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최강 4사단 18연대 흥망사
-제 2 편-
장 교덕
1915년 생이다.
경북 영주 출신이다.
상주가 고향이었던 북한군 총 참모장 강 건과 고향이 비슷한
남한 출신이지만 어렸을 때 만주로 갔다.
소학교 졸업 후 연길 일대에서 농사와 막노동을 하다가
해방 후 자기 부락에서 무장 자위대를 조직하면서 자연히
모 택동 군에 영입되였다.
그의 리더십을 알아본 모 택동 군 간부에 의해서 군정대학
길림분교에 입교시켜서 졸업한 후에 중국 해방군에서 군관으로 중용되었다.
불과 2년간 영장[營長- 대대장]까지 승진했었다.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중국군 상장까지
진급했던 조 남기 장군이 있다.
그와 장 교덕은 군정대학 동기였으나 조 남기는
한국 전쟁 중에는 중공군의 대위였었다.]
조 남기 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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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 말에 의하면 그는 농사군 타입으로
투박하지만 소박한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했다.
오산에서 미군을 격파한 뒤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부임길에
평택부근에서 미군의 항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송 덕만
역시 본적이 경남 통영이지만 1923년 길림성에서 출생했다.
만주국 경찰이 되어 경위까지 진급했다가 만주에 진주한
임표가 전 만주군 군과 경찰을 모두 포섭할때 임표군에
가담했다.
그는 내전동안 중대장 대대장까지 지내고 18연대 참모장이 되었다.
김 선생 말씀은 그는 고급 공무원 생활을 했던 티가 나서
권위적이라고 했다.
장 교덕의 전사 후 연대장이 되어 대전 전투와
낙동강 전선에서 싸웠다.
전쟁 중 4사단장이 되었다가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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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연대는 송림 제철소 내의 막사에 주둔했다.
송림에 배치된 18연대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바로 떠나왔고
전투 경험도 많아 자부심도 대단했다.
같은 4사단이라도 북한에서 징집한 다른 연대원들을
아이들 취급을 했었다,
그런 부대원들에게 새로 편입된 북한군이 요구하는 조직 문화는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중국 해방군 시절에는 계급도 없고 게다가 지휘관들에게 별다른
특권도 없어서 문자 그대로 민주군대였다.
그러나 북한군에서는 계급을 부여하였고 엄격한 군기를 강요하였다.
예를 들자면 소대장들에게는 사무실이 주어졌고 전화병[電話兵]
이라는 당번 같은 것도 배정되었다.
내무 생활도 엄격했다.
북한군은 그 강요하는 시스템을 정규화라고 불렀다.
오랫동안 야전에서 유격대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움이
체질화 된 조선족 병사들에게 이런 엄격히 강요되는 군대의 군기에
영 적응을 하지를 못했다.
조선족 부대들은 공공연히 불만들 터뜨렸다.
북한군과 조선족 부대에도 갈등이 대단했다.
[김 선생은 자주 인민군내 북한 출신 병사들을
조선군, 조선군이라고 불러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완전히 타민족 보듯한 이질감이 같은 군대내 두 집단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외출을 나가서 북한 출신 군인들과 치고 박는
시비를 하기도 하였다.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모택동군식의 교육에도 불구하고 송림 여기저기의
기물들도 뜯어 왔다.
그래서 북한군에서 18연대를 송림의 이리떼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씨X 연대라고 불렀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참전 병사도 많았고 엄격한 내무생활에
지친 해병대 장병들이 외출외박을 나오면 이런 객기를 자주
부려서 개x대라고 불렸다.지금의 후배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부대원들의 불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대 내외에 여기 저기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 조선은 아직도 암흑시대이다!”
“ 인민군은 군국주의 청산해라!”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자 인민군 본부 사령부에서
총정치부에서는 18연대를 해체 해버리고 부대원을 모두
다른 연대와 섞어서 집단행동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상부에 연대 해체에 대한 보고가 올라가자 민족 보위상
최 용건으로부터 긴급 지시가 내렸다.
“ 18연대 해체는 절대 안 된다.그 연대의 전투력은 인민군
징집병 7-8개 연대와 같은데 왜 그런 정예 부대를
없애려고 하는가? "
결국 민족 보위상 최 용건의 명령 한마디에 부대 해체는
취소되었다.
