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한국전쟁] 중공의 "인해전술"에 대하여

구름위 2014. 1. 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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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중공군이 엄청난 인원으로 인해전술을 펼쳐 유엔군을 유린했다"라는 인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우리 어릴적만해도 국사책에조차도 이렇게 나왔습니다), 실상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50년 12월말 UN군 36만명 VS 공산군 47만명

52년 중반 UN군 60만명 VS 공산군 70만명

휴전직전 UN군 90만명 VS 공산군 180만명

 

숫적으로 본다면 공산측이 최대 2배까지 우세했지만 압도적으로 우세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장비, 화력, 보급면에서 UN군이 월등히 우세하다는 점에서 공산군의 숫적 우세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북한군은 대부분이 재편된 신참 부대에다 심지어 이 숫자에는 지리산 무장공비까지 다수 포함되어 있어 전투력을 제대로 갖춘 부대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50년 11월초 중공군 제 1진은 약 20~30만명이었고 여기에 재편된 북한군이 17만명이 가세했습니다.(상당수는 만주에서 막 훈련받은 신병들) 아군은 UN군 22만에 국군 14만명이었고 제공권과 화력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세했죠.

 

문제는 미 정보부의 잘못된 정보로 맥아더가 오판하여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했다는 점입니다. 낙동강전선때나 51년이후의 교착상태때처럼 전선이 잘 정비된 상태였다면 중공군의 공세는 쉽사리 격퇴되고 우회될 여지는 없었겠지만 부대간의 지나친 추격 경쟁과 늘어진 보급로, 동계장비 부족등으로 부대간 틈이 벌어지고 전투력이 최악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공군의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자 마치 41년 12월 바바롯사 작전당시 독일군이나 44년 12월의 아르덴에서의 미군의 재현이 되었습니다.

 

 

 

특히 중공군은 한국군을 "구멍"으로 여겼고 실제로 한국군은 유능한 장교가 부족한데다 기강도 형편없었고 적지에서 술과 도박에 빠져 적의 기습을 쉽게 허용했습니다. 장교들이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춥다는 이유로 보초를 세우지 않는등(심지어 적을 앞에 두고 전 병사가 술독에 빠지고 장교들이 화투를 치는등) 2차대전때의 이탈리아군 이하의 모습을 흔히 보여주었습니다.(인터넷에서는 이탈리아군을 당나라군대라며 비웃는 이들이 많지만)

이것이 어느정도 해결되는 것은 52년에 와서 많은 장교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면서입니다.

 

중공군의 소위 "인해전술"이란 산악행군을 통해 중대, 대대급의 전초기지들을 우회하여 포위한후 사단, 군단급으로 사면팔방에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각 거점들은 고립된 상태에서 대규모 공격을 받았고 도로를 통해 차량으로 오는 지원부대를 중공군이 측면에서 기습하여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즉, 이시기 중공군의 전술은 인해전술이라기 보다, 오히려 나름의 기동전에 가까웠으며(기동전이라는 것이 꼭 기갑, 기계화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의 기동을 막고 적보다 더 빠르게 능동적으로 기동한다면 그게 바로 기동전입니다.) 정확한 정보력과 지형파악등이 뒤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군을 비롯한 아군은 상대를 경시하고 공중정찰에만 의존했으며 정보력에서 훨씬 뒤떨어졌기에 참패를 당했습니다.

 

중공군이 진정한 의미에서 "무식한 인해전술"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전선이 고착화되고 우회의 여지가 없게 되는 51년 중반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력에만 의존하는 정면 공세는 아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대부분 조기에 큰 희생만 치룬채 격퇴되고 빼앗은 지역도 금새 아군에게 탈환되고 맙니다. 약체였던 한국군도 백마고지전투에서 제 9사단이 중공군 3개사단을 괴멸적 타격을 줌으로서(거의 10배의 피아 사상률) 이미지를 상당히 개선하죠. 즉, 강력된 화력을 지닌 상대에게 융통성이 결여된 인해전술은 태평양전쟁때의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매우 비효율적인 전술일뿐입니다. 중공군 자체도 50년 12월과 달리 그동안의 큰 희생으로 고참병들이 거의 없어지고 신병들 위주로 채워진 부분도 있습니다만.

 

덧붙여 흔히 맥아더의 오판과 무능으로 졌다, 라고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참전하더라도 2개사단이하의 제한된 참전만 할 것)"라는 판단은 맥아더만 내린 것이 아니라 당시 트루먼을 비롯한 미 행정부, 국방부, 국무부 전체의 판단이었습니다.(영국을 비롯한 동맹국을 포함해) 이들은 미 정보부가 제공하는 정보를 근거로 나름의 판단을 내린 것이지 무조건 맥아더 개인의 오만이나 오판, 무능함만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의 미정보부의 무능함에 주안을 두어야 겠지요. 따지려면 애초에 북한군의 남침을 예상치 못한 부분부터 따져야겠죠. 더 앞으로 간다면 진주만 기습을 예상치 못한 것까지도 갈 수 있겠죠.

 

또한, 중공군의 전략적 승리를 단순히 맥아더의 오판에서만 찾는데,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중공군은 미군과 UN군의 부대 배치, 병력, 기동 및 보급로등에 대한 매우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이 정보가 있었기에 아군의 허점을 정확하게 찔러 포위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공군 승리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입니다만, 이 정보를 중공측이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미 국무부와 영국측에 많은 소련측 정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소련의 핵개발이 이들덕을 크게 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킴 필비, 영국 정보부내 대표적인 소련 스파이로 한국전쟁기간 주미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도쿄 맥아더사령부와 미국방부간의 모든 정보를 빼돌려 소련에 제공했던 인물, 나중에 소련으로 망명하여 잘 먹고 잘 삽니다. 구소련시절 우표에 KGB영웅들 시리즈로 넣어줬는데 그기에도 포함되는 "영광"을 얻었죠.

 

즉, 이들을 통해 맥아더 사령부와 미 국방부, 나아가 트루먼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모든 교신과 보고가 소련측으로 새어나가고 있었고 중공측에 제공되었기에 중공군은 아군의 허를 찌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공군은 단순히 정면공격을 퍼붓다가 박살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근본적인 문제를 따지려면 당시 미 정보력에 대한 시스템에 있는 것이지, 어느 한 개인의 잘못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맥아더는 신이 아니니까요.(물론 맥아더가 한국전쟁기간 꽤나 무리수를 여러번 두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