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북 최강 4사단 18연대 흥망사. -3

구름위 2014. 2. 1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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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최강 4사단 18연대 흥망사.

 

-제 3 편-
그러나 정면에서 이들을 공격해온 부대는 아시아 최강의 보병
연대인 북의 18연대였다.


미군의 오합지졸 부대는 압도적인 대병력의 북한 18연대가
가하는 다부진 공격에 무너져서 사방으로 무질서하게 도주하였다.

 

대장 스미스 중령과 장교들도 후방으로 도망쳐서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연약한 미군 병사들은 표독스럽게 공격해오는
18연대에게 손을 들고 항복했다.

 

오산 대패후 조치원에서 지연전중인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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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미령에 낮은 고개 길 위에 요란하게 퍼졌던 총성이 가시고 난

오후 2시경 전투는 끝났다.500여명의 스미스 기동부대에
18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18연대는 수 십 명의 미군 포로들을
획득하고 많은 무기도 빼았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들 18연대를 기쁘게 했던 것은
노획한 수 십 대의 트럭이었다.스미스 기동부대에 포병 일개
대대가 동행했기 때문에 포차가 많아서 였을 것이다.
18연대의 4사단은 전 사단에서 운전할줄 아는 사병들은 모아서
이 손에 굴러 들어온 횡재를 남진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18연대의 오산 전투는 북한군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신생국 북한의 군대가 세계 최강 대군 미군을 격파했으니
세계가 놀라고 선전에 놀아난 북한 주민들의 사기가 하늘같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18연대가 후방에 넘겨준 미군 포로들은 남루한 차림에
서울 시가를 행진하는 수모를 당하며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었다.

미군 포로들의 굴욕적인 시가 행진.맨 앞의 포로들이 든
프랑카드에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과 북한 인민의 우정 만세!"
라고 조롱하듯 써있다.

 

맨 앞에 선 사람은 대전 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 24사 34연대 3대대장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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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위의 포로 학대 이야기를 하자 김 선생은 중국 해방군이라면
포로를 그런 식으로 학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인민 해방군에서 복무시 포로는 절대 우대하라는 교육을
귀 따갑게 받았고 18연대는 한국 전선에서 싸울 때도 이를 철저히
준수했다는 것이다.

 

실례로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 포로를 다수 잡은 일이 있었다.
보니 10대의 어린 학생들로 대구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군에 왔는데 3주 밖에 훈련을 못받고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18연대는 이들을 모두 돌려 보내면서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더구나 18연대는 양민들을 학살하거나 약탈하는 등의 양심에
어긋나는 도덕적 범법행위에 연루된 일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김 선생은 강력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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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연대의 연대장 장 교덕은 이 공로로 영웅 칭호 수여와 함께
타사단 사단장으로 영전되어 가고 18연대 3대대장 이주설이
18연대장 대리가 되었다.

 
그는 거의 무학자로서 해방 후 조직된 화룡 유격대장
이었다. 무식했지만 용맹했다.

 
그러나 오산 전투에서의 승리 후 미 공군의 폭격 세례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 날부터 김 선생은 매일 폭격을 감수해야했다.
극심한 폭격으로 주간 행군은 피해가 속출하자
북한군은 주간이 아니라 야간에만 행군하기로 했다.

 
그래서 평택에서 주간에 피신해 있다가 시계가 안좋은
흐린 하늘에 황혼이 다가오자 북한군은 안심하고 선두의 105 여단의
[이때는 사단으로 승격되어 105사단이라 불렸다.]전차와 차량들이 모두 은신처에서 기어 나와

도로에 올라가서 일부는 출발 명령을 대기하고 일부는 출발하고 있었다.

 
이 행군 대기 중의 105여단을 미 공군의 F80전투기가 발견하였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미군 전투기 떼가 연속적으로 쇄도하였다.

 
승승장구하던 105여단은 30여대의 탱크를 포함해서
차량 대부분과 장비가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새 사단장으로 영전되어 가던 18연대 연대장 장 교덕은 평택
부근에서 공습을 받아 죽었다고 하는데 이 대공습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습으로 현대적인 항공 전력의 맛을 본 북한군은 공습의 목표가
되는 포병 부대나 차량화 부대는 철저히 야간 이동의 원칙을 세웠고
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엄수했다.

 

공습이 극심해지자 18연대의 연대장 대리 제 3대대장 이 주설도
폭탄을 맞고 죽고 말았다.