이래저래 훈련을 받으며 두 달 정도 흘러간 1950년
6월 10일 경에 전방 전개 명령이 발동하였다.
최 용건
오산의 조만식 선생이 안아 기르다시피 총애하던 제자였으나
[고 함 석헌 선생 증언]중국 운남 강무 학교를 졸업하고
좌익이 되었다. 북만에서 유격대 활동,
민족 보위상이었지만 남침을 적극 반대했었다.
김일성이 큰 형님으로 모셨지만 나중에 수하 부하들을
다 쳐내고 그를 외톨이로 고립화 시켰다.
최용건은 그런대로 참았으나 김일성이 부자세습등을
하는 것을 보고 말년을 김일성 욕으로 보내다가
사망했고 중국인 부인 왕옥환은 남편의 부탁대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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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대연습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상부에서는 이번 이동 전개는 단지 훈련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이 명령이 하달 될 때 민족 보위상 최 용건이 평양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간부들을 불러서 격려성 일장훈시를 했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희미하지만 김 선생은
그가 했던 말의 몇 마디는 기억한다.
“나도 유격대 출신이다. 유격대 작풍도 좋지만
위신을 지키고 정규화의 규율에 잘 따라야한다.
곧 대훈련이 있으니 이 훈련에서 큰 명성의 18연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타 부대의 모범이 되기 바란다!‘
최용건의 말은 그 무엇을 암시하고 있었다.
간부들의 가슴속에 중국의 많은 전투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긴장이 팽팽히 스쳐 갔다. 전쟁이 곧 발발한다는 생각이었다.
부대내에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군 의무실에 전달되자 환자들도
모두 귀대했다. [그들이 주둔하던 곳이 날씨가 따뜻한 중국 호남성이었고
그 곳의 풍토병이다시피한 말라리아 환자들이 많았었다.]
죽어도 같이 죽자는 전우애가 전투 경험자들에게 발동했던 것이다.
경기도 연천 부근에 배치된 부대는
훈련을 하면서 2주 정도 시간을 보냈다.
6.25개전 전날에야 다음날 남한 공격이 있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최 정예 부대인 18연대가 당연히 공격의 선봉에 서리라고
생각했는데 선두는 105 전차여단이 서고 4사단 18연대는
뒤에서 예비대로 후속하라는 작전 명령도 하달되었다.
부대의 젊은 친구들은 투덜댔다.
“우리를 우습게 보는군!“
이들은 18연대가 후에 어려운 전황마다 동원 되어
해결사 역할을 하고 나서야 상부의 의지를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4시에 대단한 포격을 앞세운 공격이 있었다.
공격은 작전 명령서와 같이 105 여단이 선도했다.
북한군 122mm 포.국군이 가장 두려워하던 북한의 중포였다.
-폭풍이라는 이름으로 남침 작전을 했을 때
침략의 화력을 남쪽에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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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단은 그저 그 뒤에서 후속했을 따름이다.
북한군은 6.25 당일로 동두천을 점령하고 그날로 의정부로
북쪽 교외까지 진격하였다.
첫날 한국 측 전투 기록은 4사단이 공격에 가담했다고 했지만
김 선생은 의정부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전투에 4사단은
참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날 26일 새벽부터 의정부를 향한 전투가 개시되었다.
국군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였다.
의정부 전선을 지키던 부대는 유 재흥 장군이
지휘하던 7사단이었다.
이미 동두천 전선에서 큰 피해를 본 이 7사단이 여기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은
서울에서 급파된 수도 사단의 일부 병력이 합세했던 것이었으리라.
이때 한국 방송에도 북한군 격퇴의 방송이 나오기도 했었고
자신감을 얻은 총참모장 채 병덕 장군이 철수를 권하는
참모들의 건의에
“ 무슨 소리가? 전쟁은 말야, 기회가 될 때 왁자하게
밀어 부쳐야 돼!
라고 했다는 시기가 이 때인 듯하다.
김 선생은 의정부 공격을 담당했던 부대가 105전차 여단의
기계화 연대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4사단의 다른 연대도
합세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북한군 1군단장 김 웅은 사단장
이 권무에게 18연대를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시각이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앞 부대를 추월해서
18연대가 전투에 가세했다.
