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한국전] 필리핀 군대의 명예로운 한국전 참전사

구름위 2013. 11. 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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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와 사심 없는 마음의 발로로, 필리핀은 필리핀 자신도

공산주의 폭동의 한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 한국에 공산주의

침략을 막기 위한 병력을 파병했다. 또한 이 파병은 2차대전

이후 경제적으로 비틀거리던 필리핀 재건에 쓰라린 도전이

기도 했다.

 

필리핀은 한국전쟁에 전투병력을 아시아에서 최초로 보낸 국가

이며 파병은 1955년까지 지속되었다. 첫 번째로 부산항에 발을

디딘 필리핀 전사는 1950년 9월 19일이었고, 이는 10대대전투단

이었다. 필리핀은 총 5개 대대전투단을 1955년까지 보냈고 이는

필리핀의 엘리트 병력을 모아 보낸 필리핀한국원정군(Peftok)

소속이었다.

 

한국전에 필리핀 장교 병사 7,400명 이상이 참전했다. 이 중 다섯

명의 참전용사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는데 모두 한국전 이후 처음

사람들이었다. 상당수 파병자들은 1980년대 한국을 방문했었다.

한국방문은 한국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이른바 “Revisit

Korea Program”의 일환이다. 대상은 한국전 필리핀군 참전자와

그의 가족들이다.

 

5명의 참전용사들은 15명의 가족을 동반했는데 자식과 손주들도 포함

된다. 이들을 초청한 단체는 한국의 국가보훈처다. 다섯 명의 참전용사

들은 60년 만에 방문한 한국의 거대한 발전상에 모두 놀랐다. 1950년대

와는 (필리핀과) 정 반대의 경제적인 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한국전쟁 당시 필리핀은 일본에 이어 아시아의 가장 큰 경제적 군사적

대국이었고, 1950년대의 한국은 세계 최극빈국 중 하나였었다. 이제 남

한은 세계 30대 부유국 중 하나이다.

 

 

Oldest war veteran

 

“한국전쟁 이후 남한이 그렇게 빨리 발전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라고 86세의 한국전 참전용사 지저스 디존은 말한다. “한국사람들

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디존의 부대는 제20대대전투단(BCT)으로 필리핀의 2차 파병이었다.

디존은 포병 전방관측장교(FO)였고, 병사들을 돕는 가장 위험한 보직

이었다. 디존은 목표를 식별하고 대대 야전포병의 105밀리 포 여섯 문

을 포격 유도했다. 야전전화기를 사용했고 고배율 쌍안경 두 개와 지도,

그리고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보통 고지의 정상에 숨어서 며칠

보내며 적의 활동을 관측하며 포격을 유도했었다. 이 생사를 건 관측

반은 정말 위험한 보직이었다.

 

북한 땅의 어느 아침, 거대한 중공군이 갑자기 디존이 숨어 있던 능선

아래 나타났고, 디존은 적의 한 가운데 위치한 상태에서 지도에 좌표를

확인하고 침착하게 야전전화기를 들어 몇 킬로미터 떨어진 대대 포병

사격지휘소에 좌표를 알려주며 포격을 요청했다 디존은 전화기에 대고

“Fire!”라고 명령했다.

 

105밀리 고폭탄 하나가 중공군 부대와 좀 떨어져 폭발했다. 쌍안경으로

탄착점을 확인한 디존은 오차를 수정한 뒤에 포대 모든 포의 전체 효력사

를 명령했다. 필리핀 포대 105밀리 포 여섯 문이 동시에 중공군 진영에

폭발했다. 디존은 당황한 가운데 엄청난 포탄의 포화 속에 삼켜져 버리는

중공군 부대를 목격했다.

 

이 inferno는 약 1분 동안이었다.

하늘을 뒤덮는 먼지와 연기 속에

그곳은 중공군의 공동묘지가 되고 말았다.

 

 

Wounded in action

 

“모든 것이 무너져 평평했다,”라고 루미노소 크루즈는 설명한다.

그곳은 번성하고 사람이 붐볐던 서울 남쪽 30킬로미터 지점의

수원을 말한다. “도시는 평평했고 회색빛이었다. 말 그대로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수원은 크루즈의 부대인 10대대전투단이 있던 곳이다. 거기서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그때가 1950년이었고 10대대전투단은

필리핀이 파견한 대대전투단 다섯 개 중에 최초 참전 대대였다.

 

크루즈는 연대 정찰중대 소속으로 M24 Chaffee 경전차의 75밀리

포수였다. 크루즈는 임진강 강변을 따라 선두로 이동하다 파편상

을 당했다. 크루즈는 비무장지대를 보기 위해 버스를 타고 북쪽

으로 이동하면서 그 장소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여기가 내가 다친 장소입니다.”라고 말하며 크루즈는 임진강변

손가락으로 지시했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엄청났던 율동 전투(Battle of Yuldong)에서 크루즈는 2인 참호에서

싸웠고, 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던 밤을 기억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밤새도록 공격했어요. 나와 동료는 밤새도록

소총을 쐈죠.” 그날은 1951년 4월 23일로, 정말 피로 얼룩진 전투라고

떠올렸다. 그는 그 지독한 살육의 밤인 율동전투에서 어떻게 살아났는

지 자신도 몰랐다. 같이 있었던 동료는 결국 귀국했는데, 그 야만적인

전투 후에 너무나 과도한 공포로 인해 정신이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는 “shell shock”라고 불렀고 지금은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부른다.

 

율동전투는 필리핀 군대가 한국전에서 이룩한 대단한 승리였다.

그날 밤 필리핀군 단 900명이 중공군 최고 4천 명을 상대로 야간

전투를 치렀다. 필리핀군은 율동을 지켜냈고 치명적이었던 중공

군의 공세는 차츰 하강세로 돌아섰다. 공산당의 남한 정복을 막는

유엔군의 소속으로 필리핀군도 그 몫을 해냈다.

 

 

One man’s handiwork

 

호감을 주는 인상에 말하기를 좋아하는 플로렌도 베네딕토는 10대대

전투단과 20대대전투단에서 근무했다. 한 번 참전이 끝났으나 재입대

(reenlist)해서 20대대전투단으로 들어간 것이다. 베네딕토가 전투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베네딕토는 키가 180 정도로 컸고

자동화기 사수가 되어 무거운 짐을 휴대하고 작전하다 다쳤다.

 

베네딕토의 무기는 M1919 Browning .30 기관총으로 분당 600발을 사격

이 가능했다. 기관총 자체는 약 14kg이고 베네딕토의 임무는 그걸 지고

가 공산주의 적을 향해 쏘는 거였다. 베네딕토 씨는 2년간 그런 전투를

많이 치렀다. 베네딕토 씨는 한국의 경제적인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국의 국민적인 힘은 경쟁력에 아주 좋아 보인다. 필리핀도 남한을

 배워야 한다. 우리 필리핀 사람들 가슴 속에 국가적 사랑이 자리 잡아

 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

 

이 말은 흉포한 전직 전사의 입에서 나온 깜짝놀랄만한 변화의 심경

대변한다. 그가 한국전쟁에서 무얼 했는지 알면 더욱 놀랄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전에서 난 중공군 한 200명을 죽인 것 같습니다.”

라고 베네딕토는 침착하게 말했다.

 

“사실 300명은 넘을 걸요. 내가 그들 시체를 세어봤거든요.”

 

3년의 전쟁 동안 필리핀군은 지속적으로 싸웠지만 전사한

필리핀 병사가 112명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 그의 위업

은 더욱 더 놀랍기만 하다.

