어둠 속에서 산을 헤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홀로 고립됐다. 그때부터 36일 동안 낮에는 숨고 밤에는 별을 보며 남쪽을 향해 걸었다. 나무 열매와 풀뿌리 등으로 생존하는 초인적인 삶을 살면서 간신히 목숨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선량한 양민 박종구(朴鍾九·당시 38세)를 만나 잠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전북 진안에서 “대구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겠다”는 말을 믿고 민가에 숨어 있다가 8월 25일 한두규(당시 40세)의 밀고로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 딘 소장은 그로부터 3년1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생지옥을 경험했고 1953년 9월 4일 포로교환 때에 판문점을 통해 석방됐다.

포로가 된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매우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석방 후 미국 국민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다. 죽음 앞에서도 조국을 배반하지 않고 군인의 명예와 본분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사에서 작전 도중 포로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제네바협정에서는 비록 포로라고 해도 최소한의 인격적 대우는 해주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특히 공산국가의 포로가 되면 가장 악랄한 취급을 받는다. 인격이나 인권은 찾아볼 수 없고 군사기밀을 얻어 내기 위한 고문은 너무나 참혹해 포로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 모멸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모진 고문과 박해에도 군인본분 잘 지킨 영웅

그런 상태에서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포로가 된 딘 소장은 적군의 모진 고문과 박해로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장군으로서 체통을 지키며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군사기밀을 발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버텼다. 그의 몸은 뼈만 남아 해골과도 같았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조국을 생각했고 장군의 자존심을 지키며 힘든 과정을 잘 견뎠다.

만약 딘 소장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각종 군사기밀을 실토했다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실패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한국은 그때 패망해 공산국가로 전락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포로가 됐지만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군사기밀을 지킨 딘 소장을 존경하며 모든 ‘군인의 표상’으로 삼고 싶다. 미국 정부는 그를 높이 평가해 훈장을 수여하고 군 생활도 계속할 수 있게 했다.

한편 미 24사단은 대전방어전투에서 사단장을 잃었지만, 그들의 지연전 덕분에 7월 15일 미 증원군 25사단이 부산에 상륙하고, 7월 18일 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점에서 그들의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