교전은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국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의정부의 동두천 가도 쪽 국군7사단이 후퇴하자 포천 가도 쪽의
국군 2사단도 철수 했다.
의정부 외곽을 깨고 들어간 북한군은 작은 시가전을 겪었을 뿐
침공 이틀째인 그날 오후에 의정부 전 시가지를 장악했다.
전투 다음날 감행한 창동 전투와 미아리 선 전투에 대해서
김 선생은 별다르게 큰 전투를 한 기억이 없었지만
의정부 점령 뒤에 그가 접전했던 국군들에게서 완연히
붕괴의 조짐이 보였다고 했다.
사기가 많이 떨어진 기색도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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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위협받고 있었고 병력 동원에 한계에 달한
국군은 급한대로 포천에 이어 의정부 이남에도 경찰대를 투입했었다.
보병 전투의 기본인 각개 전투마저 잘 몰랐던 경찰들은
급히 판 참호 속에서 상체를 들어내고 사격을 하다가
사상자가 속출하자 배치 몇 분 만에 모두 도주했었다.
김 선생은 이런 부대를 보고 말한 것일 것이다.
치안 행정만 보던 경찰이 진격하는 북한군 저지에 나섰다가
총격을 받자마자 총 몇 발 쏘고 도주했던 사례는 포천 일선에서도
있었고 북한군 정예 6사단의 일부 부대가 금강 하류를 도강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만 명의 전투경찰들이 공비 토벌등으로 전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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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경인 가도에서 격파된 북 T 34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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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대목에서 특별히 관심 있었던 궁금증을 김 선생에게
물어 보았다.
“ 18연대가 서울 외곽[ 창동 - 미아리 전선]전선을
통과할 때까지 파괴된 105여단 T-34 탱크를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 아-! 여러 대 보았지요.“
내가 가졌던 궁금증은 북에서 내리미는 거대한 전력에 실 병력
4,000명으로 동두천 - 포천 전선을 지키던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전차 특공에 나선 믿지 못할 사실에 대한
관심에서 생긴 것이다.
한국 측 기록에는 구체적인 전투 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나
특공을 성공시키고 산화한 호국 장병들의 체계적인 명단조차
없이‘수많은 장병들이 폭탄을 안고 적 전차에 뛰어 들었다’
하는 미사여구로 두리뭉실하게 윤색해버렸다.
한국 정부의 한심한 게으름과 돌아가신 호국 영령들에 대한
죄송한 생각이 들다가도 거꾸로“이것 정말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어서였다.
1950년 7월 20일 대전 근교에서 파괴된 북한군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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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인 미군 기록이 더 정확히 이들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미국의 책에 따라 다르지만 90명에서 100명의 한국군이
전차 특공으로 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
나는 지리멸렬하던 전쟁초기 한국군에서 이런
장렬한 전차 특공병들이 정말 나왔을까하고 하던 의심은
105여단 정치 장교였던 오기완씨가 생생히 증언하고있다.
동두천 부근에서 선두 전차가 특공으로 폭파되었는데
특공을 했던 국군 병사들은 포로가 되었다.
유격대 시절 김일성의 총애하던 졸개 105여단장 유 경수는
냉혹하게 명령했다.
“없애버려!”
김 선생의 증언에서 육탄 특공에 의한 희생으로 적 전차들이
다수 파괴된 것을 확인했다. 서울 북방에서 돌아가신
호국영령들의 전공을 ‘적’이었던 분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한 것은 오 기완 씨에 이은 두 번째가 아닌가한다.
전차를 앞세운 105여단이 서울 외곽을 뚫자
18연대는 선두에서 서울의 중심부로 쇄도 해 들어갔다.
중심부로 들어간 18연대의 선두부대는 28일 정오경
중앙청을 점령했다.
[ 김 선생은 중앙청을 조선 총독부 건물이었다고 했다.]
먼저 점령했으면 깃발도 세우고 사진도 찍고 해야 되는데
18연대는 전혀 그런 것을 모르고 휴식과 경비만 하던 중 포천쪽에서 밀고 내려온
북 3사단 병력이 들어와서 인공기를 세우고 남한 중심부 점령의 기분을 냈다.