 

 

Winter experience

 

콘스탄시오 산체스는 1950년 9월 19일 부산항에 10대대전투단의 일원

으로 상륙했고 당시 24세였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상황. 한국에 상륙한 필리핀 병사들의 1진이었고, 북한군에게 포

위된 도시에서 그와 동료는 한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산체스는 10대대전투단 지휘부 본부지원중대 소속이었다. 첫 전투

대대장은 마리아노 아주린 대령에서 1951년 봄에 디오니시오 오제다

대령으로 교체되었다.

 

전쟁터의 모든 것이 산체스에게는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었지만 이국

땅에서 경험하는 이 ‘겨울’이라 부르는 것은 그 중 가장 각별했다. 1950

년 12월 부대는 평양 근처에 있었는데 이때 중공군이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개입했다.

 

한국의 1950-1951년 겨울은 2백년 만에 찾아온 강추위와 격렬한 중공

과의 전투와 더불어 어떻게 대처할 도리조차 없는 생소한 것이었다.

“우린 중공군으로 인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 빨리 내려와 갑자기

나타났거든요. 우리는 포위를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퇴각했고, 또한 추

위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해 유엔군을 공격하던 초기가 가장 최악으로 산체스는

기억한다. 추위가 한 달 먼저 시작되자 대부분의 차량들이 먹통이 되

었다. 강렬한 영하의 날씨에 엔진 내의 물들이 얼어붙었고 엔진의 금

속 주형이 깨졌다. 대대의 차량들이 가동불능 상태가 되었고 지원중대

의 중-수송차량도 동일했다.

 

차량의 냉각수 등이 얼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하나였다. 중공군이

다가오면 지프와 트럭들은 아무리 추워도 그냥 계속 달려서 온도를 높

이는 방법 밖에 없었다. “만약 평양 부근에서 눈을 밟으면 걸어서 퇴각

했다면, 우린 결코 중공군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신(God)을 깨닫다

 

프루덴시오 메드라노는 19대대전투단의 본부 지원중대 소속이었고

필리핀원정군의 제3차 한국 상륙이었다. 이어 같은 해에 14대대전투

단이 한국에 들어온다. 14대대에는 메드라노의 친한 친구가 있었다.

 

“내가 재입대한 이유는 우리가 ‘buddy-buddy’였기 때문입니다.

 19대대의 내 친구 다섯 명도 참전 연장을 결정했습니다. 그 친구

 들이 같이 연장하자고 했고, 난 당연했죠. 내 친구들이니까요.”

 

이 두 대대에 복무하면서 메드라노는 항상 대대장 통신병을 했다. 19

대대에서는 라몬 아귀레 대령이었고 14대대에서는 니카노르 지메네즈

대령이었다. 19대대에서는 아귀레 대령의 지휘소와 종종 같이 이동했고,

그의 임무는 보이스 통신으로 온 전문을 모오스 신호를 통해 중계하는

일이었다. 아주 정확히 전달해야만 했다.

 

메드라노는 끔찍한 전쟁터의 중간에서 신을 발견했다.

전투와 전선에서의 지루함 속에서, 신은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정확한 표기가 없었고, 대대장은 '중령'일 수도 있음]

 

 

 

THE GLORY OF OUR FATHERS

 

 

      By ART VILLASANTA (2009. 12. 12)

 

한국전쟁은 이미 60년이 지났지만 요즘 필리핀 사람 9천만 명에게는

잊혀진 전쟁이다. 그러나 한국전에 7,420명의 장교와 병사가 참전했

고, 현재 살아 있는 참전자는 2천 명 정도로 대부분은 나이가 70대다.

그들에게 한국전은 지울 수 없는 뚜렷한 인생의 사건이다.

 

1950-1955년 동안 총 다섯 개의 대대전투단(BCTs)이 파견되었고, 이

는 필리핀 한국전 원정군이라 총칭하며 'PHILIPPINE EXPEDITIONARY

FORCE TO KOREA'을 약자 PEFTOK로 줄여서 지칭한다. PEFTOK의

임무는 정복하려는 공산당으로부터 대한민국 공화국을 지키는 거였다.

 

첫 대대전투단은 1950년 9월 한국에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필리핀에서

출발한 부대는 1955년 5월이다. 5년에 가까운 전투 동안 우리의 아버지

들은 전 세계에 놀라운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용기와 확고부동

한 헌신으로 당 세대 필리핀의 영웅이었다. 그 세대는 다름 아닌 2차대

전 동안 일본 제국을 상대로 싸워 승리를 쟁취한 대단한 세대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의 20개 국가가 한국에서 피를 흘

리고 고통스러워했다. 1차대전 부근에 필리핀에서는 민주주의자와 공

산당의 이미 112명이 죽고 16명이 실종되었으며 313명이 다친 역사가

있다.

 

유엔군 약 5,7000명이 한국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 중 54,000명 정도는

미군이다. 이와 동시에 남한군 228,000명이 자신들의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5개의 필리핀 대대전투단은 유엔사령부(UNC)

휘하에서 싸웠다. 우리는 처음에 공산주의 북한군과 싸웠고, 이후에

주요 적은 중화인민자원군이 된다.

 

한국전은 대부분 산악이고 산과 고지에서 대부분 싸웠다. 특히나 눈

(snow)을 구경도 못하는 열대성 기후에서 온 필리핀 군인들에게 산악

의 겨울 영하의 전투는 정말 끔찍했다. 우리 필리핀 원정군은 곧 이 눈

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야만적인 전투만큼이나 추위와 눈은 끔찍했다.

필리핀군은 나라가 독립한 후에 처음 겪는 전쟁이 한국전이었고 고국

에서 1,6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공산주의는 정말로 한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내가 이 웹사이트를 만들었고, 나의 아버지 조니 F. 빌라산타는 필리핀

전쟁통신원으로 한국에 갔었다. 거기서 다섯 개 대대전투단의 전투를

취재했다. 아버지는 주로 최전선에 있었고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

했다. 아버지는 1953년 7월 서적 [Dateline Korea: Stories of the Philippine

Battalion]을 발간했다. 아버지는 한국전의 훌륭한 취재로 인해 1954년

10월 민간인에게 국가가 주는 최고 훈장인 Philippine Legion of Honor

를 받았다.

 

한국전 참전 생존자는 해마다 줄고 있다. 아버지는 1997년 12월에 돌아

가셨고 하늘의 한국전 동료들에게 올라가 합류했다.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을 딱 한번 다시 방문하셨다. 우리 병사들은 처음

에는 더운 전쟁, 나중에는 추운 전쟁을 잔인하게 경험했고, 한국전은

바로 우리 아버지들의 전쟁이다.

 

 

한국전의 필리핀군 제10대대전투단 병사...

 

 

 

“POOR AS WE ARE...”

 

    by 작가, 도미닉 J. 빌라산타

 

 

한국전에 필리핀이 참전할 당시, 필리핀은 2차대전의 파괴로 인해

경제적으로 허덕거렸고 또한 공산당이 이끄는 폭동이 국토에서 일

어나고 있었다. 당시 필리핀 육군의 총 전력은 9개 대대전투단과 1

개 포병대대가 전부였고, 이들 대부분은 공산당 폭동을 진압하는

작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 8월 제10대대전투단이 파병으로 지목되어 23일 필리핀

을 출발했다. 당시 필리핀 정부는 훅발라합(Hukbalahap) 혹은 Huks라

불린 공산당 폭동군 25,000명을 진압하기 위해 필리핀 국립경찰까지

동원된 상태였다.

 

이 필리핀 대대전투단(BCT)들은 여러 지역에서 단독적으로 싸우기

위해 기동성이 매우 좋았고 또한 보급도 본인들이 다 책임지는 전투

단이었다. 이들은 당시 공산당 게릴라들과 싸우면서 매우 성공적인

전투를 하고 있었다.

