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새벽 4시 옹진반도 ‘미끼 공격’ 안 통하자… 5시 남침

구름위 2017. 1. 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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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옹진반도 ‘미끼 공격’ 안 통하자… 5시 남침

<3> 남침시간의 진실-새벽 4시인가 5시인가?

‘남침유도설’ 조작 위해 집중 포사격

17연대가 반격 않자, 한시간 뒤 남침

포로 수첩·라디오 뉴스 보도 등

새벽 5시 공격 근거 곳곳서 발견돼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했다. 서쪽 옹진반도부터 공격을 시작해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으로 확대됐다. 38선 전역에 걸쳐 30분 동안 먼저 포사격을 한 다음 공격해 들어왔다. 남침 루트는 옹진반도 외에 3방향이었다. 제1 접근로는 서부전선 개성∼문산∼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코스였다. 제2 접근로는 중부전선 철원∼포천을 거쳐 의정부로 들어오는 방향이었고, 제3 접근로는 춘천∼가평을 거쳐 경기도 이천으로 돌아 서울로 들어오는 코스였다.

옹진반도는 국군 제17독립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가 방어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평소에도 가끔 교전이 있었던 곳이다. 24일 밤에도 2∼3시쯤 작은 포격이 있었는데 새벽 4시가 되자 북은 30여 분 동안 엄청난 양의 화력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과도 같았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조용했다. 그러다가 5시가 되니 38선 전역에서 공격준비사격이 있고 30분쯤 지나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으로 쳐내려왔다.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옹진반도는 왜 다른 지역보다 한 시간 먼저 공격이 이뤄졌을까? 우리는 이 점(남침시각)에 대해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남침유도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군의 정설은 ‘북한의 남침시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04:00’로 돼 있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 오랜 세월 자료를 추적해 왔다. 그러나 새벽 04:00란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군의 공격시간은 작전명령에 따라 이뤄진다. 그러나 인민군의 전투명령 1호(각 사단 하달)에는 어디에도 공격시간이 명시된 바 없다. 다만 ①공격준비 완료는 6월 23일 24:00까지 ②포병 준비사격은 30분간 ③공격명령은 전화, 무선, 신호탄 등으로 한다 ④인민해방전쟁 암호는 ‘폭풍’이다 ⑤공병은 공격에 필요한 지뢰 및 장애물 제거를 25일 04:00까지 완료한다 등으로 돼 있을 뿐이다.



공격준비 완료- 4시, 공격 개시- 5시

그러나 공격 개시 시간이 ‘6월 25일 5시’라는 근거는 여러 군데서 발견됐다. 포로를 통해 획득한 기밀문서들 속에서 공격시간은 ‘5시’라고 기록한 메모 수첩이 여럿 발견된 것이다. 연대장으로부터 구두 명령을 받고 받아쓴 대대장·중대장의 수첩이었다. 적 2사단의 경우 공격 개시 시간을 05:00로 기록했고, 적 6사단의 경우 05:30으로 기록했다. 또 전투유공자 표창을 올리는 문서에도 ‘5시’로 돼 있다. 적 2사단 자주포대대 3중대 1소대장 박영희의 공적서는 ‘1950년 6월 25일 5시부터 상부의 명령에 따라 38도선 전투에서 성과는…(이하 생략)’으로 시작된다.

또한 인민군 병사 중에 시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수첩에서 여러 편의 ‘전쟁 시’가 발견됐는데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는 아침 하늘…(이하 생략)’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5시30분 이후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있다. 이날 KBS 라디오는 북한의 남침 소식을 알리는 첫 방송(7시 뉴스)에서 ‘6월 25일 새벽 5시’라고 발표했고, 12시 뉴스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아침 5시부터 8시 사이에 남침해 왔다’고 보도했다. 이는 육군본부 상황실의 통보를 받고 국방부 정훈국장(이선근 대령)이 직접 보도 문안을 작성한 뉴스였다. 이보다 더 정확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남침시각은 4시가 아니라 5시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우리 군은 지금까지 새벽 4시로 일관해 왔다. 아마 옹진반도의 포격 시간을 근거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옹진은 다른 지역보다 한 시간 먼저 공격받았을 뿐이다.

옹진에서 한 시간 먼저 공격이 시작된 것은 ‘남침유도설’과 관련이 있다. 즉 옹진에서 17연대가 해주로 북침하도록 미끼를 던지기 위해 한 시간 전에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7연대가 공격해오면 그를 빌미로 38선 전역에서 총반격을 개시한다는 시나리오가 설정돼 있었다. 그러나 17연대는 초전에 와해돼 반격은커녕 사상자 추스르기에도 급급했다. 결국 2719명 중 750명의 사상자를 내고 25일 저녁 육군본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았다.17연대는 해군 수송선 LST를 타고 26일 아침 인천으로 철수했다. 17연대가 해주를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북괴의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불발됐다. 그러나 김일성은 25일 새벽 3시에 ‘비상내각회의’를 소집하고 ‘남쪽 이승만 군대가 북침해 와서 인민 군대에 반격 명령을 내렸으니 동의해 달라’고 언급했다.

6·25전쟁은 분명히 북에서 남으로 쳐내려온 남침전쟁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그동안 남쪽에서 ‘북침’했다고 계속 허위 선전을 해왔고, 해외에서는 남한이 먼저 공격을 가해와 북에서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남침유도설’을 주장해왔다. 이 같은 주장을 가장 잘 받아들인 사람이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다. 그는 1981년 북침설로 정리해 ‘한국전쟁의 기원’을 발간했다. 이 책은 한국 좌파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됐으며 젊은이들이 세뇌되기 시작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