후임으로 정치부 연대장이던 송 덕만이 새 연대장이
되었고 그는 18연대를 인천 상륙 뒤 패주할 때까지 지휘했다.

이때 그의 나이 단 28살로서 한국군 17연대의 백 인엽 대령과
비슷한 연령이었다.

 
미군 지상군 참전이라는 불안한 상황과 극심해지는
공습 속에서도 남진은 계속되었다.

 
미군과 국군은 천안과 금강에서 방어를 시도해보다고 안되자
대전 사수를 결정하고 대전 방어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한반도에는 부산항을 통하여 밀물같이 병력과 물품이 쏟아져
들어올 때였지만 한반도에 급파된 미 24사단은 역시 훈련이
잘 안된 일본 주둔 사단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3일전 18연대는 대전의 동쪽으로 은밀하게
기동하여 대전과 영동-금산을 차단하였다.


역사에는 18연대 병력 전부가 우회 차단에 동원 된것으로
기록되었지만 김 선생은 이 역사적인 우회 차단은 18연대의
일개 대대만이 실행했고 나머지 두 대대는 전면에서
대치 했다고 했다.

 

7월 18일 전투가 개시되었다.
북한군은 105 여단은 전차를 앞세워서 대전 관통 작전을
시도하였다.

미군들은 동요하자 사단장 딘 소장이 새로 지급된
3.5인치 로케트 포를 들고 직접 전차사냥까지 해가며 독려했다.

 
그러나 침투했던 전차들이 미군의 3.5인치 로케트포와
F51 무스탕에게 대파되자 미군의 대전 방어가 성공하는듯했다.

 
그러나 딘 소장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정보가 보고 되었다.
대전에서 대구 쪽으로 내려가는 경부도로와 철도가 대전과
영동사이에서 차단당했다는 것이다.

 

후퇴로가 차단된 미 24사는 공포에 빠졌다.
더구나 훈련되지 않은 부대 간의 통신마비로 부대 지휘조차
엉망이 되었다,

 

7월 20일 오후 미 24사단은 대전을 버리고 급히 철수를 시도했으나
부대가 와해되고 사단장 딘 소장은 홀로 낙오되어 36일간
산야를 헤매다가 전북 무주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24사단은 불과 1개 대대의 18연대 병력이 감행한 우회 차단에
붕괴 되었다고 하겠다. 1951년 한국군 3군단이 현리에서 단지
수백명의 중공군 병력에 의해서 후방 오마치 고개가 차단되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붕괴하여 버렸다.
현리 전투후 미 8군 사령관 밴프리트가 무척 화를 내면서 한국군을
비하했는데 미군도 이미 비슷한 치욕을 당한 것이다.]

 

포로가 되었던 24사단장 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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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전 전투에서 미군은 1,500명 이상의 전사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김 선생은 직접 부닥쳐보니 미군들이 생각보다 허약했고
야간만 되면 전혀 전투을 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대전 승리의 영광은 북18연대에게 주어졌다.

18연대는 의정부 돌파, 중앙청 점령,한강 도강과
최초 미군 격멸에 이어 대전의 미 사단 격멸로
18연대는 북한 방송과 신문에 연달아 등장하며
북한 최강 연대라는 명성을 공고히 하였다.

 

 

대전을 떠나 경부 축선을 따라 미군의 폭격에 시달리며
남하하던 18연대의 소부대가 장거리 기동 침투로 추풍령
아래에 설치된 미군 보급기지를 습격해서 다시 한번 성가를 올렸다.

여기까지가 18연대가 한국전쟁이라는 무대를 히어로로서
화려하게 장식하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낙동강으로 접근해 갈수록 국군과 한미군의
저항이 강해지고 폭격은 매일 계속되어 18연대의 고참병
사상자들이 매일 발생했다.

 

 낙동강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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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 자신도 여러 번 부상당했었다.
그는 전쟁중 수류탄 부상 한번, 총상 세번을
입었다,


비록 경미해서 치료 후 전투에 계속 참여했지만
18 연대원들은 승리와 남조선 해방에 대하여 점점
불안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드디어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도달하였다.
앞을 가로 막은 강도 강이지만 한반도 동남 쪽 한구석에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한 한미군은 어느 한 곳도 빈 곳을 허용하지 않았다.
18연대는 비로소 중국이나 한국에서 만나보지 못한 적의 철옹성이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실감해야했다.

 

김 선생의 회고는 대전을 넘은 시각부터 조금 흐려졌다.