이에 18연대와 북 3사단과 중앙청을 점령한 부대의 영예를 두고
시비가 일었다.
그러나 4사단장 이 권무가 점령된 남산 KBS 방송의 인터뷰를 통해서 중앙청을 점령한 영예는
18연대가 가져야 한다고 말해서 이 시비에 대해서 교통 정리했다.
독립문에 인공기를 붙이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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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연대는 서울 점령 후 사흘간 서울에 머물렀다.
김일성이 남한에서 기대했던 민중들의 공산 봉기도
일어나지도 않았고 미군의 개입이 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남하하느냐, 이 선에서 정지 하느냐하는 격론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8연대는 중국에서 훈련 받은 대로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민가에 들어가지 않고 서울 거리 여기저기에서 노숙을 했다.
사흘간의 망설임 끝에 북한 군부는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남한을 적화 통일하자는 쪽으로 결정을 했다.
미군의 공군력과 동원력을 너무 무시했던 결과였다.
남진을 위한 도강 작전이 명령이 하달되었다.
우리들은 사진에서 보다시피 철교에 깔판을 대고 전차로서
도강하여 노량진을 점령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김 선생은 105여단 보병 병력이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도강 작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했다.
쪽배를 동원한 도강 시도가 있었던 것은 한국 기록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일개 분대였었고 국군에게 섬멸 당했었다.
도강 작전은 해결사격인 18연대에게 맡겨졌다.
18연대는 주간 정찰을 충분히 해서 한국군의 허술한 곳을
발견하고 야간에 배를 타고 이곳을 통해서 침투에 성공했다.
전 연대 병력이 도강해서 노량진을 점령, 전차 도강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한강 철교를 건너는 북한군 - 부역하는 남한 기관사가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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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한국군에게 춘천을 공격한 적 병력과 한강 하류를 도강해서
김포 쪽에서 공격해오는 적 6사단 병력에 의한 포위 차단을 피하고
재정비를 위한 철수 계획이 이미 하달된 뒤여서 적극 방어를
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미군이 항공 촬영했던 바지를 이용한
북한군 차량의 한강 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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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연대가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철교에 전차 깔판을 깔고
105여단이 도강하였다. 이어서 서쪽에서 진격해온
6사단이 105여단과 함께 보전합동으로 영등포를 공격하고
이를 점령하였다.
한국군이 철수함에 따라 북한군은 서울을 공격했을 때와 같이 105여단을 앞세우고
경부 가도를 따라 계속 남하하였다.
수원에서 한국군이 설치한 대전차 지뢰에 몇 대의 전차가
파괴되었지만 저항은 경미하였다.
1950년 7월 5일 새벽.
북한군은 남진하던 수원 아래에서 미군이 참전하여 오산 북방
죽미령에 참호를 파고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격은 아침 8시경부터 시작되었다.
105 전차 여단의 전차 4 대가 미군들의 포사격으로
파괴되었지만 그대로 통과했다.
미군들 기록에 의하면 전차부대 후방 북한군이 소련군 교리대로
트럭에서 하차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정보를 전했다.
이 부대는 105여단의 기계화 연대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북한군은 최초로 조우한 미군에게 크게 놀라서
이 막강한 강대국과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기 위해서
18연대에게 공격임무를 내렸다.
18연대의 1대대와 3대대가 공격에 나서고
2대대가 예비대가 되었다.
북한군은 이 스미스 부대가 보유한 여러 풍부한 장비를 보고
이 부대를 기계화 부대로 오인하고 김 선생도 그렇게 불렀다.
사실 오산 죽미령에 포진한 미군 스미스 부대는 정예 기계화
부대는커녕 일본 주둔 24사단 21연대에서 긁어모은
본부 중대 행정병들과 통신 소대가 주력인 오합지졸이었다.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기동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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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이나 한국군에 비하면 강한 무장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미군 평균 수준에서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최유효한 대전차 화기인 105미리의 대전차 고폭탄도
불과 여섯 발뿐이었다.
더구나 죽미령에 투입된지 몇시간 되지 않아서 참호도
충분히 깊게 파지도 못했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의 미군들은 아시아 후진국인 북한군이
미군을 보면 도주할 것이라는 철없는 소리를 해댔다.
맥아더도 그런 소리를 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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