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북 최강 4사단 18연대 흥망사-1

구름위 2014. 2. 1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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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최강 4사단 18연대 흥망사

 

- 제 1 편-

 

올림픽이 끝나고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오기 시작 할 무렵, 
한 동포를 알게 되었다.

무슨 기업체에서 연수를 받기 위해서 몇 달간
예정으로 한국에 왔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동포들이 드물었기에 나와 여러 번 만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귀국 무렵 갑자기 중국에서 자기의 부친이 온다는
연락이 왔다. 중국 정부의 고위 공무원인데 정년 퇴직 전
한국에 시찰 오는 케이스가 있어서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알고 지내던 터였는데 아버지가 오신다는데
저녁을 한번 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한국에 온 그 분과 만나보니 예리한 눈매에
아주 똑똑해 보이는 인상을 주는 분이었다.

저녁과 함께 반주도 몇 잔 한 뒤 이 분이 한마디 했다.

“ 서울이 매우 발전했습니다.”
나는 물었다.
“ 소시 적에 서울에 오신 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는 고개를 세게 모로 저었다.
“ 아니오! 한번도 온 일이 없지요.”


그런데 다시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 분 말씀중에 공격 대기 지점이니 전호[戰壕-참호]니
하는, 군복무자가 아니면 모르는 단어가 나오고 노량진이
어느 방향이냐는 말도 나왔다.

나는 의심이 갔다.[한국전 참전 북한병 출신인가?}
“혹시 한국전쟁 때 군에 다녀 오셨습니까?"
그 분은 다시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부인했다.

“ 천만에! 난 그 때 공부 했드랬소.”

 

그리고 헤어지고 그 분은 중국으로 가고 아들도 얼마후
돌아갔다.
몇 년 뒤 중국을 방문했더니 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문안을 물었다.

안녕하시다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저하며 이야기 했다.

“ 실은 아버님은 한국 전쟁 때 북한군 소대장으로
   참전하셨습니다. 한국에 갔을 때부인했던 것은
   한국 국민들에게 미안해서 그러셨답니다.
   이 점 사과 하시더군요.“


뒤에 중국을 자주 왕래하며 은퇴 생활을 즐기던
그 분을 찾아 뵙고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한군의 선봉으로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내려갔던
북한 최강 연대 18연대의 소대장 출신으로 부상을 입고
구사일생 살아 돌아온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래에 그 분, 김 경석 선생의 한국 전쟁 참전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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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38선에서 남한을 향하여 도발의 포문을 연 북한군의
47%가 실전 경험 풍부한 중국 동포들로 구성된 정예부대였다


중국 동포 부대는 중국 대륙의 국공내전[國共 內戰]에서 동북
만주 지방의 전투에서 먼 남쪽 해남도까지 남하하며 중국
대륙에서 발발했던 주요 전투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겪은
정예 부대였다.

 

국공내전에서 장 개석의 군대는 치룬 주요 전투마다
대패 하고 대만으로 쫓겨 간 1949년. 중국 대륙은 모 택동에
의해서 천하 통일이 되었다.

이제 사냥은 끝났고 할일 없는 사냥개가 된 조선족 군대는
모 택동이 내심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부대가 되었다.

 

반면 대륙의 작은 반도의 북쪽을 차지했던 김일성은 모택동의
성공을 보고 안달을 하며 한 반도에서 이승만 '반동 집단'을
쓸어버리고 공산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야심을 품는다.

1946년의 살찌기 전 김 일성 -
소련군의 유행 머리를 했다,
북한 용어로 닷푼[5부 가리]머리라 불렀다.

소련군 88여단 대위시절에는 머리를 더 바짝
깎은 모습이었다. [해병대의 돌격형 머리와 비슷했다.]

돼지처럼 살찐 말년의 김일성 모습과 너무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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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민족 상쟁을 재정적으로 도와 줄 스타린이라는
빅 부라더가 있었지만 인민 해방군에서 걸출한 무공으로
중국 민족의 경탄을 자아내던 정예 조선족 부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잠깐 여기서 왜 조선족 부대가 탄생하고 모택동의 공산혁명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우고 또 한반도 전쟁에 내몰려 태반이
죽어갔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1949년 중국 해방군의 북경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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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수탈정책으로 만주까지 흘러 들어가 살길을 찾던
동포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살만할 때 만주국의 실제
통치세력인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가고 만주는 한 동안 힘의
진공지대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패망하자 중국인들은 재빠르게 비적 떼를 조직해서
일본인들을 습격했다.