전투를 하도 많이 해서 그런가도 했지만 미군의
공습과 포격의 격렬함, 그리고 연속으로 죽어 나가는
전우들을 보면서 느낀 인간 내면의 심리적 거부 반응이
이 순간의 기억을 흐리게 하는 것 같다.

지나간 곳의 명칭과 배치된 낙동강 전선의 지역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난공불락의 낙동강 전선에 배치된 18연대의 강 건너 적은
미군 흑인 연대였다.

지금은 미국군에서  피부색에 따라 부대를 편성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한국 전쟁 때는 흑인들만 따로 모아서 편성한
미보병 24사단 25연대가 있었다.

 
백 선엽 장군의 수기를 보면 후퇴 길에 이 흑인 연대를
만났던 기록이 있다.

연대원은 전원 흑인이지만 연대장은 백인으로서 공교롭게도
화이트[White]라는 성을 가진 50대의 연대장이었다.

 

백[白]사단장과 화이트[白] 연대장은 서로 종씨라고 반가워했지만
백 사단장은 연로한 화이트 연대장이 피로해 하는 것을 보고 일말의 불안감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던 것이 생각난다.

 

백 사단장은 정확히 보았었다.
흑인 연대는 미군 최약체의 부대로 평가 받았다.
너무 문제가 많이 발생하자 미군은 흑인 부대를 해체하고
이들과 백인들을 섞은 부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낙동강을 앞에 두고 방어하는 지리적 이점에
엄청난 화력을 가진 이 약체 부대는 아무리 막강
18연대라 해도 도저히 격파할 수가 없었다.

 

보급도 나빴고 사상자가 속출해서 중국서 같이 압록강을
넘어온 전우들은 태반이 죽거나 후송되었다.
빈자리는 북한에서 징집된 신병 들이나 남한의
의용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된 병사들이 충당했으니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의

전투력도 전투 초기와 같을 수가 없었다.

 

전방의 적만 적이 아니었다.

전장의 상공에 항상 미 전투기들이 끊임없이
대기 비행을 하고 있다가 목표를 발견하면 번개같이
내리 박으며 기총 소사나 네이팜 공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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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김 선생에게서 궁금하던 한 정보를 또 얻었다.
1950년 8월 미 공군은 일본에 주둔하던 4발 중폭격기 B 29를
100기를 동원해서 [1기는 현해탄에서 엔진고장으로 회항하고
99기가 감행]낙동강 연안에 포진한 북한군에게
카페트 바밍[CARPET BOMBING- 융단 폭격]을 가했다.

 

미공군은 폭격 후  항공 정찰 사진을 분석해보고 별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 전쟁중 더 이상의 융단 폭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폭격 지역을 방문해서 직접 피폭 결과를 목격했던
백 선엽 장군은 북한군이 이 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고
증언했었다.

 

김 선생은 북한군들이 대폭격이라고 부르던 엄청난 폭격이 있었고
이 폭격으로 북한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나에게 술회하였다.

 

중공군 3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북부 한국에 잠복하고 있던
사실도 발견하지 못했던 미 공군 항공 정찰의 한심한 신뢰도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한국전 때의 B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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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 연대의 소대장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왔던 김 선생은 전황과
부대의 미래에 대해서 공포심과 절망감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 암울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김일성은 빨리 유엔군을
축출하고 부산을 점령하라고 일선 부대를 무섭게 다구쳤다.

[1950년 8월 1일에는 하루에 20킬로씩 진격하여 8.15전 부산을
 점령하라는 한심한 지시도 했었다.]

정치 장교들은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후퇴하면
계급의 고하를 불문하고 즉결처분하였다.

 

밤이 되면 무턱 된 공격 명령을 받고 적진지로 돌격했다가
숱한 사상자만 내고 후퇴했었다.

김 선생은 이런 전투를 몇 번이나 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매일매일을 보내던 18연대는
더 다급해진 팔공산 전선으로 이동해서 전투를 계속했다.

 
그런 지옥도 속에서 김 선생도 8월 중순 복부에 총탄을 맞는
중상을 입고 안동에 있던 북한군 야전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외과 수술을 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김 선생은 이 병원에서
한달 정도를 정양하였다.
부족한 약품 때문에 쉽게 완치가 되지 않았다.

 

9월이 되었다.
전선에서 전우들이 더 힘들게 전투를 하며 죽어가는 소문을
들어가면서 병원 생활을 하던 중 미군들의 인천 상륙이 있었다.