 

이 Huks는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봉기해 압도적인 힘으로 필리핀

민주정부 선거를 방해했고 막스레닌주의 정부를 만들려고 했다. 이

Huks는 1949년 11,000명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대-일본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베테랑들이었다. Hukbalahap란 단어는 “Hukbo ng Bayan

Laban sa Hapon”의 약자로 뜻은 ‘대-일본 인민군’을 의미했다. 태평

양전쟁 당시 꽤 세력이 컸었다.

 

이들은 매우 규율이 있고 기동성이 좋았고 100명 단위의 squadron

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주로 루존섬에서 활동하며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었다. 1945년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자 미군을 도와

루존 중부의 일본군을 몰아냈다. 도시가 해방되면 성조기와 자신들

의 깃발을 같이 게양했다. 이들은 막스-레닌주의 추종자들로 전쟁

이 끝나자 즉각 나라를 장악하려고 했다.

 

이들은 주로 루존섬 중부와 북부의 잘 알고 있는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들은 농부와 소작농의 대규모 협조를 받으면서 지주를 습격

하고 정부와 군대와 당국을 공격했다. 이때는 공권력이 완전히 회복되

지 않은 때다. 1952년 이들은 최고조에 달해 17만 명까지 늘어났고, 근

거가 완전히 격파되어 활동이 감소하게 된 것은 1955년이다.

 

1950년 필리핀 대통령 엘피디오 퀴리노는 유엔헌장에 따른 국가적 책무

를 이행하기 위하여 한국전 파병을 결정했다. 퀴리노 대통령의 다른 숨겨

진 목적도 있었으니, 당시 군의 전투력이 제한적인 상태였고 머나먼 땅의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한 다음, 그 막강한 전투력으로 공산당 폭동에 한

방 먹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린 가난하다. 한국에 병력을 보내는 것은 이 나라에 크나큰

 희생이다. 국민들은 호주머니에 있는 1페니라도 이 자유의 영속

 을 위한 파병에 투자하라.”

 

[1950년 9월 2일, 마닐라 리잘 메모리얼 콜롯세움에서,

 10대대전투단 파병식 연설. 퀴리노 대통령]

 

당시 필리핀은 가난했다. 1950년의 필리핀 정부는 거의 파산(bankrupt)

상태였다. 미국의 원조와 일본의 전쟁 배상금이 절실히 필요한 때. 전쟁

동안 필리핀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약 8억만 페소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되었다. 게다가 관료들은 부패해 타락했고 약 10억만 페소의 외국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므로 필리핀 군대의 무장은 빈약했고, 장

개석의 타이완은 중공의 침공 위험때문에 파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필리핀은 인간애를 우선하는 전통에 따라 한국을 돕기로 결정

했다. 한국전 이후에도 필리핀은 군인과 경찰 의료인력을 유엔이 필요

로 하는 전 세계에 보냈다. 베트남 전쟁 동안에도 민사 협조단이 월남

타이 닌 지방에서 활동했었다.

 

2010년 4월에 발표한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 리스트에서 24위의 대규모

활동국으로 선정되었다. 1천 명의 필리핀 경찰과 군인이 8개국에 파병

되어 평화유지활동을 했다. 아프가니스탄, 부루나이, 콩고, 코티트부아

르, 조지아, 골란 고원, 하이티, 이라크, 라이베이라, 카쉬미르, 네팔, 수

단, 티모르 등에서 활동했다. 앞으로도 더욱 활동적으로 할 계획이다.

 

 

우리 한국전 용사들을 기억하라

 

기억에는 많이 잊혀졌지만 필리핀은 꾸준히 한국전을 기억했고,

각별히 최근 두 가지 행사가 있었다. 2000년 8월에 필리핀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대통령 포고령으로 매년 9월 7일을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날’로 선포했다.

 

2005년 6월 25일에는

Mari-korea 기념비를 마리키나 시에 건립했다.

 

 

말리키나 시에 세워진 말리-코리아 기념비

 

말리카나는 한국에 파병되는 필리핀 군이 매우 험란한 산악전투

훈련을 했던 곳이다. 기념비는 한국전에 참전한 총 5개 대대전투

단을 기념하고 있다. 나도 그 비에 글을 써 넣었고 매년 9월에 한

국전 참전자를 위한 출판물을 제작하기로 했다. 그 첫 출간물은

‘명예로운 자유의 투사들’이고 부제는 ‘귀중한 필리핀의 한국전쟁’

이었다.

 

 

자유를 위한 첫 번째 전투

 

한국전에 참전한 필리핀 군대는 1950년 9월 19일, 부산항에 도착한

제10대대전투단이었다. 다섯 개 대대전투단 중 첫 번째로, 1,400명

의 장교와 병사로 구성되었다. 한국에 도착한 유엔군 전투부대로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였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최초였고

이후 2개월 뒤에 태국군이 도착한다.

 

필리핀은 전투에 참가한 총 16개 국가 중 하나다. 유엔의 연합군은

호주, 캐나다, 콜롬비아, 프랑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남아프리카, 태국, 터키, 영국, 그리고 미국이다. 남한군과

미군을 제외한 참전국에서는 총 3천여 명이 전사했고 14,000명이

다치거나 실종되었다.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전투병력 없이 인도적인 의료인력

을 파견했다. 유엔 총사령관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었고, 맥아더는

전쟁 전에 필리핀 육군을 육성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필리핀을 잘

알았다. 2차대전 당시 일본과 싸우기 위해 맥아더를 도왔기 때문이다.

 

 

PEFTOK

 

필리핀은 한국전 참전 국가 중에서

총 4위였고 부대는 아래와 같다.

 

제10대대전투단(차량화)

제20대대전투단(차량화)

제19대대전투단(차량화)

제14대대전투단(차량화)

제2대대전투단(차량화)

 

이 대대들 중에서 한 대대도 적에게 월경 당해 격파되지 않고 전투를

치렀다. 필리핀군이 주로 상대한 대상은 용감하고 노련한 중공군(CPV)

으로 주로 38선을 따라 전선의 고지들에서 싸웠다. 유엔군 중에서 필리

핀군은 유일하게 공산주의와 싸워본 경험이 있었고 또한 필리핀군이나

필리핀 게릴라 모두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경험이 있었다. 전투를 이미

이해하고 있던 이들 다섯 개 대대는 숫적으로 압도적이고 노련한 중공

군을 상대로 싸우며 전상자가 매우 적었다.

 

10-20-19-14대대가 한국전에서 전투를 했고, 14대대는 종전 직전에

들어갔다. 2대대는 종전 후라 임무가 달랐다. 이 대대들은 종전 후에

도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며 한국 서부의 비무장지대에 주둔했다. 필

리핀군 총 전사자는 112명이고 313명이 다쳤으며 61명이 포로가 되었

고,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16명이 실종되었다.

 

모든 참전 대대는 대부분 미군에 배속되어 싸웠다. 필리핀군은 미군을

mother units라고 생각했는데, 1946년 전까지 필리핀은 48년 동안 미국

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필리핀군은 미군의 교리와 훈련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장비 역시 소총-기관총-철모-대포-탱크-수류탄 모두 미국

제를 사용했다.

 

게다가 필리핀 장교 상당수가 미 육군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유학

경험이 있었고, 전차병 같은 특기병들은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 PEFTOK 장교들은 일반적으로 영어를 쓰고 말할 수 있어 통신

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유엔 참전국 중에서 필리핀에게 영어는 제2

외국어가 아닌 나라였다. 그러므로 미군에 배속되어 책임을 분담

받게 된다.

 

미군은 총 1천 6백 만명이 한국전쟁에 참가했고 약 34,000명이 전사

했으며 (모든 것을 추산하면 54,000명) 10만 명이 다쳤다. 해리 트루

먼 미국 대통령은 본인이 한국전을 “police action”이라고 지칭했다.

