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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김일성의 본명), 항일 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위장 평양 입성

구름위 2017. 1. 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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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김일성의 본명), 항일 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위장 평양 입성

<1> 가짜 김일성의 정체(상)


14세 때 부모 따라 만주로 이사1

9세 때 중국 공산당 입당

이후 소련으로 도망 장교로 변신

조만식에게 거부당한 소련군에

33세 때 통치자로 대신 낙점돼

 

기사사진과 설명
1945년 10월 평양에 첫 모습을 드러낸 가짜 김일성(왼쪽에서 둘째). 필자 제공

1945년 10월 평양에 첫 모습을 드러낸 가짜 김일성(왼쪽에서 둘째). 필자 제공



6·25전쟁이 발발한 지 어느덧 66년! 북한은 여전히 ‘핵전쟁’ 운운하며 대남 비방과 협박을 자행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유형의 도발을 획책하고 대남 선전선동에 열을 올리며 첨예한 대치 국면을 조성하고 있다. 유사시 누가 이 나라를 지킬 것인가? 국민과 장병, 특히 전후 세대에게 6·25전쟁이 주는 교훈을 일깨우기 위해 이 전쟁의 실체를 새롭게 조명하는 특별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남침의 주모자 김일성(金日成)이 가짜라는 사실은 온 세상이 알고 있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용한 이름은 김성주(金聖柱/成柱가 아님)이며, 소련에서 1945년 9월 북한에 입국할 때까지 이를 사용했다. 일본의 항복으로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평양을 점령(1945.8.24)한 직후, 김일성을 북한의 새로운 통치자(독재자)로 지목하고 그를 데려와 환영하는 자리를 만들었는데 그때부터 김일성(金日成) 장군의 이름을 도용하기 시작했다. 즉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벌어진 ‘김일성 장군 시민환영대회’ 때부터다.

김성주는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만경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이고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김보현(金補鉉)이고 동생은 김영주(金英柱)다. 그는 14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사 갔으며, 19살 때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 처음부터 ‘싹이 노란’ 반체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할 때인 1940년 12월 소련으로 도망했다. 소련에서는 그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고려인(조선인)들로 구성된 88여단을 만들고 정보장교로 키웠다.

소련군은 일본 패망 일주일 전부터 북한 땅에 들어와 소비에트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됐다. 처음 평양에 들어왔을 때는 민족지도자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먼저 접촉했다. 그러나 조 선생이 신탁통치를 거부하자 그를 탄압하고 당시 소련군에 있던 김성주를 데리고 들어와 항일운동으로 명망 높던 김일성 장군으로 위장해 독재자로 세웠다.



1945년 10월 첫 모습을 드러낸 가짜 김일성

김성주는 1945년 9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원산항으로 들어왔으며, 자신의 존재가 드러날까봐 처음에는 숨어 지내다가 10월 14일 평양 시민환영대회에서 첫 모습을 드러냈고 소련군은 그를 ‘김일성(金日成) 장군’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33세로 새파랗게 젊은 그를 보고 평양 시민들은 즉석에서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바로 김성주의 외할머니였다. 김성주는 시민환영대회가 끝난 후, 자기에게 쏠린 시선이 냉랭하자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자신부터가 ‘가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집안의 어른인 외할머니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집으로 찾아갔다.

김일성 장군이 인사 올 것이라는 연락을 사전에 받고 기다리던 할머니는 김일성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항일 독립투쟁으로 평생을 바친 역전의 용장 김일성 장군은 연세도 지긋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장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새파랗게 젊은 외손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 ‘저놈이 무슨 큰일을 저지르고 있는 모양인데, 이러다가 큰일 나겠구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편에 계속>

김성주, ‘보천보 전투’ 이끈 김성주 이름·업적 도용

<2> 가짜 김일성의 정체(하)

소련에서 입국 후 속여…한글 이름 같아 날조 용이

김창희·김광서 등 ‘진짜 김일성 장군’ 실존자 4명

‘항일운동 김일성’은  北 김성주 등장 전 모두 순직

 

 

기사사진과 설명

실존했던 4명의 김일성 장군 가운데 두 번째 김일성 장군인 김광서. 필자 제공


항일투쟁 시기에 진짜 김일성 장군은 네 사람이나 있었다. 첫 번째는 1907년 의병전쟁 때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의 의병장으로 한 일(一) 자를 쓴 김일성(金一成) 장군이다. 본명은 김창희(金昌希)였지만 신분을 숨기기 위해 김일성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일제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발발했는데, 이 무렵 그는 단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검덕산(2151m)을 근거지로 삼고 단천·풍산·갑산의 고산지대와 백두산을 무대로 활동했다. 그의 신출귀몰한 용병술에 일본군은 경악했고 함경도 일대에 소문이 전설처럼 퍼져나갔다. 그의 활동은 1925∼1926년을 고비로 점점 약해졌고 1926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번째 김일성 장군은 1888년 서울 출생으로 1919년부터 무력 항일투쟁에 나선 한인계 일본 육사(23기) 출신 김광서(金光瑞)다.

