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의 심리불안 김일성, 남침은폐 위해 비상회의 소집
- <4> 김일성은 왜 남침하는 날 새벽 3시, 내각회의를 열었나?
각료들에게 “남에서 북침했다” 속이고
반격 승인안 동의 요청해 만장일치 가결
사전에 스탈린에게 ‘남침 허락’ 받고
마오쩌둥에게는 ‘참전 약속’ 받아내
딘 소장이 격파했다는 문구가 새겨진 T-34 전차 잔해. 필자 제공 |
김일성은 소련의 비호로 순조롭게 독재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1945년 12월 2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조직하고, 이것이 중심이 돼 북한 정권수립 절차에 들어갔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를 결성하고
중앙주권기관으로서의 권력행사에 들어갔으며, 여기서 여러 가지 법을 만들고 헌법기관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흑백선거를 통해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1948.8.25) 북한 헌법을 채택(1948.9.3)했으며 1948년 9월 9일 정권수립을 선포했다. 이 모든 과정은
소련의 비호 아래 소비에트 헌법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특이한 점은 공식적인 정권수립보다 인민군을 먼저 창설(1948.2.8)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일성의 ‘공산 통일’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인민군은 창설 초기부터 소련으로부터
탱크·자주포·고사포·곡사포 등을 지원받았고, 1948년 12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 모든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두고 나감으로써 처음부터 현대적인
군비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침을 위해 인민군을 더 증강하고 장비를 현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1948년 12월 조·중
합의에 따라 만주에 있던 조선족 출신의 중공군 6만여 명을 차례로 입북시켜 인민군 4개 사단을 추가로 증강했으며, 38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3개 경비대를 사단으로 개편함으로써 총 10개 사단 19만83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됐다. 특히 인민군을 고등중학교에 배치해 체력이 좋은
학생들을 대량 선발했고, 이들을 시베리아로 보내 탱크·고사포·통신장비·항공기 등 현대 장비를 다루는 훈련을 받게 하는 등 간부로
양성했다.
북한은 1948년 12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 그들이 독·소전쟁에 사용한 장비를 물려받았다. 거기에 T-34 탱크
242대를 들여와 105전차 여단과 기계화연대를 창설했고, 독·소 전쟁 경험이 있는 고려인 병력 5000여 명을 입국시켜 105전차 여단에
배속시켰다. 이로써 북한은 처음부터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됐다.
한편 해군은 소련으로부터 들어온 전투함정 30여 척과 대소 수송선
80여 척을 확보했으며, 공군은 1949년 3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정찰기 20대, 야크 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 등 211대의
항공기를 확보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11일부터 기동훈련을 가장해 전 병력을 6월 23일까지 38선 앞으로 전진 배치하고, 남침 루트에
대한 지형정찰을 하고, 지뢰를 제거함으로써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김일성은 남침을 위해 1949년 3월부터 세 차례나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에게 ‘남침 허락’을 받았다. 또 1950년 5월 13일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참전 약속을 받아냈다. 이로써 남침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내고 공격명령만 작성하면 됐다. 남침계획은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와 그 참모들이 작성했다. 그리고 소련군 출신의 고려인으로 인민군
작전국장에 특채된 유성철이 번역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심야회의서 남한 북침에 대한
‘반격’ 동의 요청, 측근에게도 ‘북침’이라고 속여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옹진반도에 대한
포격명령(남침 1단계)을 내렸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25일 오전 3시에 비상내각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당 중앙위 정치위원들도
참석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동지들, 매국 역적 이승만 군대가 38선을 넘어 공화국에 1∼2㎞를 무력침공 해왔습니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 군대에 ‘반격명령’을 내렸습니다. 승인하는 결정을 채택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했고 회의에서는 이를 전수가결(만장일치)로 채택했다.(전 내무성
차관 강상호의 증언)
그리고 오전 11시에 평양방송에서는 ‘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적 조치로 반격을 가해 전쟁이 시작됐다’고
허위 보도했다. 참으로 기막힌 계략과 연출이다. 각료들에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친 것이다.
그러면 김일성은 왜 남침이 시작되기도
전에 비상내각회의를 소집했을까? 의문이 생긴다. 이는 남침 당일, 민족 배반(반역)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김일성의 심리 상태가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해져서 생긴 결과라고 판단된다. 즉 전쟁준비와 ‘조국통일’에만 집착해 소련·중국으로부터 남침 허락과 협조를 받아내기까지 참으로 많은 피로와
정신적 압박이 쌓였을 것이다. 그 결과 6월 25일 밤, 극도의 긴장 속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우면서 불안 증세가 나타나 남침이
시작되기도 전인 새벽 3시에 ‘비상내각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수면과 정신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각료들에게조차 남침
사실을 속였으니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애당초 거짓말할 계획이었으므로 회의를 소집하더라도 남침이 시작된 5시 이후에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2시간이나 앞당겨 회의를 소집했다. 이는 ‘정신적 불안 증세’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북한의 남침 사실은 아무리
은폐해도 증거는 많다. 총사령부가 사단에 내린 정찰명령 1호(1950.6.18)와 전투명령 1호(1950.6.22)가 있으며, 특히 1990년
소련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김일성의 ‘남침’ 사실이 밝혀졌고, 1992년 옐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러시아 교과서에 ‘6·25전쟁은
북한에 의한 남침’이라고 명시했다. 또 흐루쇼프의 회고록, 유성철· 이상조의 증언 등 수없이
많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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