 

이 (필리핀 군대의) 한국전은 내 아버지인 자니 빌라산타의 글로 쉽게

접할 수 있다. 아마도 아버지가 쓴 기사와 참전자의 말은 동일할 것이다.

 

지형학적으로 봐도 알겠지만, 한국전은 본질적으로 산악전투였다. 세

개의 산악의 무리가 있고 그 중간에 거의 반대 지형인 평지가 다섯 군

데 존재한다. 동부는 특히 산악이며 서쪽은 산악이 적은 편이다. 한국

의 고지들은 위압적으로 계곡을 지배한다. 그래서 고지를 두고 공방전

이 벌어졌으며 이는 1-2차대전의 전통적인 전술로, 고지대를 점령하면

적을 파괴하거나 아군 수천 명을 구할 수 있었다.

 

다른 문제는 한국의 날씨였다. 건기에는 한국도 필리핀만큼 덥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것은 몰라도 겨울은 필리핀에 없는 것이다. 10대대전투단은

1950년 겨울에 섭씨 영하 30도 아래까지 경험했다. 이는 보통 극지방의 날

씨인데 그 기상 속에 중공군이 내려와 혈전이 벌어졌다. 미국이나 다른 참

전국 중에는 그래도 겨울이 있는 나라들이 있었지만 필리핀을 눈을 구경도

못 한다. 필리핀 병사들은 극심한 추위에 동상 등으로 그야말로 고통스러워

했다. 전혀 처음 경험하는 거였다.

 

아버지는 20대대전투단은 낙하산으로 두꺼운 파카와 야전상의와 모포를

투하받았다. 하루는 20대대전투단이 미군 포병과 풋볼경기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군병사 일부가 상의를 벗어 내의만 입거나 알몸으로 경기에 나왔

고, 필리핀 병사들은 오들오들 떨었다고 한다. 한 GI가 이렇게 소리쳤다.

“뭐가 문제야? 이 정도 추위 못 견뎌?” 그리고는 미군 모두 폭소의 도가니

가 되었다고.

 

 

한국의 눈을 밟으며 행군하는 필리핀 제10대대 병사들...

 

 

10대대전투단이 9월 15일 필리핀을 출발할 때 전쟁은 극적으로 반전되어

유엔군이 올라가고 북한군이 퇴각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개시일에

출발했음. 잇빨 주) 부산방어선 140마일을 버티던 유엔군은 부산에 병력

이 계속 도착했고 인천상륙이 목전에 다가왔다.

 

미군을 제외한 유엔군 타국 최초 전투병력은 영국군 제27보병여단이다.

이 여단은 홍콩과 기타 영연방에서 병력을 끌어 모아 급조해 한국으로

급파했고 그 다음에 도착한 게 필리핀군이다. 점차 유엔군은 북한군 전

력에 웃도는 병력으로 늘어났고 포병과 탱크가 보강되었다. 항공력은

거의 유엔군이 지배했다. 미 공군은 부산방어선 근처 북한군의 보급로

근처와 진지를 사정없이 반복해서 폭격하고 있었다.

 

9월 15일 제10대대전투단이 마닐라 만을 떠났고 부산방어선은 전투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은 거대한 반전을 북한군 후방에서

노리고 있었다. 바로 그날 아침, 미군 2개 사단으로 된 10군단이 기습적

으로 인천에 상륙했다. 사실 인천은 파고가 안 좋아 상륙지점으로 좋은

곳이 아니었다. 파고가 9미터로 세계에서 두 번 째로 높다. 오히려 맥아

더는 그러한 이유로 도박적인 상륙작전에 인천을 선정했다.

 

그 당시 유엔군은 한국군 27만을 포함 약 50만이었다. 적은 북한군 10만

에 중공군 25만 정도였고, 압록강 이북에 예비대 1백 만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필리핀 원정군도 강력한 전투를 중공군과 벌였고, 율동전투 후에

10대대는 ‘중공군은 악마처럼 싸운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버지는 이

중공군을 ‘Matigas. Magaling lumaban’이라 표현했는데 ‘그들은 강인

하다. 또한 어떻게 싸우는 줄 안다’라는 뜻이다. 당시 필리핀 병사들은

그들을 중국을 지칭하는 단어인 “Insik” 혹은 “Reds”라고 불렀다.

 

이 때 중공군은 야간기동과 야간전투에 매우 능숙했다. 중공군은 모든

공세를 항상 밤에 시작했다. 1951년 4월 춘계공세도 야간에 시작되어

율동전투를 치렀다. 중공군의 약점은 포병과 항공지원이 약하다는 것.

 

중공군의 공격을 보면 유엔군 방어선 전면공격을 피하고 항상 측면을

돌파해 포위를 시도했다. 이때 이 공격을 목격한 서양의 기자들이 중공

군을 “human wave”라고 표현했다. 중공군은 쓰러져도 쓰러져도 계속

밀고 들어왔다. 중공군은 항상 공격전에 능숙한 정찰대를 보내 상대가

누구이며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공격했다. 영국군을 공격

할 때는 대형 스피커로 병사들 이름까지 들먹이며 환영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밤에 중박격포와 대포로 포격을 한 뒤에, 그 틈에 접근한 병력

으로 야간공격을 시도했다. 공격 1파는 주로 수류탄만 던지고, 그 다음

파가 기관단총을 들고 인해전술로 공격했다. 주로 측면의 약한 곳을 노

려 뚫으려고 했다.

 

이들은 주로 겨울 용 누빈 솜옷을 입고 있었고 그 외에 방한피복은 없

었다. 철모도 없이 그냥 귀를 덮는 솜 모자가 전부였다. 그러나 중공군

은 휴대한 식량과 탄약이 1주일 정도라 그 뒷면 사라진다. 중공군 전술

은 [5일을 주야로 싸우고, 이후 10일간 쉬며 보충한다]였다.

 

1951년 초가 가장 위험했는데,

한국군과 미군은 병사 대부분이 신병이었다.

 

 

 

[필리핀 원정군 제10대대전투단(차량화)]

 

 

Motto: Steady . . . on

 

 

The BCT emblem

 

이 10대대는 필리핀군의 유일한 기갑대대였다. 마닐라에서 미군 수송선

을 타고 4일을 항해해 부산에 9월 19일 도착했다. 원래 필리핀군 3대대

를 보강해 10대대전투단으로 만든 것이다. 유일한 기갑대대로 1개 중대

는 총 29대의 미국제 M4 셔먼이나 M5 스튜어트 전차로 구성되었다.

 

이 기갑대대가 가장 먼저 파병된 것은, 한국전이 정규전인 장거리 기동전

일 거라고 추측한 필리핀 국방부의 생각 때문이었다. 탱크 훈련을 하면 승

무원들은 항상 “Steady... on!”이란 모토를 외쳤다. 대대장인 마리아노 아

주린 대령은 미국 켄터키 미 육군 기갑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장교였다.

 

당시 10대대전투단의 한국 파병은 필리핀의 대서특필이었다. 필리핀 독립

4년 만에 첫 해외파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국의 공산당 위협에도 불

구하고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은 대단한 명예라고 생각했다. 10대대의 최고

연령은 54세였고 최저연령은 18세임을 모두 보도를 통해 자세히 알고 있었

다. 모든 신문이 한국으로 떠날 10대대전투단을 자세히 보도했다. 9월 2일

리잘 스타디움에 6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10대대의 파병 환송식이 있었다.