 

그들은 일본인 개척촌을 습격해서 분탕질을 하기도
하고 피난길에 오른 일본인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털기도 했다.

 
중국 비적들의 만행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이들의 손에 죽은
일본인 부모들이 만주 땅에 남겨놓은 일본인 고아들이
무려 5 만 명이나 되었던 사실로도 증명된다.

 

비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 습격도 끝물이 되고
추수기가 되자 논농사를 짓는 조선인 촌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만행을 잘 보아왔던 조선인들은 촌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무기를 준비하고 자치단을 조직했다. 

농사밖에 모르던 만주의 대부분 조선 젊은이들이 졸지에
역사의 바퀴 틈에서 무수한 소무장 조직원들이 된 것이다.

 

일본이 패망하자 장 개석은 미군의 수송기까지 동원하여 만주의
주요 도시에 군대를 진주시켜 일본군과 만주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만주 장악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장 개석의 국부군이 선수를 친 덕택에 만주가
국부군이 장악하는 것이 되나 하였다.

 

그러나 모 택동도 이 만주가 갖는 전략적 가치를 주목하고 있었다.

우방 공산국 소련과 긴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지원을 받기도
좋았을뿐더러 일본이 15년간 갈고 닦은 경제 개발 덕분에
만주의 공업 생산력은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대륙의
그것보다도 더 높았었다.

 

모 택동은 자신의 근거지 연안을 포기 하더라도 만주만은
먹어치우기로 하였다.

 
그가 파견한 임표는 유격대를 키우며 끈질기게 싸운 끝에
만주에서 국부군을 내몰았다.

왼쪽이 임표. 1946년 하얼빈. 임표는 국방상이 되고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소련으로 도주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함 - 현재는 그를 전략가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가 모택동의 16자 유격전법의 실창안자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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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이 국공내전에서 꼽는 3대 전역의 하나이고

국부군의 연속된 와해를 가져오게 한 최초의
켐패인인 요심 전역[遼瀋 戰役]이다.

 

모 택동 군이 만주를 점령함에 동포 젊은이들의 공헌이 아주 컸다.

이는 1940년의 일본 만주군 대토벌로 소련으로 도주한
주 보중 부대 이후 공간으로 남아 있는 만주 조직을 재건코자
연안의 모 택동 정권이 비밀리에 파견했던 조선인
이 상조의 노력 [특히 북만주지역-흑룡강성]도 역할을 했다..

 

그는 나중에 휴전회담의 북한 대표로 나와 남한에 얼굴을 알렸고

나중에 주 소 대사를 하면서 김일성에게 숙청당할 기색을
알아채고 소련으로 망명했다.

십 여년 전 그는 전 한국을 방문해서 경남의 고향을
둘러보기도 했다.

휴전회담 공산측 대표단. 오른쪽 두번째가 이 상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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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 택명이라는 가명으로 지하 활동을 하다가
일본 항복 후 표면에 나와 임 표 군을 위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목표는 물론 조선 젊은이들의 포섭이었다.


그에게 조선인 촌락마다 이미 비적 대비를 위해서
조직하여 놓은 무장 자위대는 차려놓은 밥상과 같았다.

그는 이들 젊은이들을 부지런히 모 택동 군에 편입시켜갔다.
더구나 농촌에서 농사일 빼놓고는 별다른 장래 전망이
보이지 않던 조선인 젊은이들을 혁명이니 해방이니
투쟁이니 하는 피를 끓게 하는 공산주의의 단어들이
자석처럼 유인하였다.

 

더해서 만주 농촌의 젊은이들 사이에 모 택동과
공산주의가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중국 대륙에서
전파된 사회 풍조도 있었다.

이 상조의 조직적인 노력의 대상이 아닌 남만주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군에 투신했다.

 

이들 조선 젊은이들이 모 택동 군에 합세한 숫자는
50,000명에서 60,000명으로 추산한다.