 

그가 퇴원을 하기도 전에 북한군 4사단은 총퇴각을 하기 시작했다.
야전 병원의 환자들도 어쩔 수 없이 천리 후퇴 길에 올랐다.
그래도 그가 겨우 걸을 만큼 회복된 시점에서 후퇴 명령이
내린 것이 다행이었다.

 

김 선생의 야전 병원도 이동해서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 길에 올랐다.

그가 어디서 태백산맥으로 접어 들어갔는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인접에서 싸웠던 6사단은 경상북도를 벗어나서
제천에서 태백산맥에 들어갔었다.

 

한국군은 이들 낙동강 패잔병들이 산을 타고 북으로
도주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북진에 정신이 팔린
워커의 명령으로 이들을 차단하는 작전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낙동강 전선의 수만 병력이 북으로 도주했다.
북상길이 차단되어 태백산맥에 붙지 못했던 북한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공비가 되었다가 모두 섬멸되었다.

 

북한 야전 병원의 환자들은 농촌에서 소가 끄는 수레을
타고 북상했다.

이들은 한달 정도를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북한으로
들어가 평안북도 북부의 강계 근처까지 철수해서
재집결을 했다.

 

김 선생은 중상 환자로 분류되어서 중국으로 보내져 길림의
중국 해방군 야전 병원에 입원해서 다음해 초까지
치료를 받고 완치가 되었다.

그가 다시 북한군 4사단을 찾아가니 그는 이미 상이 제대가
되어있었다.

 

내심 홀가분한 마음도 중국에 돌아온 김 선생은 신설된
연변대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중국 정부의 공무원으로
일생을 시작하였다.

 

김 선생이 길림의 병원에 있을 때 18연대의 부대원들을
만포진에 다시 모아서 옛 부대를 재건하려한다는 발을 들었지만
김 선생은 물론 다시 참여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전쟁 초기 자타가 공인하는 북한 최강 연대였고
개전 초기 그 성가를 실전에서 증명하며 기세를 올리던
18연대는 미군의 참전이 본격화되고 한국군이 재정비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최강 연대로서의 타이틀을 내려 놓아야했다.

각개 병사의 용맹함은 무시무시한 근대전의
화력 앞에서는 무력했다.

 

더구나 중국 전선에서 실전을 겪은 노병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고 부대를 떠나고 신병으로 대체되어 더 이상 최강이니 뭐니
하는 타이틀을 붙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낙동강에서 완전 궤멸 되다시피 했던 4사단은 다시 재조직되고
대전 전선과 낙동강에서 18연대를 지휘했던 연대장 송 덕만이
사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18연대는 더 이상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대동강 하류
남포에 주둔하면서 미 해병대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였다.

이 기간동안 여자들과 추문을 일으킨 송덕만은 숙청되어
사라져가는 18연대의 명성에 마지막으로 먹칠을 했다.

[송덕만은 앞에서 말한 중국 해방군 47사 정치위원의 당부를
 무시하다가 인생의 막을 내린듯하다.]
그 뒤 그 사람의 소문을 들은 사람이 없다.


1950년 봄 평북 정주에서 북한군에 편입되었던 4,000명의
조선족 병사로서 한국 전쟁의 최전선에 내몰리며 절반이
전사한 것으로 추측되며 나머지도 북한군 생활을 하다가
북한 땅에 할 수없이 잔류하고 중국의 원래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이는 극소수였다,

 

조선족 부대에 더 가혹했던 것은 김일성의 숙청이었다.
그는 입북때 중대장급 이상의 조선족 간부는 모조리 숙청해버리고
북한군을 자신의 직계 빨치산 출신으로 완전 채워넣어 정권유지를
위한 사병으로 만들어 버렸다.

 

조선족 절믄이들은 이국 중국 땅의 해방전쟁에 동원되어 애꿎은
목숨을 잃었고 김일성의 남침에 내몰려 포탄 밥들이 되었다.


이미 8순이 넘어 연금으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는 김 선생은
지금도 가끔 낙동강 전선에서 밤낮 당했던 끔찍한 폭격과
악몽을 꾼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민감한 질문을 김선생에게 던졌다.
북한도 수십번 드나 들었고 북한 정권이나 북한 군부에 아는 사람도
많은 그 분은 나의 질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북한은 지금도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선생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내가 다 이야기 한대로입니다.."

나는 결론 삼아 물었다.
" 북한이 말하는 조국 해방 전쟁[6.25 사변]을
  어떻게 평가합니다."

그 분은 역시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 일어나서는 안 될 전쟁이었습니다. 잘못 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