 

한국 도착 당시 10대대는 총 14,000명이었고 3개 소총소대와 1개 중형탱크

중대, 경탱크로 무장한 정찰중대와 야전포대가 구성이었다. 이 필리핀군의

2개 탱크중대는 당시 매우 귀중한 기갑이었는데, 미군은 대대에 셔먼 17대

M-10 tank destroyer 울버린 한 대를 주기로 약속했다. 미군은 부산방어선

에 이 탱크들이 매우 귀중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전 당시 필리핀 제10대대 정찰중대의 M-24 탱크.

 

 

그러나 이후 13개월 동안 미군에게 받은 것은 정찰중대에 내려온 M24

Chaffee들 뿐이었다. 결국 기갑병력이 남아돌자 이들을 중화기중대로

돌렸고, 이들은 1951년 4월 율동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10대대는 한국 도착 후 2주 동안 지형에 대한 숙달과 훈련을 했고, 병기

와 보급품을 수령했다. 그때 부산 북쪽 밀양에서 비박하며 보냈고 이후

왜관을 향해 북상을 시작하며 10대대는 미 25사단에 배속된다. 이후 10

대대는 낙오 북한군들로 된 대게릴라전에 투입되어 명성을 얻었다. 왜관

지역에만 게릴라 3천 명이 있었다. 이들은 낙오된 북한군 현역으로 지형

도 매우 익숙했고 무장도 훌륭했다.

 

9월 당시 남한 지역에는 공산 게릴라 35,000명이 존재했다. 이들은 도로

와 통신을 파괴하고 후방에서 유엔군 부대들을 공격했다. 게릴라 소탕에

서 필리핀 10대대는 처음으로 두 명의 전사자가 낙동강변에서 발생했다.

북한군의 매복이었다. 이후 6주간 10대대는 게릴라 소탕을 했다.

 

10월 31일, 10대대는 38선을 넘어 북으로 올라갔고 이때 내 아버지인 전쟁

통신원 조나 빌라산타도 같이 동행했다. 빌라산타는 필리핀의 첫 전쟁통신

원이었다. 그 다음날 평양에 도착한 대대는 상부로부터 평양 개성 간 도로

를 게릴라로부터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무이동이란 마을에서 북

한군 대대와 교전을 벌여 50명을 사살하고 필리핀군 1명이 전사했다. 이 전

투를 "The Battle of Miudong/Singye”이라 부르는데 이는 필리핀군이 외국

 땅에서 벌인 첫 정규 전투였다.

 

이때 베난시오 세리노 중위가 이끄는 5인 특공조가 11월 5일 북한군

77명을 포로로 잡는 수훈을 발휘했고 병기와 탄약도 노획했다.

 

 

Bitter winter

 

이때 한국땅에 2백 년 만의 강추위가 찾아왔고 필리핀 병사들은 그 추위

를 목격하고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10대대는 즉각 상부에 방한피복과

장구를 긴급으로 요청했다. 이것이 즉각 해결되지 않자 대대장인 아주린

대령은 직속상관인 미군 연대장에게 항의했고, 그러자 미군 연대장은 아

주린 대대장을 지휘관직에서 해임했다. 결국 방한장구를 받았으나 아주린

대대장은 귀국하고 이어 디오니시오 오제다 대령이 지휘권을 인수했다.

 

11월 10일은 중공군이 개입한 쓰라린 날이었다. 11월 25일에 중공군은 20

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엄청난 스피드로 다가왔다. 그들은 경무장이었다.

이에 미 8군과 미 10군단은 곧바로 퇴각을 시작했다. 유엔군은 다시 38선을

거꾸로 넘어 후퇴했다. 이는 미 육군 역사상 최단시간 최장거리 퇴각으로

기록됐다. 10대대가 크리스마스를 맞은 곳은 수원으로 유엔군 중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1951년 2월 유엔군이 반격을 시작하자 10대대는 미 육군 3사단의 일부가

되어 반격에 동참했다.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주춤하며 북으로 물러났

다. 3-4월 동안 10대대는 계속해서 고지를 공격하고 점령하고를 반복하며

다시 38선에 다가섰다.

 

4월 14일에, 10대대는 모든 유엔군 중에 가장 북쪽에 있었고, 두 달 간의

전투로 인해 모두 지쳐 있었으나 사기는 여전히 높았다. 17일이 되자 10

대대는 푸에르토리코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 65연대의 예비대로 빠졌다.

이때 대대 병력은 전상자들이 빠지며 900명 정도로 줄었고 처음으로 전투

에서 빠져 쉬었다.

 

 

율동 전투(The Battle of Yuldong)

 

율동전투는 필리핀군이 한국에서 치른 가장 대규모 전투로 기념할만

하다. 이때 북한군과 중공군은 ‘춘계대공세’란 명목으로 25만 명을 동

원해 유엔군을 공격했고, 이는 한국전 사상 공산주의 쪽의 가장 큰

공세였다.

 

공세는 4월 22일 발진되었는데, 중공군은 원하는 장소에 들어와 있었다.

중공군은 밤에 이동하고 낮에 숨는 전술로 발각되지 않았고, 큰 손실을

입은 유엔군도 반격을 준비했다. 이때 유엔군의 기본 전술은 반도에 동

서로 200마일을 가로지르는 ‘전선’을 형성하는 거였다.

 

이 가장 북단에 형성된 전선을 Line Kansas이라 불렀고 이는 38선 10-14

마일 북쪽이었다. 캔서스 라인 역시 북쪽에 팽창한 라인 두 개를 두고 있었

는데, 하나는 와이오밍 라인이고 하나는 유타 라인이었다. 이 두 라인이

유엔군 최북단이다.

 

10대대전투단은 유타 라인에 4월 22일 보강되어 들어왔고 적의 반격이

임박해 보였다. 10대대는 서부전선 임진강 북쪽 유엔군의 방어선 40마일

중에서 3마일을 할당받았다. 이때도 역시 미 육군 3사단 배속 상태.

 

4월 22일 아침, 10대대는 3사단의 일부인 65연대 1대대의 방어선에 도착

해 경계구역을 인수했다. 필리핀 병사들은 참호를 보강하고 기관총을 거

치하고 철조망을 더 깔았다. 그 위치는 유타 라인의 언저리로 33번 국도

와 나란한 지점으로 33번 국도는 철원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

였다.

 

당시 푸에르토리칸으로 된 미 64연대는 아마도 서부전선의 가장 훌륭한

부대가 아니었나 싶다. 65연대의 다른 대대 하나가 10대대 왼쪽에 있었다.

그 더 옆에는 영국군 29독립여단이 지키고 있었고 29여단은 벨기에대대

와 로얄 울스터 소총1대대/노섬랜드 퓨질리어 1대대/글로스터셔 1대대로

구성된 편성여단이었다. 모두 3사단의 섹터였다. 영국군 왼쪽에는 문산리

에 한국군 1사단이 있었고 문산은 서부전선의 핵심 거점이었다.

 

반대편인 10대대 오른쪽에는 25사단의 일부인 터키 여단 1개 대대가 있

었고, 더 나아가 오른쪽에는 미 육군 24사단이 있었다. 이 3-25-24사단은

서부전선을 책임지는 미 육군 1군단 소속이었다. 1군단 오른쪽에는 미

육군 9군단이다.

 

필리핀 10대대 반대편에는 중공군 12군의 31-34-35-181사단이 있었고

총 병력은 약 4만 정도였다. 그 상위는 3병단으로 15군과 60군이 있고

합하면 약 20만 명이고 북한군 5만 명도 이 춘계대공세에 참가했다. 이

때는 북쪽에서 적의 포병이 추가되어 집중력을 발휘하던 때다.