일본이 갖은 노력을 하여 키워놓은 만주 국군의 크기가
총 20만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점을 보면 이는
대단한 숫자라고 하겠다.

 

공산군이 된 조선인들은 한족을 능가하는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 하였다. 

전설적인 전공을 세운 강철 8련(聯)의 신화도 있었고 임표의
경위 중대가 모두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중국 해방군의 산동성 공격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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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력이 강했던 여러 이유도 있었지만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한족 농민출신 장병들에 비해서 월등하게 높았던 조선인 청년들의
높은 교육 수준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만주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은 밭농사밖에 모르던 중국인들이
버려둔 강가 습지를 싼값에 구매하거나 세를 얻어서
개간을 했다.

 

조선인들은 개간에 성공하면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개간지 일부를
공동으로 내놓아 여기서 나온 소출로 학교를 열고
교사들을 초빙하여 어린 자식들을 교육하였다.

 

이는 자식 교육이 유전자화 된 한민족만이 할 수 있는 희생적
투자로서 한족이나 다른 민족들은 전혀가지지 않은 장엄한
민족자산이었다.

 

대원들이 기본적으로 초등학교 교육은 다 받았고 어려운
한자 때문에 문맹율 높은 한족에 비하면 우수한 한글을
배운 덕에 모든 교육 훈련과 지휘 통신에서 항상
한 수 위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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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통일이 된 마당에 조선족 부대가 별로 필요도 없게 된
모 택동은 이 조선족 부대를 모두 김일성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결국 이들 중국 인민 해방군의 조선족 부대는 통채로
북한에 들어와 북한 군복으로 갈아 입고 북한군의 부대로 편성된다.

 

식민지 땅 한반도에서 먹고 살기에 너무 고달파서 이국의
만주 땅으로 유랑의 길을 떠났던 유민들의 많은 자제들이
해방의 혼돈시기에 해방이라는 미명으로 남의 나라 내전에
휘말리며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가 다시 흉악한 침략자인
김 일성의 침략 도구로서 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남침에 앞장섰던 북한군 4사단, 5사단, 6사단, 7사단,
그리고 12 사단-7사단이 사단 명칭을 바꾸어 편성한 사단-등이
중국 동포가 근간이 된 전투 부대다.

 

이런 입북[入北]부대 중에서도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부터 자타가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한 부대로 공인 하던  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 단 두 달 전에 중국의 먼
호남성에서 북한 황해도의 송림으로 이동해왔다.

 

원래는 중국 인민 해방군 47군[군단] 3개 사[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동포 군인들을 모두 차출해서 편성해서 북한에 보낸 부대였다.

 
중국 인민 해방군 47군는 만주 돈화에서 창설하여 국공내전에서
문자 그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먼 내지인 중경까지 진격했던
정예 부대였다.


47군은 실전을 가장 많이 겪은 풍부한 전투 경력의 군[군단]이기도 하였고
조선족들이 제일 많았던 군단이기도 했다.
이 47군의 젊은 동포들은 전투 때마다 같은 부대 한족들이
입을 벌리게 하는 용감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한마디로 47군이 그렇게 정예 군단으로 명성을 떨치게 하는
중심에 많은 조선족 젊은 전사들의 맹활약이있었던 것이었다.

말한바와같이 47군은 1947년 조선족이 많이 살던 만주 돈화에서 창설 되었다.
다수의 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이 참군(參軍)하였다.

 

북한행 동원령이 내렸을 때 47군은 호남성 서부 산악지대에서
비적 토벌 작전을 담당하고 있었다.[여기서 말하는 비적이란
국민당 정부의 낙오병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지역이 넓고 교통이 불편하여 명령 전달에만
많은 시간이 걸렸다.

 

47군 소속의 전 조선족 군인들이 당시 군단 본부가 있던 대용에
집결했던 때는 남부 호남성에 춘색이 완연했던 3월이었다.


여기서 집결했던 조선족은 47군 139사 800명, 140사 1,800명,
141사 2,800명으로 총 5,400명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조선 독립단이란 부대를 편성하였다.
단장에는140사에서 영장[營長-대대장]을 했던 장 교덕이
임명되었다.