그는 일본 육사 출신이지만 조선인들이 3·1운동 때 무참히 희생되는 모습을 보고 부대를 탈출해 독립군으로 전향, 김경천(金擎天)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신분을 숨기기 위해 김일성이란 별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고 무기 구매를 위해 소련에 자주 들어갔으며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인 청년들을 규합해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일본군과 싸우는 모습은 국내 신문에 자주 보도돼 한인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 그는 백마를 자주 탔으며 1921년경 그를 따르는 의병은 600명으로 늘어났다. 1926년부터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당시 전사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1942년 스탈린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돼 소련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나중에 확인됐다.

199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광복에 기여한 공을 인정해 러시아에 거주하는 아들(김기범·당시 67세)을 초청해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세 번째는 날일 자(日)를 쓰는 김일성(金日成)으로 1935년부터 만주의 중국 공산당 유격대장으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의 공식 직함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師)장’이다. 그는 1901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과대학을 나온 지식인 독립운동가로서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다. 물론 북한의 김성주(金聖柱)와는 다른 사람이다. 한글 이름이 같아서 혼동하기 쉽다. 북한은 이를 이용해 그의 이름과 업적까지 완전히 도용했다.

북한의 김성주는 1912년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19살 때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그의 행적은 독립운동사나 중국의 항일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단체는 15개나 된다. 그런데 북한 김성주의 기록은 없다.

김성주(金聖柱)는 14살 때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아버지의 친구인 손정도 목사(손원일 제독의 부친)의 도움을 받아 길림에서 육문중학교를 다녔으며, 이미 그 시절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공산주의 성향의 독서회를 만들고 리더를 맡았다. 그러다가 중국 국민당 정부 시절 군에 잡혀가 수감되기도 했지만 독립군의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 번째 김일성 장군인 유격대장 김성주(金成柱)는 1937년 6월 4일 밤 한만 국경지대인 혜산진에서 ‘보천보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 주재소를 습격해 순사 여러 명을 살해하고 기물을 파괴하고 도주했다. 그 후에도 일본군을 상대로 자주 게릴라전을 벌였으며 11월 13일 일본군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이 전사 소식은 1937년 11월 18일 자로 매일신보·경성일보·동아일보 등에 보도됐다.

따라서 ‘김일성 수령이 일본 주재소를 습격한 보천보 사건의 장본인’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날조이며, 앞에서 말한 세 번째 김일성 장군의 이름과 업적을 도용한 것이다(한글 이름이 같아서 학자들도 많이 혼동했음).

북한의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소련에서 원산을 통해 입국할 때까지 김성주(金聖柱)라는 이름으로 살았고, 독재자로 등장한 이후 본명을 김성주(金成柱)라고 속였다. 그의 이름을 속여 가며 영웅으로 만들고 우상화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은 북한의 ‘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들이다.

한편 세 번째 김일성 장군이 전사하자 그 부대장 자리를 인수한 사람도 김일성이란 이름을 그대로 썼다. 이 분이 네 번째 김일성 장군이다. 네 번째 김일성 장군도 만주에서 게릴라 전법으로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1940년 12월 일본군이 만주에서 집중적인 토벌에 들어가자 쫓겨서 소련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소련에서는 ‘오케얀 스카야’ 야영학교에서 고려인을 상대로 빨치산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병사했다.

결국,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만주를 누비며 항일 독립투쟁을 한 4분이 모두 순직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분들의 이름을 도용했으므로 결국 다섯 번째 김일성인 셈이다.



● 배영복 (예)육군준장은

성균관대학교 졸업/학군 3기/베트남전쟁 참전/국방부 정훈교육과장/국방부 보도과장 /육군 공보실장/ 육군정훈감/도곡 현대사연구소 대표/6·25 진실 알리기 본부 이사/대표 저서 ‘전쟁과 역사’(2014)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