 

이때 필리핀군은 아군 방어선 5km 앞에 정보 전초(IOP)를 만들어 중공군

공세에 대한 경보장치 역할을 했다. 밤 8시 30분, 전초는 거대한 중공군이

10대대 전면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결국 전초는 10대대 전선

으로 안전하게 복귀했고, 이때 대대의 거점인 율동은 중요한 중공군 공격

포인트로 부각된다.

 

중공군은 먼저 4시간 동안 엄청난 대규모 포격으로 시작했다. 일대의 중공

군은 목표 세 곳에 집중 포격했다. 밤 9시 30분, 대대의 왼쪽 측면에 있던

탱크(중화기)중대가 먼저 중공군과 교전을 폭발하기 시작했다.

 

자정을 5분 지나 4월 23일 일요일이 되자, 10대대전투단에 중공군의 풀

스윙이 시작된다. 오른쪽을 맡고 있던 베이커 중대가 가장 먼저 공격받

았고 이어 모든 중대가 공격을 받는데, 중공군은 대포 박격포 자동화기

를 이용해 10대대 방어선에 징을 치고 나팔과 호각을 불며 돌격했다.

 

이 전투는 엄청난 혼전이었다. 적은 엄청난 숫자로 압도해 왔고, 에이블

중대, 탱크중대, 정찰중대, 베이커중대는 박격포와 포병 지원을 받으면서

격렬하게 저항했고, 결국 전선은 중공군에게 뚫리지 않았다.

 

 

Steady on!

 

재난은 10대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0대대 측면에서 일어났다. 중공군

은 오른쪽 터키 대대를 관통했고 결과적으로 10대대는 포위될 위험에 빠졌

다. 결국 오른쪽에 있던 베이커 중대는 원을 그리며 재배치해 오른쪽 측면

을 방어했다. 왼쪽에 있던 푸에르토리코 대대는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에도

몸부림치며 위치를 고수했고, 65연대 나머지 병력도 전선에 구멍을 막으며

선전했다.

 

서부전선 자체가 붕괴하는 가운데 필리린군과 푸에르토리코 병력은 위치

를 지켰고, 유엔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노리는 중공군을 거부했다.

 

더 왼쪽의 영국군 여단은 최초 중공군 공격을 막아냈고, 한번 물러나자

중공군은 오히려 임진강을 도하해 고랑포로 우회해서 내륙으로 들어왔

다. 결국 솔마리에 있던 글로스터셔 대대는 포위를 피해 후퇴한다.

 

10대대의 왼쪽에는 많은 부대들이 자리를 지켰지만 4월 23일 아침이 되자

오른쪽 측면들이 후퇴를 시작한다. 결국 필리핀 10대대 거점은 유독 앞으

로 돌출되어 외롭게 버티는 거점의 양상이 되어 버렸다. 중공군의 급류에

포위된 상황. 이곳이 뚫리면 화천 인근까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그 일대

는 중공군이 미 9군단에 속해 있는 한국군 6사단을 공격했다. 서부전선의

남은 부대들은 임진강 위쪽에 고립될 위험에 처했다.

 

중공군은 계속해서 공격했고 10대대는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특히나 율동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능선의 탱크중대 소속 소대원

17명은 적 1개 연대와 맞섰다. 그 능선을 넘어서려고 중공군은 엄청난 숫

자를 내세웠다. 탱크가 없는 탱크중대장 콘라도 얍 대위는 이 와중에 전사

했고 남은 장교는 조세 아티아가 중위로 이 1소대는 원래 병력이 부족했다.

 

이 아티아가 중위는 나중에 수훈십자훈장을 받았는데, 이 율동에서 엄청난

적을 상대로 신화에 가까운 극적인 전투를 치렀다. 전사한 중대장 얍 대위

는 나중에 사후 최고훈장에 추서되었고 탱크중대는 미8군에서 부대표창을

받게 된다.

 

4월 23일 새벽, 10대대는 M24 경탱크 두 대를 앞세워 중공군에 반격했는

데 이때 중공군은 매우 놀랐다. 엄청난 살육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중공

군이 생존자들을 모아 재편성을 하는 과정에서 필리핀 탱크가 들어오면

서 반격해온 것이다.

 

대대 보급장교인 알프레도 카이톤 중위는 이날 이침 식량과 탄약을 실은

차량행렬을 과감히 몰고 들어왔다. 그대 사방은 섬뜩할 정도로 고요했고

카이론 중위의 눈에는 사방에 쓰러진 엄청난 숫자의 갈색 넝마들이 보였

다. 중위는 50기관총 사수에게 저 넝마들이 누구냐고 물었고 사수는 간결

하게 대답했다. “Dead Reds (빨갱이들 죽은 거).”

 

카이론 중위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은 태어나서 처음 목격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인간이라고 카이론 중위는 나중에 말했다.

 

미 육군 3사단은 10대대에 퇴각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이 다시 공격하면

10대대가 전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하고 엄호

할 테니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0대대에 휴식은 없었다. 모진 시련에 지칠대로 지쳤지만, 24일이

되자 대대는 고립된 영국 글로스터셔 대대를 구원하기 위해 탱크를 앞장

세워 들어갔다. 이 구출공격에서 M24 탱크 하나가 중공군에게 격파되었고

필리핀군은 전사자가 더 발생했다. 10대대는 고립된 글로스터셔 대대를 향

해 약 1,500미터를 진격했으나 지형으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 글로스터셔 대대를 격파하는데 중공군은 4일이나 혈전을 치러야 했다.

글로스터셔 대대는 750명 중에 50명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사로잡

혔다. 글로스터셔 대대는 중공군 63군의 3개 사단을 맞아 마지막 총알을

쏠 때까지 저항했다.

 

율동전투에서 10대대는 10명이 전사하고 26명이 다쳤으며 14명이 실종

됐다. 글로스터셔 구출작전에서 5명이 더 전사하고 다쳤다. 그런 엄청난

전투에서 난 필리핀 군의 경미한 피해를 보고 필리핀군의 전투력은 새롭

게 조명되었다. 10대대는 패배하지 않았다.

 

이 중공군의 대공세 첫 날에만 유엔군 7천 명이 전사했다. 중공군 피해는

7만 명 정도, 유엔군은 중공군이 더 내려오기 전에 서울 방어를 위해 남으

로 퇴각을 결정했다.

 

4월 26일, 필리핀 소대 총 40명이 방어하는 거점에 중공군 1개 연대가 포위

해 공격했다. 이 전투 역시 엄청난 혼전으로 영웅적인 병사들이 있었다. 필

리핀군을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중공군 박격포를 제압하기 위해 니콜라스

마우사이 하사는 자기 목숨을 내던졌다. 박격포를 잠재우고 총에 맞아 전사

했는데, 이때를 이용해 대대가 후퇴할 수 있었다.

 

 

필리핀 10대대전투단의 한 박격포반... 한국전.

 

 

필리핀 참전비에서는 매년 율동전투 기념행사를 갖는데, 이때 모든

한국전 참전자들이 모인다.

 

1951년 6월이 되어 유엔군은 반격했고 이때 10대대는 태조강(Taejo

River)에서 중공군 65명을 사살하며 화천호에 들어섰다. 이때 10대대

는 3사단 예비대로 빠졌는데, 3사단장 로버트 솔레 소장은 자신의

사단에서 필리핀 10대대가 최고 대대라고 말했다. 율동전투 이후

필리핀군은 “The Fighting Filipinos”라는 별명이 생겼다.

 

4월에 춘계공세가 실패하자 중공군은 5월에 다시 2단계 공세에 나섰고

또한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평화협정이 시작된다. 이 평화협정 동안

은 대규모 전투가 없었으나, 소규모의 처절한 살육전은 계속 되었다. 중

공군은 포병과 대공화기를 보강했고 이때 중공군의 포격은 1-2차대전을

통해서도 경험하기 힘든 끔찍한 것이었다. 한국전 참전 미군 전사자의

1/2이나 되는 숫자가 이 평화회담 도중에 죽었다.