 

이들에게 공식으로 내려진 이동 명령의 이유는
조선으로 가서 전쟁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간 중국혁명을 위해서 전투하느라 수고했으니 고향인
동북 지방에 가서 근무하라는 것이엇다.

 

그리나 간부들은 북한으로의 이동을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47군 정치 위원이 조선 독립단 고급 간부들을
불러서 은밀히 당부했다.

" 너희들이 조선으로 갈지도 모른다.그렇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세가지를 부탁하겠다.
  첫째,해방군이 햇듯 인민들을 소중이 해라.
  둘째,여자를 조심해라, 여자에게 잘못 빠지면 패가망신한다.

  세째.언제나 신중해라. 너희 조선족들은 용감하지만 매사에
       너무 성질이 급하다. "

조선 독립단은 중국인 전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장 교덕의
인솔로 며칠간 천리나 걸어 무한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조선족 병사들은 객차가 아닌 화차들에 올려 탔다.
기차가 쉬며 달리며 하루 동안 가다보니 압록강을 도강하여
북한 땅에 들어선 것을 알게 되었다.

평북 정주에 도착하자 전원 하차 명령이 내렸다.
북한군 장군 김 광협이 참모들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 광협은 중부 전선을 공격했던 북한군 군단장으로
 남침을 지휘했었다.
 그러나 한국군 6사단의 분전으로 남진이 지지부진하자
 김 일성에 의해서 강등 당했었다.국내 전사에 그가 소련군 출신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만주 빨치산 출신으로 최용건의 직계다.]

 

이곳 정주에서 일 주일동안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던 상이병과 고령의 병사들 상당수가
제대해서 중국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남은 병력 중 3,000명으로 북한군 연대가 편성되고 남은 병력
1,000명은 독립대대로 편성되어서 남침의 선봉에 선 105
전차여단의 기계화 연대로 편성되었다.


김 선생은 이 부대가 북한의 남침 때 서울 점령 뒤
시가행진 때 선을 보이던 사이드카 부대였다고 했다.

 [김 선생은 모터 사이클을 꼭 사이드 카라고 불렀다.그 때의 용어였던 듯하다.]

 

이 사이드 카는 전쟁 기념관에도 있는데 소련이
독 소전쟁중 노획한 독일제[BMW]를 카피 생산한 것을
북한군에게 준 것이다.


북 105 전차 여단 기계화 연대. 주축은 조선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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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떠나올 때 개인 화기는 다 반납하고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다시 개인 화기를 지급받았다.
소련제가 아니라 일본제 99식이었다.

 

김 선생의 연대는 삼팔선 돌파후 서울에서 부대 일부가 소련제
아식 보총[모시 나강]을 지급 받았고 대전 전투가 끝나고서야
전부 소련제로 개인 화기와 공용화기 교체를 하였다.
하지만 각개 전투의 절대 위력 무기인 따발총만은
군관들에게 미리부터 지급되었다.

 

편성된 부대는 이 권무가 사단장으로 있는 북한군 4사단의
18연대가 되었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부대를 인솔하고 장 교덕이
대좌 계급을 받고 연대장이 되고 송 덕만이 참모장이 되었다.
중국 해방군에서부터 패장[소대장]이었던 김 선생은
소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여기서 위 인물들의 면모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 권무

1910년 생으로서 김 일성보다 나이가 두 살 많다.

한족(漢族)이 아닌 소수 민족 출신인 그는 순수한
자기 능력으로서 8로군 사단장까지 진급했었다.
전쟁 중 군단장을 역임했고 전후 1955년 북한군 총참모장까지
역임했다.

이 자는 남침의 선봉에 섰던 방 호산, 유 경수등과 같이 
악당스러운 이미지로 유명한 북한 지휘관중의 한명이지만
김 선생을 그를 지휘관으로서는 크게 호평을 했다.
소탈하고 남자다운 리더십을 가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북한에 들어와 군사 부문에서 일했지만 간섭을 일삼는
소련군 고문과 크게 싸우고 한직으로 쫓겨 갔다가 전쟁이
임박하자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의해서
4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대전 전투 전후 4 사단장직을 김 창덕에게 인계하고
군단장으로 영전했다.
전후 1955년 북한군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1959년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