 

한국에 필리핀 20대대전투단이 들어왔고, 10대대와 거의 1년 만인 9월

6일 교대하였고, 10대대는 9월 27일 전선에서 완전히 빠졌다. 10대대는

필리핀으로 귀국했고 10월 23일 마닐라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도착

했고 The Fighting Tenth란 칭호를 받았다.

 

10대대는 한국전에서 398일 동안 총 63명이 전사했고 145명이 다쳤으며

58명이 실종되었다. 전투 전상은 총 266명으로 다섯 개 필리핀 파병 대대

중에서 가장 높았다. 1952년 5월 10대대 전사자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

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필리핀 10대대전투단의 105밀리 자주포가 중공군을 향해 포격하고 있다.

 

 

 

 

[제20대대전투단(차량화)]

 

Motto: We Lead

 

The BCT emblem

 

20대대전투단은 율동전투 몇 주 전 한국에 도착했다. 10대대에게서

공식적으로 임무를 교대한 것은 9월 5일이다. 이 20대대는 필리핀

공산당 토벌에 베테랑 부대로 1,400명의 병력으로 참전했고 대대장

은 살바도르 압세데 대령이다.

 

당시 한국전은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일종의 고착전이 되어 가고

있었고, 전쟁은 1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참호전처럼 흘렀다. 양쪽 참

호 중간은 무인지대로 지뢰가 깔렸고 철조망과 함께 양쪽이 수천 정

의 기관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소규모 정찰과 매복이

이어졌다. 이때 전선을 지배한 것은 포병이다.

 

 

20대대전투단의 한 벙커. 30기관총을 적을 향해 겨누고 있다[위에 달린 엄청난 양의 수류탄]

 

 

당시 전선은 38선 약간 위쪽에 형성되었다. 20대대 역시 미 3사단에 배속

되어 철원 북동쪽으로 올라갔다. 그해 가을에 유엔군은 가을 공세에 나섰

고 이에 따라 20대대도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277, 321, 300, 313고지를

공격하며 앞으로 나갔다.

 

10월 말에 20대대는 이른바 ‘철의 삼각주’ 공격에 동참했고 평강, 금화, 철원

등의 도시를 지났다. 시변리에 있는 중공군이 점령한 고지 두 개를 빼앗아 막

았고, 다시 임진강 서쪽의 고장야리로 대대가 진출한다. 이때 유엔군은 실질

적 경계선을 설정하여 중공군을 그 라인 위쪽으로 밀어냈다. 20대대는 67연

대와 함께 중공군 64군 병력을 임진강 동쪽으로 몰아냈다.

 

20대대전투단 참전 당시의 상황도.

 

 

51년 말에서 52년 초까지 20대대는 전초를 운영하며 중공군과 잦은 공방전

을 벌였다. 3-4월에는 임진강 동쪽에서 북쪽으로 무력정찰을 내보내 중공군

탱크와 자주포 몇 대를 박살내고 적 살상 400명 정도를 기록했다. 3월 중순

에는 중공군에게 공격을 받은 그리스 대대를 구출하는 작전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 금화와 철원 인근에서 중공군과 싸우며

일곱 개 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Eerie, 191, 200, 198, Yoke, 불모고지.

 

이후 폭찹힐과 Alligator Jaw에서도 싸웠는데, 악어 턱은 지형의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중 Eerie 고지가 가장 힘겨웠고 5월 21일 마지막으로 공

격했다. 이 고지 공격에서 피델 라모스 중위가 소대를 이끌고 결국 점령했고,

1994년 라모스 중위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350일간 전투한 20대대는 총 13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다쳤고 실종은 1명

이었다. 20대대는 필리핀에서 공산당 게릴라들과 계속 싸우던 부대라 전상

률이 낮았다. 그리고 이때 방탄조끼가 보급된 이유도 있다.

 

 

[제19대대전투단(차량화)]

 

“Bloodhounds"

 

 

The BCT emblem

 

 

19대대는 한국전 참전을 위해 필리핀 마리키나에서 16주간 훈련을

받았고, 그래서 “Marikorea”라는 별명이 생겼다. 한국에 도착한 것

은 1952년 4월 말. 한국에 도착해서 2주간 적응하고 20대대와 교대

했다. 대대장은 라몬 아귀레 대령.

 

들어간 곳은 철원 근처의 유엔군 주방어선으로 한국 중부였다. 처음

에는 미 1군단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미 육군 45사단에 배속된다. 휴전

회담은 진행되었지만 중공군은 여전히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

고 하고 있었다. 19대대가 들어간 섹터는 철원 부근에서 가장 공격받기

쉬운 곳이었다. 19대대의 책임은 191고지(Arsenal Hill로 불림) 방어와,

Hill Eerie, 그리고 8번 전초 구성이었다.

 

6월 19일, 중공군은 19대대 거점을 포격해 두 명이 전사하고 네 명이

다쳤다. 그러자 19대대는 자신들의 대포와 박격포로 응사했고 이로

인해 중공군과 19대대 간의 포격 결투로 이어진다. 이 포격전을 필리

핀군은 “The Rizal Day Battle for Combat Outpost No. 8.”라고 부른다.

 

중공군은 엄청난 포격 후에 다음 날 19대대 거점을 공격했으나

19대대가 강력한 응사로 좌절시켰다. 이 포격 결투로 인해 장교

한 명을 포함한 8명이 전사했다.

 

 

Camp Tiano: Home of the 19th in Korea.

 

 

6월 20일 밤 10시, 적이 대규모 포격을 퍼붓더니 이어 보병의 집단공격이

이어졌다. 조명탄을 띄워보니 중공군은 Eerie 고지와 191고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19대대는 이 공격에도 방어선을 끝까지 지켰고, 대포병 포대가

중공군 대포와 박격포를 꽤 많이 격파했다.

 

이 야간전투에서, 19대대는 야만적인 백병전과 대검을 사용한 난투전이

벌어졌다. 이 필리핀군 방어선의 전투는 외관상으로 중세 성곽을 공격하

는 포위전과 비슷하게 흘렀으며, 중공군은 사다리를 이용해 거점 높은 곳

에 기어올랐고 필리핀 병사들은 올라오는 병사를 계속 쏘아 떨어트리거

나 손으로 밀어 버리기도 했다. 소대장 아폴로 티아노는 착검한 총을 들고

다가오는 중공군을 향해 미친 듯이 돌격했고 적 한 명을 죽였고 소대원들

은 방어선을 고수했다.

 

중공군은 수가 막히자 그냥 계속해서 야만적인 반격만 반복했다. 이

전투는 21일 아침까지 이어졌고 중공군은 탱크 두 대와 시체 500구를

두고 퇴각했다. 필리핀군은 8명이 전사하고 16명이 다쳤다. 정말로

잔인한 야간전투였다.

 

4일간의 전투로 191고지는 여전히 아군 손에 있어 밑의 중공군을 모두

관측할 수 있었다. 필리핀군은 정상에 국기를 게양했고 중공군의 도전

을 이겨내고 승리했다. 이런 결과로 19대대는 다른 유엔군 부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고, 10군단으

로부터 전투 표창을 받았다.

 

 

춘천 북쪽의 필리핀 19대대전투단 병사들...

 

 

 

[제14대대전투단]

 

"Avenger"

 

 

 

‘보복자’라는 닉네임은 당시 필리핀 국방부장관 라몬 막사이사이

로부터 얻은 것인데, 공산당 토벌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뒀기 때

문이다. 14대대는 니카노르 지메네즈 대령의 지휘로 1953년 3월

26일 한국 땅을 밟았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간 다음, 인제 계곡으로 들어가 예비대

지역에서 비박을 했고, 5월 15일, 최전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은

서부전선 주침공로였다. 14대대의 임무는 'Sandbag Castle'과 단장의

능선 일대의 적을 막고 침투자를 박멸하는 것이었다. 소총중대 하나와

탱크소대 하나는 계곡 평지에서 적을 방어했다.

 

이때 공격적인 정찰을 적 깊숙이 들어갔고, 그 중 하나인 C중대 폰시나오

아그노 하사가 이끈 분대 정찰대는 중공군 매복에 걸렸다 다른 분대의 도

움으로 구조되었다. 구출된 병사 중 하나는 아퀼리노 아구스틴 일병인데,

중공군에게 잡혔다가 같이 죽으려고 수류탄 두 개를 중공군 얼굴에 던졌

는데, 중공군들은 죽었고 아구스틴은 철모와 방탄조끼가 파편을 막아줬다.

아구스틴은 미군으로부터 은성훈장을 받았다.

 

전선에서 두 달이 지났을 때 14대대는 전사 4명, 부상 27명이었다. 이때

미 육군 45사단이 들어와 14대대를 교대했다. 예비대로 빠졌다가 14대대

는 한국군 20사단을 구원하는 작전에 동참하게 된다.

 

 

14대대전투단 병사들이 전선 중간의 무인지대로 정찰을 나가는 브리핑을 받고 있다.

 

 

6월 14일, 중공군이 공격하자 막아냈고 다시 반격을 준비하는데,

중공군은 그날 밤 약 12시간 동안 14대대에게 엄청난 포격을 날

렸고 이때 두 명이 전사하고 여섯 명이 다쳤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14대대 A와 B중대는 크리스마스 고지를 향해 반격

을 시작했다. 그 고지는 미군 중대가 있다가 중공군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비와 진눈깨비로 잠시 지연되었다가 공격이 시작된다. 중공군은 이 전투

에서 약 200명이 죽었고, 이후 대대는 다른 거점으로 이동한다.

 

7월 18일에는 중대급 적이 방어선을 탐침하러 들어와 물리쳤고, 500고지

근처에서는 중공군이 14대대를 향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권유 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때 중공군은 “우리는 너희들의 적이 아니다,”라고 대형

스피커로 방송했고 14대대원들은 무시했다. 24일부터 3일간 또 적의 강

력한 포격을 받았다. 대대 통신소와 보급소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고,

그러자 14대대의 포대도 수 천 발의 대응 포격을 했다.

 

7월 말에 대대는 전선에서 빠져 양구 계곡으로 이동했다. 이때 대대는

강력한 훈련 프로그램을 돌리면서 양구 계곡 마을들의 재건을 도왔다.

14대대는 한국 대통령 표창과 함께 1954년 3월 필리핀으로 돌아와 필

리핀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1953년 7월 23일, 휴전 성립 뉴스를 들으며 기뻐하는 필리핀 14대대 장병들...

 

 

 

[2대대전투단]

 

"Black Lion"

 

 

 

 

필리핀 2대대전투단은 1946년 창설해 대공산당 전투 경험이 가장 많은

부대였다. 남부와 중부 루존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몇 년간 전투한 부대

다. 파병 전에 다시 말리키나에서 강력한 훈련을 소화해서 역시 "Mari-

korea"라고 불렸으나 이미 한국전은 소강상태로 가고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3년 12월이고 대대장은 안토니오 베이라였다.

 

2대대는 양구 계곡으로 이동해 14대대를 만났고 미 24사단에 배속되

었다. 한국전은 이미 7월 27일에 휴전이 성립이 되었으나, 당시 양쪽

에서 간헐적인 무장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새로 받은 장비를

훈련하면서 새롭게 헬리콥터를 이용한 전술을 경험하게 된다. 필리핀

대대는 'Heliborne Task Force'로 지정되었고, 조금 불길하지만 현장

에서 핵전쟁과 생물/화학무기 대처 훈련을 받았다.

 

2대대는 계속해서 비무장지대 정찰을 나갔고 당시 비무장지대는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다. 지뢰를 밟은 사건만 여섯 건이었고 다양

한 사건들이 있었다. 이때 필리핀 2대대는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적진에 침투하는 은밀한 비밀작전과 습격을 수행했다.

 

2대대는 총 13개월 동안 전선방어와 함께 민간인 의료봉사와

재건도 도왔다. 2대대는 1955년 5월 출발해 필리핀에 6월 6일

도착했다.

 

 

내 아버지,

여러 신문에 소속되어 10-20-19-14대대를 취재하다

 

 

 

 

내 아버지는 가족들이 물으면

항상 한국전쟁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아버지에게는 자연스러웠다. 

 

한국 이야기를 하시면 항상 용감한 병사들에게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책으로도 써서 출간했다. 전쟁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고

승리와 패배가 있었다. 아버지는 전선에서 죽고 수난을 당하는 필

리핀 군인들을 눈으로 보고 글로 썼다. 아버지는 병사들의 이야기

를 직접 참호에서 같이 있으며 옮기는 것이 책무라고 생각하셨고

“신께서 만든 자유를 위한 용감한 투사들”이라고 표현하셨다.

 

아버지는 최전선부대에 있기를 원하셨고 10대대와 함께 38선을

넘어 북으로 올라갔다. 한국의 산악은 깊었고 만주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시무시했다. 아버지는 정찰작전까지 동참해 나가 병사

들의 전투와 고통과 죽음을 목격했다.

 

한 번은 중공군 저격수가 아버지가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타자기를

맞췄고, 총알이 몇 인치만 달리 맞았어도 아버지는 한국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많은 정찰에 비무장으로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1951년 귀국하셨다가 20대대전투단의 요청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가셨다. 그때는 전쟁통신원이 파견 동안 받는 급료도 없

었다. 이때 아버지는 유엔군에게서 통신원 신임장을 받았고 프랑스

신문 등 다른 신문의 통신원도 했다. 당시 다른 나라들은 한국전쟁

을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고 아버지는 말한다.

 

아버지 세대는 2차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세대다. 급료는 아주

낮았고 그래서 아버지는 점심으로 종종 땅콩을 드시곤 했다.

어떨 때는 아침과 저녁도 땅콩만 약간 드셨다.

 

 

"Our eternal love goes with you to Heaven"

 

아들인 나 역시 기자가 되었다.

 

이제 60년이 지나 사람들은 필리핀한국전원정군을 잘 모른다. 우리

세대 역시 그렇고 우리 자녀 세대는 더욱 모른다. 그래서 이를 알리

고자 학술조사를 통해 글도 쓰고 웹사이트도 만들었다.

 

우린 약 7천 명의 필리핀 병사들이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전쟁

에 참전한 것을 절대 망각하면 안 된다. 우린 필리핀 공산당으로 인해

큰 내홍을 겪었다. 이 참전부대들은 한국에서 돌아와 다시 공산당과

민다나오의 무슬림 폭동을 진압해야 했다.

 

한국원정군이 무엇을 성취했냐고? 그들은 1950년대에 이중적인 승리

를 만들었다. 남한의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일조했고, 필리핀의 힘을

세계에 과시하며 공산주의와 대적했다. 1950년대는 오늘 날의 필리핀

민주주의를 위해 결정적인 시간들이었다.

 

필리핀과 한국은 여전히 민주주의 국가이며 그 과정에서 필리핀 병사

수천 명이 그 ‘잊혀진 전쟁’을 위해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다했다. 두

려움과 조금은 모자람과 능력의 한계까지 포함해서. 여기에 관련된

남녀 모두 우린 명예롭게 영웅이라고 불려야 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